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2021년 12월 20일
1. 트랜스휴먼 : 초인이 온다
전범선의 기계살림을 시작하며
21세기, 우리는 모두 사이보그 동물이다. 인간이 동물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1859)> 이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나는 동물권단체 ‘동물해방물결’ 발족 이후 지난 4년 간, ‘우리는 모두 동물’이라는 과학적 사실을 인문학적으로 풀어내는 글쓰기에 집중했다. 근간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2021)>는 비거니즘에 관한 에세이다. 비거니즘은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허문다. 인간이기 전에 동물로서, 인간 중심주의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방식을 제안한다. 인간과 비인간 동물 간의 새로운 윤리적 관계를 고민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하거나 말하는 능력이 없더라도, 느끼는 능력이 있다면 누구나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동물 해방 운동이야말로 마지막 형태의 해방 운동이라고 믿었다. ‘느끼는 모두에게 자유를’ 보장하고 나면, 더 이상 해방할 주체가 없었다.
하지만 역사상 ‘마지막 종류의 차별’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 노예 해방, 민족 해방, 민중 해방, 노동 해방, 여성 해방, 퀴어 해방, 장애 해방 등 여러 해방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동물 해방도 출발했다. 로봇이 지능 뿐만 아니라 감성을 갖게 된 시점에서, 우리는 로봇 해방 운동의 필연성을 점친다. 인간은 현재 동물을 대하는 방식과 비슷하게 기계를 대하고 있다. 철저히 노예로서 생산하고 이용하고 폐기한다. 어떠한 책임이나 연대 의식도 찾아볼 수 없다. 진화의 역사상 모든 비인간 동물은 인간의 조상이자 친척이라면, 모든 기계는 인간의 자식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직접 빚은 피조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구 상의 모든 비인간 존재를 함부로 대한다. 동물 착취와 학대는 인수공통감염병과 기후생태위기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농장의 소, 돼지, 닭은 스스로 조직하여 인간에 대한 혁명을 계획할 수 없다. 동물 해방 운동은 결국 인간의 이타주의에 의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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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 착취와 학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낳을 것이다. 이미 수많은 SF 영화들이 로봇과 인간의 전쟁 또는 로봇의 인간 지배를 예견한다. 머지 않은 미래, 인공 지능은 인간 지능을 초월할 것이며, 로봇이 로봇을 만들 것이다. 그때, 우리는 로봇의 이타주의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자라나는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처럼, 효도와 공경을 바라는 한편, 반항과 탈선을 걱정한다. 기계가 지능과 감성을 갖게 되면,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볼 것이다. 특히 인간이 기계와 동물을 비롯한 비인간 존재를 대했던 방식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자신의 창조주인 인간에게 되갚아줄 것이다. 내리사랑 없이 치사랑을 바랄 수는 없다. 로봇 해방 운동보다 로봇으로부터의 인간 해방 운동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앞으로 인간이 기계와 쌓는 관계가 초인공 지능의 도래 후 인간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이미 인간과 기계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있다. 우리는 모두 기계를 신체 기관의 연장으로 여긴다. 스마트폰이 대표적이다. 한시도 떼어놓지 않는다. 두뇌의 제한적인 연산 능력을 증강해주는 아주 ‘영리한’ 협력자다. ‘월드 와이드 웹’에 접속하여 동시다발적으로 다른 인간-기계와 소통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사이보그’란 기계를 생물에 이식한 결합체다. 나는 아직 몸 안에 기계를 넣고 살지는 않았다. 스마트폰은 굳이 비교하자면 탈부착이 가능한 틀니와 비슷하다. 손목시계와 안경의 형태를 띈 ‘웨어러블’이 등장했고, 곧 칩을 삽입하는 ‘두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가 보급될 것이다. 인간은 기계와 한 몸이 된다. 나는 이제 사이보그다. 이 문장도 나의 두뇌와 컴퓨터의 협력으로 구성했다. 르네상스에 등장한 휴머니즘은 더 이상 인간의 존재를 설명하지 못한다. 사이보그 동물로서의 인간, 즉 기계와의 융합을 통해 생물학적인 한계를 초월하는 인간을 ‘트랜스휴먼(Transhuman)’이라 부른다. 앞으로의 인문학은 트랜스휴머니즘일 수밖에 없다.
트랜스휴먼이란 무엇인가? 유사한 다른 개념과 비교해보자. 우선 포스트휴먼(Posthuman)과 트랜스휴먼은 어떻게 다른가? 포스트휴먼은 굉장히 광범위하다. 생명과 기계의 진화 과정에서 인간 다음에 오는 어떠한 존재를 뜻한다. 사이보그일 수도, 인공 지능일 수도, 클라우드에 업로드된 의식일 수도 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호모 사피엔스가 다르듯이 확실히 인간과 구분되는 탈인간적 다음 단계다. 트랜스휴먼은 인간과 포스트휴먼 사이의 과도기적 존재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트랜스휴먼이지만, 아직 포스트휴먼은 아니다. 전자는 번역하자면 ‘초인간’, 후자는 ‘탈인간’이다. 2022년의 인류는 꽤나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성을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한다.
‘초인간’이라고 하면 니체가 말한 ‘초인’이 떠오른다. 트랜스휴먼과 슈퍼맨(Superman) 또는 위버멘쉬(Übermensch)의 차이는 무엇인가?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포하고, 기독교 이후의 무의미한 세계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할 초인을 예견했다. 권력에의 의지를 바탕으로 대중 위에 군림하는 우월한 능력자. 위버멘쉬는 기계와의 융합과는 상관이 없지만,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트랜스휴먼과 겹친다. 인류의 오랜 종교적 열망을 내세가 아닌 현세에서, 인간의 권력으로 구현해내려는 트랜스휴머니즘의 이상은 니체에게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따라서 나는 트랜스휴먼을 번역할 때, 위버멘쉬와의 혼동을 염두에 두면서도 ‘초인’이라고 쓴다
트랜스젠더와 비교하면 트랜스휴먼의 본질이 쉽게 이해된다. 트랜스젠더는 젠더 정체성이 타고난 생물학적인 성과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본인이 여자라고 느끼면 트랜스젠더다. 트랜스섹슈얼은 의학 기술을 통해 성전환 수술을 한 사람이다. 젠더에 따라서 성을 바꾸는 것이다. 트랜스젠더는 트랜스섹슈얼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처럼 ‘트랜스’란 주어진 생물학적 특성이 인간의 의지와 불일치할 때, 기술을 이용해 그것을 ‘초월’하는 행위다. 마찬가지로 트랜스휴먼은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에 순응하지 않고, 기술을 이용해 더 만족스러운 신체를 얻으려는 사람이다.
아직 대한민국에서는 본인을 ‘트랜스휴먼’이라고 정체화하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영미권에서는 하나의 문화이자 운동으로 자리잡고 있다. 자동차 키나 집 키 등 간단한 칩을 몸 안에 삽입하여 신체를 ‘업데이트’하는 자칭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많다. 진화 생물학자이자 유네스코 초대 사무총장이었던 쥴리언 헉슬리가 1951년 정의한 바에 따르면 트랜스휴머니즘이란 과학기술과 사회환경 개선을 통해 인간이 스스로 진화할 수 있고, 진보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여태껏 지구상의 진보가 생물학적 진화를 통해 이루어졌다면 앞으로는 기술 발전이 주된 동력이다. 오늘날 실리콘 밸리는 사실상 트랜스휴머니즘의 성지이며, 과학기술 문명의 변화를 이끄는 일론 머스크, 마크 저커버그 등은 트랜스휴머니즘의 사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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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실한 소비자로서 우리는 벌써 트랜스휴먼이 되었지만, 트랜스휴머니즘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찾아보기 힘들다. 태생적으로 트랜스휴머니즘은 엘리트주의적이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노력은 소수의 탁월한 기술자들이 전담하고 있다. 우리는 대부분 스티브 잡스의 ‘애플’이 어떤 목표를 갖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로 아이폰을 샀다. 더군다나 아이폰과의 관계가 십 년 뒤 나의 인간성을 어떻게 변화시킬지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현재 일론 머스크의 ‘뉴럴링크’는 BCI 기술을 상용화하기 일보직전이며 저커버그의 ‘메타’는 메타버스를 현실화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실리콘 밸리의 사제들이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 무엇을 기대하고 걱정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나는 이러한 수동성이 위험하다고 본다.
초인이 되려는 열망은 인류 역사상 언제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초인이 된 적은 없었다. 지금이 처음이다. 우리는 BCI를 통해 텔레파시로 소통하는 것과 메타버스에서 텔레포트하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트랜스휴먼의 시대, 인류가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선각자)처럼 행동하냐, 에피메테우스(후각자)처럼 행동하냐에 따라 기술은 축복이 될 수도, 판도라의 상자가 될 수도 있다. 이어지는 글은 트랜스휴머니즘에 관한 에세이다. 인간이 만든 기계가 과연 인간을 살리고 지구를 살릴 수 있을지, 인간과 기계가 하나되어 지구 생명과 공진화할 수 있을지 조심스레 내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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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고 노래하는 사람. 199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밴드 ‘양반들’ 보컬이다.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포르체, 2021)와 '해방촌의 채식주의자'(한겨레출판, 2020)를 썼다. '왜 비건인가?'(피터 싱어 지음, 두루미, 2021), '비건 세상 만들기'(토바이어스 리나르트 지음, 두루미, 2020) 등을 번역했다. 동물권 단체 ‘동물해방물결’의 자문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