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양애진의 넥스트 샤머니즘
2024년 5월 24일
1. 넥스트 커뮤니티의 심연을 찾아서
- 프롤로그 - 한민족 원형성 탐험계획서
ⓒ양애진: 의식의 원(元), 우주의 망(网)
올해는 여름으로 시작했다. 한겨울의 대한민국을 떠나 한여름의 뉴질랜드로 갔다. 인생 첫 남반구였다. 새벽 5시 반부터 해가 떠오르고 밤 9시 반에야 하늘이 어둑해졌다. 덕분에 하늘 볼일이 많았다. 하늘이 큰 대륙에는 본디 불리던 이름이 있었다. 아오테아로아(Aotearoa), 마오리어로 ‘길고 흰 구름의 땅’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200년 전, 구름의 땅은 뉴질랜드(New Zealand)로 개명됐다. 풀이하면 ‘새로운 네덜란드’다. 17세기 네덜란드 탐험가들이 그들의 국가를 닮았다며 부여한 정체성이다.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정체성도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 대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식민 국가가 되었다.
그럼에도 첫눈에 본 아오테아로아 뉴질랜드는 태평양 원주민과 대서양 이주민이 상당한 공존을 이룬 듯했다. 공항 입국 심사관부터 마오리였다. 법적 공용어는 마오리어와 영어 둘 다였다. 공공시설 안내문, 화장실 등 어디서나 쉽게 두 언어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참가했던 컨퍼런스에서 마오리족 출신의 중년 여성을 알게 됐다. 그는 마오리 문화를 배울 기회를 절실히 찾고 있었다. 영국 식민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마오리 지혜의 대가 끊겼다고 했다. 낯선 이야기가 아니었다. 한국 역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잊고 잃은 것이 많았다. 식민 역사를 가진 곳들은 모두 마찬가지일터.
하여 곪은 상처는 조금씩 터지고 있었다. 작년 말 들어선 뉴질랜드 보수당 정부는 마오리 보건 당국 폐지, 공공 서비스 분야에서 마오리어 사용 최소화 등 ‘반 마오리족 정책’을 추진했다. 이중 언어 표지판이 혼란만 일으킬 것이라는 게 명분이었다. 마오리당 국회의원은 의회 발언에서 마오리 전통춤 하카(Haka)로 반감을 표현했고 반향을 일으켰다. 국호를 다시 아오테아로아로 변경하자는 여론도 있었다. 본래 이름을 되찾아 본래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다. 청산(靑山)을 위한 청산(淸算)이다.
사실 대립의 씨앗은 와이탕이 조약이다. 마오리어와 영어로 작성된 두 개의 조약 원문의 해석 차이 때문이다. 문제의 세 가지 조항은 자치권, 토지 소유권, 관습 보호. 웰링턴 테파파 박물관 꼭대기 층에는 두 개의 조약이 팽팽하게 대치중이었다. 1만 명의 마오리들이 의회 앞에서 시위 중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긴장과 압력이 높아지고 있었다. 마침 다가오는 2월 6일이 와이탕이 조약을 맺었던 ‘와이탕이데이(뉴질랜드 건국 기념일)’였다. 그날의 현장에서 와이탕이 페스티벌이 열릴 예정이었다. 이날의 현장에 가봐야 한다는 직감이 들었다. 고민 끝에 귀국날을 일주일 미뤘다.
와이탕이에서 만난 마오리의 하카
ⓒ양애진: 와이탕이 해변가에서 하카를 하는 마오리 청년들
와이탕이 페스티벌은 일종의 굿판이었다. 분노를 예술로 ‘승화’하는 장이었다. 언어는 있지만 문자는 없는 마오리에게 전승 수단은 노래와 춤이다. 구전으로 체화되어야 하는 문화일수록 한 세대만 끊겨도 이어나가기가 쉽지 않다. 허나 눈앞에 펼쳐지는 수백 명의 폭발적인 하카는 “우리는 여기 있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뜨거운 태양볕 아래 여전히 건재한 뿌리의 생명력이었다. 가사를 모름에도 응축된 에너지가 가슴을 울렸다. 시큰함에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하카를 마치고 무대를 내려가는 그때, 어디선가 적막함을 가르는 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관객석에 있던 노년의 여인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고,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있는 힘껏 하카로 답했다. 생생 생동한 반향이었다. 다시금 눈앞이 흐려졌다. 그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다.”
We know where we come from, and where we are going to.
한반도 이전에 한민족 - 정체성 망각
문득 자각했다. 정작 정체성을 잊고 지내는 것은 우리 아닐까? 나는 과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가? 출생과 국적에 가리어진 알맹이를 알고 있는가? 비단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급속한 산업화는 선진국의 영광을 가져다줬지만, 그 이면에는 풍족의 우울감이 자리했다. 자기 인식 이전에 타인타국의 인정과 인증에 급급한 탓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치중한 나머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경시됐다. 바깥에 눈 돌리고 내면은 외면했다. 점령과 전쟁의 상처는 아물지 않은 채로 덮어뒀다. 자의식 결핍은 곧 자기 관점 부재가 됐다. 치유되지 못한 이전 세대의 상처는 다음 세대에서 재발했다. MZ세대는 부모보다 가난한 첫 세대가 됐다. 풍족함 속에서 길러진 높은 기준과 기대는 저성장 현실 앞에서 무참히 무너졌다. 좌절은 중독으로 이어졌다. 정신건강이 위기에 빠졌다. 몇 년 사이 길거리에 보이는 정신과 수가 확연히 늘었다. 물질적으로 가장 풍족하지만 정신적으로 가장 빈곤해졌다. K열풍 역시 사실상 전지구적 도파민 중독 현상이다. 한류는 ‘한(韓)’을 모른 채로 방향 잃은 쓰나미가 되어가고 있다. 쓰나미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폐허만 남을 뿐이다. 이럴진대 선진국 지위는 허울 좋은 ‘인증마크’에 불과하다. 찰나의 영광에 취하면 영겁의 열등에 갇히고 만다. 망각이 상실이 되기 전에 회복이 절실하다. 뿌리 찾기가 시급하다. 케이팝이 한국의 위상을 견인하고 있는 지금이 적시다. 한국은 적소다.
무(巫)를 통(通)한 망(网)화 - 신문명 방향
❶ 신사상 | ‘넥스트 샤머니즘’ 현실적 모델
뿌리 찾기의 시작은 무(巫)다. 한민족의 심리 정신적 복합체제로서 무가 궁금해진다.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생명/무생명을 포함한 지구 만물을 모시는 마음은 기후 비상, AI 부상 시대가 요구하고 있는 바와 일치한다. 둘째, 무가 가진 현실성과 수용성은 변화무쌍한 사회에 적합해 보인다. 이미 유불도 수입의 역사를 통해 그 묘합의 능력을 확인한 바 있다. 셋째, 종합예술적 성격을 띤 무의 의례 굿은 예술, 사회를 넘어 기술, 경제까지 아우를 수 있는 방법적 실마리가 될 수 있다. 한국 토속 신앙이자 고대 종교인 무를 탐구하고 오늘에 알맞은 내용과 형식으로 변형해보고자 한다.
❷ 신매체 | ‘넥스트 굿판’ 종합적 기획
매체의 변화는 세계관의 변화다. 20세기 마셜 맥루한은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강력한 통찰을 선언한 바 있다. 필히 대중문화와 그 필두인 케이팝을 살필 수밖에 없다. 케이팝 팬덤문화는 엔터 외의 종교, 미디어 등 다양한 분야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이돌 생일카페를 모방한 부처님 생신카페와 세종대왕 탄신가배도 등장했다. K철학의 존재 유무에 대한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다만 케이팝 특유의 종합예술적 양식(style)은 부정할 수 없다. 중독성 강한 멜로디, 화려한 의상, 영상미 가득한 뮤직비디오, 참여형 댄스 챌린지, 트렌디한 굿즈로 팬들의 일상에 침투한다. 본디 공자의 예악(禮樂)도 노래와 춤, 글, 의례는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K가 없기에 오히려 흥하는 역설에는 흐름(通)을 추동하는 ‘매체로서의 K’가 존재한다. K라는 매력적인 빈그릇의 활용법을 상상하게 된다.
❸ 신공간 | ‘넥스트 공간’ 입체적 해독
한국 공간에 대한 재인식도 필수다. 지난 반백 년 동안 대륙으로의 길이 끊겼다. 사실상 섬나라 국민이었다. 그러는 사이 만주, 이르쿠츠크 등 선조에게 가까웠던 지역들은 후대에게 잊혔다. 역사학자 윤명철은 한반도 대신 ‘한륙도’ 개념을 주장한다. 대륙과 해양이 교차하는 지점으로서 한국을 넓게 보는 시선을 배워야 한다. 멀어져 버린 가까운 지역들을 다시 끌어안는 작업이다. 더불어 지오그래피(Geography)와 커넥토그래피(Connectography)를 동시에 살펴야 한다. 물리적 특징에 네트워크 관점을 더해 맵을 망(网)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활물이 되어 버린 사물의 유통망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제3의 존재의 반증이다. 연결 ‘관계’를 파악하는 일은 공간을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일이다. 신사상은 신매체로 흐르고 신공간을 만든다.
공(共)시와 통(通)시를 동(同)시에 - 범시적 관점
ⓒ양애진: [세계관, 세계감, 세계상] X [과거, 현재, 미래]
앞으로의 전개 방식은 X축과 Y축으로 구분했다. 먼저 X축은 공시적 관점이다. 이를 위해 사회학자 김홍중의 세 가지 틀을 빌렸다. 인식의 틀로서의 ‘세계관’, 감정의 틀로서의 ‘세계감’, 이미지의 틀로서의 ‘세계상’이다. 다음으로 Y축은 통시적 관점이다. 무난하게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 지었으나 중첩은 불가피해 보인다. 변이들은 이미 존재한다. 일상 속에서 변화의 씨앗들을 예민하게 발견하고 관찰 기록하는 것에 주안점을 둔다. 또 하나 유념할 것은 인간세만이 아닌 다종세를 전제하는 다세계적 해석이다. 하나의 세계 안에도 복수의 공간과 시간이 존재한다. 필히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 수 있어야 한다. 고대로 사유의 지평을 확장하고 예술로 감정의 흐름을 확산하며 기술로 공간의 개념을 확대하자.
코드로서의 썸네일 - 도상적 표현
썸네일 작업에도 별도의 목적을 두었다. 이미지는 텍스트보다 더 공격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디지털 기술은 이미지 생성 장벽을 낮추고 전파 속도는 높였다. 인스타그램은 이미지의 시대의 정점을 알렸다. 텍스트는 이미지의 캡션 수준으로 전락했다. 빠르게 생성된 밈과 이모티콘들이 매초마다 우후죽순 쏟아지고 반짝하다 사라진다. 그러는 와중에도 한 시대를 풍미하거나, 이후에도 오래도록 살아남는 기호들이 있다. 20세기의 신세계를 담아낸 기호는 ‘평화 기호(☮)’였다. 1960년대 히피들은 꽃을 들고 전쟁 이후 평화를 꿈꿨다. 21세기의 신세계를 담아낸 기호는 무엇일까? 아직까지는 안상수 선생님의 '생명평화무늬’를 뛰어넘을 만한 기호는 보이지 않는다. 온 우주 만물 생명의 속성이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를 시대적 맥락에 알맞게 재해석해보는 작업도 의미 있겠다. 어찌 됐든 최종적으로는 전체를 아우르는 어떤 기호가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
정체성 추적을 시작하며..
작년에는 <커뮤니티 3.0>를 연재하며 넥스트 커뮤니티를 상상해 왔다. 시스템과 제도 전환을 고민하면서 블록체인(기술)과 비트코인(경제)과 다오(조직)를 살폈다. 결국 만사 인간 문제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모든 전환의 전제 조건은 의식 전환임이 분명해졌다. 그리하여 건(乾)의 시대에서 곤(坤)의 시대로의 이행을 외쳤다. 하늘로 향하던 눈을 아래로 돌려 땅과 그 아래를 보자고 했다. 위로의 성장에서 아래로의 성숙을 꾀했다. 이제 안에서 밖으로 나아갈 차례다. 하늘로 제대로 나아가기 위해 내가 서 있는 땅을 바로 알자. 한민족 ‘원(元)’을 알아야 비로소 우주 ‘망(网)’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