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2023년 3월 14일
12. ‘개/벽’, 허·공의 돌파
-2023년 다시개벽의 원년을 염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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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생/명’이 아니라 ‘개/벽’이다. 기존의 개벽담론을 다시 보고, ‘생/명’ 관점에서 다시 쓴다. 또 다른 개벽담론의 발명을 연습한다. ‘개/벽’은 개벽담론의 재–발명을 위한 생각 도구이다. ‘전환의 물결’을 위한 이론적 실험의 단초가 되기를 기대한다.
또 하나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하나의 유령이 지구를 배회하고 있다. 그림자처럼, 혹은 아우라처럼 주위에 어른거리는 그 무엇, 누군가는 ‘인류세’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하고 ‘대멸종의 시대’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포스트휴먼’이라는 표지를 붙이기도 하고, 미디어들은 대체로 ‘대전환기’라는 모호한 이름으로 이런저런 현상을 정의하기도 한다.
나에게 그 유령은 이를테면, ‘개/벽’의 정동(情動)이다. 혼돈과 종말의 어스름한 느낌이 그것이다. 그 유명한 19세기 서유럽의 유령, 공산당선언(1848)의 그것도 이런 분위기에서 나왔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때의 유령은 낙관적인 실루엣을 지녔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늘의 유령은 명백히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동아시아에서라면 유령이 아니라, ‘귀신’이었을 것이다. 서구의 유령이 개체적이고 이념적이라면, 동아시아의 귀신은 비–개체적이고 정동적이다. 감각적이고 신체적이다. 종말의 감각은 종말의 이론에 선행한다. 기후우울증도 그 징후 중 하나이다. 더욱이 절멸당하는 생명체들은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위령제가 필요하다.)
‘어둠의 생태학(dark ecology)’(티머시 모튼)이 예사롭지 않다. 김지하의 ‘명(冥)의 생명사상‘을 궁리하던 중에 서유럽의 최신 생태주의 이론과 정치신학을 읽으며 이거다 싶었다. (역시 서양의 유령과 동양의 귀신도 서로 통하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김지하의 문학적 후학인 문학평론가 임우기의 귀신론이 시의적절하다. 공산주의라는 유령도 이념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공산(共産)‘의 감각이 선행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 수준의 심리적 현상과는 구별되는 물질/사회적 마음의 움직임이 있었을 것이다.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는 일갈한다. ”왜 천지만 알고 귀신을 모르느냐?“고.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다.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랴. 하늘과 땅은 알아도 귀신은 알지 못한다. 귀신이 나다(曰吾心卽汝心也 人何知之 知天地 而無知鬼神 鬼神者 吾也).” (논학문)
19세기 중반 서유럽에 한 떼의 유령이 출몰할 때, 19세기 조선에는 귀신이 출현했다.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는 아예 ”나는 귀신이다“ 라고 선언했다. ’종말/시작‘의 개벽적 대전환기에 이를테면 귀신은 생명세계의 활동형식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내가 귀신이다.“ ”우리가 귀신이다“. 귀신을 알아차리고 자각하는 것이, 대전환의 출발점일지도 모른다.
리셋(re-set)의 감정, 사란(思亂)의 정동
『단속사회』로 유명한 연구활동가 엄기호는 2016년 출간한 책 『나는 세상을 리렛하고 싶습니다』에서 한국사회는 지역, 성별, 세대를 가리지 않고 세상이 “싸그리 망해버려라” 하는 ‘리셋’의 감정이 자라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세상을 ‘리셋’해버리고 싶은 욕망, 즉 모든 것이 망해버려서 세상을 원점으로 돌려버리고 싶은 욕망이 강렬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2016년 새해 경향신문 창간 70주년 기념 설문조사를 인용한다. 조사에 따르면, 청년들이 가장 원하는 사회상은 “계속 성장 사회”도, “과학기술이 변화를 이끄는 사회”도, 친환경적 “자원 보존 사회”도 아니라, “붕괴와 새로운 시작”이었다. 조사대상 청년들의 46.4%가 모든 것이 붕괴되어 제로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는 ‘리셋’된 사회를 원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소망과 관계없이 실현 가능성이 높은 사회로 예측된 것은 ‘자원보존사회’(50.5%)였다. 청년들은 역시 지혜롭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30년전 1893년, 전라도 고부에서 작성된 역모(逆謀)의 편지 ‘사발통문’에 ‘리셋의 감정’에 비견되는 ‘사란(思亂)의 정동(情動)’이 발견된다. 思亂(사란), ‘변란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매일 난망(亂亡)을 거리낌 없이 내뱉던 민중들은 곳곳에서 모여 말하기를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 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나 어디 남아 있겠나 하며 그날이 오기만 기다리더라“
”싸그리 망해버려라“ 하는 그 감정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이 아니고서는 스스로를 구원할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라도 고부의 민중들은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이윽고, “때가 되었네 때가 되었네(時乎時乎)” 노래하고 춤추며 하늘과 땅과 사람 온 세상이 새로이 되는 ‘다시개벽’의 그날을 스스로 열었다. 우리가 훗날 동학농민혁명이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그렇다. 때가 왔다. “다시개벽!”을 거리낌 없이 이야기할 때이다. 우선 ‘다시개벽’ 서사를 다시 써야 한다. 오늘 개벽담론의 재발명을 위한 나의 생각도구는 ‘개/벽’이다. ‘개벽’이라는 두 글자의 가운데를 내리쳐 둘로 가른다. 그리하여 나에게 ‘개/벽’은 첫째 ‘종말’의 기표이다. 파국과 종말을 회피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직시하고 대면하자는 말이다. 둘째 ‘개/벽’은 ‘돌파’의 기표이다. 그리고 그 돌파의 힘은 공·허(空·虛)의 에너지에서 나온다. 셋째, 나에게 다시개벽, 즉 ‘개/벽’은 재–구별의 기표이다. 또 다른 구별을 통한 재–창조다.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는 아픔을 안고, 새로운 질서를 태동시키는 일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구별의 철폐’가 아니라 ‘새로운 구별’을 통해 이루어진다.
개/벽(1): 종말을 직시하기
더 이상 말이 불필요하다. 기후재난과 팬데믹, 그리고 결정적으로 생물학적 대멸종의 시대, 우리가 물리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현실들이다. 어설픈 낙관과 희망을 이야기할 일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대면하고 있는 파국적 현실과 마주서야 한다. 감당하고 대면하기 위해서는 ‘직시’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시대의 생명사상은 ‘어둠(冥)의 생명사상’이고, 우리시대의 생태학의 ‘어둠의 생태학’이 될 수밖에 없다.
시작된 것은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종말로부터 다시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 김지하는 일찍이 『천부경』의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을 빌어 ‘종말이 시작’임을 천명한 바 있다. 여성신학자 캐서린 켈리는 『지구정치신학』에서 “시작에서 종말로 가는 시간이 아니라 종말에서 새로운 시작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그렇다. 파국 없이 다시개벽 없다.
그리고, 그것은 물질적이다. 지질학적 변화, 우주론적 변화가 그것이다. 어떤 이들은 지구 자기축의 이동을 보고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태양계 별자리의 이동을 주장하기도 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류세 담론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기후변화와 대멸종은 부인할 수 없는 지구사적 대사건이라는 것이다.(AI와 로봇과 같은 과학기술의 대변동 역시 ‘물질적 대변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물질적 대변화는 ‘사회세계’의 대변동을 수반한다. 우리는 이미 코로나19 3년여 동안 이를 충분히 경험했다. 오늘 우리는 바이러스가 야기한 기존의 가치와 사회적 질서의 대혼란을 경험하고 있다. 이를테면 의미세계의 붕괴다. 행복과 불행의 척도가 모호하다. 나쁜 놈과 착한 분을 구분할 수 없다. 중국도 문제고 미국도 문제고, 유럽도 역시 문제 투성이다. 국민의당도 민주당도 서로를 가짜라고, 적폐라고 배척한다.
종말이란 말이 시사하듯이 그것은 무엇보다 시간적이다. 기존의 시간이 붕괴한다. 근대사의 종말이며, 문명사의 종말일 수도 있다. 민주화 이후 혹은 진보의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 혼란과 허무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기존의 가치관에 따라 구성된 행복 혹은 성공을 목표로 하는 성장주의적 개인사의 종말이기도 하다. 거꾸로 부국강병의 민족사 혹은 국가사의 폭주를 목격한다.
그러므로, 종말은 세계의 소멸이 아니다. 지구의 소멸이 더더욱 아니다. (최근 대한민국을 엄습한 인구소멸이나 지역소멸도 마찬가지다.) 세계는 지속된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세계를 직면할 뿐이다. 파국은 지구와 인류의 종말이 아니라 기존의 시스템과 문명의 효력 상실을 의미한다. 독일의 체계이론가 니클라스 루만에게 파국은 “한 체계의 안정성 형식의 교체”를 의미한다. 시스템의 교체는 정권의 교체에 머물지 않는다. 위험사회론으로 널리 알려진 또 다른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해방적 파국론’을 제시한 바 있다. 파국은 성찰을 강제하고 ‘탈바꿈’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경제위기, 사회위기, 정치위기 식의 ‘위기론’은 타당하지 않다. 현재의 경제시스템은 머지않아 종말을 고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사회시스템은 붕괴와 교체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생태위기’도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있다. 그것은 생태계를 정태적인 것으로 바라보면서, 인간을 위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어둠의 생태학’은 타당하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 동서의 고전을 통해 배운 바 있다. 천지가 어진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天地不仁). 자연이 자애로운 어머니만은 아니라는 것을.(‘창조질서보존론’이나 ‘청지기론’에 대해서도 숙고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탈성장’을 주장할 때가 아니다. 이미 성장이 불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성장경제시스템의 ‘마지막 몸부림’을 목격하고 있다.(남반구는 다르게 봐야 한다.) ‘포스트성장시대’를 실험해야 한다. 우리는 포스트모던시대, 포스트휴먼시대, 포스트성장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개/벽(2): 허·공의 돌파
종말을 대면해야 한다. 파국을 직시해야 한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도 없다. 성찰과 힐링만으로는 이런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깨어지고 깨뜨리고서야 도달하는, 깨달음에의 용기가 절실한 때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불확실성과 미지의 세계, 구별불가능성에 대한 공포와 불안과 두려움을 돌파해야 한다.
다시개벽은 ‘도덕혁명’만이 아니다. 혁명은 ‘보듬는 것’만이 아니다. ‘초월(超越: 뛰어넘기)’이든 ‘포월(匍越: 기어서 넘기)’, ‘포월(抱越: 안고 넘기)’이든 ‘저월(低越: 밑으로 넘기/)’이든, 넘어가야 한다. 그런데, 리셋시대의 ‘넘기’는 파월(破越: 돌파해서 넘기) 아닐까. 오늘날 우리는 돌파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옛 시스템이 내 몸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는 돌파해야 한다. 돌파는 깨고 나가는 일이다(breakthrough). 깨달음이다. 그리하여, 나에게 다시개벽은 ‘개/벽’이다.
돌파, 기존의 질서를 깨지 않고, 새로운 질서는 형성될 수 없다. 그런데, 돌파의 에너지는 ‘대안적 이념’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 역시 하나의 구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별(분별)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다시개벽시대 돌파의 에너지는 ‘절대적 무한’, ‘텅빈 충만’, 공·허(空·虛)와 무궁(無窮)으로부터 나온다. ‘비구별의 지대’로부터 온다.
오늘날 국가와 자본은 ‘예외적 권력’이다. 생명권과 함께 ‘재산권’은 성역이 되었다. 스스로 신이 되었다. 그러나, 하늘 아래 ‘예외적 권력’은 없다. 우상과 하느님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우상은 깨져야 한다. 국가주의와 자본주의만이 아니다. 진보도 녹색도 스스로를 유일한 대안으로 여긴다면, 우상이 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먼저 자기의 ‘우상성(偶像性)’을 깰 수 있어야 우상을 깰 수 있다.)
신학자 전철의 말을 빌리면, 신학은 종말론적 관점에서 체계를 과감하게 건드리는 소통 담론이다. “신학은 현존하는 체계의 존립근거에 대한 비판적 물음을 던짐으로써 현실체계의 체계 내적 정당성을 기초에서부터 해체한다.”다시개벽시대,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우상을 깨는 신학적 사유이다. 자신의 우상성을 깨는 무아(無我)의 사상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예외적 권력과 제국의 문명은 인위적으로 해체되지 않는다. 자기생산체계는 완강하다. 생명체를 비롯한 모든 체계(system)는 영생을 꿈꾼다. 사회적 시스템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다시개벽이 시사하는 것처럼, 우주론적 대변동을 편승해야 한다. 원불교의 모토를 (살짝 비틀어) 다시 읽는다. “물질이 개벽하니 정신이 개벽된다.” 중세유럽은 페스트로 인해 르네상스로 진입했다. 러시아혁명과 중국혁명은 1차세계대전과 일본의 침략으로 인한 권력의 공백상태에서 가능했다. 19세기 조선 말 다시개벽의 열망 역시, 역설적으로, 전염병의 창궐과 열강의 침략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나온 ‘자기구원의 사상’이었다. 미증유의 생태학적 변화는 기존의 문명, 정치시스템, 문화를 모두 바꾸게 될 것이다. 우리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어떻게 사회를 바꾸었는지를 경험하고 있다.
그런데,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돌파의 에너지는 ‘이념’과 ‘대안’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개/벽’적 돌파는 “초월적 돌파(박영신)”일 수밖에 없다. ‘영성적 돌파’일 수밖에 없다. 김지하는 이를테면, ‘공허의 돌파’를 제안한다(김지하전집 머리글). 김지하에 따르면, 비약을 위해선 허공에 발을 내딛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의 모심은 ‘허공에의 모심’이다.
(나에게 ‘영성’은 이성과 감성과 구별되는, 이를테면 비사회적이며, 비개체적인 인간의 속성이다. 비구별의 정동이며 감응의 체험이다. 그것을 일러 거룩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영성은 어떤 것이라도 생성시킬 능력이다. 거듭남과 부활의 능력이다. 살아있는 것을 살아있게 하는 힘, 존재를 존재케 하는 힘이다.)
개/벽(3): 자각적 재–구별
체계이론의 관점에서, 개벽(開闢)은 절개(切開)다. 태초에 절개가 있었다. 갈라서 열린 세계다. 절개를 통한 세계 창조다. ‘첫 세상의 열림’은 하나의 질서가 혼돈과 구별되면서 생겨난다. 천지가 구별되고 음양이 구별된다. 그리고, 차이의 차이, 분화의 분화를 거듭하며, 세계 안에 수많은 세계들이 창발되면서 전체 세계의 지평이 넓혀진다. 그렇다. 태초에 차이가 있었다. 경계와 구별이 있었다. 니클라스 루만은 ‘절개로서의 세계 창조’를 이렇게 적는다.
”세계 창조는 분명 ‘구별을 그려라’라는 지침임이 틀림없다. 하늘 땅이 구별되고 다음에는 인간이 그리고 다음에는 이브까지 구별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 자신은 모든 구별의 피안에 있다면 창조는 구별하기라는 특권의 소산이다.“
루만의 결론은 구별이다. 태초에 구별이 있었다. 하늘과 땅을 구별하고, 여자와 남자를 구별한다. 그럼으로서의 음양의 한 세계를 탄생시킨다. 하나의 코스모스가 탄생한다. 이때 구별은 자기구별이다. 일체유심조, 의식의 자기구별이다. 생명의 자기구별이며, 사회의 자기구별이다.
그렇다. 구별로써 세상은 창조되었다. 구별해야 살 수 있다. 그러나 구별은 족쇄가 된다. 진보/보수(각각의 관점에서는 진보/비진보, 보수/비보수)의 구별은 한때 낡은 질서를 돌파하는 힘이 되었으나, 이제 족쇄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다르게 구별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근대화도, 자본주의와 국가도 우연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우연성(contingency)’의 필연성이다. 다시개벽 시대엔 또 다른 구별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야 한다. 리셋해야 한다. 리셋하지 않으면 거듭날 수 없다. 부활할 수 없다.
구별은 거부할 수 없는 세계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구별(분별)이 문제가 아니라, 구별함(분별함)에 대한 자각의 부재가 문제다. 자아는 타자와의 구별을 통해 자아가 된다. 빅뱅 이후 우리는 구별함으로서만 살 수 있다. 그렇다면, ‘구별을 넘어서’는 망상이다. 또 다른 세계의 지평을 여는 것 역시, 또 다른 구별을 통해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역설이다. 오늘 우리에게는 오늘에 맞는 또 다른 구별이 필요하다. (나에겐 이것이 중도다.) 예컨대, 생명과 기계와 구별, ‘타자생산적’ 기계와 ‘자기생산적’ 기계의 구별. 영성과 신명의 구별이 그것이다. (미국 보수 기독교의 pro-life운동과 가톨릭의 생명문화운동, 그리고 한국의 생명운동과의 구별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맥락에서 모든 ‘개/벽’은 ‘다시개벽’의 ‘다시’를 내포한다. 모든 발명은 재발명이고, 모든 창조는 재창조이다. 사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구별은 ‘재’구별이다. 그러나 ‘개/벽’의 재구별은 차원이 다르다. 후천개벽론이 시사하듯이 우주적이다. 최소한 문명사적이다. 그러므로 음양의 구별과 같은, 혹은 천지의 구별을 대체할 수 있는 ‘담대한 구별’이 요구된다. 그리고, 놓치지 않아야 할 가장 중요한 부분, 이때 재구별은 ‘자각적’ 구별이다. 구별을 자각하면서 구별한다. 꿈인 줄 알고서 꿈을 꾼다.
2023년을 개/벽과 리셋의 원년으로
그렇다. 우리는 리셋시대, ‘다시개벽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다시개벽(개/벽)은 역설적으로 ’종말을 직시‘하는 것이며, 다시개벽은 ’허·공의 돌파‘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자각적 재구별‘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태동시키는 것이라는 것. 단 그것은 물질적 대변동의 흐름을 타고 가야 한다는 것.
개벽은 세상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상의 시작이라는 우주론적 사건은 당연히 그 전과 후로 구분되게 마련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러므로, 다시개벽이란 항상 후천개벽일 수밖에 없다. 개벽 이전과 이후를 구별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에만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 발명될 수 있다.
그렇다. ’세상을 리셋하기‘다. ‘다시개벽’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시간이 시작된다는 의미이다. 세상은 모두 자신만의 고유한 과거와 미래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하여, 나에게 2023년은 ‘개/벽’의 원년이다. 직시하고 돌파하고 재구별하는, ‘개/벽’적 전환운동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원년을 원년으로 만들기 위한 두 가지 사회적 과제가 떠오른다. 우선은 ‘사회적 사건 만들기’. 결국 우리의 활동은 사회적 소통의 다양한 형식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사회적 소통의 핵심은 새로운 구별의 코드를 발명하는 것, 그리고 담대한 다시개벽 서사로 재구성해내는 것, 그리고 저항적 소통사건 만들기이다. 자신을 사회적 사건으로 만든다는 것은 고유의 언어와 소통방식으로 사회에 공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사회적 탈주’. 다시 말하면, 그것은 비사회적인 ‘나’를 발견하기이다. 우리는 사회 안에서 살지만, 동시에 ‘사회의 외부’에 있다. 사회는 한 사람의 우주적 신체와 횡단하는 정신을 온전히 담을 수 없다. 인간은 사회체계의 일부이기 전에 한 생명체이고, 인간은 뜬구름처럼 자유롭고 싶은 마음이다. 그런 점에서는 우리는 모두 아나키(anarchy), ‘사회의 외부’를 꿈꿀 수밖에 없다. 그리고 외부의 사고방식과 실험은 기존의 사고방식과 체계를 충격할 수 있다.(그러나, 이 또한 사회적 체계의 형식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역설이다.)
다시개벽과 리셋하기를 꿈꾸며 ‘구공존이(求空存異)’를 되뇌인다. 구동존이(求同存異)를 빗대어 만든 말이다. ”공허를 구하고 차이를 존중한다.“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차이를 구하고, 공허를 존중한다.“ 요체는 또 다른 차이를 생산하는 잠재력은 공·허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동(同)’은 발견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체계이론가 루만의 문법으로 말하면, ‘풍부하고도 공허한(plenitude and voidness)’. 하지만,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공허하고도 풍부한’. 불확실성과 미–결정의 시대, 나의 삶과 우리의 삶터와 행성 지구를 어떻게 풍부하게 만들 수 있을까?
다시개벽을 꿈꾸고, 자신을 사회적 사건으로 만들고, ‘한’ 사람으로 또 다시 태어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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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섭(사발지몽). 생명과 전환을 화두로 오랫동안 정읍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해왔으며, 최근에는 (사)밝은마을_생명사상연구소를 중심으로 감응(感應)과 우형(又形)을 키워드로 하는 ‘또 다른’ 생명사상·생명운동의 태동을 탐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