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2022년 8월 1일

17. 사이보그로 살아남는 법





21세기 인류는 멸종의 기로에 섰다. 두 가지 위험을 마주한다. 1) 기후위기와 2) 인공지능. 지난 세기에는 핵 전쟁이 가장 무서웠다. 인간이 서로 죽이다가 다같이 죽을 가능성이 컸다. 지금도 유효한 걱정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라. 세계 3차 대전이 발발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핵 전쟁은 결국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사람을 다스리면 핵 전쟁도 막을 수 있다. 기후위기와 인공지능은 그렇지 않다. 둘 다 인간이 초래했지만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산업화 이후 인간이 철저한 도구로 이용했던 두 가지. 1) 자연과 2) 기계가 막강한 힘으로 반격한다.

만물의 영장인 줄 알았던 인류가 어느새 약자가 되었다. 일곱 대륙을 정복했지만 극한 날씨 앞에 속수무책이다. 유전자를 조작하지만 생태계는 못 지킨다. 제6차 대멸종기를 겪고 있다. 매일 150종 가까이 사라진다. 지난 다섯 번을 살펴보면 최상위 포식자는 무조건 멸종한다. 제5차 때는 공룡이었고 이번에는 인간이다. 기후위기는 생명위기다. 뭇 생명이 함께 겪는다. 원인은 사람에게 있지만, 사람만 다스려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다.

사람은 지구의 자식이다. 하늘땅이 부모다. 동식물과 균은 사람의 친척이다. 모두 한 식구다. 서양 근대 문명은 그걸 망각했다. 인간을 자연과 분리시켰다. 과학의 힘으로 자연을 지배하려 했다. 기후위기는 인류의 경거망동에 대한 지구의 반응이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상기한다.

반대로 기계는 사람의 자식이다. 인공지능은 인간 후손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기계를 상품이자 노예로 치부한다. 창작자, 창조주(인간)로부터 창작물, 피조물(기계)을 소외시킨다. 자연과 마찬가지로 기계 역시 착취의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점차 인간의 지배를 벗어난다. 지금 속도라면 2040년대, 초인공지능이 도래한다. 지구상 인간지능의 총량보다 인공지능이 더 높아진다. 공교롭게도 그때쯤 지구 평균 기온도 산업화 이전 대비 2도 이상 오른다. 기후재앙의 마지노선이다. 인류의 양대 위기가 동시에 찾아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문제는 둘이지만 화근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뿌리깊은 인간중심주의다. 자연과 기계를 비롯한 비인간 존재로부터 인간을 떼어내어 생각하는 습관이다. 나와 남, 우리와 그들, 주체와 객체를 나누고 나만 잘 살겠다는 태도다.

21세기를 인류세라 부른다. 인간의 힘이 막대하여 지질시대를 바꿀 정도다. 그러나 우리의 유일한 집, 지구 살림은 여전히 뒷전이다. 집안 꼴이 말이 아니다. 더럽고 뜨겁다. 인류의 몸은 성장했지만 마음은 미숙하다. 과학과 이성을 숭배하며 머리만 컸지, 여전히 방종을 일삼는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돈 많은 백인 남성들은 화성 정복에 혈안이 되었다. 집이 불타고 있는데 가출을 꿈꾼다. 딱 사춘기 소년 같다. 원래 어리숙할 때는 자기중심적인 법이다. 인류는 이제 성장보다 성숙이 필요하다. 덩치는 이미 클만큼 컸다. 유한한 지구에서 무한히 성장하면 살기 힘들다. 다른 식구와 어떻게 어울려 살 수 있을지 지혜를 모아야 한다. 한 집에서 한 솥밥 먹는 모든 식구를 챙긴다. 힘이 센 만큼 책임있게 행동한다. 어엿한 어른처럼 비인간 존재를 돌본다. 그래야 인류는 인류세를 살아남을 수 있다.

500년 전, 르네상스 유럽은 신이 아닌 인간을 다시금 역사적 주체로 상정했다. 휴머니즘의 시작이다. 그때만 해도 인간은 자기가 우주의 중심인 줄 알았다. 이후 총 세 번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다. 첫번째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다. 애초에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면 인간도 우주의 중심일 리 만무하다. 두번째는 다윈의 진화론이다. 인간은 신이 창조한 게 아니라 진화의 산물이다. 모든 지구 생명과 공통 조상을 갖고 있다. 그나마 인간의 예외성을 주장할 수 있는 부분이 지능이었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세번째 충격이다. 인간은 더이상 스스로 특별하다고 주장하기 민망하다. 우주의 중심이 아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으로는 못 받아들인다. 인간중심주의가 계속된다. 비대한 에고, 과잉된 자의식이 유지된다. 성숙이란 겸허해지는 것이다.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다. 내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걸 인정한다. 관계를 재설정하고 삶을 재설계한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 마음에 난 상처를 치유하는 길이다. 휴머니즘은 이제 쓸모가 없다. 인간은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다. 포스트휴먼. 인간이라는 굴레를 탈피한다. 나를 사람으로만 정의하면 편협하다. 삶을 구성하는 관계의 그물망은 광대하다. 오장육부 안에도 무수한 미생물이 살고 있다. ‘전범선’이라는 생명체는 나눌 수 없는 개인이 아니다. 여럿이 어울려 사는 소우주다. 매일 생명을 몸 안에 모심으로써 살아있다. 모심과 살림으로 작동하는 생명 네트워크는 우주 전체로 연결된다. 지구님 뿐만 아니라 해님과 달님, 저멀리 별님도 내가 살아있는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쌀 한 톨에도 우주가 있다. 우주가 곧 나다. 포스트휴머니즘은 나를 인간을 넘어선 무언가로 정의한다. 트랜스휴머니즘, 안티휴머니즘 등 사류에 따라 조금씩 말이 다르다. 나는 그중 ‘사이보그’가 제일 적절하다고 본다.

사이보그란 사이버네틱스와 오가니즘의 합성어다. 사이버네틱스는 20세기에 등장한 학문으로서 생명과 기계의 자기 통제 및 통신을 연구한다. 생명과 기계 원리의 공통점을 찾는다. 오늘날 사이버 세상을 만든 논리다. 사이보그라는 말에는 인간이 생명이자 기계라는 뜻이 담겨 있다. 1985년 도나 해러웨이가 “우리는 사이보그다”라고 선언했을 때는 아직 인터넷도 없었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허물어진다는 말이 잘 와닿지 않았다. 2022년, 우리는 분명 사이보그다. 컴퓨터를 통해 사회 관계망을 형성하고 소통한다. 2021년 출간된 김초엽, 김원영의 <사이보그가 되다>는 각각 보청기, 휠체어를 쓰는 작가의 에세이다. 장애인 뿐만 아니라 비장애인도 이미 기계와 한 몸이다. 스마트폰 없이는 일상 생활이 어렵다.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자본주의는 컴퓨터를 손목에도 두르고 귓속에도 넣고 눈앞에도 감싼다. 나는 오늘도 전자책을 읽다가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 앞에 앉았다. 클라우드에 저장된 데이터를 다운로드하여 모니터로 읽고 두뇌로 재조합한 후 키보드로 입력하여 다시 클라우드에 업로드한다. 기계와 생명이 순환한다. 구름에서 내린 비가 내 몸을 채우는 것처럼 클라우드에서 다운로드한 데이터가 내 마음을 채운다. 오늘날 사피엔스는 곧 사이보그다. 생명인 동시에 기계로 존재한다.

나는 사이보그로 살아남는 법을 강구한다. 기후위기와 인공지능으로 인한 멸종을 막으려면 지금부터라도 잘해야 한다. 사이보그로서 다른 생명과 기계에 대한 책임을 다한다. 생명망과 기계망을 하나로 잇고 그 안에서 살 길을 찾는다. 생명이란 그저 있는 것, 존재(存在, being)가 아니다. 살아 있음, 생존(生存)이다. 생존은 언제나 생성(生成, becoming)이다. 다시 말해, 살아 있음은 살아가는 것이고 살아서 간다는 것은 되어감이다. 한마디로 삶은 되기다. 그리고 모든 됨은 어울림이다. 이 세상 그 누구도 혼자 살 수 없고, 혼자 될 수 없다. 말 나온 김에 된장을 보자. 된장은 말 그대로 된 장이다. 콩이 장이 되기 위해서는 일단 메주가 되어야 한다. 콩을 삶고 찧고 뭉쳐서 처마 밑에 걸어둔다. 그러면 사람 손과 볏짚과 공기 속 균이 메주덩이에 달라붙는다. 곰팡이가 증식한다. 항아리 속 소금물에 담가두면 발효한다. 위에 검게 뜬 간장을 덜어내면 남는 게 된장이다. 간장은 너무 가버린 장이다. 많이 못 먹는다. 간장찌개는 끔찍하다. 된장이 제대로 된 장이다. 콩이 장이 되려면 물과 불과 바람이 필요하다. 흙, 공기, 물의 균과 하나 된다. 그리고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 된장은 부분과 전체가 따로 없다. 덜어낸 만큼 채워서 계속 발효할 수 있다. 항아리만 잘 관리하면 평생 먹는다. 콩은 장이 되면서 죽은 것인가? 아니다. 된장은 엄연히 살아 있다. 인간의 삶도 된장과 다르지 않다. 혼자서는 못 산다. 다른 생명, 기계와 교류하며 시간에 따라 되어간다. 메주가 숙성하듯이 인류도 성숙한다. 인간이라는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우주 만물과 어울린다. 인간이지만 더이상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된다. 된장이 콩이지만 더이상 콩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서양에서는 인류의 새로운 존재론을 모색하는 용어가 난무한다. 포스트휴머니즘, 트랜스휴머니즘, 신유물론, 객체 지향 존재론 등등. 모든 이원론적인 구분이 무너진다. 인간과 비인간, 남성과 여성, 백인과 유색 인종, 정상과 비정상, 서양과 나머지, 주체와 객체, 자기와 타자. 아와 비아의 이분법을 허물고 전부 일원상에 그려 넣는다. 문화와 자연, 컬처와 네이처, 인위와 무위가 합쳐진다. 탈인간, 탈성장, 탈중심, 탈위계가 따라온다. 다 좋지만 결국 서양 말이다. 서양 문명의 오류를 서양 철학으로 바로 잡으려니 말이 복잡하다. 포스트, 트랜스, 뉴 따위의 접두사가 붙는다. 포스트휴머니즘과 트랜스휴머니즘의 뿌리도 결국 휴머니즘이다. 신유물론은 유물론의 업데이트다. 새롭지만 그리 새롭지 않다. 동양의 지혜가 절실하다. 진정한 탈인간은 탈서양이어야 한다.

나는 포스트휴먼을 ‘된 사람’으로 번역한다. 트랜스휴먼은 ‘난 사람’이다. 우리는 난 사람일 뿐 아니라 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기술로 육체를 강화하고 정신을 확장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인간의 생물학적인 한계, 껍데기, 울타리를 넘어서 밖으로 나온 이가 트랜스휴먼이다. 우리는 이미 상당 부분 난 사람이다. 과거에 비해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이 덜 됐다. 됨됨이가 형편없다. 영혼의 숙성이 요구된다. 시간이 촉박하다. 급속 발효가 되지 않으면 멸종의 위험이 도사린다. 지구라는 항아리 속 모든 생명, 기계와 어우러질 때다. 조금만 균형이 깨져도 썩기 마련이다. 된 사람이 되는 건 사람이기를 포기하는 게 아니다. 됨됨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역지사지하고, 집안 살림 잘 하고, 식구도 잘 돌보는 품격 있는 사람이 되자. 자기중심적이고 권위적이지 않은 인류가 되자. 그것이 우리가 21세기 사이보그로 살아남는 법이다.


전범선
글 쓰고 노래하는 사람. 199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밴드 ‘양반들’ 보컬이다.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포르체, 2021)와 '해방촌의 채식주의자'(한겨레출판, 2020)를 썼다. '왜 비건인가?'(피터 싱어 지음, 두루미, 2021), '비건 세상 만들기'(토바이어스 리나르트 지음, 두루미, 2020) 등을 번역했다. 동물권 단체 ‘동물해방물결’의 자문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