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김혜정의 마음놓고 마음챙김
2023년 8월 18일
1.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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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방어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 작은 일에도 쉽게 화를 내는 사람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들을 살면서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싫다는 기분이 드는가? 어리석다는 판단이 드는가? 혹은 이들이 불쌍한가?
그런데 만약 비슷한 행동을 인간종이 아닌 다른 생물 종이 하는 모습을 보면 우린 어떻게 반응할까? 새똥개구리는 뱀이나 새와 같은 포식자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조류의 배설물로 위장한다. 다수의 인간이 그렇듯이 새똥개구리도 거짓말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방어한다. 새똥개구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마귀게거미는 몸에서 배설물의 냄새를 발산하고 주변 환경을 지저분하게 만들어서 먹잇감이 자신을 똥이라고 혼동하도록 위장한다. 사마귀게거미의 위장에 속아 넘어간 먹잇감은 제 발로 호랑이굴이 호랑이굴인 줄도 모르고 들어갔다가 사마귀게거미에게 잡아먹히고 만다. 동물들만 거짓말에 능한 게 아니다. 코리달리스 헤미디센트라라는 이름의 식물은 자기 주변에 있는 바위의 색상을 인지한 후 동일 색상으로 위장한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어디까지가 식물이고 어디서부터가 광물인지 알 길이 없다. 이런 동식물들의 위장술을 볼 때 어떤 판단이 드는가? 인간을 볼 때처럼 싫다는 기분이 드는가? 어리석다는 판단이 드는가? 혹은 불쌍한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놀라운 방식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생명체의 전략적 행동에서 우리는 신비감을 느끼고, 이들의 생존전략을 영리하다고 판단한다.
만약 우리가 자연을 보듯이 인간을 바라보면 우리의 시선은 어떻게 변할까? 앞서 언급한 지나치게 방어적인 사람들, 작은 일에도 쉽게 화를 내는 사람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협소한 윤리적 관점으로 바라보았을 때 참 못났고, 어리석은 존재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사회에서 직장 상사로 만나거나, 선배나 동료로 만나게 되길 바라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들을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바라보면 너무 미우니, 이들을 한번 나무라고 상상해 보자. 만약 어떤 나무가 빛이 잘 들고 경쟁해야 할 다른 나무들이 주변에 많지 않은 풍요로운 환경을 만난다면, 그 나무는 올곧은 모습으로 자라날 것이다. 생명의 성장하고자 하는 욕구가 환경에 적응한 결과 그러한 모습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나무가 이렇게 풍요로운 환경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나무는 볕도 조금밖에 들지 않고 주변에 경쟁해야 할 다른 나무들도 많은 척박한 환경에서 자란다. 그런 나무는 어떻게든 햇빛을 받기 위해 자기 몸을 구불구불 휘게 하며 자라야만 할 것이다. 이를 식물의 굴성 운동이라 한다. 볕을 받기 위해 제 몸을 꼬아가며 자란 나무의 모습 역시 생명이라면 무릇 지니기 마련인, 성장하고자 하는 욕구가 발현된 결과이다.
만약 누군가가 친절하고 협력적인 성격을 지녔다면, 아마도 그는 친절하고 협력적인 소통 방식이 보상으로 귀결되는 협력적인 환경에서 자랐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누군가 지나치게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을 지녔다면, 그는 살아온 과정에서 자신을 방어하고 자신의 행동반경을 축소했을 때 안전이라는 보상이 돌아오는 환경에서 자랐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개별 인간들이 하는 온갖 부적응적 행위들은 다 저마다 삶의 맥락에서 생존하기 위한 나름의 지혜가 발로된 결과이다. 다만 각자가 처한 환경이 달랐기에 각자가 지닌 지혜가 제각각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다.
광대한 자연에 인간이 지닌 협소한 윤리적 관점을 적용해 보면, 우리의 시야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작고, 억압적인지 알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생명을 잡아먹기 위해 자신을 위장하는 사마귀게거미를 사이코패스 사기꾼이라고 욕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리하다고 판단한다. 만약 살다가 사람이 너무 미워진다면, 미워진 그 사람을 사람으로 보길 잠시 멈춰보는 것은 어떨까? 미운 그 사람을 나무라고 상상해 보자. 아님 거미나, 개구리도 좋다. 어리석게만 보이고 미웠던 그 사람이 신비롭고 지혜로워 보이는 마법이 일어날 것이다.
그간 지구에는 참 많은 생물 종이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얼마나 많은 수의 종이 멸종했는지 우리가 체감할 수 있다면 지금 생존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얼마나 지혜롭고 신비로운 존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우리가 남보다 더 나은 인격을 지녀서, 더 높은 수준의 교양과 지성을 지녀서, 더 많은 돈을 지녀서 우리가 지혜로운 것이 아니다. 생존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현재 살아있는 생명체들은 모두 나름대로 지혜롭다.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하고자 자기 몸을 꼬아가며 자란 인격으로부터 어리석음과 고통을 읽어낼지, 혹은 생존하기 위해 선택한 지혜로운 전략과 성장하고자 하는 욕망을 읽어낼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본인이 제어되지 않는 충동 때문에 사회에서 곤란을 겪었거나, 겪는 중이라면, 본인을 개구리라고 상상해 보라. 자신이 그리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환경에 대한 강한 적응력과 성장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지 어리석어서가 아니다. 자신이 지닌 지혜와 생명력을 이해하라. 어리석다고 자책하길 멈춰라!
앞으로 2주에 한 번씩 다른백년에 기고하게 될 칼럼의 제목은 <마음놓고 마음챙김>이다. ‘마음챙김’이라는 단어가 유행한 지는 꽤 되었다. 우리가 마음을 제대로 챙기기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어서인지 몰라도, 마음챙김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다들 어느 정도 아는 것 같다. 그러나 마음을 챙기는 일은 마음을 놓아야 가능하다. 마음을 놓는 일은 자신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이다.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 자신을 대단하게 보는 일을 멈춰야 한다. 만약 당신의 가족들이 갑자기 당신을 성인군자처럼 우러러본다면, 당신은 높은 확률로 불행해질 것이다. 성인군자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을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 가족이 당신을 자기중심적이고 무력한 갓난아기를 대하듯 돌봐주고 친절하게 대해준다면 당신은 매우 기쁠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당신 자신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본인을 대단한 인간으로 보길 멈춰라. 자신을 대단한 인간으로 보면 본인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어리석고, 불합리한 존재인지만 보게 될 것이다. 본인을 길바닥에 있는 한 포기 풀,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 한 마리의 거미, 개울가에서 진종일 울고 있는 한 마리 개구리와 대등하게 바라보라. 자신에게 관대해지기 훨씬 수월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하는 동안에만 특별하다. 그러나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를 포함한 많은 수의 사람들이 무의식중에 자신이 다른 존재보다 특별하다는 자의식을 품은 채 살아가고, 그로 인한 불행을 경험한다. 아무것도 아닌, 아주 작고, 아주 아주 하찮은 존재가 되어 보라. 그리고 행복하고 자유로워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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