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운주의 생명의 경계에게
2024년 4월 16일
12. 편지를 마치며
- 모든 너희와 나, 자연에게
이 편지 칼럼들을 기획한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마무리하게 되었네.
처음 생각할 때와 달리, 너희에게 편지 쓰는 과정이 쉽진 않더라. 사람들이 자신의 시선에 따라 연구한 사실들을 기반으로 너희들에게 쓰다 보니 그 모든 시선들이 나에게 들어오는 거야. 그 속에서 얼마나 휘청거렸는지 몰라. 사냥을 주로 하는 사람들이 쓴 언어를 기반으로 자료를 조사할 때는 나도 모르게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 너희를 판단하거나, 무시하거나, 겁내며 힘을 동경하는 말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지. 특히 고라니에게 편지를 쓸 때가 기억에 남아. 사냥 전문 사이트에서 ‘고라니는 아둔하고 겁이 많다’는 문장을 보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어. 편지를 쓴다는 건 나와 대등한 관계의 누군가에게 애정을 담아 쓰는 행위인데, 그런 상대에게 ‘너희 아둔하고 겁이 많다더라?’ 쓸 수 없는 노릇이니까. 너희에게 편지를 쓰는 건, 너-나 사이의 관계를 계속해서 자각하는 시간이었어. 내가 평소 접하는 자료들이 사실만을 전달하는 객관적인 정보인 듯 보이지만 누군가의 시선이 녹을 수밖에 없다는 진실의 민낯을 마주하는 순간들이기도 했지.
자주 말문이 막히는 순간들이 많았어. 모든 정보는 결국 의도를 담을 수밖에 없고, 무엇이 되었든 쓰는 이의 권력이 담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느껴졌지. 비인간 동물에게 조금 더 막연한 관심을 가지게 되어 내가 그들의 입장을 헤아리는 마냥 생각했는데 ‘(인간)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을 많이 실감했어. 마치 산 속 깊은 소나무 숲에 들어가면 그 생명력 강하다던 잡초도 없이 소나무들만 빽빽하듯이, 상황에 맞는 적응을 한, 힘 있는 생명이 권력을 가지는 건 당연해 보이더라. 그래서 요즘은 권력이란 말 자체에 전처럼 거부감이 들지 않아. 자연스러운 일이란 걸 느꼈거든. 다만 슬픈 점은, 사람은 권력을 가지게 되면 대부분 타자를 돌보는 것에 무뎌지고 권력을 가진 자신이 곧 기준이 되더라. 혹시 너희도 그래? 그래도 소나무의 그늘 아래서 오랫동안 웅크리고 있던 소사나무, 서어나무와 같은 음수들이 틈새의 햇빛에 치고 들어와 생태가 발칵 뒤집히는 순간에 위로를 받기도 해. 소나무 등과 같은 타감작용[1]을 하는 나무들과 달리 다양하게 어울리는 극상림[2]으로 들어서잖아.
야생에 사는 너희들이 원래 살던 집을 사람인 우리가 빼앗고 있다는 말을 사람들 사이에선 많이 해. 나와 이 말을 듣는 이에게 죄책감을 먼저 심어버리게 되는 일인 것만 같아서. 상상하고 행동하기 위한 의지를 꺾어버리는 것만 같거든. 다른 말을 써보고 싶어. 너희의 집이 곧 우리의 집이니, 함께 쓰기 위해 타자를 견디고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물어보려고 해. 함께 삶을 나누는 지구에 태어나, ‘원래 누구의 것이었나?’ 소유를 논하는 것은 가뜩이나 언어가 너무나 다른 비인간 동물들과 우리 사이에서 의미가 없게 느껴져.
앞서 말했듯, 생명 집단에서 권력이 생겨나는 과정은 꽤나 당연하고 다양한 생존 전략들이 펼쳐지더라. 처음에 풀과 나무에 대해 공부할 때 나뭇가지와 잎 하나하나가 인간의 손, 팔과 같지 않을까 생각했어. 하나를 꺾을 때도 죄책감이 들었지. 하지만 식물의 몸을 좀더 알고 나니 마냥 내 팔, 손과 같지 않다는 걸 느꼈어. 뿌리내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만큼, 끊임없이 재생하는 나뭇가지를 가지게 된 것이라고 하더라. 너무나도 다른 몸을 가진 우리. (이 말이 곧 너희의 뿌리와 줄기 모두를 잘라도 된다는 말로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길 바래.)
균근을 통한 나무 소통망 ‘WWW(Wood-Wide-web)’ 연구자는 한 나무가 벌채를 당하면 이웃 나무까지 함께 시들해진다고 했어. 다른가 싶으면 또 닮은 우리, 끊임없는 공통점과 차이점 사이에서 나와 닮은 이에게만 호감을 가지는 것은 정말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 그동안은 쉽사리 공통된 것들에 좀더 호의를 베풀었던 거 같아. 다름은 여전히 두려움이기도 하고. 쉽사리 몸이 움츠러들어.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어디까지 너희가 타자의 침범을 허용하고 있는지 우리가 조심스레 알아가는 과정에서 너희의 다름은 정말 찬란하다 느껴.
식물, 너희들이 물이 없는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상상을 초월할 힘으로 물을 끌어 올리고, 그 힘을 버티기 위해 굵직하고도 단단한 줄기를 만든 덕에 우린 너희를 집, 가구, 도구를 만들 재료로 오래 전부터 사용해왔어. 너희가 특정 동물로부터 스스로 지키기 위해 만든 독을 약으로 사용하기도 했지. 동시에 너희는 우리를 이용하기도 했어. 인간은 대체적으로 본능적으로 범주를 만들고, 그 범주를 통해 집단을 만들고 그 안에서 자신의 애정, 명예, 부, 안정, 안전, 탐미, 성적 욕구 등 다양한 욕구를 실현시키려 해. 그리고 그 욕구를 마음 속에서 내려놓을 수 있을 때까지 닮은 상징을 잘 만들기도 하는데, 꽃으로 벌이나 나비를 꼬시려던 너희가 얼레벌레 사람도 꼬신 거 같더라. 국화, 국수, 지역특산품, 고유종, 예술작품의 상징 등 다양한 인간 범주 속에서 상징으로 자리 잡으며 사랑받아 인간이 너희의 번식을 돕지. 사람이 인공적으로 퍼뜨리는 방식보다 다른 매개자들이 날라주는 것을 훨씬 좋아할 것 같아 유감이다만.
며칠 전 산을 오르다가 칡의 어린순이 땅에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걸 봤어. ‘갈등’이란 단어가 ‘칡 갈(葛)’과 ‘등나무 등(藤)’의 조합이더라? 등나무와 칡나무 모두 콩과 식물로 높은 지지대를 감아올리며 위로 올라가 햇빛을 독점하려 드는데, 과하면 지지대가 된 나무는 광합성을 하지 못해 자라지 않거나, 죽기도 한대. 이 두 나무는 서식하는 장소가 잘 겹치지 않아. 하지만 종종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한 나무를 두고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칡나무는 왼쪽으로 지지대를 감아 올려 한 쪽이 죽을 때까지 경쟁하기도 한다더라, 느슨하게 감아 공생하는 상황도 있고. 이 얘길 들으며 같은 욕구를 가져 다른 동태로 경쟁하는 이들이 그저 서로를 타자화하고 혐오하며 품을 내주지 않으면 주위 것들을 어떤 식으로든 넘어뜨린다는 걸 실감했어. 동시에 타자의 죽음을 통해 생존하고자 하던 내 욕구의 비밀들도 낱낱이 탄로나는구나. 이 지독한 꼬임의 비밀이 서서히 땅으로 스며들 때까지 흔적을 남겨 우리의 기억에도 함께 남는구나. 투쟁과 경쟁을 하는 관계라 하더라도, ‘너’를 통해 ‘나’를 알고 몸에 힘을 느슨히 풀며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
인간 동물들은 지구 생물량의 0.01%밖에 차지하지 못했지만 기후위기를 야기하고 있대. 비교적 우리와 닮은 너희 ‘포유류’의 80%를 멸종시켰다고도 해. 하지만 몸의 형태가 너무 달라 그 의중이 짐작하기 어려운 너희들은 여전히 지구의 80%를 넘는 무게를 가지고 있어. 지구에 도대체 중력이 왜 생겨나는지, 만유인력이 왜 생겨나는지 인간 동물이라면 아무도 모르는 세상에서 과학의 힘으로 답을 내고 생태계 정점에 서 있다고 우리 스스로는 믿고 있어. 기후위기가 우리의 위기가 아닌, 지구의 위기라 얘기하며 다시 한 번 과학의 힘으로 지구를 구해야한다 주장하기도 하고. 웃기지?
지구의 근본이라 여겨지는 만유인력, 중력, 생명의 기원 등등 그 존재와 힘이 어디서 왔는지는 현재 인간의 과학으로는 알 수가 없대.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이 모든 인간이 밝혀낸 과학의 공식들이 결국 무게가 있는 물체들끼리의 관계라고 하더라. 이걸 밝혀낸 우리가 타자와 언어가 조금이라도 다르면 관계 맺기에 너무 서툴러져. 난 모든 인간 동물들이 몸과 말과 행동이 따로 움직이는, 고장난 헛똑똑이들 같아. 그런 우리가 너희와 우리를 포함한 모든 자연을 비교적 수동적인 약자로 치부하기도 하고, 두려움의 존재로 보기도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너희들의 욕구가 지구에서 여전히 요동치고 있어. 사람이 다 읽을 수 없는 마음들이 물질을 만들고 지구를 순환시키지. 다함께 자연을 만들어.
기후위기로 멸하는 건 정말 자연일까? 우리와 너희가 함께 만들어낸 자연에서 가장 먼저 죽어가는 게 나에게 체감되는 인간 동물은 인간 사회 시스템 속 권력에서 밀려난 사람들이야. 성소수자, 여성, 이주민, 농부, 빈자, 노약자, 장애인 등등. 사람은 다름을 참 두려워하나봐. 시스템과 맞지 않아 보이면 곧 약자가 되어버리고, 자기 안의 힘을 스스로 꺼트리기도 해. 사람들이 너희를 아무리 나약하다 치부하더라도 여전히 끊이지 않고 살아남아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나도 너희와 함께하는 존재로서 그저 또 살아가겠지.
때로는 모순되기도 하고 몸과 말, 행동이 모두 따로 놀더라도 인간이기에 여전히 목표를 세우고 소통하려 노력하면서, 하루하루 내 자리에서 성실히 살아내고 싶어. 나는 여전히 세상이 궁금해. 내가 생에 할 수 있는 만큼, 정직하게 살아보고 싶어. 관계를 맺다 우정을 나누기도, 갈등을 가지다 비밀을 폭로하기도 하며 너희와 잘 관계 맺는 법을 평생 알아가다가, 내 몸의 나이테에 맞게 잘 죽고 싶어. 시 한 편을 두고 마무리하려 해.
우리 바깥의 우리
- 김소연
우리는 서로의 뒤쪽에 있으려 한다
등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것은 아니고
다만 등을 보고 있으려고
표정은 숨기며
곁에는 있고 싶어서
옆자리는 비어 있고
뒤에 서서 동그랗고 까만 팔꿈치를 쳐다보면서
그림자 속에 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등 뒤에서 험담이 들려올 때
꼭 듣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제대로 듣지 못하면서
⸺말하는 것 좀 봐
⸺말하지 못하는 것 좀 봐
단 하나의 사건에서
모두의 죄들이 한꺼번에 발각되는 순간이 온다
⸺이제 전부가 죄인이 되었는데 앞으로 벌은 누구에게 받나
추위 때문에 소름이 돋는 건지
소름이 돋기 때문에 춥다고 느끼는 건지
(내가 알던 나에 대한 (내가 알던 나에 대한
(내가 알던 너에 대한)
내가 알던 나에 대한) 내가 알던 나에 대한)
우리 바깥에는 우리가
우리로부터 바깥으로 우리에게로
우리 바깥의 우리를
우리는 마주 보고 있지 않았다
마주: 이것은 바라보는 걸 뜻하지 않았다 언제 단념하게 될지 지켜보는 걸 뜻했다
우리는 두려움 없이 말하는 자의
두려움을 보고 있다
분명히 맨 뒤에 서 있었는데
자꾸 맨 앞에 서 있다
우리는 등을 보이지 않으려다
곧 얼굴을 다 잃어버리겠다
추신. 너희의 욕망은 뭐니?
2024.04.13
운주 씀
운주 씀
[1] 타감작용 : 식물 혹은 미생물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화학물질을 분비하여 다른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성질을 뜻하는 말.
[2] 극상림 : 숲은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변화해가는 천이과정을 거치는데, 이 과정을 거쳐 기후조건에 맞게 숲의 모습이 변하지 않고 안정된 마지막 단계를 이룬다. 이 단계는 몇천년을 유지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