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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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애진의 커뮤니티 3.0
7. 살림의 돈
- 블록체인과 지역화폐의 결합
나는 한때 삼시세끼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농촌을 돌아다녔다. ‘식량을 자급할 수 있는 농부라면 돈이 필요 없는 생활이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질문이 발단이었다. 하지만 정작 발견한 것은 중앙과 뗄 수 없는 지역의 모습이었다.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은 가까운 매장이 아닌 머나먼 수도권 가락시장으로 가장 먼저 보내졌다. 남해살이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서울 마트에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신선한 농수산물이 즐비했다. 반면 남해 마트는 회전율이 낮은 탓인지 상대적으로 신선도가 낮았다. 남해에서 생산되는 좋은 품질의 농산물을 정작 남해 마트에서 구하기는 어렵다니. 아이러니했다. 촌에 살면서도 유기농 농산물은 ‘온라인’으로 구매했다. 블랙홀 같은 수도권으로 빨려 들어가는 지역에서는 생활 경제가 조금씩 무너져가고 있었다.
돈벌이 경제 & 살림살이 경제
대체 돈이란 무엇인가. 돈의 세 가지 기능은 가치의 1) 척도, 2) 저장, 3) 교환이다. 기능에만 집중하면 놓치게 되는 점이 있다. 돈은 인간이 만들어낸 발명품이자 상품이라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돈이 필수가 아니었다. ‘돈 사러 시장에 간다'는 표현이 있었다.돈을 주고 쌀을 사는 것이 아니라 쌀을 주고 돈을 샀다. 돈이 없어도 생활에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상을 살아가는 데는 마을내 품앗이와 물물교환으로 충분했다.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은 이를 ‘살림살이 경제’라고 정의한다. 그에 반해 돈을 조달해 오는 화폐 중심의 경제를 돈벌이 경제라고 한다. 돈벌이 경제가 살림살이 경제를 보조하던 시절이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화폐와 경제활동의 우중주>에 따르면 불과 19세기까지만 해도 자급자족, 즉 살림살이 경제의 영역이 지배적이었다. 쌀과 무명을 이용한 물물교환에서 돈은 일부의 역할만을 담당했다.
하나의 돈이 중심이 된 세상
이제 우리는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사회에 산다. 기본적인 생활을 꾸리기 위해서는 돈이 필수가 됐다. 모든 거래의 중심은 돈이다. 화폐는 일상생활 영위 그 이상이 되었다. 금융 자본뿐만 아니라 문화 자본, 사회 자본, 지적 자본 획득 등 모든 목적을 충족시킬 수 있는 마법 같은 수단인 셈이다. 돈의 부재는 곧 생존의 위협이 됐다. 농부님들이 판로의 부재에 눈물지었던 것은 농산물을 화폐로 전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돈의 가치는 돈의 희소성에서 나온다. 희소성을 기반으로 하는 통화 시스템은 구성원의 경쟁을 유도한다. 학생은 대학을 위해, 기업은 시장을 위해 경쟁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돈을 위해 경쟁하고 있다.
지역화폐운동 LETS
단일 통화 시스템을 극복하려는 움직임은 역사적으로 있어왔다. 대표적인 대안화폐운동으로는 1983년 캐나다 코목스 밸리에서 처음 시작된 레츠(LETS/Local Exchange Trading System )가 있다. 레츠는 화폐의 ‘교환’ 기능을 극대화한 시스템이다. 개인과 개인이 물품과 서비스를 교환하는 거래를 돕는 정보 체계다. 모든 사람에게는 잠재된 기술과 지혜가 있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한다. 거래 시에는 중앙에서 발행되는 법정화폐 대신 지역 공동체 내에서 자체적으로 발행한 화폐를 활용한다. 이 화폐의 성격은다음과 같다.
1) 무소유: 전체 네트워크의 소유자가 없다. 통화소는 중개자 역할만 할 뿐이다.
2) 무화폐: 화폐는 정보다. 거래를 하면 제공자 계정에는 +, 제공을 받는 자의 계정에는 - 수치로 표기된다. 거래 기록, 즉 데이터가 화폐다.
3) 무이자: 아무리 축적해도 이자가 발생하지 않는다. 축적보다 소진에 의미가 있다. 거래 빈도수가 유저의 활성도와 평판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당근마켓의 ‘매너 온도’를 떠올려보자)
4) 무제한: 얼마든지 화폐를 발행할 수 있다. 개개인이 화폐 발행 주체다. 돈이 없어도 재능과 물품만 있다면 거래가 가능하다.
5) 무결성: 시스템은 0에서 시작해서 0으로 끝난다. 거래는 지역 내부로 한정된다. 외부로 통화가 유출될 일이 없어 많은 거래가 일어나도 구성원 전체 거래의 총액은 0이 된다.
국내 대표 사례로는 IMF를 계기로 2000년 대전에서 처음 시작된 ‘한밭레츠’가 있다. 한밭레츠에서 사용하는 단위는 '두루'다.생활 품앗이(아기 돌보기)부터 물품 품앗이(아기침대, 차량대여), 전문 기술 품앗이(진료)까지 생활에 필요한 물품과 서비스를 모두 두루를 이용해 계산할 수 있다. 2021년에는 기후위기 대응활동을 하면 적립해 주는 기후화폐 ‘그루’도 등장했다. 코로나19는 지역화폐 개념이 보편화되는 기점이기도 했다. 대부분은 시민 주도형이 아닌 관 주도형인 ‘관행 지역화폐’였다. 관행 지역화폐의 법적 명칭은 ‘지역사랑상품권’이다. 지자체가 발행하고 해당 지자체 가맹점에서만 사용 가능한 상품권의 일종이다.
지역화폐의 한계와 블록체인
현 지역화폐의 한계도 분명하다. 먼저, 적용 범위가 제한된다. 거래 범위가 너무 좁으면 거래 품목이 제한적이고, 거래 참여자도 줄어든다. 그 결과 지역화폐 통용에 필요한 유통구조를 만들기 어렵다. 둘째, 특정 지역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에 다른 지역과 경제적 교류가 어렵다. 외부 교류를 위해서는 결국 범용 화폐가 필수다. 하지만 두 화폐를 동시에 사용하는 것은 복잡하고 귀찮은 일이다. 통화의 분할은 지역 내 거래의 복잡도를 증가시킬 우려가 있다. 여러 통화간의 교환 비율과 환율 등의 문제도 있다. 셋째, 모든 교환을 계산하고 수치화해야 한다. 일정 기준의 부재는 상호 합의를 오히려 더 어렵고 불편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 넷째, 화폐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야 한다. 레츠 시스템은 효과적이고 정확한 계정 기록 프로세스를 중시하나 제삼자(운영진)에 대한 신뢰를 필요로 한다. 관행 지역화폐는 ‘상품권깡’ 같은 지역화폐 부정 유통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 다섯째, 통화 발행 비용이 많이든다. 화폐를 관리 운영하는 일은 활동은 장기적인 투자와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관행 지역화폐는 배포 후 수급이라는 일방향으로만 소비되고 있다. 화폐가 지역 내에서 자체적으로 순환되지 않는다. 내부지역민 생활 경제 활성화보다는 외부 관광객의 지역 유인 효과가 더 크다. 지속적인 발행이 필요하다. 발행 주체의 유지 부담이 가중된다. 중앙 정부 의존도가 높아진다. 현재 지자체는 중앙 정부로부터 20~50%가량의 지원을 받는다. 22년부터 불거진 지역화폐 예산 전액 삭감 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 중이다. 대안화폐 시스템이라고 등장했지만, 생산되고 폐기되는 선형적 경제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화폐가 ‘순환’해야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확장성’이 시급하다. 확장되기 위해서는 ‘다양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지역화폐 전문가 베르나르 리에테르는 <The future of money>에서 진정한 대안화폐는 기존 시스템을 공격하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병렬로 작동할 수 있는 도구라고 말했다. 대안화폐는 보완화폐다. 지역을 폐쇄적인 공동체로 만들어 외부 세계로부터 차단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소규모 시스템들과 연결되는 것이다. 지역 내 순환과 지역 외 연결이 동시에 가야 한다. 지역화폐의 지속가능성은 ‘누구와, 얼마나 많이 연결되어 있느냐’에 달려있다.
디지털 등기소 블록체인 기술을 사용하면 모든 거래가 시스템화되는 블록체인으로 관리하면 거래 기록 운영 부담도 줄어들고, 부정 유통 문제도 사전 방지 가능하다. 해킹 위험이 줄어 보안 유지 비용도 낮출 수 있다. 무엇보다 레츠와 레츠 간의 관계를 보다 유기적으로 만들 수 있다. 블록체인 기반 지역 통화는 다른 지역으로 쉽게 이전될 수도 있다. 환율에 따라 현지 통화를 다른 현지 통화로 실시간 환전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역을 더 빨리 발견하고 지역 커피숍에 연결할 수 있다. 블록체인 기반으로 국제적인 교환체계로 확장할 수 있지 않을까? 지구 어디를 가든 현지인이 되는 것이다.
블록체인과 지역화폐의 결합은 이미 시작됐다. 2018년 시작된 서울 노원구의 노원화폐(NW)는 세계 최초 블록체인 기반 지역화폐다. 화폐 창출 방법은 크게 네 가지(자원봉사, 기부금품, 품, 물품거래)다. 예를 들어 자원봉사를 하면 봉사 시간만큼 화폐를 받는 식이다. 서울 서초구에서도 자원봉사, 재능기부에 가상자산을 지급하는 ’서초코인’ 사업을 점차 확대해가고 있다.
돈은 서로 살림이다
지역화폐는 신뢰 기반 프로세스다. 신뢰는 관계에서 발생한다. 블록체인은 신용을 대체하는 수단이 아니라 ‘보완’하는 수단이다. 진정한 화폐 신뢰는 사회 신용이 건강해야 가능하다. 한밭레츠가 지속될 수 있었던 주 요인으로는 격월로 진행된 품앗이 만찬을 꼽는다. 함께 밥을 나눔으로써 식구라는 호혜 관계를 형성했다. 그 외에도 품앗이 놀이, 장터, 학교 등을 통해 구성원 간의 관계를 다각화했다. 관계없는 지역화폐는 단기적인 소비 촉진 및 복지 정책에 불과하다. 구매와 판매라는 한 번의 거래로 끝나는 일시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 작용하고 지속하는 거래 관계가 맺어져야 한다. 뿌렸다가 돌아오는 한 번의 과정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끊임없이 선순환이 일어나야 한다.
살림살이는 풀어 말하면 ‘살리는 일’과 ‘사는 일’의 결합어다. 남을 살리는 일과 내가 사는 일이 한데 묶여 있다. 산다는 것은 본래 ‘함께 산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살림/살이 경제를 만들어내는 환경이자 주체는 공동체다. 마을이다. 공동체 안에서 서서히 뿌리를 내려가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돈은 경쟁과 희소성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협력과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이 되어야한다. 지역화폐는 관계를 잇는 매개물이자 서로를 살리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다양한 화폐가 공존하는 생태계를 만들어 가자. LET’S LE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