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2022년 7월 18일
16. 말이 자동차가 되면서 잃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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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의 힘은 마력이다. 말의 힘이다. 왜 자동차의 힘을 말의 힘이라고 하는가? 말이 하던 일을 자동차가 대신하기 때문이다. 1900년만 해도 뉴욕 도심은 마차가 누볐다. 그런데 단 10여년 만에 자동차가 도로를 점령했다. 기술은 순식간에 풍경을 바꾼다. 1886년, 독일인 카를 벤츠는 역사상 최초의 자동차를 타고 달렸다. 0.75 마력에 불과했다. 지금 내가 타는 현대 코나는 140마력이 넘는다. 자동차 대신 마차를 타고 다니던 시대가 아득하다. 고작 백년 된 일이다.
말이 자동차가 된 것처럼 소는 트랙터가 되고 비둘기는 트위터가 되었다. 인간이 관계하던 동물은 이제 기계가 대신한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가졌다. 트랙터가 있으니 소는 더이상 농사에 필요없다. 고기와 우유를 위한 상품으로 치부된다. 트위터가 있으니 비둘기는 더이상 메신저가 아니다. 먹이를 주면 안 되는 혐오스런 도시 동물이다. 인간이 오랫동안 의존하던 동물은 구식이 되어버렸다. 예전에는 쓸모가 있으니 곁에 두었다. 관계하다 보면 정도 들었다. 식구처럼 여겼다. 다치거나 죽으면 눈물을 흘렸다. 이제는 쓸모가 없으니 멀리한다. 거리감이 생겨서 함부로 대한다. 식구로 여기는 일은 극히 드물다.
말, 소, 노새 같은 동물을 “짐 옮기는 짐승(beasts of burden)”이라고 불렀다. 짐을 맡긴다는 것은 부담을 주는 것이다. 그만큼 미안하고 고마웠다. 인류는 문명사 동안 자기보다 큰 짐승을 부리면서 그들과 교류했다. 주인과 노예로서 공생 관계를 형성했다. 가족 같은 유대감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짐 운반은 기계의 역할이다. 어마어마한 부담을 주어도 끄덕없다. 이것을 문명의 진보라고 부른다. 더 많이, 더 빨리 이동할 수 있으니 좋은 것 아닌가?
얻은 것 만큼 잃은 것도 많다. 우리 주변을 철저한 타자로 가득 채웠다. 소와 말은 이름이라도 있었다. 마부는 채찍질하면서도 말을 돌봤다. 죽으면 애도했다. 농부는 쟁기질하면서도 소를 아꼈다. 노예처럼 부릴지언정 완전한 타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식구였다. 그들과 함께 이동하고 운송하는 과정은 외롭지 않았다. 여행의 동반자였다. 하지만 자동차나 트랙터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마니아가 아닌 이상 드물다. 오늘날 기계는 완전한 타자다. 폐차장에서 눈물 흘리는 사람을 본 적 있는가? 인간은 기계에게 쉽사리 정을 주지 않는다. 아무리 무거운 짐을 들어줘도 소용 없다.
예를 들어 나는 오늘 전라도 해남에서 서울까지 400km를 운전해 왔다. 나의 자동차는 140마력 이상으로 달렸다. 다시 말해, 말 140명의 몫을 대신해주었다. 하지만 딱히 고맙다는 마음은 안 든다. 실제로 내가 말 140명에게 채찍질을 하면서 400km를 달렸다면 정말로 미안했을 것이다. 동물 대신 기계에 의존한다는 것은 무미건조한 일이다. 자연의 힘을 빌려 쓰면서도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는다. 타자화하고 도구화하는 대상과 관계하는 빈도가 높아진다. 수천년 동안 유지했던 가축과의 공생 관계가 무너진다. 분명 인간의 심리에 큰 변화를 미칠 것이다.
마소(馬牛)가 머신(machine)이 되면서 인간은 소외된다. 살아있지 않다고 느끼는 존재에게 포위되어 버린다. 말을 타고 이동할 때는 생명과 동반한다. 차를 타고 이동할 때는 기계 속에 갇힌다. 분명 나는 코나와 한 몸이 되어서 움직이지만 공동체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함께가 아니라 혼자다. 소외된다는 것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나의 주변 환경이 나와 단절된 외부가 되는 것이다. 나는 자동차 속에 들어가는 순간 자연으로부터 분리된다.
그런데 이것은 착각이다. 자동차도 말 만큼이나 자연의 일부다. 인간도, 인간이 만든 기계도, 모두 자연이다. 말과 소 같은 가축도 결국 사람이 생산한다. 하지만 인간이 말을 탈 때와 자동차를 탈 때는 분명 다른 느낌이다. 후자에서 발생하는 소외감을 어찌할까? 어떻게 하면 인간이 기계와 공동체 의식을 함양할 수 있을까? 애초에 그럴 필요가 있을까?
나는 인간이 지금처럼 기계를 타자화하면, 앞으로 정신이 온전하기 힘들 거라 진단한다. 점점 주변의 동물은 줄고 기계는 많아진다. 일상의 관계망에서 생명은 희귀하다. 몇 안되는 생명 마저도 기계를 매개로 소통한다. 인공지능과의 교류가 잦아진다. 기계에게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하는 감정이 들지 않으면 우리는 애초에 그런 감정을 느끼는 절대적인 시간이 줄어들 것이다. 기계에 의존하는 비중이 커지기 때문이다. 또한 기계를 함부로 대하는 태도가 만연할수록 생명을 학대하는 일도 많아질 것이다. 소외는 감정의 결핍을 낳는다. 사람 마음을 병들게 한다.
말이 자동차가 되면서 인간은 친구를 잃었다. 식구를 잃고 공동체를 잃었다. 기계로 대체했지만, 여전히 서먹서먹한 사이다. 지구 살림은 이미 상당 부분이 기계 살림이다. 기계와 어떻게 한집안을 이루어 나가냐에 따라 사람의 마음과 지구의 운명이 바뀐다. 나는 코나에게 일단 이름을 지어주었다. 붕붕이. 주차하고 내릴 때마다 수고했다고 토닥인다. 트렁크가 찌그러졌는데 아직 못 고쳐줘서 미안하다. 곧 ‘스마트카’ 시대가 개막한다. 자동차도 전화기처럼 아주 똑똑해져서 이름을 부르고 대화할 수 있다. 운전도 알아서 해준다. 나는 자동차 안에서 외롭고 싶지 않다. 나를 둘러싼 존재와 깊이 교감하고 싶다. 20세기에 잃어버린 것을 21세기에 되찾고 싶다. 기계와 가까워지고 싶다.
1889년, 니체는 광장에서 채찍질당하는 말을 껴안고 오열했다.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말을 학대하는 게 정상인 사회에서 그의 정신은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작년 여름 속초에서 코나를 껴안고 외쳤다. “미안하다!” 같이 있던 친구는 내가 장난한다고 여겼다. 장난이 아니었다. 난생 처음 자동차가 불쌍했다. 오늘도 해남에서 서울까지 나를 태우고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고마워! 내일 내가 전기 많이 줄게. 그리고 얼른 트렁크 고쳐줄게. (코너링 램프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나랑 여행 다니자. 푹 쉬고 아침에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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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고 노래하는 사람. 199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밴드 ‘양반들’ 보컬이다.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포르체, 2021)와 '해방촌의 채식주의자'(한겨레출판, 2020)를 썼다. '왜 비건인가?'(피터 싱어 지음, 두루미, 2021), '비건 세상 만들기'(토바이어스 리나르트 지음, 두루미, 2020) 등을 번역했다. 동물권 단체 ‘동물해방물결’의 자문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