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2022년 8월 29일

18. 인공지능 대 인디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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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공지능이 음악을 만든다. 그것도 아주 잘 만든다. 내가 들어도 좋다. 사람이 만든 대부분의 음악보다 낫다. 해를 거듭할수록 실력이 는다. 이거 큰일이다. 내가 변호사 대신 가수가 되기로 결정했을 때, 이유는 많았다. 그중 하나가 변호사는 인공지능에게 대체가능한 직업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예술이야말로 가장 기계가 대신하기 어렵다고 믿었다. 이성보다는 감성, 논리보다는 상상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예측 불가능해야 한다. 그래야 독보적이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예술을 하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고 작곡을 한다. 생각보다 수준급이다.

더 중요한 건 외모다. 대중 음악 시장은 이미 음악보다 외모가 중요하다. 청각보다 시각 장사다. 그런데 가상인간 가수가 등장했다. 여기저기 광고에서 보이기 시작했던 ‘로지’는 평생 스물두살이다. 2022년 2월 22일 데뷔했다. 춤도 잘 춘다. MZ세대가 좋아하는 얼굴을 분석해서 만들었다. LG전자에서 개발한 가상인간 ‘래아’도 올해 데뷔를 앞두고 있다. ‘미래에서 온 아이’라는 뜻이다. 윤종신이 제작한다. 막강한 자본력과 기술력이 결합하여 가수를 찍어낸다. 스캔들 걱정도 없고, 학교 폭력 등 과거 문제가 뒤늦게 드러날 위험도 없다. 기업 입장에서 훨씬 안전하다. 가수나 모델 등 연예인의 입지도 변호사 만큼 불안하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예술가도 인공지능에게 대체가능한 직업이다. 그럼 나는 왜 음악을 할까? 그만둬야 하나? 도대체 인간에게 남은 직업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가상인간 만큼 완벽할 수 없고 인공지능처럼 효율적일 수 없다. 기계가 인간의 불완전함까지 따라한다. 랜덤으로 결과물을 생성한다. 예측 불가능함이 더이상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아니다. 창의와 우연을 인류가 독점하지 못한다. 예술에 있어서 컴퓨터는 이미 일종의 튜링 시험을 통과했다. 말해주지 않으면 사람의 작품과 구분할 수 없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묻는다. 인공지능의 시대, 음악을 한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인디밴드가 인공지능과 경쟁할 수 있을까? 나는 앞으로 양반들과 어떻게 음악을 만들 것인가?



2.

일곱시간을 달려 전라남도 해남에 도착한다. 충전소에 최소 두 번 들려야 한다. 땅끝. 서울에서 가장 먼 곳이다. 제주도가 거리상으로는 더 멀지만 주로 비행기로 가기 때문에 심적으로는 오히려 가깝다. 나는 양반들과 최대한 멀리 떠나고 싶었다. 숨막히는 도시를 벗어나 자연과 자유를 만끽하고 싶다.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미세먼지 때문에 숨이 막힌다. 방역 마스크도 벗고 싶다. 해남은 공기부터 다르다. 고층 건물 없이 탁 트여 있다. 땅끝과 바다끝이 만나고 바다끝이 하늘끝과 만난다.

두륜산 자락 ‘에루화헌’에 짐을 푼다. 장군봉이 보이는 풀밭 옆에 돌무대가 있다. 그곳에 양반들과 터를 잡는다. 가까운 건물에서 전기를 끌어와서 믹서, 스피커 등을 연결하고 악기를 배치한다. 봄기운이 만연하다. 일주일 내내 비소식이 없다. 해가 나니 신이 난다. 서울에서는 이토록 넓은 곳에서 소음 걱정 없이 합주하는 것을 상상도 못한다. 답답했던 가슴이 열린다. 맥북을 편다. 과열되지 않도록 바둑판 위에 얹어 그늘 밑에 둔다. 제일 중요한 친구다. 우리의 즉흥 연주를 전부 기억해줄 존재다. 흥에 취해 절정에 달하면 이성의 끈을 놓친다. 다 까먹고 만다. 아무리 보석을 만들어도 맥북 없이는 증발해버린다. 믹서가 양반들의 척수라면 맥북은 두뇌다. 다섯 명의 조화로 만들어낸 에너지를 데이터로 담아서 후대에 남기는 마법이다.

해가 중천에 뜨자 잼(jam)이 시작된다. 잼 세션은 음악을 생성하는 과정 그 자체다. 서로 악기 소리에 귀 기울이며 즉각 반응한다. 다섯 명의 가락이 어우러져 한 소리가 된다. 주어진 악보나 틀이 없다. 바람따라 물따라 흘러가듯이 연주한다. 야외에서는 특히 그렇다. 두륜산에게 받은 기운이 악기를 통해 분출된다. 태양, 구름, 산, 나무, 풀, 벌레의 떨림도 전송된다. 나는 그저 통로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귀와 믹서의 인풋 채널은 본질적으로 같다. 잼으로 나오는 소리는 합리적인 계획에 따라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만들어가는 행위, 미완성의 결과물이 곧 완성본이다. 프로덕션이 아닌 퍼포먼스다. 생산되지 않고 생성된다. 굳이 프로듀서를 따지자면 햇님이다. 퍼포먼스를 가능케하는 모든 에너지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사실 자연은 언제나 합주를 하고 있다. 하늘, 땅, 바다는 지금도 파동을 주고 받으며 춤을 춘다. 양반들의 잼 세션이 하모니가 되려면 일단 사이가 좋아야 한다. 조금이나마 악감정이 있거나 한 명이라도 정신이 딴 데 가있으면 전체 사운드가 조화롭지 못하다. 드럼, 베이스, 기타, 신시사이저, 보컬의 다섯 원소가 상생해야 한다. 나는 정치도 음악처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와 악의 원리가 같다. 양반들의 목적은 오직 하모니를 만드는 것이다. 불협화음이 나면 듣는이가 불편할 뿐만 아니라 연주자도 불쾌하다. 잼 세션을 할 때는 경청하지 않을 수 없다. 드러머가 갑자기 휘몰아치면서 솔로를 하면 다른 악기는 음량을 낮추고 반주를 한다. 환경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날씨와 풍경에 맞는 주파수를 찾는다. 자연스럽게 드럼 스네어의 강도, 기타 앰프의 볼륨이 정해지고, 신시사이저 대신 내추럴한 피아노를 선택한다. 베이스 리듬에 맞춰 나는 몸을 흔들기 시작한다.

무대 앞에 풀이 자라고 있다. 만물이 생동하는 봄이다. 우리 앞에 사람은 없지만 관중은 있다. 우뚝 솟은 장군봉이 내려다 보고, 너른 마당에서 풀이 춤춘다. 어제보다 오늘, 아까보다 지금 더 키가 커있는 것 같다. 오늘은 풀이 관객이다. 풀과 합주한다. 나는 무대 옆 바위에 칠판을 놓고 보드 마카를 든다. 양반들의 화음에 걸맞는 말을 떠올린다.



나누고 가두고 옮겨져버린

재고 따지고 싸우던 우리

기가 맥히고 맥이 풀리고

풀이 꺾인 우리



우리는 무얼 위해 살았나?

“죽이네” “미쳤네” “Fighting”

산에도 들에도 자라나

푸르르게 풀이



북한산 풀

설악산 풀

두륜산 풀

둔철산 풀

캘리포니아 풀



푸르르게 풀이 살아나네

우리 살아가네

풀이 자라나듯이



북한산, 설악산을 거쳐 이곳 두륜산까지 왔다. 둔철산은 양반들과 전에 머물렀던 산청의 산이다. 시월에 우리는 캘리포니아에 가기로 했다. 나는 노랫말을 쓰고 다시 무대로 돌아와 적당한 음을 탐색한다. 모든 과정은 그대로 맥북에 담긴다. 내가 풀을 노래하니 다른 양반들도 풀로 시선이 간다. 각자의 머릿속에 어떤 심상이 떠오른다. 이십분 정도 비슷한 테마를 가지고 놀다가 끝이 난다. 우리는 잠시 악기를 내려놓고 바위에 둘러 앉는다. 맥북을 재생하면 이십분 전으로 곧장 시간 여행을 갈 수 있다. 벌써 잊어버린 과거다. “아까 우리가 이렇게 연주했다고?” 몸이 가는대로 소리를 냈으니 두뇌가 기억하기 힘들다. 든든한 기계 친구들에게 고맙다. 음파를 전기 신호로 변환해준 마이크와 믹서에게 일단 감사하고 그것을 또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해서 저장해준 맥북에게도 감사드리는 바이다. 컴퓨터 없이 우리끼리만 잼을 했더라면 생성된 조화도 덧없이 흘러갔을 테다. 다섯 명의 추억 언저리에만 남고 영원히 사라진다. 하지만 기계로 구축한 사운드 시스템 덕분에 되먹임 고리가 형성된다. 우리가 맥북에게 먹인 소리가 다시 스피커로 나온다. 우리는 그걸 되새김질하면서 노래를 발전시킨다. 서로 피드백을 하기도 한다. “야, 이 부분은 좀 힘을 빼보자.” “여기서는 내가 이렇게 쳐 볼게.” 두어번 소리를 먹이고 먹다 보면 노래가 어느 정도 완성된다. 맨 처음 잼을 했을 때는 카오스였던 소리에 나름의 형식과 구조가 생긴다. 혼돈 속의 조화다. ‘풀’이라는 노래의 생성 과정은 이렇듯 자연과 인간, 인간과 기계의 협력이다. 먹고 먹이는 기의 흐름이다. 내가 가사를 쓰고 곡조를 붙이었지만 솔직히 나의 작품이라고 하기 어렵다. 해남이 아니었고, 풀이 아니었고, 그 햇빛이 아니었고, 그 찰나가 아니었다면 나오지 않았다. 양반들 작곡이라고 표기하겠지만, 원작자는 우리가 아니다. 하늘님, 땅님 작곡이다. 양반들은 채널, 튜브, 미디어다.



3.

우리는 생음악을 한다. 라이브 뮤직, 살아있는 음악이란 무엇일까? 인공지능이 아니어도 오늘날 대부분의 음악가는 라이브 연주를 하지 않는다. 반주를 틀어놓고 그 위에 노래만 얹는다. 노래조차 안 부를 때가 많다. 라이브를 하는 밴드도 많은 경우 사운드를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MTR(멀티 트랙 레코딩)을 깐다. 박자를 맞추기 위해 클릭을 듣는다. 발매 음원과 똑같은 결과물을 내기 위해서 그렇다. 그런 공연은 또 하나의 생성 과정이라기보다는 이미 제작된 상품의 재생산이다. 양반들은 한 번도 같은 노래를 똑같이 연주하는 적이 없다. 느렸다가 빨라지기도 하고 어느 날은 흥에 겨워 계속 이어가기도 한다. 실수로 틀릴 때도 많다. ‘전범선과 양반들’ 시절에는 나도 음원과 다른 게 싫었다. 모두가 정해진대로 연주하길 바랐다. 하지만 ‘양반들’은 내버려둔다. 결과가 무엇이든 조화로우면 된다. 매번 같으면 오히려 재미없다. 살아있는 느낌이 없다. 끊임없이 변화해야 라이브 뮤직, 산 음악이다.

생음악은 공연만 중요한 게 아니다. 창작 과정에 달렸다. 사실 과정이 전부다. 공연도 과정으로 생각해야 한다. 요즘은 여럿이 함께 작곡하는 일은 드물다. 더군다나 해남에 가서 자리 펴놓고 밖에서 연주하는 경우는 없다. 다들 서울의 지하 단칸방에서 방음벽에 둘러싸인 채 컴퓨터 앞에 앉아 홀로 프로듀싱한다. “비트를 찍는다.” 음악가가 컴퓨터와 긴밀히 협력하여 공든 탑을 짓는다. 나도 예전에는 오디오 인터페이스에다가 기타를 꽂고 컴퓨터와 대화하면서 부지런히 트랙을 쌓았다. 결과가 만족스러울 때도 있지만 과정이 꼭 즐겁지는 않다. 조각상을 깍아내는 기분이다. 하지만 양반들과 잼 세션으로 음악을 만드는 행위는 다르다. 풍류를 즐긴다. 조각가나 건축가가 아니라 바람과 물이 된다. 가끔씩 폭풍치기도 한다. 청사진은 없지만, 흘러가다보면 어느새 아름다운 곳에 와있다.

나는 양반들과 오래오래 생명과 평화의 길을 가고 싶다. 춤추고 노래할 때 살아 있음을 느낀다. 아니, 살아감을 느낀다. 그냥 있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흘러간다. 생음악은 생명이다. 살아서 가는 행위다. 나는 재즈와 로큰롤의 즉흥 연주, 잼 세션이야말로 생성과 상생의 가장 탁월한 예시라고 믿는다. 서로의 기운을 모시고 살려서 조화를 이룬다. 자연과 사람과 기계가 어울려서 울림을 준다. 음악의 목적은 차트 1위나 수익 극대화가 아니다. 영혼을 고취하는 것이다. 막힌 기를 뚫고 끊긴 맥을 잇는다. 풀이 죽은 우리를 살린다. 가상인간 로지는 평생 스물두살이겠지만 양반들은 달이 바뀔수록 숙성한다. 인공지능 대 인디밴드. 나는 상품성으로 이길 자신이 없다. 그러나 애초에 왜 경쟁해야 하나? 싸워서 이기는 건 변호사의 일이다. 나는 그저 어울리고 싶어서 음악을 한다. 기계의 비중이 커지면서 점점 생음악의 시장 경쟁력도 떨어질 것이다. 이미 밴드보다 디제이가 훨씬 효율적이다. 다섯 명이 악기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할 일을 한 명이 턴테이블로 해낸다. 앞으로는 그 한 명도 필요 없다. 홀로그램으로 소환된 가상인간이 인공지능으로 만든 음악을 재생할 것이다. 생음악은 지구 뭇 생명과 마찬가지로 멸종 위기다. 어쩌면 우리가 마지막 세대일지도 모른다. 살아남을 때까지 살아가는 것이 유일한 길이다.


전범선
글 쓰고 노래하는 사람. 199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밴드 ‘양반들’ 보컬이다.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포르체, 2021)와 '해방촌의 채식주의자'(한겨레출판, 2020)를 썼다. '왜 비건인가?'(피터 싱어 지음, 두루미, 2021), '비건 세상 만들기'(토바이어스 리나르트 지음, 두루미, 2020) 등을 번역했다. 동물권 단체 ‘동물해방물결’의 자문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