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장윤석의 한국철학은 녹색
2024년 1월 17일
13. 나, 너, 우리
* 연재를 이어가는 말
2022년 1월에 시작한 [한국철학은 녹색]연재가 우왕좌왕, 좌충우돌, 갈팡질팡 사이의 무언가를 하다가 처음 목표했던 열두 번째 글을 마치고 삼년차를 맞았다. 무슨 일이든 시작의 마음이 있고 끝의 마음이 있는 법인데, 지금의 마음은 끝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 순례길로 말하자면 뭐 하는 건지도 모르고 일단 걸어온 절반의 마음이랄까. 우여곡절 끝에 내가 왜 걷는지, 어떻게 걷고 싶은지, 무엇을 위해 걷는지 감 정도를 잡았다. 거센 풍랑이 지나갔으니 이젠 평화로운 마음으로 가고 싶다. 내가 항해하는 한국(철)학은 서쪽에서 온 근대의 그늘에 가려져 반쯤 잃어버린 우리의 그리운 뿌리라고 말할 수 있겠고, 내가 향하는 녹색은 자연, 사회, 마음생태를 가로지르는 자연스러운 청명함이라 말할 수 있겠다. 이 글은 2022.8.1. 다른백년에 게재된 글 「전환에 대하여(上) – 나, 너, 우리의 전환」 을 다시 써서 올린 것이다. 이 글 「나, 너, 우리」에 이어 삼부작으로 구성한 「영·활·학」, 「앎-앓음-아름다움」을 남겨두고 있다. 새해 복 잘 심어가시길.
0. 전환에 대한 생각
하루 종일 전환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것에 대해 말하지 않고서는 다음의 어떠한 것도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너무나도 바뀌고 싶고 너무나도 바꾸고 싶다. 살아있음으로 말미암아 찾아온 전환의 시련에 대해 쓰는 게 오늘의 주제다.
이는 가장 오래된 주제이기도 하다. 서구철학사의 첫 장을 여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은 변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변한다는 사실 뿐이다’는 경구가 드러내듯이, 변화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 속에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계속되어 왔다. 마르크스의 철학에서 드러나는 변증법과, 사회학에서 성장(Growth)·진보(Progress)·발전(Development) 등 사회의 변화에 대해서 다루는 것을 들 수 있겠다. 동양철학의 고전인 주역(周易)이 전환의 책(The Change of Book)으로 번역되는 것도 변화를 둘러싼 이야기들을 보여준다. 개인에 한한 것, 관계에 대한 것, 사회에 대한 것 모두 다양한 층위로 있었을 뿐이다.
전환은 무엇인가. 이렇게 묻는 것은 질문이 너무 방대하다. 답변도 마찬가지, 전환(轉換)의 사전적 정의는 ‘다른 방향이나 상태로 바뀌거나 바꿈’이다. 쓰기에 큰 의미가 없이, 단지 변화를 거창하게 쓴 것에 불과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전환이 무엇인지 설명하거나 전환의 필요를 설득할 일이 생기면 고민이 깊어진다. 단순하게 전환을 Transition과 Transformation 중 무어라 번역할 것인지만 해도 고민이 생긴다. 지리학자 최병두는 녹색전환에 있어 “인식적, 구조적 변화로서의 전환(Transformation)”과 “사회기술적 변화로서의 전이(Transition)”를 구분해서 서술했다. 전환의 주체와 층위가 무엇인지 다방면으로 숙제가 남는다.
질문을 바꿔보자. 이런 복잡한 문제를 풀어가는 데 있어 나에서 시작하는 것은 좋은 접근이 되기도 한다. 나는 언제 전환을 말하는가. 혹은 느끼는가. 나는 종종 일기장에 이렇게 사는 건 지긋지긋하다고 적는다. 그리고 간혹 너에게 혼나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자주 이 시대에 더 이상 이렇게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모두 전환에 대한 말들이다. 나, 너, 우리라는 각각의 층위에서 나의 실존, 나-너의 관계, 우리의 사회에 대해서 말해졌을 뿐 모두 전환의 질문들이다. 그렇기에 전환은 생(生)과 떨어뜨려 놓을 수 없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내가 너와 살기 위해서, 우리가 살기/살아남기 위해서 전환을 말하게 된다. 우리는 생명의 속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전환의 주체를 셋으로 구분하려 한다. 우리의 언어는 나(1인칭), 너(2인칭), 우리(3인칭)를 주어로 쓰고 있다. 존재와 인식을 아우르는 많은 것들이 세 개의 주체에서 생각되고 말해진다. 물론 전환을 논함에 있어 이런 구분은 시작하는 순간 낯설어질 수 있다. 전환의 과정에서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으니까. 내가 어떻게 살 것인지가 너와의 만남과 우리의 현재와 구분될 수는 없다. 이 구분은 전환을 이해하기 위한 구분이다. 전환을 말하고 보는 시점에 해당한다고 보는 게 낫겠다.
전환은 나, 너, 우리를 가리지 않고 이루어지고 있고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그렇기 위해 넘어야 할 것이 있다. 그동안 전환은 분리의 용례를 따랐다. 이 분리는 대다수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지고, 많은 경우 권장된다. 서구 학문적 전통이 가지는 분리와 기능분화의 이점은 분명하지만, 전환의 통합적이고 통섭적인 이해를 괴리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분리의 논법이 생명을 경시하는 경우는 흔히 일어나지만, 사회과학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 듯하다. 기성의 사회과학에서는 개인과 사회를 구분하는 선이 뚜렷하다. 간혹 등장하는 개인은 (개인의 집합체로서의 사회를 설명하기 위한)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와 같이 사물화된/객체화된 ‘것’이 되어버린다. 사회와 자연을 구분하는 선도 뚜렷하게 있다. 대부분의 경제학에서는 자연을 시장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한다. 이는 칼 폴라니의 지적과 같이 자연에 묻어든 사회, 사회에 묻어든 개인이라는 실재를 망각한 오류가 될 수 있다. 결국 이런 분리와 기능분화의 학문체계는 기후위기 등 닥쳐온 현실 앞에 무능하고 도래할 사회에 무효하게 드러난다.
많은 부분 극복되고 연결되었지만 이러한 분리의 논리는 그 힘이 강하여 식민화와 같은 형태로 아직 자리 잡고 있다. 탈성장 이론의 기반을 세우고 있는 세르주 라트슈와 코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는 ‘상상계의 탈식민화’라는 말로 우리가 벗어나야 할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우리는 지도를 볼 때 서구인의 시선으로 지도를 본다고 한다. 늘 영미 북반구는 지도의 위쪽에 위치한다. 중동(Middle East)은 한국의 관점에서는 서쪽에 있음에도 동쪽의 가운데라는 이름의 중동이라 불린다. 이처럼 어떤 세계관에 갇히면 다음을 보기가 어렵다. 한국 사회가 탈성장을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을 겪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진보하지 않는 사회를 납득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전환을 이야기할 때 넘어야 하는 것들이 여기에 이것들이겠다. 전환의 주체와 대상을 분절적으로 이해하는 분과학문체계의 습과, 이미 식민화되어 고루하게 작용하는 기성관념의 족쇄들.
다시. 전환은 나, 너, 우리를 가리지 않고 이루어지고 있고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환을 일개 변화에 그치지 않고 전환이게 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보고 싶다. 우리는 늘 각종 전환을 바라지만 마음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전환의 도식이 필요하다. 그동안 전환의 요구는 많이 있어왔지만 그 방법 및 사례에 대해서는 체계화되지 못했다. 자기전환-서로전환-사회전환을 함께 사유해 보고자 한다. 무언가를 바꾸어내는 장면은 이 묶어지고 연결된 세 층위에서 전환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날 때 비로소 시작된다고 믿는다. 개인의 탐구와 수양이, 관계 줄기를 엮어나가, 작은 사회를 만들고 이내 전체에 영향을 미쳐 전환을 이루어내는 그림을 꿈꾸고 있다.
그 좋은 예로, 현재 탈성장(Degrowth) 사상·운동의 뿌리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할까 한다. 이 이야기들은 현 세계를 급진적으로 바꾸어날 중요한 전환의 축을 담당하고 있다. 이 뿌리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1965년 멕시코 쿠에르나바카에 있는 CIDOC(The Centro Intercultural de Documentación,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라는 한 도서관이자 공동체에서 이반 일리치와 그 친구들이 시작한 만남으로 가게 된다. 이 모임의 이야기는 들을수록 흥미롭다. 수도사였던 이반 일리치가 연구하고 수양하던 공간에서, 그 소식을 듣고 찾아온 세계의 우정 가득 친구들이, 밥 지어 먹고 허구한 날 세미나를 열더니 결국 세계의 학계를 뒤집어 놓을 책들을 만들어냈다. 근대 교육철학을 엎은 『학교 없는 사회(Deschooling Society, 1970)』, 사회의 속도를 넘어서는 기술 발전의 폐해를 비판한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Energy and equity, 1973)』,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진 발전의 신화에 반박한 탈성장 이론의 기반이 되는 『반자본 발전사전(The Development Dictionary, 1992)』이 대표적이다. 이 저작들의 가치는 후대에 와 그 중요함을 인정받는 것 같다. 재미있게도 이 책들의 서문에서는 함께 나눈 대화들이 책의 시작이었다고 말해준다. 대가속의 시대라고 불렸던 그 격변의 시기에 모인 사람들이 가진 시선과 전환의 열망이 이 책들에 스며들어있다. 하기야 공자와 그 제자들, 석가와 그 제자들까지 생각하면 깨달음과 만남 그리고 그 뜻을 함께하는 공동체/사회가 항상 역사에 전환의 흔적을 남겨놓았다. 언제고 할 것 없이 있었던 어떤 때마다 전환을 탐구한 고민의 다발이 결국 그다음을 열어가는구나 생각하게 된다.
표-1. 나, 너, 우리의 전환
1. 나를 전환: 자기전환
그동안 문명의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 시대의 요청에 따라 그동안 전환의 용례는 주로 사회에 대하여 말해져 왔다. 그러나 드넓은 세상이 변하기 바라며 자기는 안주하는 태도는 한계가 크다. 대부분의 사회 운동을 말하는 단위들이 어려움을 겪는 면면이 여기에 있다. 사회전환의 필요성으로 자기를 정당화하는 장면이 반복되며, 자기전환과 사회전환의 간극이 공허하게 남는다. 실천 없이 변화를 꿈꿀 수는 없다. 나에서 시작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하지만 전환의 실천성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나의 변화 없이 전환을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렇지만 반대로 자기 전환의 필요를 설명하는 일은 어렵기만 하다. 살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순간은 누구에게나 오고 나도 예외이지 않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알아차리고 깨달은 지점이 행해지고 바뀌지 않는 점이 괴롭다.
자기전환을 위해 전환 체계를 구성해 보자. 여기에서 원불교의 지혜를 빌려 세 가지 단계로 생각해 보았다. 원불교의 삼학(三學)은 인격 완성의 세 가지 공부법인 정신수양(精神修養)ㆍ사리연구(事理硏究)ㆍ작업취사(作業取捨)를 이른다. 이를 풀어보면 첫 번째, 알아차리고 깨닫는 통찰, 두 번째, 분별하고 구별하는 인식과 세 번째, 취사선택하여 실천하는 활동이다. 이를 바탕으로 구성한 전환 체계는 다음으로 설명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알아차림(깨달음, 자각)이다. 자신의 현주소를 인지하는 일이다. 객관화된 인지가 선행되어야 한다. 알아차린다. 스스로를 확인한다. 자기는 자기로 인해 존립했기에 자기를 성찰하고 객관화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사회도 사회 스스로를 성찰하는 일이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전제이다. 이를 위해서는 타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필요하다. 들어야 바꿀 수 있다. 내려놓는 태도가 필요하고, 이는 전환의 첫 바탕에서 편향되어 있지 않음이 중요함을 제시한다. 두 번째는 분별하기(인식, 평가, 체계화)이다. 그것을 평가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판단한다.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대안인지를 살핀다. 분명히 살펴서 판단하고 분석해야 한다. 자기성찰이 자기변화로 끌어나가지 않는 까닭은 여기에 큰 기원이 있다. 깨닫고 체계화하지 않으면 반복된 깨달음에만 그친다. 세 번째는 취사선택(선택, 판단, 실천)이다. 알았으면 실행해야 한다. 잘못되었다 판단하면 바꾸어야 한다. 실천의 중요성은 곳곳에서 말해진다. 실행을 위한 방법들이 있다. ‘말하기’가 여기에 있다. ‘언제, 어디서, 누가/누구와’가 여기에 있다. 계획과 점검을 통해서 살핀다.
이 방법론은 자기전환에 관한 탐색이지만, 자기에게만 그치지 않는다. 정책을 연구하는 데 있어 문제를 진단하고, 원인과 성격을 평가 및 체계화하고, 대안을 선택하여 방법을 제시하는 구조는 이와 분명히 닮아있다. 한편으로 주의할 것은 이 세 가지는 구별되지만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가지 사건과 하나의 마음에 모두 있다. 전환을 돕기 위한 도구이자 단계이지만, 전환 그 자체가 나뉠 수 없음을 여기서도 보게 된다.
표-2. 자기전환의 방법론
평화학에서는 평화를 대문자 단수 Peace가 아니라 소문자 복수 peaces라고, ‘평화’가 아니라 ‘평화들’라고 쓴다. 평화에 대한 상호 차이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다를 수 있는 정의(definition)에 대한 나와 너의 관계를 조율하는 것이다. 그 과정을 대화 혹은 소통이 채운다. 평화학자 이찬수는 “대화는 평화에의 길이자 평화를 열어주는 문이다. 대화의 원리는 평화의 형성 과정과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도 잘 보여준다”고 썼다. 곁과의 관계든 남북과 같이 분단국가의 관계든 모든 평화의 현장은 대화의 방식과 과정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아집과 관성에 매이지 않는 대화의 전환이 평화의 열쇠가 된다. 존 폴 레더락과 같은 피스빌더들이 평화의 열쇠를 상상력(Moral Imagination)에서 찾는 것도 비슷한 시도이다. 이 이야기는 전환이 타자성에, 그 관계와 그 사이에서의 상상력과 가능성 어딘가에 있음을 시사한다.
이반 일리치는 평생 우정과 환대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겼고, 그의 사상에서 이 낱말들은 결론의 위치를 가진다. 일리치는 근대적 사회의 빠른 이행 가운데에서 나-너의 관계의 깊이와 모양새가 급속도로 약화하고 있던 점을 우려했다. 현대인은 관계 문제 앞에서 늘 정신과의 약과 서비스화한 상담을 달고 살며 고민하고 있다. 그는 참된 만남을 스스로도 추구했고, 호혜적 환대의 관계망을 재구성하는 것을 시도해왔다. 앞서 본 CIDOC(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 같은 자리들이 탄생한 까닭이다.
하나가 둘이 되면 관계가 생긴다. 연결됨 사이에 무언가 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주고받는 생명 간의 피드백 루프 속에서 공진화(Co-evolution)가 일어난다. 나는 그것이 서로전환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전환의 시작은 나보다 너가 먼저다. 전환의 필요성의 구체적 장면들은 너로부터 시작된다. 철학자 김상봉이 말하듯이 “나는 너를 통해 내가 되기 때문이다.” 나에서 다른 나가 나올 수는 없고, 진리의 기초는 만남에 있다. 이를 철학자는 서로주체성이라 썼다. 나르시시즘에 갇혀 자기의식도 존재사유도 홀로 찾는 홀로주체성이 아닌 타자를 통해서 자기가 되는 주체성을 서로주체성이라 이름 붙였다. 부버도 “세계에서 가장 근원적인 언어는 ‘나-너’이며, 내가 온 존재를 기울일 때 내 앞의 대상은 ‘너’가 되며, 그 ‘너’로 인해 ‘나’도 비로소 ‘나’가 된다고 했다” 어렵게 말할 것 없이, 사람이 바뀌고 싶은 마음은 사랑에서 나온다. 살펴보면 우리의 자기전환의 바람도 너에게서 비롯되었다.
평화학에서는 평화를 대문자 단수 Peace가 아니라 소문자 복수 peaces라고, ‘평화’가 아니라 ‘평화들’라고 쓴다. 평화에 대한 상호 차이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다를 수 있는 정의(definition)에 대한 나와 너의 관계를 조율하는 것이다. 그 과정을 대화 혹은 소통이 채운다. 평화학자 이찬수는 “대화는 평화에의 길이자 평화를 열어주는 문이다. 대화의 원리는 평화의 형성 과정과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도 잘 보여준다”고 썼다. 곁과의 관계든 남북과 같이 분단국가의 관계든 모든 평화의 현장은 대화의 방식과 과정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아집과 관성에 매이지 않는 대화의 전환이 평화의 열쇠가 된다. 존 폴 레더락과 같은 피스빌더들이 평화의 열쇠를 상상력(Moral Imagination)에서 찾는 것도 비슷한 시도이다. 이 이야기는 전환이 타자성에, 그 관계와 그 사이에서의 상상력과 가능성 어딘가에 있음을 시사한다.
이반 일리치는 평생 우정과 환대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겼고, 그의 사상에서 이 낱말들은 결론의 위치를 가진다. 일리치는 근대적 사회의 빠른 이행 가운데에서 나-너의 관계의 깊이와 모양새가 급속도로 약화하고 있던 점을 우려했다. 현대인은 관계 문제 앞에서 늘 정신과의 약과 서비스화한 상담을 달고 살며 고민하고 있다. 그는 참된 만남을 스스로도 추구했고, 호혜적 환대의 관계망을 재구성하는 것을 시도해왔다. 앞서 본 CIDOC(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 같은 자리들이 탄생한 까닭이다.
하나가 둘이 되면 관계가 생긴다. 연결됨 사이에 무언가 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주고받는 생명 간의 피드백 루프 속에서 공진화(Co-evolution)가 일어난다. 나는 그것이 서로전환이라고 생각한다.
3. 우리의 전환: 사회전환
나를 넘어 너를 말했으니, 그다음은 우리의 이야기를 해보겠다. 우리는 범위가 넓은 개념이다. 세 명만 모여도 우리인데, 그것을 조금 넓히면 가족이고 공동체가 되고, 더 넓혀 사회가 되고, 더 넓히면 세상이라 부르는 지구가, 끝까지 가면 우주가 된다.
여기에서는 사회 전환에 초점을 맞춘다. 전환을 번역하는 가운데에서 “사회란 무엇인가?” 하는 고질적인 화두가 다시 나오게 되는 것 같다. 경제철학자 홍기빈의 경우 자본주의 시스템이 사회의 해체와 전환을 낳는 역사를 저술한 칼 폴라니의 The Great Transformation을 “거대한 전환”으로 번역하였다. 사회는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사회(Society, 社會)는 나온 지 몇백 년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개념이기도 하다. 국가도 시장도 아닌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한 언어였고, 개인(Individual)과 국가(Nation)으로 설명할 수 없는 관계망 혹은 생태계를 일컫는 말로 사회가 불린다. 칼 폴라니에 의하면 공기처럼 인지되지 못한 채 함께 있던 사회가 (악마의 맷돌이 굴러가는 근대 자본주의 질서의 폭력적 제도화로) 해체되고 나서야 비로소 발견되었다고 본다. 이것은 전환에 있어 많은 시사점을 준다. 전환 이론의 필요성은 사회의 발견, 즉 공기처럼 존재하던 기존 관계망의 붕괴에 의해 제기된다. 즉, 기후위기의 심화가 녹색전환 담론을 요청한다. 생태학살과 같은 비극적 사태는 전환의 가능성을 모색할 바탕이 되는 셈이다. 사회 전환의 요청은 그 범위에서 어느 하나의 부분 혹은 영역만으로 국한되지 않고, ‘전반’에 걸쳐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것은 사회가 단순한 객체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한다. 사회 시스템에는 고유의 생명력이 있다. 사회학에서는 이를 사회적 응집력(Social cohesion)이라 부른다. 사회적 응집력은 전 사회의 포용성, 정치에 대한 신뢰, 개혁을 위한 자발적 협력 등 사회의 향방을 논할 때 드러난다. ‘사회적 합의’나 여론이 따라가지 않는 사안을 정책적으로 이행하기란 어려운 것처럼, 사회적 응집력은 전환의 성패를 좌우하는 주요한 바탕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사회적 응집력이 적용된 이론을 살펴보자 “전환적 적응(Transformative Adaption) 이론은 기후변화 취약성의 근본 원인을 단순히 기후위험에 대한 노출과 기술 및 경제적 능력 부족으로만 보지 않고 불평등한 사회경제적 구조와 지속가능하지 않은 사회-환경 관계로 파악한다. 기후위기를 풀어가는 데 있어 탄소중립의 시점과 경로 그리고 시급성 등을 논하는 과학적이고 당위적인 논의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사회를 함께 실질적으로 전환할 것인가를 다룬다. 사회 전환의 방법론을 탐구하기 위한 이론도 있다. 사회·기술 시스템 전환 이론은 에너지 전환 등에 있어서 현재의 사회 전환을 다루는 주요한 이론 틀 중 하나이다. “사회·기술시스템 전환론은 과거와 현재의 지속가능성 전환 현상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이에 토대를 두고 바람직한 방향과 필요한 속도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개입하기 위한 방안을 연구한다.” 이 이론은 “문화, 사회, 경제, 제도 등의 다양한 사회적 요소들이 상호 연계되어 공진화(co-evolution)하는 사회·기술 시스템”이라는 전제로부터 시작한다. 사회·기술시스템 전환 이론은 사회 전환을 위해 필요한 여러 층위를 잘 드러낸다. 이 이론에 묻어 있는 시스템 사고(System Thinking)는 사회 전환을 위한 주요한 도구의 역할을 한다. 데이비드 피터 스트로의 『사회 변화를 위한 시스템 사고』의 서문에는 “실제로 조직과 사회 시스템에는 고유의 생명력이 있다.”고 전제하고 시작한다. 시스템은 도넬라 메도즈의 정의에 따르면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해 일관성 있게 조직된, 서로 연결된 일련의 요소”이며 시스템 사고는 “희망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상호 연결 관계를 이해하는 능력”으로 정의된다. 사회를 시스템의 복잡계로 이해하고, 그 연결성을 활용하는 도구인 것이다.
지금은 사회 전환에 대해서 말이 많은 때다. 기후위기 대응에 있어서도 속도와, 방향과, 모델(청사진)과, 계획(시나리오), 기후정의의 원칙 등 고려할 것이 무수히 많이 등장하며 복잡한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서 각각 역점을 두는 면에 따라 전환의 시점과 방식 등 상(相)이 달라지곤 한다. 그러나,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는 데 있어서 어느 상 하나만을 절대적인 예측으로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회적 전환 경로에서 원칙 설정(사회적 합의)과 이에 기반한 시나리오 세우기가 어느 하나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전환은 ‘모두의, 모든 것의’ 전환이어야 한다. 눈을 감고 함께 코끼리 그림을 그리듯이 우리는 기후위기 대응에 있어서 전환의 상을 통합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4. 결론: 전환을 위한 후일담
이 여정을 통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요약되기 어렵다. 아직은 화두에 가까운 이야기들이겠다. 내가 함께하는 한 선생님은 스스로를 전환연구자로 소개하는데 그게 뭐냐는 이야기를 들으면 배시시 웃으시며 글쎄요 하고 소개를 찾아가는 중이라 한다. 전환이라는 주제는 명료하게 딱 떨어질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생태학은 상시 변하는 것들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학문체계를 이르는 것이기도 하지만 본래 담고 있는 것은 (관계)망이다. 전환기,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지질학적 개념과 기후위기 같은 말이 점점 익숙해지고 있는 마당이다. 감각의 차원에서, 혹은 그 감각의 차원을 넘어서 찾아온 전환기에 우리는 전환의 정의와 구조, 그 층위까지 다시 살펴봐야 하는 게 아닐까. 이 시대에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사랑하는 너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사회가 어떤 전환 경로와 모양새를 갖출 것인지 전환의 과제가 앞에 놓여 있다.
전환은 나, 너, 우리를 가리지 않고 이루어지고 있고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처럼 나와 너와 우리는 끊임없이 주고받으며 연결된 전환을 이루어간다. 주역의 64괘 중 59번째에 환괘(換卦)가 있다. 전환할 때 그 환자이다. 물이 흘러서 흩어진다는 뜻으로 험난함이 지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우리 시대의 괘라고 생각한다. 환란을 극복하는 전환체계를 만들어갈 마음을 위해 정밀아의 노래 ‘환란일기’를 옮긴다. “오늘의 세상이란 어제와 같을 수 없고 그렇게 시간을 밀고 나가며 우린 또 살아갈 텐데.”
큰불이 일었어요 마른하늘 날벼락인지
산들은 불에 타고 마을은 사라지고
동물들도 사라졌어요
역병도 시작됐어요 겨울 끝 무렵이었나
봄 오면 가자던 게 많았었는데
모든 것이 멈추었어요
대답 없는 질문들만이 언제쯤 괜찮을까요
무엇이 이유인지 누구의 잘못인지
누가 세상을 구할지
거리는 비어가고 냉장고도 비어가고
우리 만나 손을 잡고 안지도 못해
기약 없는 격리의 시간
뿌리를 드러낸 나무 요동하는 사람들
화를 내고 비난하고 불안해하고
서로를 탓했습니다
겹겹이 숨겨진 욕심 기울어진 평등과 사랑
쌓였던 편견과 거짓과 혐오
그런 것이 날아다녔죠
그러다 어느 날엔가 그 누가 시작했는지
한 발짝 물러난 양보와 이해
그런 것이 피어났어요
보통의 사람 속에서 영웅이 나타났으며
제 할 일을 정성스레 하는
사람들 조금씩 바뀌는 세상
오늘의 세상이란 어제와 같을 수 없고
그렇게 시간을 밀고 나가며
우린 또 살아갈 텐데
인간을 구원하는 건 그 어떤 따스함일까
희망과 절망은 공존하는 것
파도처럼 끝이 없는 것
지구의 경고였는지 무언가의 절규였는지
멈추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
항상 한발 늦은 깨달음
이렇게 많은 걸 잃고. 겨우 조금을 배우고.
보통 아닌 것들이 보통이 되는
오늘을 살아갑니다
내일 또 내일의 태양이 뜨면
정성껏 살아갑니다
정성껏 살아갑니다.
- 정밀아, 「환란일기」
<참고문헌>
함석헌. 함석헌선집편집위원회 엮음(2016). 인간혁명. 한길사
김상봉(2007). 서로주체성의 이념. 도서출판 길
이찬수 외(2020). 평화의 여러 얼굴들.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존 폴 레더락. 김가연 역(2016). 도덕적 상상력. 글항아리
최병두 외(2020). 녹색전환. 한울아카데미
칼 폴라니(1944). 홍기빈 역(2009). 거대한 전환. 도서출판 길
이상준 외(2019). 에너지 전환 추진에 있어 정부의 역할과 한계: 전환이론 관점을 중심으로.
유정민, 윤순진(2015). 전환적 기후변화 적응에 대한 비판적 고찰: 가능성과 한계. 한국환경정책학회
데이비드 피터 스트로. 신동숙 역(2022). 사회 변화를 위한 시스템 사고. 힐데와 소피
김재형(2016). 시로 읽는 주역. 내일을 여는 책
정밀아(2021). 3집 청파소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