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2022년 9월 6일

19. 누리집을 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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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죽이는 문명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근대 문명, 산업 문명, 지구화, 인류세 등. 오늘날 인류 사회를 정의하는 말은 많다. 다들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는 하지만 정확히 무엇이 문제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나는 죽임이 제일 문제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문제가 아니다. 어떤 죽음은 좋은 죽음이다. 웰빙, 잘 있음의 완성은 웰다잉, 잘 죽음이다. 하지만 죽임은 언제나 나쁘다. 삶을 없애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에게 삶이란 전부다. 선과 악, 고통과 행복이 모두 삶을 전제한다. 따라서 좋은 죽임이란 있을 수 없다. “인도적 살처분”과 “동물복지 축산”은 철저한 모순이다. 죽이는 이가 기분 좋게 죽이려고 지어낸 말이다. 죽임을 당하는 이에게는 어떤 인도주의나 복지도 의미 없다. 안락사는 다르다. 본인의 의지에 따라 의사의 도움을 받는 자살이라면 죽임이 아니다. 임신중절은 어디서부터 생명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나는 ‘죽임’이야말로 현대 사회의 정치적 쟁점을 가로지르는 열쇳말이라고 단언한다. 홉스봄의 말처럼 19세기는 자본의 시대, 20세기는 제국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죽임의 시대다. 나는 자본이나 제국이 반드시 나쁘지는 않다고 본다. 그것들이 나쁘다면, 생명을 죽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역사는 대량학살의 역사다. 지난 이백여 년 간의 근대 산업 문명은 인류의 죽임 연습이었다. 잦은 전쟁을 통해 최첨단 살상 기술을 개발했다. 이제 인류는 지구를 죽인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인간은 절대 지구라는 제1생명을 죽일 수 없다. 까불면 지구가 인류를 덜어낼 것이다. 인류는 대신 지구에 사는 뭇 생명을 말살하고 있다. 인류세와 기후생태위기는 곧 죽임의 시대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만 죽이고 살 수 있을까? 죽이는 문명에서 살리는 문명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우리가 얼마나 죽임을 숭배하는지는 말에 담겨있다. 오늘날 최고의 감탄사가 무엇인가? “죽인다!” “쥑이네!” 영어로도 마찬가지다. “킬링 잇!(Killing it!)” 도대체 왜 기분 좋을 때 죽인다고 할까? “살린다!” 혹은 “살리네!”는 좀 어색하더라도 “살아 있네!” 정도의 대안이 있다. 생명에게 살아 있음보다 좋은 게 있나? “죽이네!” 다음으로 많이 쓰는 감탄사는 “미쳤네!”다. “크레이지(Crazy)!” “매드(Mad)!” 언젠가부터 미친 게 좋은 게 됐다. 대단한 것을 보면 미쳤다고 칭찬한다. 사실 죽임의 메커니즘은 도살과 학살이 다가 아니다. 나눔과 가둠과 옮김이 선행된다. 공장식 축산의 작동방식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자본은 효과적으로 죽이기 위해 일단 나눈다. 인간과 비인간 동물을 나눈다. 그래야 죄책감이 안 든다. 어미와 새끼를 나눈다. 그래야 비용이 절감된다. 그리고 가둔다. 철창과 우리에 가둔다. 그래야 관리가 용이하다. 그리고 옮긴다. 어미로부터 새끼를 떼어낸다. 농장에서 도살장으로 옮긴다. 나누고 옮기고 가두고 나서야 비로소 죽인다. 그래야 죽이기 쉽다. 안 그러면 차마 죽이기 힘들다. 함께 어울려 사는 존재를 그 자리에서 죽이는 일은 매우 고통스럽다. 죽는 이 뿐만 아니라 죽이는 이에게도 못할 짓이다. 우리는 이러한 아픔을 감추기 위해 죽임을 외주 준다. 죽임이란 결과가 아닌 과정이다. 나눔과 가둠과 옮김 모두 죽임의 일부다. 유대인으로 분류되고 압송되어 아우슈비츠에 수감된 이는 이미 죽임을 당한 것이다.

죽이는 문명은 비인간 존재 뿐만 아니라 인간도 죽인다. 숨을 끊는 것만 죽임이 아니다. 인간 중심 사회는 인간의 목숨을 곧잘 유지한다. 생명권을 인권으로 보장한다. 지난 세기 인간의 평균 수명은 두 배가 늘었다. 하지만 참살이를 보장하진 않는다.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 몸은 살아도 마음이 죽겠다. 전쟁이 거의 사라진 인류는 이제 타살보다 자살이 많다. 매년 80만 명의 인간이 극단적 선택을 한다. 타살은 40만 명 정도다. OECD 국가 중 대한민국이 자살률 1위다. 매년 1만 3천 명 이상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 스스로 죽임은 사회가 죽임이다. 대한민국은 참 죽이는 나라다. 매년 12억 명 이상의 비인간 동물을 식용으로 도살하기도 한다. 80억 인구가 한국인처럼 고기를 먹으려면 지구가 세 개는 필요하다. 대한민국은 죽임의 최첨단을 달리고 있다. 자본이 사람을 죽이는 방식은 동물을 죽이는 방식과 같다. 나누고 옮기고 가둔다. 닭장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지옥철을 타고 사무실 파티션 속으로 출근하게 한다. 가족을 해체하여 서로 떨어져 살게 한다. 정신이 병든다. 기가 막히고 맥이 끊기고 풀이 꺾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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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이후 정신 분석은 문명이 어떻게 인간을 죽이는지 연구했다. 나눔은 말 그대로 정신 분열을 일으킨다. 원래 하나인 것을 여럿으로 나누면 헷갈린다. 무엇이 진짜인지 혼란스럽다. 정신 분열증, 요즘 말로 조현병 환자는 흔히 환각과 망상에 시달린다. 도시에서 자랄수록 발병률이 높다. 선진국보다 개발도상국에서 더 자주 발생한다.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이 가장 높고, 호주, 아이슬란드, 모나코가 제일 낮다. 산업화 과정에서 자본주의는 인간과 자연을 나누고 주체와 타자를 나눈다. 연결된 사회를 당구공 같은 개인으로 쪼갠다. 모든 것이 파편화된 상태에서 나의 정신을 온전히 붙잡고 있기란 쉽지 않다. 정신 분열은 정신병, 정신 이상의 대명사다. “미쳤다”는 말은 정신 분열을 뜻한다. 다시 말해 미친 상태는 나눠진 상태다. 다른 증상과 마찬가지로 정신 분열 역시 스펙트럼이다. 문명화된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 나눠져 있다. 각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주와 나, 지구와 나, 자연과 나, 사회와 나, 가족과 나, 너와 나가 나눠져 있다고 느낀다. 경계를 긋는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환각이요 망상이다. 개인으로서, 에고로서 존재하는 방식은 반드시 나눔을 전제로 한다. 하나인 우주와 연결된 뭇 생명을 여럿으로 분류한다. 에고는 스스로 만족스러운 내러티브를 구성하기 위해 결국 자신마저 나눈다. 나다운 것과 나답지 않은 것을 구분한다. 진단을 받지 않은 사람도 조금씩 영혼의 균열을 갖고 있다. 미치지 않고는 이 죽이는 문명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나눔이 분열이라면 옮김은 소외를 뜻한다. 가장 극단적인 것은 난민 문제다. 의지와 상관 없이 타국에서 타자로 살게 된다. 이주 노동자나 결혼 이민자도 마찬가지다. 경제적 이유로 인한 이동이 얼마나 자유로운지 의문이다. 스스로 옮김이지만 결국 사회적 옮김이다. 춘천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살고 있는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 모두 디아스포라다. 오천만 인구 중 절반이 수도권에 집중된 것은 대한민국의 병폐다. 산업 문명의 증상이다. 내가 원해서 서울에 산다지만 만약 이백년 전에 태어났다면 십중팔구 고향에 머물렀을 테다. 옮김은 사람을 멜랑콜리하게 만든다. 강원도에서 이십년 살다가 처음 미국으로 유학갔을 때 느꼈다. 사랑하는 존재, 가깝고 익숙한 존재, 나와 하나라고 느끼는 존재로부터 멀어졌을 때 인간은 우울하다. 연인과 이별하거나 가족과 사별할 때 극심하다. 내가 옮겨졌을 때 뿐만 아니라 내가 애착하는 것, 예를 들어 나의 창작물 또는 집 앞의 나무 한 그루가 옮겨져도 마찬가지다. 옮김은 상실과 우울을 낳는다. 우울증은 정신분열증보다 더 흔하다. 인류의 4% 정도가 겪고 있다.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1위다. 무려 10명 중 4명이 우울하다. 세계 평균의 10배인 것이다. 나눔보다 옮김이 심각한 나라다. 민족주의를 비롯한 집단주의가 강력하기 때문에 개인의 정신 분열은 상대적으로 덜하다. 물론 남북한의 분단 자체가 민족 정신의 분열이라고 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가둠은 곧 억압이다.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다. 동물원에 갇힌 코끼리 중 40%는 정형행동을 보인다. 같은 행동을 의미 없이 반복한다. 좁은 곳에 갇혀서 욕망을 해소할 수 없을 때 동물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나는 군대에 있을 때 가장 크게 느꼈다. 어릴 때 학교에서도 경험했다. 듣기 싫은 수업을 들으며 앉아있어야 할 때 나는 다리를 떨거나 연필을 돌렸다. 가둠은 정형행동 뿐만 아니라 틱, 공황, 불안, 강박 등을 낳는다. 현대 문명에서 억압하는 주체는 주로 가부장적인 권력이다. 아버지, 학교, 군대, 기업, 국가 등이다. 가면 안 되는 곳과 하면 안 되는 것을 정의한다. 감시하고 처벌한다. 육체적으로 가둘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가두려 한다. 오늘날 우울 다음으로 흔한 정신 장애가 불안이다. 코로나19로 둘 다 급증했다. 분열과 우울과 불안은 모두 연결된 증세다. 유전적 요인도 분명 있지만 환경적 요인이 그 발현을 결정한다. 나눔과 옮김과 가둠은 동시에 작동한다. 죽임의 3대 메커니즘이다.

마르크스는 소외, 프로이트는 억압에 천착했다. 둘을 통합하여 계승한 20세기 서양의 비판 이론은 옮김과 가둠이야말로 문명의 근본적인 병폐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애초에 나눔이 없으면 옮김도 가둠도 있을 수 없다. 주체와 타자, 나와 너를 나누지 않고는 소외도 억압도 성립하지 않는다. 68혁명 이후 페미니즘과 에콜로지를 필두로 한 서양 철학의 과제는 바로 나눔의 극복이었다. 특히 서구 문명의 뿌리 깊은 심신이원론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몸과 마음, 육체와 정신의 분열을 막을 수 있을까? 죽이는 문명에서 함께 살아남고 모두를 살리려면 일단 몸과 마음을 온전히 지켜야 한다. 오늘날 포스트휴머니즘은 그래서 일원론을 전제로 영혼의 육체화를 강조한다. 물질 없이는 정신도 의식도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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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 세계도 결국 물성을 전제로 한다. 나는 주말 동안 누리집을 지었다. 전범선닷컴 도메인을 구입하고 페이지를 작성했다. 네이버와 유튜브,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산재된 나의 창작물을 수집하고 일정한 서사를 부여했다. 음악과 영상, 칼럼과 책 등. 월드 와이드 웹, 온 누리 망에 퍼진 내 영혼의 조각을 하나하나 모았다. 한참을 들여다보니 거울 같았다. 스마트폰이라는 검은 거울 속에 구체화된 또다른 나의 형상. junbumsun.com은 나를 온전히 반영하는가? @junbumsun은? 웹 3.0 시대로 접어들면서 누리집은 현실 세계의 집과 중첩될 것이다. 증강 현실과 가상 현실 기술이 거울 세계를 구현한다. 지금은 고작 평면적인 페이지들의 나열이지만 십 년, 늦어도 이십 년 안에는 삼차원, 사차원으로 경험하게 된다.

메타버스는 우리에게 얼마든지 원하는 모습으로, 원하는 누리집에서 살 수 있다고 약속한다. 육체 세계의 구질구질한 현실을 초월하여 무한한 욕망을 해소하라고 부추긴다.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의 디스토피아를 유토피아인 것처럼 광고한다.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의 괴리는 앞으로 인간 정신을 가장 크게 위협할 것이다. 인스타그램에서는 모두가 행복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것은 새로운 분열이다. 메타버스는 말 그대로 유니버스를 넘어서는 형이상학적인 초월 우주를 뜻한다. 저커버그의 비전에 따르면 인류는 더이상 하나가 아닌 여러 우주, 멀티버스를 살게 된다. 저급한 육체가 단일한 미트스페이스에서 계류하는 동안 고귀한 정신은 무한한 사이버스페이스를 마음껏 떠돈다. 마인드 업로딩으로 영생을 누린다는 트랜스휴머니즘의 약속과 일맥상통한다. 몸과 마음을 완전히 나누고 마음을 기계에 가두어 끝없이 옮기겠다는 것이다. 클라우드 속 천년 지복은 과연 삶인가 죽음인가? 메타버스는 우리를 살리는가 죽이는가?

나는 메타버스가 아닌 마하버스(Mahaverse)를 꿈꾼다. 기계로 구현하는 거울 세계가 별도의 초월 우주를 만들기 보다는 현실 세계와 연결된 하나의 큰 우주를 이루길 바란다. 어차피 현실도 허상이다. 스마트폰과 스마트 글라스에 비친 나의 모습이 화장실 거울 속 나의 모습과 너무 다르지 않았으면 한다. 그래야 정신이 온전할 것 같다. 너무 다른 모습으로 살다 보면 그것이야말로 환각과 망상이다. 인터넷에서 행복한 만큼 현실에서 행복하고 싶다. 누리집을 지으며 나는 우리집을 둘러본다. 나의 몸과 마음이 각각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메타버스의 목적은 천국에 접속하는 것이지만 마하버스의 목적은 깔끔한 로그아웃, 해탈이다. 어느 세계에도 미련이 없고 싶다. 월든 호숫가에 통나무집을 짓던 소로우의 마음으로 월드 와이드 웹에 누리집을 짓는다.


전범선
글 쓰고 노래하는 사람. 199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밴드 ‘양반들’ 보컬이다.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포르체, 2021)와 '해방촌의 채식주의자'(한겨레출판, 2020)를 썼다. '왜 비건인가?'(피터 싱어 지음, 두루미, 2021), '비건 세상 만들기'(토바이어스 리나르트 지음, 두루미, 2020) 등을 번역했다. 동물권 단체 ‘동물해방물결’의 자문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