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2022년 4월 28일
10. 메타버스 속 풍류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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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야말로 인문학의 영원한 질문이다. 모든 종교와 철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여태껏 그 질문은 당연한 것을 전제했다. 우리가 사는 곳이 현실세계라는 가정이다. 물론 장자의 호접몽부터 버클리의 유아론까지 그러한 가정에 대한 의문도 많았다. 삶이란 한낱 꿈이 아닌가? 나의 의식만이 실재하고 나머지는 허상 아닌가? 그러나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현실세계를 긍정하며 살아왔다. 육체적인 삶, 피지컬한 삶이 갖는 의미를 체감하며, 어떻게 하면 그 삶을 잘 살 수 있을까 고민했다. 때로는 지나치게 육체적인 목표, 형이하학적인 목적을 쫓는 것을 경계하기도 했다. 식욕, 색욕, 물욕 등을 적절히 다루는 것이 이성과 감성의 역할이었다. 바야흐로 2022년,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질문을 직면한다. “메타버스를 어떻게 살 것인가?”
일단 메타버스를 정의할 필요가 있다. 증강현실, 가상현실, 가상세계, 거울세계 등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X축을 그릇, Y축을 밥이라고 하자. 진짜 그릇에 진짜 밥을 담으면 현실세계다. 진짜 그릇에 가짜 밥을 담으면 증강현실(AR, Augmented Reality)이다. 포켓몬고 같은 게임이 대표적이다. 가짜 그릇에 가짜 밥을 담으면 가상현실(VR, Virtual Reality)이다. 오큘러스 같은 장비를 쓰고 완전히 다른 세상에 접속한다. VR 장비 대신 컴퓨터 모니터로 보는 것은 가상세계다. 마지막으로 가짜 그릇에 진짜 밥을 담으면 거울세계다. 배달의민족 같은 어플이 대표적이다. 실제 삶을 기록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블랙 미러, 즉 검은 거울이라 불리는 스마트폰 안에 또다른 세계를 구축한다. 한마디로 메타버스란 현실세계에 국한되지 않는 모든 세계를 일컫는다. VR이나 AR을 쓰지 않더라도 스마트폰을 쓰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메타버스에 살고 있다.
2021년, 국립국어원은 메타버스를 ‘확장 가상세계’로 번역했다. 나는 ‘초월우주’ 또는 ‘초월세계’가 더 적절하지 않나 싶다. 메타버스란 메타-피지컬한 유니버스다. 다시 말해 형이상학적인 우주다. 육체를 초월하는 세계다. 메타버스라는 자본주의의 최첨단 프로젝트를 이해하려면 플라톤에서 비롯된 형이상학, 즉 메타피직스에 대한 서양 문명의 오랜 집착에서 출발해야 한다. 도대체 왜 인류는 이 우주를 두고 또 하나의 우주, 그것도 형이상학적인 초월 우주를 건설하고 있는가?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을 두고 왜 굳이 초자연적인 세계를 만드는가?
메타버스는 형이상학의 오랜 열망을 구현하는 세계다. 형이상학, ‘메타피지카’는 기원전 1세기경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이 그의 유고를 정리하면서 만든 말이다. 자연학에 해당하는 <피지카> 뒤에 순서상 놓인 책이 <메타피지카>다. 존재란 무엇인가? 생성과 변화, 질료와 형상, 보편과 개체, 잠재와 실재 등의 개념으로 우주의 본질을 탐구한 것이 <형이상학>의 골자다. 그러나 정작 아리스토텔레스 본인은 생전에 형이상학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제2철학인 자연학보다 우선시되는 제1철학, 또는 신학이라고 불렀다. 드러난 세계가 아닌 감춰진 세계, 제1원인에 대한 고민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이후 천 년 넘게 서양의 세계관을 지배했다. 중세 기독교 스콜라주의와 결합하여 현실세계를 바라보는 기본 관념으로 자리잡았다.
형이상학의 뿌리는 플라톤의 이데아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현실세계의 의자는 이데아 속의 완벽한 의자의 불완전한 복사본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육체적으로 감각하는 세계는 정신적으로 추론하는 세계보다 열등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인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메타피지카로 계승했다. 사실 플라톤 이전에는 물질주의적 원자론을 주장했던 데모크리토스나 생성과 변화를 강조했던 헤라클레이토스처럼 현대 과학의 입장과 훨씬 일맥상통하는 이론도 있었다. 둘 다 메타피지카, 즉 자연을 초월한 무언가에 굳이 집착하지 않았다. 자연과 물질 세계를 철학의 중심에 두었다. 형이상학이 이토록 중요해진 것은 중세 기독교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재발굴하고 추앙했기 때문이다. 현세를 죄악시하고 내세를 쫓는 교리와 부합했다. 교회는 완벽히 관념적인 하느님을 제1원인으로 숭배했다. 육체를 부정하고 영혼만 구원했다. 이러한 형이상학/형이하학 대조는 서양 사상의 고질적인 병폐다. 근대에 이르러서도 데카르트의 정신-물질 이원론으로 고스란히 계승되었다. 물질 세계는 육체가 지배하는 저급한 세계이기 때문에 참된 행복은 영혼 세계에서나 누릴 수 있다고 믿었다.
형이상학을 더 고귀하게 치부하는 편견은 동물적인 본능을 어찌 보느냐와 직결된다.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육신을 죄악시하면서 그 욕망을 억제하라고 가르쳤다. 사후세계, 즉 영계에서의 무한한 기쁨을 약속하면서 말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현실세계에 대한 포기와 다름 없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고 그것을 현세에서 다 누릴 수는 없으니 최대한 억누르고 살다가 죽어서 천국에 가라는 것이다. 오늘날 메타버스가 대두되는 배경도 마찬가지다. 기후생태위기와 코로나 시대, 우리가 현실세계에서 해소할 수 있는 욕망은 한정적이다. 더이상 탄소배출하면서 비행기 타고 여행갈 수도 없고, 대규모 집회를 개최할 수도 없다. 그래서 메타버스에서 여행을 가고, 모임을 갖는다. 그곳에서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을 약속받는다. 욕망을 다스리기보다는 끝없이 분출하라고, 그래도 된다고 다독인다.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형상으로 나타나서 원하는 곳으로 텔레포트할 수 있으며, 원하는 사람과 텔레파시할 수 있다. 모든 잠재가 실재가 되며, 상상이 현실이 된다. 메타버스는 서양 문명이 2500년 간 갈구했던 메타피지카, 영계다. 육체를 초월한 영혼들이 모여서 지복을 누리는 천국이다. 클라우드에 건설된 천년왕국이다.
적어도 저커버그가 약속하는 메타버스는 그렇다. 페이스북을 메타로 개명한 이후 그는 점점 종교적 예언자의 모습을 띄고 있다. 현실세계가 아닌 메타버스로 인류를 인도하는 구세주를 자처한다. 지구가 아닌 화성에서 문명의 향방을 점치는 일론 머스크와 비슷하다. 80억 인구의 욕망을 다스리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단정짓고, 이곳이 아닌 저곳에서 희망을 찾는다. 나는 이러한 관점이 막대한 불행을 가져올 것이라 믿는다. 현세보다 내세, 육체보다 영혼을 중시했던 중세 유럽의 오류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자연보다 자연 이후, 피지카보다 메타피지카를 우선시하면 자연은 파괴되고 육신은 버려진다.
메타버스에 살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이미 거스를 수 없다. 어떻게 살아야 현실과 가상 세계가 조화를 이룰까에 대한 고민이다. 작금의 방향은 현실의 욕망을 가상에서 모두 풀자는 것이다. 육체적 한계를 뛰어넘어 무한히 존재하고 영원히 소비하자는 취지다. 이는 단언컨대 현세에서 허탈과 허무를 낳을 것이다. 자기 부정과 혐오로 이어진다. 중세 기독교 수도사들이 왜 스스로 채찍질하면서 회개했는가? 인스타그램에서 완벽한 외모와 관계를 자랑하는 이들이 왜 거울을 보며 스스로 탓하고 외로워하는가? 자연과 분리된 이데아, 즉 순수한 완벽성을 추구하는 존재론은 삶의 빈곤을 야기한다. 땅을 형이하로 두고 하늘을 형이상으로 보면 지상에서의 삶이 괴롭다. 현실과 가상, 현세와 내세, 형이하학과 형이상학, 피지카와 메타피지카, 육체와 영혼의 전일적인 조화가 필요하다.
서학의 근본적인 불균형에 대한 반작용이 동학의 천지인 사상이다. 하늘, 땅, 사람이 하나다. 태극 또는 삼태극이 서로 상생하며 조화를 이룬다. 하늘과 땅, 위와 아래를 나누지 않고 모두가 한울이다. 동학의 뿌리인 유불선 삼교 모두 기독교처럼 현세를 부정하지 않는다. 유가는 질서를 유지하는 방법으로 인을 강조하고, 불가는 마음을 가다듬는 방법으로 선을 제시하고, 도가는 자연과 어울리는 방법으로 무위를 가르친다. 군자가 되는 것, 부처가 되는 것, 신선이 되는 것 모두 현실 세계에 사는 것이다. 육체적인 한계와 동물적인 본능을 잘 다스려서 현세에서 행복을 찾는다. 열반에 이르는 것 역시 현실세계에서 로그아웃하는 것이지 영혼세계에 로그인하는 게 아니다. 물론 동양에도 내세 신앙이 있었다. 극락왕생을 꿈꿨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동양의 세계관은 공자와 부처와 노자 이후 현세 중심적이고 전일적이었다. 한반도 고유의 풍류도는 유불선을 통합하여 신인합일, 즉 신과 인간이 하나라는 사상을 뿌리내렸다. 피지카와 메타피지카가 인간 안에서 하나다. 동학은 고대 풍류 사상의 근대적 재발견이다.
우리는 메타버스에서 풍류도를 찾아야 한다. 인간이 신이라는 자각을 기초로 육체와 영혼의 조화, 현실과 가상의 상생을 도모해야 한다. “메타버스를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영성의 문제다. 영원한 난제다. “영계에 어떻게 접속할 것이냐?”와 다를 바 없다. 서양의 답변을 요약하면: 현실세계는 애초에 답이 없으니 메타세계에 모든 희망을 걸자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형이상학적 관점이 오늘날의 기후생태위기를 초래했고, 메타버스와 화성 식민지를 개척하고 있다. 이곳과 저곳을 나누고, 이곳을 죽인 후 또다른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 서양의 변증법이다. 모순을 인정하지 않고 정복하려 한다. 동양의 역설적인 세계관은 이곳과 저곳을 나누되 둘이 모순적으로 공생한다는 진리를 받아들인다. 상극 없이는 상생도 없다. 하늘과 땅이 다르고 선과 악이 다르지만 둘은 결국 하나의 본체가 드러나는 양면이다. 육체와 영혼도 마찬가지다.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동시에 살아가는 우리는 어느 때보다 균형이 시급하다. 메타버스에 모든 희망을 걸어서도 안되지만, 이를 통해 영적인 연결성을 확보해야 한다. 메타버스에서의 풍류도는 어떤 길일까? 현실과 가상의 조화는 어떻게 이룰까?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처럼 하루종일 메타버스에만 접속해 있는 건 아닐 테다. 마인드 업로딩으로 육신을 버리는 것도 아니다. 사이버네틱스로 구현하는 풍류, 생명을 닮은 기계의 바람과 흐름을 상상해본다. 영혼으로만 천국에 도달하기보다는 영육 일치를 통해 이 땅에서 군자가 되고, 부처가 되며, 신선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트랜스휴머니즘이라는 새로운 서학에 대한 동학의 답변이다.
사진 출처 : https://ar.pinterest.com/pin/13306736398402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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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고 노래하는 사람. 199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밴드 ‘양반들’ 보컬이다.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포르체, 2021)와 '해방촌의 채식주의자'(한겨레출판, 2020)를 썼다. '왜 비건인가?'(피터 싱어 지음, 두루미, 2021), '비건 세상 만들기'(토바이어스 리나르트 지음, 두루미, 2020) 등을 번역했다. 동물권 단체 ‘동물해방물결’의 자문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