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양애진의 커뮤니티 3.0
2023년 9월 27일
11. 커먼즈와 지구 거버넌스
(사진: 양애진 x DALL·E)
2023년 여름, 북대서양 해수면 온도가 38.4도라는 기록적 수온에 도달했다. 극지방의 빙하가 빠르게 녹으면 담수가 유입된다. 해수의 염도가 낮아지면 심해 해류의 흐름이 느려진다. 바다의 열을 분산하는 초대형 해수 순환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북서 유럽의 온도를 온화하게 유지해 주었던 따뜻한 해류가 멈추게 되면 영화 <투모로우>가 현실이 된다. 과학자들은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빙하기가 도래할 것으로 예상한다. 북대서양 해류 붕괴는 사실상 지구 붕괴인 셈이다. 지금 당장 총체적인 변화가 절실한 시점이다. 공동의 거주지가 위기에 놓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유화의 세계에서는 전지구 단위의 해류를 관리하는 주체는 부재하다.
마을과 커먼즈
시장의 질서가 포화상태인 도시의 자원은 대부분 사유화 됐다. 하지만 시골에는 여전히 공동 자원인 ‘커먼즈(commons)’가 존재한다. 어촌 마을의 바다는 어촌의 상부상조 조직인 어촌계에 의해 보존되고 유지된다. 바다에는 울타리만 없을 뿐 어부마다 정해진 어획 구역이 있다. 함부로 서로의 영역을 침해하지 않는다. 바닷속 바위도 자산이다. 해녀들은 바위에 뿌리내린 다시마를 수확해서 판매한다. 바위는 부모에서 자식으로 세습되기도 한다. 바다와 바위를 관리하고 사용하는 권리를 인정해 주는 어촌계는 마을 자치 단체의 성격을 지닌다.
미국의 역사가 피터 라인보우의 <마그나카르타 선언>에 따르면 커먼즈는 사회적 관계인 동시에 물질적 사물이다. 토착성을 기반으로, 땅에 뿌리내린 생활의 영역에서 자라난다. 유무형의 자원을 포함한다. 말하자면 ‘공통적인 것’이다. 공적인 것도 사적인 것과도 아니다. 커먼즈는 ‘분명한 경계’가 있고 ‘관리되는’ 공유[재]이기 때문이다. 다만 국가나 시장에 의존하지 않고 공동체 구성원에 의해 자율적으로 관리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개런 하딧이 <공유지의 비극>에서 말한 공유지는 커먼즈가 아니라, 관리자가 없는 ‘개방지’ 일뿐이다.
어촌계와 낚시꾼
커먼즈는 ‘고유’하고 ‘경험’적이다. 추상적 개념어가 아니라 구체적 대상이자, 관계 맺음이다. 관계를 통해야만 자원에 접근 가능하다. 예를 들어 어촌계의 일원이 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마을로 전입신고를 한다고 해서 무조건 마을 어촌계의 일원이 되는 것이 아니다. 가입 조건이 워낙 까다롭다 보니 귀농보다 어려운 게 귀어다. 구성원들의 상호작용을 커머닝(commoning)이라고 한다. 커머닝 없는 커먼즈는 없다. 두모마을에서 협업은 일상이었다. 모내기철이 다가오면 니논 내논 할 것 없이 삼삼오오 모여 함께 일을 했다. 이장님이 트랙터를 몰고 가면 다른 분들은 비어있는 논을 찾아 모를 심었다. 마을의 논을 하나씩 채워갔다. 여름이 되면 잡초 씨앗이 날리기 전에 예초를 마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풀씨가 마을 논들에 퍼지기 때문이다. 가을이 되면 어른들은 마을 뒤편의 계단식 유채밭으로 모였다. 내년에 심을 종자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유채는 꽃이 피기 전에는 쌈짓돈 마련을 위한 판매용이면서, 꽃이 핀 후에는 마을로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관상용이었다. 남자 어른들은 낫질로 바짝 마른 유채를 베어내고, 여자 어른들은 유채 씨를 털어냈다. 잘 모은 유채 씨는 다음 해 파종을 위해 보관됐다.
자본주의의 사적 소유의 형성 과정은 곧 커머닝을 기반으로 하는 삶이 파괴되는 과정이었다. 생산자와 생산수단은 분리됐다. 관계를 통하지 않고도 돈만 있으면 생활 영위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사용자와 자원 간의 관계는 끊어졌다. 시장 논리에 익숙해진 도시인들이 커먼즈를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다. 한 번은 마을에 낚시꾼들이 찾아와 소란을 피운 적이 있었다. 마을의 바다에서 낚시를 하면서 유튜브를 찍었는데, 당연하게도 마을 어른들에 의해 저지당했기 때문이다. 낚시꾼들은 바다에 주인이 어딨냐며 되려 마을 사람들을 이기적이라고 몰아갔다. 커먼즈의 관점에서 보면, 관리의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착취적 권리를 요구한 셈이었다.
디지털 커먼즈와 코스모로컬리즘
1993년 최초의 웹 브라우저 탄생으로 인해 월드와이드웹(WWW)은 기세를 몰아 전 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환경을 만들었다. 인터넷 덕분에 사람들은 물리적 거리를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함께 생각하는 도구 컴퓨터와 네트워크의 네트워크 인터넷은 협업 비용을 극적으로 줄였다. P2P(Peer to Peer) 생산 즉, 온라인 협업이 가능해졌다. 디지털 혁명은 커먼즈의 부활을 의미한다. 마을에서는 실시간으로 발생하던 협업의 기술이 글로벌화되고 있다. 상호 호혜적인 협력과 분산 자본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유통망은 도로망에서 인터넷망으로 바뀌었다. 실시간 장부 파악을 가능케 하는 블록체인 기술은 커먼즈를 더욱 촉진한다. 소비 대신 소통이 중시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자본가 아니라 구성적 참여자인 ‘커머너’(commoner)다. 이들은 상품을 만드는 노동이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커먼즈에 기여하고 가치를 창출한다. ‘사적 소유 기반 경제’에서 ‘기여 기반 경제’로의 이행이다.
기여 기반 경제에서는 재분배가 아니라 사전 분배와 사후 점검이 요구된다. 특히 기후위기의 영향은 전 세계적으로 동일하게 재분배되지 않는다. 사회 운동과 생태 운동이 통합되어야 한다. 생태적으로 올바른 일을 하면서 생계적으로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지구적 차원에서 체제적 변화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대안적 글로벌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것이다. P2P 재단의 창립자인 미셸 바우웬스는 코스모 로컬리즘(cosmo-localism)을 주장한다. 글로벌한 지식과 기술을 활용하면서도 지역적 자원과 조건에 맞춰 생산과 소비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오래된 미래, 커먼즈를 다시 복구하는 ‘법’
커먼즈가 다시 부활하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하는 조건이 있다. 커머닝을 인정하고 보호하는 새로운 법체제를 고안해야 한다. 현행법 상으로는 계(契)를 맺어 운용되는 자산일지라도 1인 대표자를 설정해야 한다. 법적으로는 개인 혼자 권리와 책임을 모두 지게 된다. 다오(DAO)에서 발생하는 문제도 같다. 다만 법 자체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서화되어있지 않다고 법이 없는 것이 아니다. 모든 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관계 시스템인 커먼즈의 법은 계속해서 변해야 한다. 그럼에도 적응할 수 있는 것은 함께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농사와 비슷하다. 시골의 농부와 어부들은 날씨를 살피며 살아간다. 완벽한 불변성 대신 불완전한 가변성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다른 종류의 법이다. 법 자체도 커먼즈가 된다.
커먼즈는 시장과 국가가 자원 관리를 위한 유일한 방법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러나 커먼즈가 시장과 국가를 모두 대체할 수는 없다. 관계의 미학인 커먼즈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권력 시스템과 제도적 ‘관계’에 놓인다. 어촌계가 작동하는 것도 수산업협동조합법으로부터 권리를 보장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네트워크로 연결된 공동체가 공동의 집인 ‘지구’ 자원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엘리너 오스트롬은 마을에서부터 지역, 국가, 국제 차원에서 공유되는 ‘다중심 거버넌스’ 개념을 제안한다. 바우웬스는 국가 기반, 시장 기반을 넘어선 새로운 모델로서, 시장/커먼즈/국가의 ‘삼두체제’를 제안한다. 국가는 커먼즈를 인정하고 공공서비스를 공유화하는 ‘파트너 국가’로 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역의 노력을 글로벌 네트워크와 연계시킨다. 초국적인 동시에 초지역적 역량 창출이다.
핵심은 ‘공동’의 ‘경험’
커먼즈는 소유가 아닌 ‘관계’이자 ‘관리’다. 공동으로 관리되지 않은 자원은 커먼즈로 볼 수 없다. 현재 지구는 공동의 관리가 부재하다. 커먼즈화가 절실하다. 관리 주체와 자원의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바다를 살피지 않은 무분별한 어획은 결국 바다의 가뭄을 가져온다. 한때 하루에 200-300마리씩 잡혔다는 남해의 물메기는 이제 하루에 20마리 잡기도 쉽지 않다. 난무하는 사유화로 인해 인류 공동의 부가 위기에 처했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공유지의 비극이 아닌 사유화의 비극이다.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한 부지런한 노력이 필요하다. 지구와 관계를 끊어내고 우주로 갈 것인지, 지구와 관계 맺음을 잘해볼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커먼즈화의 표준화된 공식 같은 것은 없다. 커먼즈는 고유한 역사와 공동체의 오랜 기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연결은 쉬워졌지만 관계가 쉽게 휘발되는 오늘날엔 공통의 기억이 쌓일 틈이 없다. 공동의 경험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커먼즈에 관한 논의를 확산시키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지속적인 사회적 관계와 공감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데이비드 볼리어의 주장처럼 “문화적 밈을 유통시키자”. 함께, 협력, 협업의 단어를 직접 체감할 수 있는 공동의 장을 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