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2023년 11월 27일
10. 생태파괴(Ecocide)와 존재파괴(Suic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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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이 꺾인 마음을 끝내 놓아버리는 상황은 어떤 조건에서 발생하는가?
관계의 파괴는 어떻게 존재의 파괴를 만들어내는가?
모든 생명은 관계를 맺으며 삶을 이어간다. 관계가 단절된 존재는 살아있을 수 있지만, 삶을 이어가기 어렵다. 따라서 관계는 삶과 생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이다. 물론, 모든 관계가 삶에 유의미하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관계는 오히려 생을 끊게 한다. 그렇다고 관계 맺기가 두려워 홀로 살아갈 수는 없다. 모든 존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존재를 죽이는 또는 살리는 관계는 어떻게 형성될까?
내가 죽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평화학을 공부하며 “죽음”과 “죽임”에 대한 차이를 인지하고 나서부터다. 각종 전쟁 사례에서 폭력의 메커니즘을 보며 여러 삶의 방식 중 왜, 어떤 상황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는 방식을 택하게 되는지/택했는지 알고 싶었다. 또한, 한국의 케이스에서 전쟁이 멈춘 이후 집단학살은 점차 줄어들었지만, 죽임의 빈도와 강도는 줄어들지 않는 현상의 원인이 궁금했다.
이에 나는 가설을 세웠는데, (학살을 포함한) 폭력을 경험한 사람은 다른 존재를 해하는 방식 또는 자신을 해치는 방식으로 폭력을 반복하고, 이는 연쇄작용처럼 주변으로 확장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잘 드러내는 사례를 찾기 위해 폭력과 죽임이 극단적으로 증폭된 학살의 케이스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학살은 주로 식민지배 관계 또는 전쟁 하에서 발생한다. 누군가(무언가)를 죽여야 살아남는 구조에서 죽임은 타당하고 당연한 것이 된다. 오히려 많이 죽여야 내가 인정받고 우위에 설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폭력이 확대 재생산된다.
식민지배 또는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 실증적 자료를 찾기 위해서 나는 죽임의 가해자들이 이후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 죽임을 한 경험이 주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것이 혹 다른 죽임으로 연결되는지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앞서 말한 Genocide-Ecocide Nexus라는 식민지배 시스템 아래서 일어난 죽임의 메커니즘을 알게 되었다.
생태학살은 집단학살과 같이 주로 전쟁이나 전후 개발로 인해 일어난다. 전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그 지역의 생태망을 말살하거나 공간의 개발을 위해 그곳의 생태계를 없애는 것이다. 이는 터전을 빼앗는 전략적 방법이자 그 네트워크 안의 관계를 모조리 끊어내는 수단이기도 하다. 의도적으로 공생의 관계를 끊어내는 방식은 자본주의가 사람을 운용하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 사람을 개별적 존재로 만듦과 동시에 관계망을 없앰으로써 개인의 통제를 원활하게 한다. 생태학살은 생물체 간의 관계와 생태-인간의 관계를 없애면서 개발 및 관리의 통제를 쉽게 만든다. 그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관계에 깊은 애착을 느끼지 못함으로 부유하게 된다. 부유하다 붙여진 관계는 그만큼 쉽게 떨어질 수 있는 관계로 존재를 더 뿌리내리지 못하게 한다.
이런 흐름에 따라 나는 생태학살(Ecocide)와 자살(Suicide) 역시 집단학살(Genocide)와 생태학살(Ecocide)의 고리와 같이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개발로 이어진 식민지배의 방식이 일상에서 주변의 상실을 만들고 개별적 존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관계망의 끊어짐과 주변의 상실을 겪은 존재는 자신 역시 놓게 되거나 엄청난 분노에 휩싸이게 된다. 폭력의 내외적인 반응이 발생하기 쉬운 상태에 놓인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에게도 발견된다. 동물원을 뛰쳐나가는 동물들이나 수족관에서 자살하는 벨루가처럼 말이다.
따라서 기존의 폭력과 평화에 관한 연구가 주로 인간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최근에 정치생태학, 인문지리학, 인류학 등에서의 논의와 같이 죽임의 메커니즘에서도 ‘인간이 생태망 안에서 다른 종들과 맺는 관계’라는 생태적 조건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에 인간-생명 사이의 관계가 집단-망-존재로서 연쇄적으로 반응한다 보고 그 관계를 끊어내었을 때 방식과 그에 따른 파장 역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판단하였다.
결론적으로 이를 통해 사유하고자 했던 것은 죽임만이 아닌 다른 전환의 가능성이다. 죽임 간의 관계성과 정동을 파악하여, 그 안에서 발생하는 역동이 다른 방식으로 전환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탐색하고자 했다. 죽임이 지나간 자리에서 생명들은 어떻게 살아낼까. 사랑할 수 있을까. 서로를 살리는 역동은 어떻게 발생하는 것일까. 그 질문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다음 글에서는 죽임에서 살림으로 가는 경험과 시도를 살펴보려 한다.
[1] 윤노빈. (2003). 신생철학. 학민사.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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