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김혜정의 마음놓고 마음챙김

2024년 4월 22일

12. AI와 마음

- 연재를 마치며







드디어 마지막 글이다. 작년 8월에 연재를 시작했으니, 벌써 시간이 꽤 흘렀다. 연재를 시작하기에 앞서 관계자분들에게 기획서를 미리 제출해야 했는데, 기획서에서는 각각의 글들이 논리적으로 연계되어 있었다. 그리고 처음 썼던 두 꼭지 정도의 글들은 기획서대로 썼다. 그러나 고민 끝에 엎어버리고 다시 써서 제출했다. 일단 글을 쓰는 내가 재미가 없었으니 읽는 사람은 당연히 재미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도 했고, 체계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글은 이제 나보다 챗GPT가 더 잘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연재 제안을 주신 관계자의 눈치를 보면서도 mbti 대문자 P답게 그때그때 떠오르는 대로, 마음가는 대로 기획서를 무시하고 글을 썼다. 연재 도중 영국에 한 달간 다녀왔고, 한국의 절에도 한 달 넘는 기간 동안 머무느라 약속한 시일보다 글을 늦게 보내드린 적이 더러 있었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고 기다려준 출판사 실무자께 감사드린다.

인공지능 기술의 놀라운 발전속도에 많은 이들이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능력을 전방위적으로 뛰어넘는 날이 오게 된다면, 그때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어디서 구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인공지능 시대에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될 것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나름의 답변들이 영상과 활자 매체를 통해 쉴새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아마 내가 처음 써낸 기획서를 무시하고 보다 감성적이고 사적인 내용을 담뿍 담은 글들을 토해낸 이유에도 이런 인간적인 불안이 있었던 것 같다. 이토록 공부가 덜된 내가 사람들에게 명상을 알리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동시에 온갖 종류의 기능장애를 유발해온 ‘자아’라는 환영을 하루라도 빨리 거둬내도록 종용하는 기술의 진보에 새삼 감사함을 느낀다.

인류는 아주 오랫동안 ‘나’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집단적 망상에 사로잡혀 온갖 종류의 기능장애를 일으켜왔다. 말 한마디에 깊게 상처받고선 이 상처를 절대로 잊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며, 두고두고 자신이 상처받은 자리를 손가락으로 후벼 파며 사는 이들이 지구상에 얼마나 많은가? 어떤 이들은 한 달을, 어떤 이들은 1년을, 또 어떤 이들은 평생을, 이미 과거가 된 상대를 원망하며 살기도 한다. 사실 그런 이들은 상대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니다. 자기 자신의 무의식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 번만 받으면 될 고통을 평생 받을 고통으로 연장하고야 마는 이 ‘자아가 있다’라는 인지 오류는 우리 삶에 얼마나 해로운가? 이 병은 너무나도 깊어서 인간과 아주 흡사해 보이는 기계가 등장하자마자 인간들은 엄청난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 자신에게 과잉되게 부여한 의미와 가치들이 나와 너무나 흡사한 기계를 보면서 상처를 입은 것이다.

그러나 상처를 입고 있는 대상이 기실 아무런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상처도 자연스레 사라진다. 실제로 상처받은 것은 ‘나’가 아닌, 고정불변한 실체가 존재한다는 어리석은 견해와 이 ‘나’라는 환영을 특별하게 채색하고자 하는 탐욕일 뿐이다. 탐욕과 어리석음이 깨부수어지는 작업은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기술시대에 압도되어 쫓기듯이 자아를 버리지 말지어다. 내가 대체 불가능한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인 현자를 어느 누가 다치게 할 수 있으랴!

인간이 인공지능 시대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단지 자아라는 환영이 상처받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의 뇌는 인지적 자원을 최소한으로 사용하려는 습성이 있다. 이미 습득한 인지적 자원을 비슷하지만 다른 상황에 그대로 써먹으려는 것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 솥뚜껑 보고도 놀라는 인지 오류가 이 때문에 일어난다. 이러한 습성은 진화의 과정에서 얻게 된 부산물로서 우리의 생존에 필수불가결할 뿐만 아니라, 벗어나기 힘들다. 하지만 적어도 진화과정에서 소실되어 버린 행복을 의도적으로 일깨울 수는 있다. 현존을 훈련하면 된다. 뇌는 인지 자원을 최소한으로 사용하려는 이 습성 때문에 자꾸만 처음 보는 대상을 보고서도 마치 이미 아는 대상을 본 듯이 관성적으로, 자동적으로 보아버린다. 명상은 처음 보는 대상을 처음 보는 대상이라 정확히 알고 보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현존이다. AI 시대의 도래가 두려운 이유는 기존에 습득해 놓은 인지 패턴으로는 너무나도 빠르게 변하는 시대상을 포착하는 게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존을 훈련하면, 기술의 진화가 지금처럼 두렵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사실 변화는 늘 있어 왔다는 사실을 현존을 훈련하며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매 찰나 당신을 처음으로 만나는 중이며, 당신과 영원히 헤어지는 중이다. 이 사실을 늘 기억하며 살아간다면, 지상에 천국이 도래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오랫동안 망각할수록 마음에 지옥 불이 타오를 것이다.

정교한 기술과 인간이 공생하려면 그만큼 우리의 지혜가 성숙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늘 해오던 대로 자기 자신은 보지 않고 외부만을 본다. 두려움의 원인인 마음의 조건들을 보지 않고 기술 자체만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기술의 발전 속도가 아니라 마음이다. 우리보다 나은 존재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기꺼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겸손해져야 AI 시대가 재앙이 아닌 축복이 될 것이다. 다가오는 기술시대에 명상은 모두가 필수적으로 배워야 할 삶의 기술이다.






김혜정차와 명상을 좋아하는 김혜정입니다. 수행자가 되어가는 중입니다. 제가 행복해지고자 걸어온 수행 여정을 여러분과 글로 나누고 싶습니다. 10년차 요가강사이며, 미얀마 쉐우민에서 처음 위빠사나 명상에 입문했습니다. 그 후로는 주로 고엔카의 수행법을 따라 위빠사나 명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