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2023년 12월 12일

11. 일상에서의 파괴와 전환






요즘의 학교는 살얼음판이다. 어른부터 아이까지 예민함과 무력감으로 가득하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아이들은 자신과 주변의 연결을 상상할 수 없다. 분열되고 갈라진 관계들에서 폭력의 강도는 점차 심해진다. 초등학교 복도에는 온갖 욕설이 난무한다. 미친, 씨발부터 상상할 수 없는 욕들이 공중에 나뒹군다. 아이들은 거침없이 말을 내뱉는다. 그 말에 담긴 폭력성과 무지는 사람을 매초 단위로 괴롭게 한다.

날 것의 단어들은 귀를 더럽히고 머리를 어지럽게 한다. 누굴 그렇게 찢어버리고, 죽여버리겠다는 건지. 그것이 어떤 말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각종 폭력을 던진다. 필터를 거치지 않고 내놓은 말들을 그대로 상상해보면 학교는 엄청난 범죄의 현장이다. 피가 난무하고, 시체들이 깔려 있으며, 죽어가는 상대의 앞에서 이죽거리며 다른 죽일 상대를 물색하는 사이코패스들의 장이다. 어쩌다 이 정도까지 된걸까.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감각하며 자랐으면 저런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곯아가는 몸과 피폐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연구자의 마인드로 떨어져 보려 애쓴다. 일상의 순간에서 한 존재가 망가지고 파괴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집단에 어떤 결과를 낳을까?

질문을 하다 한 아이를 떠올렸다. 그 아이는 아주 모나고 거친 존재였다. 항상 불만이 가득했으며, 누군가에게 분풀이를 하고 싶어했다.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끊임없이 소리를 질렀다. 처음 그 아이를 마주했을 때, 나는 저 아이를 본질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했다. 관찰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묻고, 듣기 시작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에서 궁금한 점을 묻고. 그렇게 그 아이는 자신의 십여 년의 생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아주 오랜 기억부터 몇 일 전 이야기까지.

아이의 마음 속 응어리는 아주 오래 쌓이고 쌓여 굳어있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도 모른 채 갓난 아이가 그저 울듯이 분노를 여기저기 쏟아내며 살았던 것이다. 그 아이의 부모님을 만났을 때, 부모님은 많이 지쳐있었고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뒤로 부모님을 여러 차례 만나고 아이와 계속 이야기하며 함께 하는 시간을 늘렸다. 질문을 하며 했던 이야기를 다시금 하기도 하고, 감정을 풀어가며 아이의 표정이 바뀌어 갔다. 응어리진 것들을 펼쳐 보이며 악을 쓰던 아이는 웃기 시작했다. 아이의 변화에 따라 부모님도 한결 편안해졌다.

물론 사이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또한, 이 케이스는 이야기가 잘 된 경우다. 모든 상황이 이렇게 끝나지는 않는다. 끝까지 악을 쓰며 행동을 바꾸지 못하고 지나가는 경우도 많다. 그런 경우를 살펴보면 주로 교사와 관계망이 형성되어도 부모와의 관계 설정이 그대로이거나 악화되었을 때가 많다. 하나의 관계가 바뀐다고 근본적인 변화를 이끄는 것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학교를 케이스로 보았을 때, 아이들이 가진 각각의 관계에서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며 전체적인 전환이 일어난다. 또한, 어떠한 관계에서도 애착을 느끼지 못할 때 그러면서 관계망이 깨질 때 폭력적이고 무기력한 모습이 증폭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망이 집단으로 퍼질 때 교실 자체가 붕괴된다.

최근 교실붕괴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개인의 붕괴가 집단의 파괴로 드러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부유하는 개인/존재의 파괴의 연장선이라 본다. 또한, 현 사회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척도라 생각한다. 부모들의 끊어진 관계망과 분열적 태도가 아이들에게 그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의 전환을 들여다보며 우리는 어떻게 폭력의 고리에서 벗어나 관계망의 회복을 만들어 낼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앞서 말한 사례와 같은 여러 경험을 통해 나는 서로에 대한 돌봄/관심과 사랑이 존재의 거의 모든 것을 바꾼다고 믿게 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사랑받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매사 툴툴거리며 불만을 내뱉고, 공격성과 폭력성을 보인다. 끊임없이 남 탓을 하며 피해의식을 키운다. 하지만 어른들은 이를 받아주지 않는다. 자신 역시 같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사랑받지 못하고, 하지 못하며 자란 어른들은 자신이 받은 상처를 그대로 아이에게 전한다.

물론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시기에 오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유년시절에 오고, 누군가에게는 청년시절에, 혹은 뒤늦게 중년이나 노년에 온다. 사랑의 대상은 부모일 수도, 연인일 수도, 때론 친구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을 바꿀 만큼 거대하고 깊은 사랑은 일상적이고 꾸준한 관계를 만들었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총량의 법칙이 있듯 사람에게 가 닿는 사랑이 어느 정도 이상 채워져야 전환의 시기도 찾아오기에.

어린 시절 무한한 사랑을 경험한 아이는 밝을 확률이 높다. 긍정적이고, 매사에 잘 털고 지나간다. 반면에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는 무기력하며, 모나고 화가 많을 확률이 높다. 피해의식이 심하며 공격성을 보인다. 이런 아이들을 보며 생태적 관계망의 중요성을 매일 느낀다. 어느 곳에서든 사랑을 찾고 느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다면 뉴스에 일어나는 잔혹한 일들이 확 줄어들 텐데 하는 생각을 한다. 지금은 유기적 네트워크와 돌봄이 절실한 시대가 아닌가 싶다.

아이가 타인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자신을 사랑하기는 너무나 힘들다. 그리고 그렇게 어른이 되면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이 태도가 된다. 공격적이고 방어적인 태도가 주변을 형성한다. 부서진 자기를 중심 세상을 판단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관계망 내에서 자기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지가 중요하다. 자신의 소우주, 작은 세계, 작은 생태계를 중심으로 확장되는 경험이 사람을 숨쉬게 한다.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주변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들이 끊어지고 아무 연결성을 찾지 못할 때 개별적 존재는 무너진다.

여러 폭력의 시간을 거쳐왔지만 생명과 공존 역시 그 안에 있었다. 우리가 지금껏 살아남았던 것은 분쟁에서 이기고 폭력을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라 무수한 폭력 안에서도 서로를 보듬는 마음과 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극적으로 튀어나온 극단적 폭력의 시간이 아닌 보통의 나날과 그 안에서 공존하던 여러 생명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가 살아갈 길은, 살 수 있는 길은 거기에 있다.






이희연오스트리아에서 평화학을 연구하고 있다. 폭력과 죽음의 고리를 정치생태 안에서 해석하고, 평화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 또한, 현재 플루리버스와 가이아 이론을 한국의 동학과 연결하여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