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12. 암흑의 숲속을 더듬어 인드라망을 찾다
한류시절부터 오랜기간 익숙한 탓에 K-콘텐츠에 대해 가장 날카로운 해외비평가인 중국의 문화힙스터들은 한국의 하드SF영상물에 대한 평가가 특히 박하다.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소개된 한국 최초의 스페이스 오페라 <승리호>와 한단계 업그레이된 무대배경과 의상소품 처리 등으로 평가받는 <고요의 바다>가 제물이 됐다. 두 작품 모두 새로운 시도가 겪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진일보한 측면에 초점을 맞춘 한국내 ‘지못미’ 평가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중국과 비교해 한참 뒤쳐진 한국의 우주기술수준에 대한 야유의 감정도 없지 않다. 중국은 현재 미국과 함께 화성탐사경쟁을 벌이는 우주 G2이기도 하지만, 한국어로도 이미 번역된 류츠신의 <삼체(三體)>와 하오징팡의 <접는 도시>가 2015년과 2016년 연이어 휴고상을 수상한 덕에 SF의 국제적 위상도 꽤 높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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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명 샤쟈(Xia Jia夏笳)로 해외에도 알려진 80허우세대 SF작가이자 대학에서 이를 가르치는 왕야오(王瑤)의 평론집 <미래의 좌표>(2019)는 중국SF의 역사와 중국현대사에서의 의미를 잘 정리하고 있다. 그가 시대순으로 선정하고 작품마다 촌평을 붙인, 열세명 작가의 단편소설집<고독한 복병(寂寞的伏兵)>(2017)과 함께 읽을 만하다. 중국SF는 이웃국가 한일처럼 서구적 근대화와 과학기술에 기반한 부국강병의 문화적 토양을 만들어 내려는 계몽과 교육의 요구에서 싹텄다. 그래서 홍콩의 중국현대문학 평론가인 쉬즈둥(許子東)은 <20세기 중국소설을 다시 읽다(重讀20世紀中國小說)>(2021)에서 량치차오(梁啟超)의 <신중국미래기(新中國未來記)>(1902)를 가장 먼저 소개하는데 이 작품은 동시에 중국 SF문학 혹은 사이언스판타지(科幻奇譚)의 효시로 꼽히기도 한다.
이런 역사적 맥락이 중국SF의 발전과정에서 줄곧 이원론적 구조와 관념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농촌이 대표하는 낙후한 ‘향토중국’과 도시가 상징하는 ‘현대중국’ 혹은 그 이상향 미국의 이미지이다. 공산혁명이 성공하고 신중국이 수립된 시점에는 꼭 그렇지 않았다. 1958년에 발표된 <十三陵水庫暢想曲>같은 작품에서 향촌의 (인민)공사는 농촌과 도시, 남녀와 계급의 이분법을 초월하는 사회주의의 미래상으로 그려진다. 물론 당의 프로파간다 수단으로써 교조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사라졌던 SF가 개혁개방후 반짝 부활했던 시기가 있다. 1978년에 소개된 중국SF의 원로 예융례(葉永烈)의 <小靈通漫遊未來>에서 이미 무대가 되는 ‘미래시(未來市)’는 농촌의 존재감을 완전히 부정한다. 한편 1979년 청뚜(成都)에서 창간한 SF월간지<과환세계(科幻世界)>는 2019년 창간 40주년을 맞으며 중국SF역사의 산증인이자 산실로 아직 건재하다. 이 잡지는 지금도 각급도서관과 학교, 청소년을 위한 공간에 단골손님으로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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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정치적 이유 등으로 다시 침체에 빠진 중국의 SF가 본격적 부흥기를 맞은 것은 90년대후반이다. 중국 하드SF 혹은 ‘핵심SF’의 대표작가 삼인방 류츠신(劉慈欣), 왕진캉(王晉康), 허시(何夕)가 이때 등장했다. 이공계출신 남성이라는 공통점을 갖는 이들의 작품은 인류, 지구, 우주의 운명이나 국가의 민생에 대해 논하는 역사적 대서사에 치중하고 동시에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내포하고 있다. 반면 이들과 대척점에 서서 “역사진보의 종착역인 유토피아”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유지하며 순문학 매직리얼리즘에 가까운 작품을 선보이는 저널리스트 한쑹(韓松)도 동시대 작가이다.
목표인 미국을 따라잡기 위한 초조함속에 “SF는 민족과학정신육성의 요람”이라는 선언이 이 장르문학에 대한 도구화를 넘어 그 국가의 과학기술 수준을 반영한다는 인식을 내재화했다. 과학지식의 엄밀성, 창조적 기술혁신과 이에서 비롯한 경이로움을 중시하는 하드SF를 인간본성과 사회현상에 착목하는 순문학에 근접한 소프트SF보다 중시하는 풍조가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중국내에서도 지금은 웹을 기반으로 한 각종 판타지 문학 등과 엄밀히 구분하기 어려우며 실은 양적으로 대세가 될 수 밖에 없는 소프트SF에 대한 이들 진영으로부터의 비판이 유래한 배경이다. 앞서 언급한 한국SF영상물에 대한 비아냥의 기저에는 자국의 콘텐츠에도 동시에 요구되는 이런 잠재적 강박이 깔려있다. “우리가 듄은 못만들어도 (하지만 이에 버금가는 삼체라는 걸출한 원작소설은 가지고 있다), 검열만 없다면 오징어 게임은 만들지 못할 이유도 없다”라는 (페미니스트적 성향도 지닌 젊은 여성) 중국문화평론가의 발언에는 하드SF의 거대서사와 우주관 창조를 절대화하고 있다.
동시에 이런 작품들(듄이나 삼체)은 미중과 같은 G2 우주강국에서만 나올 수 있고 영상물은 미국헐리웃만이 만들 수 있다는 패권국가적 시각이 내포돼 있다. 중국은 류츠신의 단편소설을 각색해서 만든 영화 <유랑지구>를 통해 이미 하드SF영상물의 가능성을 선보인 바 있다. 지금은 <삼체>의 넷플릭스 버젼 제작을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언젠가 중국에 의해 직접 제작될 날을 꿈꾸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앞서 언급한 한국의 하드SF영상물에 대한 혹평은 한국이 아직 이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음에 대해 겉으로는 안심하면서 내심 조바심하는 표현일 수도 있다. 씁쓸하지만 사실은 뼛속까지 자리잡은 중화주의적 혹은 가부장적 세계관의 무의식적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에서도 과학기술지상주의에 대한 ‘안티테제’인 소프트SF의 출현 당시부터 하드SF는 우파보수 성향과 겹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는데 아마 한국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서구사회와 일본을 제외한 국가들중에서 2차대전후 거의 유일하게 핵심국가군으로 진입해 가는 중화권 국가(그중에서도 대표선수인 중국대륙)들과 한국의 지나친 경쟁의식이 “후발추격 국가의 SF문화”라는 구조적 이원론의 덫에 빠져서 왜곡된 형태로 표현되는 모습이다.
한국은 과연 이런 평가에 대해 초연하게 반응할 수 있을까? 특히 진보주의자들은 여전히 국제주의적인 자세를 유지할 수 있을까? 이런 이야기를 언제인가 페북에 썼다가 많은 ‘페친’들의 심기를 자극한 적이 있다. 나는 한국이 이런 불필요한 경쟁심리에서 빠져나오고 더이상 남들의 평가에 신경쓰지 않는 성숙한 자세를 얻길 기대하는 편이다. 사실 위에 언급한 중국인 문화평론가는 원래 K-콘텐츠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아마도 한국내의 반중감정이나 중국 콘텐츠에 대한 조롱과 비하에 시달리다가 저런 생각을 품게 된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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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다시 ‘중국특색SF’에 대한 안팎의 강박적 요구가 생겨나면, 중국고전판타지 소재를 이용해 무협SF나 신화SF를 만들어야 한다는 ‘중화SF역사 2천년’의 주장까지 생겨난다. 그 부작용으로 중국 고유의 신비주의 색채를 가진 현학(玄學)이 서구에서 온 과학기술보다 우월하다는 국수주의적 판타지 설정도 등장하고, 서구와 도시의 ‘타락한 문명’에 대비되는 존재한 적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 순정한 이상향의 ‘중국향촌’을 상상해버리기도 한다. 건축가 출신 작가 판하이톈(潘海天)은 현대의 재료를 빌어 일본전통 미학을 표현하는 일본의 유명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건축양식을 예로 들어 ‘중국SF’의 가능성을 논한다. “화성에는 유리기와가 없다”라는 그의 말은 SF와 중국전통간의 본질적 모순에서 느끼는 곤혹스러움을 표현한다. 그는 ‘고대의 로봇’을 묘사했다고 예로 들어지며 열자(列子湯問)에 기록된 서주(西周)의 목왕(穆王) 희만(姬滿), 그의 왕비였던 성희(盛姬), 그리고 신비의 인물 언사의 이야기에 시간여행자 상상을 뒤섞어 <언사전설(偃師傳說)>(1998)이란 작품을 발표했다. 그는 이후 중국 판타지문학의 가상세계인 ‘九州유니버스’를 (九州는 고대 중국을 의미한다) 창조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기도 한다. 왕야오는 이런 다양한 시도를 긍정하면서도 현대자본주의가 가져온 공업화, 도시화, 전지구화 속에 중국사회가 겪는 변화의 과정을 그리는 것이 중국SF의 속성이라고 명쾌하게 정리하며 ‘중국’과 ‘SF’라는 본질주의에 빠지지 말라고 충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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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로 대표되는 중국SF는 미국SF고전인 <차가운 방정식(the cold equations)>(1954)의 영향으로 생존이냐 인간성이냐의 기로에서 전자를 선택하는 극단적인 공리(功利)주의 성향도 보인다. 그중에서도 제2편 암흑의 숲(黑暗森林)에서 류츠신은 자신이 고안한 우주공리(公理) 두가지를 소개한다. 생존은 문명의 필요조건이고, 문명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확장되지만 우주의 물질총량은 불변이다라는 내용이다. 왕야오는 이를 고전적인 막스베버의 쇠우리(iron cage) 딜레머나 다수의 생존을 위한 소수의 희생과 그 반대상황을 저울질하는 ‘트롤리 딜레머’로 설명한다. 류츠신은 초기작품에서 낭만적인 성향도 보이지만 2천년대에 발표된 삼체이후로 이 관점을 고수하며 중국사회에 끊임없이 양자선택의 질문을 던진다. 발전소 엔지니어였던 류츠신 자신의 경험을 포함해 90년대말 국영기업의 대량정리해고가 남긴 상흔이다. 한국IMF시대의 트라우마와 다르지 않다. 흔히 성과주의로 인권과 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요구에 답변하는 중국정부의 대응이 오로지 ‘문혁’과 같은 ‘냉혹한 전체주의’역사에서 기원하는 것이라는 세간의 오해를 불식할 증거이다. 추가로 소개할 일화는 한국에 소개된 중국의 SF작품중에서 열광적 반응을 얻은 완샹펑녠(萬象峰年)의 후빙하시대연대기(後冰川時代紀事)라는 작품에 관한 것이다. 그의 작품은 류츠신과 <삼체>의 영향을 깊게 받고 있다.
(http://mirrorzine.kr/features/132723?fbclid=IwAR2GLKLnOh9U95X1IxzFBaOVafeC2_WS1tipe7RP3IW082xPQeYT0BiYkWU)유사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는 한국SF독자들의 취향과 관점이 중국독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류츠신의 <삼체>는 세계 최초로 한국어로 번역이 됐지만, 불과 수백부밖에 팔리지 않았다. 2019년에 번역 출간된 이후 시리즈의 누적판매부수가 2천만을 넘어선 일본과 매우 대조적이다. 협소한 하드SF시장과 중국문화에 대한 상대적인 무관심이 겹쳐진 결과일 것이다. <k< span="">를 생각한다>의 저자 임명묵은 작금의 청년세대 반중감정의 이유중 하나로 양질의 당대중국문화를 접할 기회가 적었던 것을 들기도 한다. <삼국지>와 <영웅문>을 보며 자라난 중년 이상의 한국인들과 중국과 중화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삼체>는 완성도와 스케일면에서 ‘현대판 삼국지’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터인데, 일반 독자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쉬운 일이다.
류츠신은 젊은 여성을 소수의 최후 생존자로 묘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선택에 대한 변명을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그의 작품에 묘사되는 여성에 대한 관점은 보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을 포함한 중국SF에서 세계를 구하는 중국인 영웅이 미국식 수퍼히어로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그들은 시종일관 나약하고 고뇌하는 모습을 보이며, 한쑹의 설명처럼 윤회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의 유토피아는 ‘멋진 신세계’가 아니라 ‘태평천하’이다. 왕야오는 SF의 이런 설정에 대해서 설명하며 G2로 부상하는 중국이 전지구적 위기에 대해 서구와 다른 대답을 내놓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실은 최근 인기를 얻는 K-콘텐츠 주인공들의 모습과 겹치는 바가 적지 않으니, 이는 동아시아 공통의 영웅관이나 문제해결방식에 대한 기대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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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허우가 중심이 되는 대부분의 신세대SF작가들은 류츠신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그를 존경하지만,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는 것에도 두려움이 없다. 샤쟈를 포함한 적지 않은 여성작가들의 활약도 두드러진다. 하드SF의 틀에 구애받지 않고 탈중심화한 가치관을 바탕으로 다양한 형식과 소재의 작품을 내어놓고 있다. 인공지능, 안드로이드가 활약하는 사이버펑크와 포스트휴머니즘을 비롯해 기술의 발전이 초래할 우리 삶의 변화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현실풍자도 넘쳐난다. 이공계 출신 여성소설가의 십만부 넘게 팔리는 작품(<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수 없다면>, 김초엽)도 등장하며 활성화되기 시작한 한국SF의 모습과 닮아있다. 마침 중국의 신세대 SF플랫폼 ‘미래사무관리국’의 제의로 한국의 환상문학 웹진 ‘거울’이 2017년부터 한중SF교류를 진행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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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에 <삼체>와 함께 언급한 하오징팡의 <접는 도시>는 미래의 베이징을 세개의 공간과 시간으로 분리된 도시로 묘사한다. 각 세계는 함께 공존하면서도 서로가 ‘보이지 않는 인간’처럼 돼버린 계급간 분화를 상징한다. 나는 이러한 분화가 문화경제계층에 따른 지역적 분리라는 이중상징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한다. 초거대도시, 중형도시, 그리고 소도시 및 농촌이라는 세개의 분리된 공간이다. 작품속에서 제2공간에 거주하는 대학원생이 나중에 제1공간으로 올라가려면 제3공간에서의 관리경험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는 중국에서 공산당원으로서 고위직 승진을 하려면 젊은 시절 농촌간부로서의 근무 경험(下鄉)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대한 풍유이다. 시진핑을 비롯한 중국의 고위간부는 모두 이런 과정을 거쳤다. SF와 같은 중국 장르문학의 알레고리적 표현이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공간들 사이에는 오직 정부가 통제하는 좁은 채널을 통해서만 정보와 인력이 소통되는데, 이는 중국의 여론형성 메커니즘에 대한 적절한 묘사로 볼 수도 있다. 중국은 인터넷과 레거시미디어 사이에 정부의 게이트키퍼(gatekeeper)역할이 존재한다. 그래서 한국처럼 인터넷여론이 레거시미디어와 상호작용하면서 전국민여론으로 빠르게 확산되는 일은 오직 정부의 의도나 묵인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제1공간사람들은 해외정보와의 접촉도 상대적으로 많은 반면 제2공간이나 제3공간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과 무관한 외국소식에 상대적으로 둔감하다. 실은 그래서 한복과 김치논쟁에서 한국의 네티즌들이 소수의 중국네티즌의 의견을 중국보통사람들의 생각으로 간주하는 것은 대단히 큰 오해이다. 그나저나 하오징팡은 이미 국제적 지명도가 있는 유명작가가 됐기 때문에 이런 표현들은 앞으로 상대적 제약을 받게 될 것이다. 작년 하반기 중국정부의 공동부유정책 발표이후 계급분화에 대한 공론장에서의 토론이나 학술적, 예술적 표현은 자유롭지 않다. 인기 추리소설 작가 즈진천은 3년전 드라마화된 작품들의 성공으로 셀럽이 된 후 계급분화를 주제로 한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털어놓았던 차기작을 2년째 내놓지 못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소수가 즐기는 장르예술 작품이라고 해도, 일단 주류의 관심을 끌게 되면 자유로운 표현에 제약이 생기는 패러독스가 있다.
나가며
미래사무관리국과 거울의 후속 교류가 원활하지 않아서 추가적인 판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탓인지 당시에 각각 한국어와 중국어로 번역이 됐던 양국의 작품들은 현재 일반 독자들은 읽을 수 없게 됐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아쉬움이 있다. 만약에 이런 기회가 더 활성화하거나 지속되기를 원한다면, 필요한 노력들에 대해서 한중문화교류활동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작은 조언이 있다.
당시 한국측 교류 담당자였던 김주영 작가의 인터뷰 기사 (http://mirrorzine.kr/features/124982 )와 미래사무관리국측의 소개글 (https://mp.weixin.qq.com/s/9pLz5M-nC5VmzQ4ieB_p_w )을 읽어보면서 짐작한 것들이다. 중국통인 김주영작가의 노력으로 이 프로젝트가 성사됐지만, 한국측은 김주영 작가 개인의 수고가 없었다면 아마 실현되지 못했을 것 같다. 중국측은 조금 더 조직적으로 일을 하긴 했지만, 한국뿐 아니라 다양한 국가들과 거의 동시적으로 이런 일들을 추진해왔던 것 같다. 그래서 어떨 때는 중국측이 일정 약속을 잘 못지키는 경우도 있었고, 약간은 곤란한 사정도 있었다고 한다. 이 상황은 한중교류 혹은 한중관계의 한단면을 잘보여준다. 즉, 중국이 스스로를 일종의 허브나 중심으로 설정하고 한국을 수많은 파트너중의 하나로 여기는 경우가 많은 반면, 한국이 중국을 대할 때는 한-중간의 일대일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다. 물론 위의 사례는 한중교류가 중심이 되기때문에 중국은 당연히 동등한 관계를 설정하도록 프로토콜을 맞춰야 한다. 그런데 실제 일이 진행되다 보면 불가불 이런 관점과 입장의 차이가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 솔직히 말하면, 한국인들은 냉정하게 이런 현실적인 차이를 받아들이고 이런 경험들을 지나치게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것이 좋다. 중화주의의 마이크로 어그레션(micro aggression)에 지나치게 민감해질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중국이라는 플랫폼을 상대하는 것과 중국사람 혹은 중국의 지역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은 현격한 차이가 있다. 만일 중국이라는 추상적 대표성을 갖는 집단이나 개인을 만나게 될 때는, 이를 한국과 같은 나라나 개인으로 보기보다는 탈인격화한 거대한 인공지능 플랫폼정도로 인식하는 것이 좋다. 플랫폼은 바꿔말하면 우리가 이용하는 도구에 가깝다. 그래서 김주영 작가가 여전히 미래사무관리국의 해외교류사업에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개인적으로 초청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런 플랫폼을 잘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에 중국과의 교류를 원하거나 중국시장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막연히 초대를 기다리기보다는 자신이 이 플랫폼에 적극적으로 올라타는 것이 유리하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중국이 아닌 다른 플랫폼(영미권)에서 성과를 얻어 중국플랫폼의 초청을 받는 방법도 있다. K-콘텐츠는 지금 후자의 길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중국플랫폼의 성장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포트폴리오는 늘 고려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베이징 동계올림픽 기간에 벌어진 숏트랙과 한복 해프닝의 기저에는 문화시장을 포함한 중국의 성장이 잠재적으로 자신의 미래 밥그릇을 위협할 것을 염려하는 한국 청년 세대의 불안이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 말이다.
*왕야오는 베이징대학 물리학과 학부를 졸업했지만, 일찍부터 작가생활에 뛰어들었고 문화창작 활동에 더 관심이 컸던 탓에 석사학위는 중국미디어대학(中國傳媒大學)에서 영화를 전공했다. 그리고 다시 베이징대학에 돌아와 박사과정으로 SF문학을 연구했다. 그의 박사학위 지도교수는 중국을 대표하는 페미니스트 연구자이자 영화평론가인 다이진화(戴錦華)선생이다. 중국을 대표하는 80허우 SF작가중에는 유독 중국의 최고학부로 일컬어지는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 출신이 많은데 이 대학들의 SF동아리와 관련이 있고, SF문학이 엘리트문화와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한국에서도 SF가 소수의 엘리트와 덕후들의 문화권에서만 향유되던 시절이 있었음을 상기해 보면 특이한 현상은 아닌 것 같다. 본문에 언급한대로 국가간 경쟁심리가 우주개발이나 이의 SF적 묘사로 드러나는 것도 이런 엘리트주의와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학창시절부터 작가활동을 한 그의 초기 대표작중 하나는 동화와 SF를 결합한 <유리병속에 가둔 요정(關妖精的瓶子)>이다.
동일 제목을 가진 그의 단편선집이 2012년에 출간됐다. 이런 ‘깜찍한’ 작풍에 어울리게 동급생들이 그의 작품을 중국인들이 아침에 즐겨먹는 멀건죽을 의미하는 희반(稀飯)SF라고 불렀다고 한다. 소프트SF에 대한 그럴듯한 별칭이다. 그의 필명 샤쟈는 성서의 하갈(haga, 夏甲)에서 따온 것인데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몸종이었고,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을 낳는다. 모자는 나중에 사라와 또다른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 의해 사막으로 쫓겨나는데, 이스마엘은 아랍민족의 조상이 됐다고 알려져있다. 여기서 하갈은 “쫓겨난 시녀”를 의미하는데, 아마 물리학계에 남지 않고, SF작가겸 연구자가 된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유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류츠신의 <삼체>를 영어로 번역한 화교출신 SF작가 켄리우의 작품을 중국어로 번역했는데, 켄리우가 그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해준 덕에 해외에도 알려지게 됐고, 영어로 SF단편 <let’s have a talk></let’s have a talk>을 써서 네이쳐지의 칼럼난에 발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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