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2023년 4월 13일

1. 들어가는 글. 다시 만난 세계

– 시선과 관계의 전환





“우리는 수많은 세계를 담아낼 수 있는 세계를 원한다” - 사파티스타, 세계사회포럼





평화는 어떻게 형성될까. 평화학을 연구하면서 끊임없이 되묻는다. 각자가 처한 상황, 발 딛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 다르지만, 사람들은 작게는 전쟁이 없는, 크게는 갈등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말한다. 무언가 없어야 평화가 생기는 건가.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반문한다. 비워야 비로소 채워진다는 건 없음과 동시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에 게 있어야 할까. 평화를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 이제 시작될 글은 이러한 질문의 고리를 삶과 죽음, 인간과 생태 사이에서 풀어가는 여정이다.

복수(Revenge)의 세계

평화를 생각하면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릴까. 작년 한 해 공부를 하며,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 에게 질문했다. 사람들은 고요한 자연, 가족들과 식사,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 등을 답했다. 보편적으로 평화는 나와 타인 또는 다른 존재의 관계가 원활할 때 발생한다. 하지만 이는 말처 럼 쉽지 않다. 우리의 세상에는 평화적 관계보다는 폭력적 관계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 관계성이 유지되는 것일까. 나는 그 고리의 시작을 죽음에서 본다. 우리가 살면서 마주 하는 파괴적인 죽음들의 발생이 우리를 끊임없는 죽음의 고리로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그 고리 중 하나는 Genocide, 집단학살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떠한 집단에 속하게 된다. 가족, 국가, 공동체 등 각기 다른 속성의 집단이 사회를 구성하고 사람은 그 사회 안에서 자란다. 자라면서 우리는 사회의 역사와 질서를 배운다.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인간이 어 떻게 파괴되었는지,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마주한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의 많은 부분은 전쟁과 관련되어 있다. 인류의 시작부터 생명을 파괴하는 모습을 배운다. 전쟁을 어떻게 또 다른 전쟁으로 덮는지 보게 된다. 그 과정에서 평화적 시기라는 것은 전쟁을 준비했던, 복수를 위한 시기로 인지된다. 그러한 인식 안에서 이분법적 사고는 자연스레 작동된다. 아군과 적군, 선과 악이 우리의 인식에서 무의식적으로 나뉜다. 흑백으로 나뉘지 않더라도 나와 타인의 경계는 분명해진다. 나를 지키기 위해 복수를 해야 함을, 힘을 공격적으로 기르고 써야 함을 체득한다.

이는 자본과 만나 더욱 강력해진다. 고리(Nexus) 안에서 인간 파괴는 자연 파괴로 이어진다. 대규모로 사람을 죽이던 기술은 더 광범위하게 자연을 죽인다. 생태학살, Ecocide가 죽음의 고리 안에서 연결된다. 인간은 서구적 근대화 이후로 자연과 완전히 분리되었다. 자연 없이 인간의 힘으로만 완전할 수 있다는 자기 완결적 서사는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뽑아내었다. 인간 대 인간의 구도는 인간 대 자연의 구도로 확장되었다. 벌레와의 전쟁을 위한 화학물질은 땅의 힘을 빼앗고, 그 위에 자란 생명은 자신의 힘을 잃었다. 자연을 통제하기 위한 시설과 시스템으로 순환체계에 균열이 갔다. 인간은 그것을 인간의 힘에 의한 승리로 보았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모든 생태계에 영향을 미친다. 내면의 힘을 잃은 생명은 존재가치를 상실한다. 그것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여기까지 Genocide와 Ecocide의 연결고리를 Double Nexus라고 한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어떻게 자본주의와 연결되는지를 밝히는 연구들이 그 안에서 일어난 죽음의 고리 역시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의 고리를 더 제시하고자 한다. Ecocide, 생태학살에서Suicide, 자살로 이어지는 Triple Nexus이다.

기후위기가 증가할수록 기후 우울증에 빠지는 인구가 늘어났다는 기사들이 한동안 나왔었다. 젊은 세대 사이에서 자신이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인한 우울증이 증 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간편식과 외식의 증가가 사람들의 장 건강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이 역시 정신적 건강과 연결된다. 장이 안 좋아질수록 우울증에 빠지는 인구가 늘어난다는 연구는 환경과 사람 심리 간의 연결을 더 긴밀하게 한다.

사람들의 심리가 불안해질수록 폭력은 증가한다. 그것은 자신의 외부로 향하기도 하고, 내부로 향하기도 한다. 복수의 칼날은 타자화된 대상 또는 자기 자신에게 꽂힌다. 공격적 사고는 죽음의 고리 안에서 돌고 돈다.

복수(Plur)의 세계

이러한 복수(Revenge)의 세계를 다르게 보는 시각이 있다. Pluriverse, 플루리버스라 불리는 자치와 공동성의 세계를 디자인하기 위한 사회/인류학적 개념이다. 라틴아메리카를 기반으로 하는 이 개념은 “민중들이 보여주는 비이원론적이고 관계적인 삶의 방식에 주목한다” (Arturo 2019). 평화학에서 이 개념에 주목하는 것은 플루리버스가 서구 중심의 가부장적 근대화를 기반으로 한 파괴와 전쟁 확장의 시각에서 벗어나 역사를 조망하기 때문이다. “지구의 영성을 바탕으로 모든 생명체의 상호연결성을 중요시하는 플루리버스 디자인은 지역의 세계들을 다시 상상하고 복원하기 위한 도구가 된다.”

평화를 연구한다는 것은 관점을 달리 보는 것이다. 지금껏 우리가 습득하고, 배우고, 익혔던 것들을 다층적이고 복합적으로 다른 시선에서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존재 중에 가장 먼저 ‘나’라는 사람을 다시 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평화를 관찰하는 것의 시작이다. 그리고 세상이 보는 거시적/미시적 관점이 아닌 나에서부터 시작되어 퍼져가는 점층적 세상, 플루리버스를 그려간다.



이희연오스트리아에서 평화학을 연구하고 있다. 폭력과 죽음의 고리를 정치생태 안에서 해석하고, 평화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 또한, 현재 플루리버스와 가이아 이론을 한국의 동학과 연결하여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