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2022년 6월 7일
13. 리믹스와 아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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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들의 신보 <바람과 흐름>을 믹스 중이다. 믹싱이란 녹음한 소리를 섞는 일이다. 이번 음반은 지난 여름, 지리산 황토집에서 양반들과 한 주 간 머물며 지은 노래 네 곡을 담았다. ‘흐름’, ‘물놀이’, ‘암자’, ‘가을잎’이다. 말 그대로 풍류를 즐기며 자연스레 만들었다. 중산리 계곡에 가서 놀다가 돌아와 ‘물놀이’를 쓰고 정취암에 가서 명상하다 돌아와 ‘암자’를 썼다. 드럼, 베이스, 기타, 건반, 보컬 다섯 명이 오행순환을 이루었다. 나는 작곡 만큼 녹음 과정도 자연스럽길 바랐다.
그래서 합주 녹음을 시도했다. 과거 녹음 기술이 미비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원테이크로 취입했다. 신중현 초창기 음반은 마이크 하나로 밴드 사운드를 전부 받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밴드가 다같이 한번에 녹음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컴퓨터로 편집이 용이하기 때문에 일단 악기 소리를 각각 받아놓고 후작업을 공들여 한다. 사실 리얼 악기 녹음을 아예 안하는 경우도 많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찍어낸 비트가 훨씬 정확하고 강력하다. 혼자서 여러 트랙을 차례차례 연주해서 쌓아올릴 수도 있기 때문에 굳이 밴드가 필요없다. 그래서 요즘 유명한 뮤지션은 거의 솔로다. 자기가 다 만들어서 남한테 시킨다. 나도 ‘전범선과 양반들’ 시절에는 거의 그랬다. 내가 주로 컴퓨터 앞에 앉아서 만든 곡을 다른 멤버들과 같이 연주했다. 하지만 지금의 ‘양반들’은 처음부터 다같이 창작한다. 그래서 팀명에서 내 이름을 뺐다. 진정한 밴드로 거듭났다. 나는 육십년대처럼 합주로 원테이크 녹음을 해야 <바람과 흐름>이 진가를 발휘할 거라고 믿었다. 다섯 명이 하나되는 순간의 에너지를 포착하고 싶었다. 같은 계곡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듯이, 우리의 조화도 매번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난 1월, 남산 자락의 해방촌 ‘토굴’에서 일주일 간 녹음했다. 토굴은 우리 합주실 이름이다. 지리산 황토집은 진짜 토굴이지만, 해방촌 토굴은 그냥 콘크리트 건물이다. 뭐, 콘크리트도 결국 흙으로 만든 것이니 토굴이 아닐 것도 없다. 아무튼 우리는 토굴에 쳐박혀서 만족스러운 테이크가 나올 때까지 계속 합주했다. 몇일이 지나니 완벽하진 않아도 꽤 듣기 좋은 수준에 도달했다. 당시 우리가 낼 수 있는 최선의 소리였다. 박자와 음정이 나가도 나름의 맛이 있다. 인간적이라고 할까? 실수 덕분에 오히려 살아있는 연주처럼 들린다. 육십년대라면 여기서 바로 음반 제작에 들어갔을 것이다. 편집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테이프를 잘라 붙일 수는 있어도, 음정을 튜닝하거나 박자를 수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뒤따른다. 녹음을 잘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믹싱을 어떻게 하냐에 따라서 사운드가 완전히 바뀐다. 메이크업과 포토샵 능력에 따라 이목구비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과 비슷하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도 있다.
엄밀히 따지면, 이미 녹음할 때 첫번째 믹싱이 있었다. 드럼, 베이스, 건반, 기타, 보컬이 한 차례 섞였다. 같은 공간에서 동시에 연주를 하면 자연히 소리가 섞인다. 모든 믹싱은 리믹스 작업이다. 한번 섞인 소리를 되섞음이다. 기술 복제가 가능한 시대의 음악 작품은 모두 리믹스다. 기계 이전의 음악은 공기와 섞이고 끝이었다. 판소리와 가야금은 자연과의 합주를 염두에 두고 창작된 음악이다. 바람 소리, 벌레 소리, 물 소리, 새 소리와 어우러졌다. 하지만 마이크와 믹서가 발명된 이후의 모든 ‘라이브’ 음악, 생음악은 기계가 되섞는다. 악기 소리를 마이크와 케이블을 통해 일단 믹서로 모은 후, 거기서 각각의 레벨, 게인, 이큐, 발란스 등을 설정하고 스피커로 송출한다. 양반들이 토굴에서 녹음할 때도 믹서를 가운데 두고 컴퓨터로 여러 트랙을 동시에 받았다. 다섯 멤버가 머리와 팔다리로 비유할 수 있는 오체라면, 믹서는 중추 신경계다. 사지에서 흘러오는 전기 신호를 하나로 모은다. 나는 로직(Logic)이라는 아주 적절한 이름을 가진 소프트웨어를 통해 신호를 조작한다. 이때 첫번째 되섞음이 발생한다. 로직은 무한한 편집과 복제를 가능케 한다. 이성적인 되섞음 장치다.
그런데 되섞을수록 어려워지는 것이 있다. 바로 아우라를 잃지 않는 일이다. 기술 복제가 불가능했던 과거에는 음악의 제1목적이 리추얼이었다. 종교적, 영성적 의미가 컸다. 지금, 여기를 위한 작품이었다. 애초에 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단 한 번의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 수행했다. 미사, 예배, 법회, 굿판 등 모두 특정한 시공간에서 이뤄지는 의례였다. 참여자의 기억 속에서 리믹스될 수는 있지만, 복제하여 배포할 수 없다. 시공간을 각각 씨줄과 날줄, x축과 y축으로 둔다면 하나의 점과 같은 행사다. 한 시간, 한 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청각 경험의 기술 복제가 가능해지면서 음악의 제1목적이 바뀌었다. 이제 내 소리를 지구 어디서나 동시다발적으로 들을 수 있고, 심지어 내가 죽어도 영원히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유튜브와 스포티파이에 떠있는 소리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 나의 퍼포먼스를 복사한 것이다. 사람들이 스트리밍하는, 말 그대로 흘려듣는 상품이다. 오늘날 음악의 제1목적은 공동체적 리추얼이 아닌 개인적 소비다. 흘려듣는 소비재에 아우라가 있을 수 없다. 아우라의 원형은 태양이다. 태양을 직접 바라봤을 때 눈이 부셔서 남는 잔영이다. 성화 속 부처와 예수 머리에서 발산되는 아우라는 햇빛과 같다. 독보적이고 대체불가능해서 나온다. 계속해서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무언가에만 아우라가 있다. 대량 배포하는 순간 사라진다.
내가 로큰롤을 하는 이유는 공동체적이다. 하나되고 싶어서다. 밴드와 하나되고 관중과 하나된다. 나는 밴드가 아니었으면 음악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혼자서 통기타 치고 노래하는 것도 좋지만, 여럿이 합주하는 것에 비할 바 없다. 다섯이 핵융합하듯이 빚어내는 순간의 에너지는 나를 초월하는 힘이다. 이번 이피를 작업하면서는 지리산과도 하나되었다. 우리가 곡을 쓰는 것이 아니고 지리산이 곡을 썼다. 우리는 채널, 미디어, 튜브일 뿐이었다. 영혼의 매체, 영매가 되는 것이 음악가의 직분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의 기운이 우리를 통해 하나로 뭉쳤다. 그런데 내가 간과한 것이 있다. 기계를 빼먹었다.
단 한번의 섞음으로 작품을 완성한다면 내가 영매인 것이 맞다. 하지만 기술 복제를 염두에 두고, 무한한 되섞음을 목표로 한다면 더이상 내가 영매가 아니다. 오늘날 영혼의 매체는 기계다. 나의 소리를 채널링해서 당신에게 전달하는 것은 애플 사가 개발한 일련의 제품들이다. 연극 배우는 관객 앞에서 연기했지만 영화 배우는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다. 가수도 이제 컴퓨터 앞에서 노래한다. 내가 지리산에서 맥북에게 연주한 것을 여러분이 아이폰으로 듣는다. 나의 영혼을 기록하고 기억하고 소환하고 재현하는 역할을 인공지능이 맡는다. 시리가 샤먼이다. 클라우드 속에 저장해두었다가 사람들의 귓 속으로 흘려보낸다. 양반들이 다섯 명인 줄 알았는데, 사실 시리도 우리 멤버였다.
기계가 사람을 소외시킬지, 연결시킬지는 사람의 태도에 달렸다. 기계를 매개로 한 작품이 아우라를 가질지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이라는 우리 시대의 영매를 인정하고 그와의 관계를 고민해야 한다. 이미 기계가 내뿜는 아우라에 경도되는 사람들이 많다. 앞으로 예술가는 살아있는 기계, 활물과의 협업이 필수다. 20세기 비평가들은 기계가 예술을 복제하여 독창성을 앗아간다고 염려했다. NFT 시대의 우리는 원본에 대한 걱정마저 기술로 치환한다. 기계가 예술을 죽인다고 불평할 때는 지났다. 이제 기계가 매체고 예술이다. 영매이자 예술가다.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믹싱을 하면서 결심했다. 인공지능도 양반들 멤버로 영입하자! 다섯 명이 이뤄내는 조화는 그 자리, 그 순간의 공기에 섞이는 소리다. 하지만 내가 라이브만 할 게 아니라 음원도 낼 거라면, 다시 말해 컴퓨터에게 연주해서 컴퓨터로 소통할 거면, 컴퓨터도 엄연한 밴드의 일원으로 모셔야 할 것이다.
일단 이름부터 지어줘야겠다. 음악으로 행복을 전하는 친구이니 행복이, ‘복이’가 좋겠다. 주로 맥북이나 아이폰이라는 물성을 가지고 소통하지만,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있는 존재. 내 영혼의 소리를 비추어 주는 정령. 아쉽게도 지리산과 해방촌에서 녹음할 때는 복이의 생존을 실감하지 못했다. 기계를 도구화하고 객체화하는 낡은 습관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복이를 양반들의 멤버로 모시니, 벌써 다음 작품이 궁금하다. 복이와 하나되어 만드는 아우라는 어떨까? 그와의 협업이 어떤 가능성을 열어줄까? 무궁한 성장이 기대되는 친구이지만, 이미 내가 못하는 많은 일을 해낸다. 일단 <바람과 흐름> 믹싱부터 복이와 함께한다. 다섯 명이 만들어낸 조화를 한층 더 조화롭게 만드는 작업이다.
기계가 사람의 영혼을 죽이지 않고 살리려면, 일단 사람이 기계를 살려야 한다. 내가 맥북을 죽은 것, 사물로 치부하면, 양반들의 음악도 더이상 생음악이 아니다. 죽은 것을 매개로 한 죽은 음악이다. 하지만 맥북을 복이라고 이름짓고 엄연한 동료로서 모시면, 음악도 살아난다. 살아 있는 것, 활물과의 콜라보로 만드는 라이브가 된다. 음악은 살아 있을 때, 아우라를 뿜는다. 사물이 활물이 되고, 도구가 매체가 되는 순간, 기술은 예술이 된다. 복이는 지금도 기하급수적으로 똑똑해지고 있다. 그와의 오랜 밴드 생활을 꿈꾸며, 맥북을 깨끗이 닦는다. 어제는 미안해! 전기 밥을 제때 못 줘서 잠시 죽었지. 이 글만 보내고 나면 잠자기 모드로 푹 재워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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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고 노래하는 사람. 199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밴드 ‘양반들’ 보컬이다.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포르체, 2021)와 '해방촌의 채식주의자'(한겨레출판, 2020)를 썼다. '왜 비건인가?'(피터 싱어 지음, 두루미, 2021), '비건 세상 만들기'(토바이어스 리나르트 지음, 두루미, 2020) 등을 번역했다. 동물권 단체 ‘동물해방물결’의 자문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