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2023년 1월 8일

12. 죽임에서 살림으로







분열되고 있는 세상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죽음의 기운이 몰아치고 있는 지구에서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역동을 가지려면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할까. 연재를 정리하며 2023년을 갈무리하고, 2024년을 그려본다.

정동의 작동

정동은 어떻게 발현될까. 감정이나 이성과 다르게 정동은 몸과 마음의 동시적 움직임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어느 한쪽이 한쪽을 견인하는 것이 아닌 역동을 가진 존재로 생동한다. 이러한 작동은 삶에서 언어로서, 행동으로서, 감각으로서 일어나고 사라진다. 그 무엇이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얽혀가며 새로운 무언가를 내보이는 작용이 생긴다. 이는 현재라는 상태에서 때로는 부정적으로 보이고, 때로는 긍정적으로 보이지만 후에 어떻게 보일지 알 수 없다.

지금의 정동을 살피기 위해 사람들의 언어를 들여다본다. 사람들은 자신의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여러 언어를 빌려 쓴다. 많은 이에게 쓰이는 언어는 힘을 갖고 대중화된다. 언어가 대중화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누구나 다수를 향해 이야기할 수 있고, 열린 장이 펼쳐질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 말이다. 하지만 대중화된 언어가 자신의 말이 아닌 타인의 말을 모방하는 것에 그친다면, 특히나 나보다 높다고 생각하는 누군가의 말을 흉내내는 거라면 그건 언어의 대중화가 아닌 신(화)의 대중화이다.

누구나 신이 되고 싶어하는 사회, 성공신화라는 단어에는 내가 신화를 쓰고 싶어하는 욕망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그 욕망에는 누군가의 위에 서고 싶은, 위계질서가 뚜렷하게 존재한다. 개별화와 다양성이 화두가 되며 성공신화가 옛말이 된 것 같지만, 이는 잘게 쪼개져 더 많은 성공신화를 양산해내고 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신화를 컨텐츠로서 소비한다. 그렇게 영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은 생활 양식을 넘어 소비로 쓰여진다. 하지만, 신화는 단순히 컨텐츠가 아닌 마음과 정동의 모음집과도 같다. 소원을 빌 듯 염원이 담긴 말이다. 거기에는 하늘까지 닿기를 바라는 강한 힘이 있다. 그렇기에 신적/영적 정동이 담긴 언어라면 조심하여 사용해야 한다. 언어가 이 사회를 점차 획일적이고, 폭력적인 사회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인간을 신격화하는 상황들을 만들어낸다. 신의 시대에서 돈의 시대로, 또 다른 시대로 변화하고 있지만 인간은 절대적 존재에 대한 이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는 주변부를 삭제함으로써 생명의 정동보다는 파괴의 정동을 이끈다. 솟아나는 무언가로 인해 역으로 파괴되는 것들이 발생한다. 그리고 끝내 공간과 관계의 단절을 만들어낸다.

공간의 형성

모두가 모였을 때 공간이 어떻게 운영될 지 논하는 건 중요하다. 인스브루크에서 평화학을 공부하면서도 자주 등장한 주제다. 유럽권 사람들이 장을 주도하고, 이야기의 대다수를 차지해 버리는 상황에 대한 불편함을 우리는 치열하게 논의했다. 물론, 그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그러한 것은 아니다. 문화적으로 토론이 익숙하고, 자신의 주장을 말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고, 혼자 숙고하기보다는 우선 묻는 태도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다만, 이는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온 사람을 의도치 않게 배제하거나 무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상대의 말을 듣는 것이 먼저인, 나의 의견을 피력하기보다 우선 전체의 상황을 보고 행동에 나서는 것이 익숙한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은 말할 기회를 잃기 때문이다. 

더욱이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비영어권 사람들에게는 영어가 소통의 수단이 될 수 있어도 외국어로 다른 문화와 태도를 체득해 행동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따라서 의도치 않은 차별과 공간의 흐름과 형성에 대해, 배려 없이 상대를 대하는 태도에 우리는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했다. 또한, 매너의 정도가 아닌 나의 습을 버리고 다른 문화양식을 따라가는 것은 식민주의의 연장선에 가깝기에 적절한 매너의 선이 어딘 지에 대한 논의 역시 치열히 진행되었다.

앞서 말했듯 언어와 행동의 정동은 공간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얼만큼의 범주를 상상하고 상대와 조율하며 나아가는지에 따라 정동은 생명을 만들어낼 수도, 무언가 파괴할 수도 있다. 작년 한 해, 국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여러 공간을 경험했다. 어떤 공간에서는 환대를, 어떤 공간에서는 불편감을 느꼈다. 그 이유를 돌아보면 공간의 운영에 따른 정동의 차이가 있었다. 공간이 가득 차 있으면 그곳에서는 역동이 일어날 수 없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이 있는 곳에서는 몸도 마음도 자유로울 수 없다. 서로 간 지켜야 할 매너 외에 절대적인 선이 있는 공간에서는 아무리 생명의 언어를 써도 파괴의 정동이 발생한다.

다양성에 대한 회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 안에서 여러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고, 새로운 정동이 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공간 또는 집단이 한 사람에 의해 좌우된다면 얘기는 다르다. 그것은 다양성을 위한 공간처럼 보이지만, 한 사람이 만들어 놓은 단일한 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기획 의도 때문에 잠시 머무는 사람 또는 초대되어 오는 사람이 한데 모일 수 있지만, 의도된 공간에는 오랫동안 꾸준히 여러 사람이 모이기 어렵다. 특히나 그것이 한 사람의 의도일 경우에는 그 입맛에 남는 사람만 남기 마련이다.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면 그렇게 집단은 폐쇄적이거나 교조적으로 된다. 그리고 그제야 편해졌다고, 자신의 의도대로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무지함이 더해지면 그것이 집단을 망가트리고 없어지게 만든다. 결국 관계에 있어서 자신에 대한 돌아봄과 태도에 대한 배움이 없다면 상호작용이 일어날 수 없다. 다양성은 자기성찰과 살림이 함께 할 때 가능해진다. 나를 살리고, 내 곁의 사람을 살리는 것이 세상의 다양성을 지속가능하게 한다.

결국 분열되는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서로를 살리는 것이다. 나를 감각하고, 주변을 알아차리면서 그 사이의 정동을 만들어가는 일이 필요하다. 절대적인 무언가를 상정하지 않고, 각각의 존재들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깊게 관찰하면서 함께 나아가는 순간이 절실하다. 2024년은 전세계적으로 큰 변화들이 있는 해다. 지구 전역에서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그 변화가 파괴의 고리로 연결되지 않으려면 생명의 정동, 자기 자신과 주변의 살림을 시작해야 한다.






이희연오스트리아에서 평화학을 연구하고 있다. 폭력과 죽음의 고리를 정치생태 안에서 해석하고, 평화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 또한, 현재 플루리버스와 가이아 이론을 한국의 동학과 연결하여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