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양애진의 커뮤니티 3.0

2023년 3월 16일

1. 커뮤니티 3.0을 상상하며

- 나의 커뮤니티 연대기




(사진 출처: 출처: Pinterest)



얼마 전 신축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아파트 단지 한가운데에는 ‘커뮤니티 센터’가 있다. 한글로 풀이하면 공동체 중심지, ‘마을회관’이다. 전통적으로 마을회관은 마을 주민들을 위한 공론장이자 사랑방이었다. 주민들은 마을회관에 모여 마을의 대소사를 함께 논의하고 마을잔치도 열었다. 현대식 아파트에서는 공동으로 결정할 일이 많지 않다. 공동생활 보다 개인생활 보호가 우선이다. 논의보다는 건의가 많다. 공존공생 아닌 각자도생의 공간이다. 실제로 커뮤니티 센터에는 피트니스센터, 수영장, 사우나, 스크린골프장, 카페, 독서실 등의 편의시설이 모여 있다. ‘입주민 전용 편의 시설’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그런데 커뮤니티란 정확히 뭘까? 우선 사전적 정의는 세 가지다. 1) 특정 지역·국가 등에 사는 사람들을 통칭한 주민, 2) 종교·인종·직업 등이 같은 사람들의 공동체, 3) 공동체 의식. 사람이고 집단이고 의식이다. 알듯 말듯 모호하고 포괄적이다. 농촌 사회학자 조지 힐러리가 1955년 발간한 기사에 따르면 커뮤니티 정의는 94개 이상이다. 커뮤니티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커뮤니티 개념을 사회학적으로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로버트 모리슨 맥키버다. 그는 커뮤니티를 ‘지역성과 공동성을 기초로 하는 공동생활권’으로정의했다. 지리적·공간적 경계를 구분하지 않고 구성원 간의 ‘사회적 동질성’을 강조했다. 공동체 의식이 없다면 커뮤니티라고 할 수 없다.

1) 아파트 마을

나는 아파트 인간이다. 태어난 직후부터 대학교에 가기 전까지 20년 내내 아파트에서 자랐다. 한 동짜리 나홀로 아파트 동산타워(tower)에서 살다가 십여 개의 아파트가 모인 두암타운(town)으로 옮겨졌을 뿐이다. 아파트에서도 일종의 마을을 감각했다. 골목길이없는 대신 주차장이 있었다. 약속하지 않아도 방과 후 아이들은 스케이트를 신고 109동 주차장으로 모였다. 해질녘 엄마들이 “저녁 먹자!”하고 외칠 때까지 온종일 놀았다. 그중엔 보다 자주 만나는 가족들도 있었다. 부모끼리 친하고 자식들도 또래였다. 우리는 서로를 ‘이웃 주민’이라고 불렀다. 연장자 삼촌은 ‘이장님’ 칭호를 획득했다. 아파트 단지에서 만들어진 우리만의 작은 마을이었다. 언젠간 우리 주민끼리 마을을 만들자고 약속했다.

2) 서울 공화국



 대한민국은 서울공화국 (출처: 위키백과)

대한민국에서 수많은 비수도권 학생들은 불가피한 커뮤니티 해체를 경험한다. 지방에서 ’인서울’은 마땅히 추구해야 할 목표다. 옛말에도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고 했지 않나. 과거에도 현재에도 대한민국은 리퍼블릭 오브 서울이다. 순위가 높은 대학은 대부분 서울에 있다. 상위권 학생들은 ‘당연히 광주를 떠날 애들’이다. 학교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한 협력 아닌 경쟁의 공간이었다. 지나친 경쟁심은 커뮤니티 결속력을 헤쳤다. 잘하고 싶은 마음과 잘나고 싶은 마음은 달랐다. 종종 친구가 적으로 보였다. 고등학교 졸업을 하던 날, 앞으로는 두 번 다시 경쟁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나의 대학교 입학은 곧 10년간 유지해 온 ‘아파트 마을의 해체’ 전조이기도 했다. 자녀의 대학을 따라 이사 가는 이웃도 생겼다.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고 만남의 빈도가 줄어들면서 얼마지 않아 아파트마을은 사실상 해체됐다. 가끔 SNS를 통해 소식을 전해 듣는 정도다. 이제 광주에 가도 만나는 사람이 없다.

3) 인서울 지방러

어느 서울 사는 초등학생이 그린 우리나라 전도 (출처: 온라인 커뮤니티)

상경 후, 나의 핵심 커뮤니티 공간은 ‘아파트’가 아니라 ‘기숙사’로 이동했다. 대학교 기숙사는 전국에서 상경한 친구들이 모인 곳이었다. 대부분 나와 같이 뿌리 뽑힌 이들이었다. 일종의 연대감이 있었다. 새터에서 처음 만난 날 우리는 서로의 사투리를 신기해했다. 하지만 바깥에서는 지방에서 온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서울에서는 서울을 제외한 모든 곳이 시골이었다. “너 별로 사투리 안 쓰는 것 같아”라는 말은 칭찬이었다. 함께 살고 함께 밥을 먹었다. 기숙사 친구들 덕분에 외로울 틈이 없었다. 부모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커뮤니티 수를 급속도로 늘려갔다. 학생회, 밴드, 연합동아리, 기자단, 국토대장정 등 원하는 곳이라면 닥치는 대로 들어갔다. 가입이 쉬운 만큼 탈퇴도 쉬웠다. 연결된 만큼 더 취약해졌다. 어느 지점이 맞지 않으면 미련 없이 다른 집단으로 떠났다. 두터운 오프라인 커뮤니티 하나가 사라진 자리는 얇은 온·오프라인 커뮤니티 여러 개로 채워졌다. 고학년이 되자 동기들은 각자의 길을 찾아 흩어졌다. 지방러 연대도 해체됐다.

4) 탈조선 – 인터넷 세계여행

동기들은 대부분 대기업, 공무원, 회계사, 변호사, 의사, 약사를 선택했다. 인서울처럼 당연했다. 나는 그 무엇도 선택하지 못했다. 이 중 하나를 택한다면 경쟁의 불구덩이에 뛰어들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또다시 떠밀리듯 살고 싶지 않았다. 언제까지 원하지 않은 한정된 자원을 얻기 위해 달려야 할까?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할까? 어딘가에 다른 삶은 없을까? 다양한 삶의 방식을 보기 위해 한국을 비롯한 유럽, 인도, 동남아의 농촌과 대안공동체를 찾았다. 당시 나는 워크어웨이(workaway)라는 초국적 일자리 플랫폼을 사용했다. 덕분에 지역경계 없이 다양한 일자리를 경험하며 현지 호스트들을 만났다. 하루 5시간 노동을 제공하고 숙식을 제공받았다. 사는 곳, 하는 일, 언어,인종, 종교 등 모든 것이 달랐다. 과거에는 결코 만날 수 없었을 우리는 인터넷으로 연결됐다. 느슨한 온라인 연결은 예상외로 강력했다.

5) 탈서울 – 청년 실험 마을 팜프라촌

점점 비대해져 가는 도시를 보며 지역 공동체로 고개를 돌렸다. 획일화된 세계도시 대신 고유성을 가진 미래 농촌마을을 상상했다. 도시와 촌의 지리적 간극은 디지털 기술로 극복 가능해 보였다. 남해군 두모마을 양아분교에 둥지를 틀었다. 팜프라촌의 시작이었다. SNS로 도시 청년들을 촌민으로 불러왔다. 함께 농사를 짓고 비즈니스 모델을 실험하며 3년을 보냈다. 그 사이 전국에 수십 개의 청년마을이 등장한 것은 고무적이다. 문제는 지속가능성이었다.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도 어려웠지만 유지하는 것은 훨씬 어려웠다.

6) 탈조직 – 프리워커와 원격근무

기업들의 남방한계선 ‘판교’ (출처: 경향신문)

결국은 일자리의 문제였다. 대한민국은 일자리도 수도권에 집중됐다. 기업들의 남방한계선은 ‘판교’라는 웃지 못할 말도 있었다. 광복 이후 두 번째 분단인가. 광주에 있던 친구들도 직장을 얻을 때가 되면 서울로 올라오는 게 현실이었다. 그러다 2021년, 거대한 장벽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찾아온 팬데믹은 세상을 멈췄다. 기업들은 재빨리 디지털 업무 전환을 이루고 원격근무를 도입했다. 출퇴근이 사라지고 여유 시간이 늘어나자 사이드잡, N잡, 퍼스널 브랜딩은 직장인의 기본소양이 됐다. 프리랜서로 독립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 역시 프리워커 2년 차다. 다양한 지역의 조직들과 원격으로 일한다. 원격근무가 확대되면 거주 지역 선택지가 다양해진다. 지역의 성장 가능성은 높아진다. 디지털 기술 발달로 분산화된 사회를 상상한다.

7) 탈중앙 – 블록체인과 DAO

촌과 DAO(탈중앙화조직)는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일단 권력의 중앙집중도가 낮은 편이다. 마을 일에는 군청도 쉽게 간섭할 수 없다. 군청에 문의하면 이장에게 물어보라는 답변을 종종 듣는다. 때때로 비효율적이라는 점도 비슷하다. 그리고 별도의 화폐를 발행한다. 남해군의 지역화폐 ‘화전(花錢)’은 특히 활용도가 높다. 10% 할인 혜택이 있어 남해를 찾는 관광객도 환전해서 쓰는 경우가 많다. 가상과 현실, 로컬과 글로벌, 삶과 일의 경계가 사라져가고 있다. 로컬과 블록체인의 결합을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된다.

블록체인과 오프라인이 결합하면 생업과 생활을 아우르는 새로운 커뮤니티가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원격근무와 DAO는 수도권 과밀 문제와 지방 소멸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디지털 경제에서는 로컬 지식을 더 잘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의 이야기가 어디로 향하게 될지는 아직 예상이 안 된다. 그때그때 솟아나는 질문들을 하나씩 파헤치다 보면 어느새 넥스트 커뮤니티에 가까워져 있기를 기대한다.

아침이 되면 나는 수영 가방을 들고 커뮤니티 센터로 향한다. 아파트 주민 대신 센터 직원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다. 벽면의 키오스크에 입주민 카드를 찍고 ‘정기입장’ 한다. 수영을 하고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린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다른 이들과의 소통은 전무하다. 가끔 의도치 않게 눈이라도 마주치면 목례만 주고받을 뿐이다. 그 또한 ‘반갑습니다’ 보다는 ‘실례합니다’에 가깝다. 커뮤니티는 없고 커뮤니티 ‘서비스’만 있다. 커뮤니티가 사라진 아파트에서 미래의 커뮤니티를 상상한다.






양애진경계 없는 세계를 꿈꾸는 프리워커. 대도시 중심에서 벗어난 삶의 방식을 찾아 세계 각지의 공동체를 다녔다. 미래형 촌을 꿈꾸며 팜프라를 공동 창업하고 도시 청년들이 촌 라이프를 실험하는 마을을 만들었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판타지 촌 라이프』 를 공저했다. 이후 서울로 돌아와 여러 지역과 느슨하게 연결되어 도시와 촌을 잇는 작업을 하고 있다. 자연과 문명, 로컬과 글로벌, 무브먼트와 비즈니스, 생태와 기술 사이의 경계를 탐색하며 통합된 미래를 모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