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양애진의 넥스트 샤머니즘

2024년 7월 3일

2. 사라진 조상들의 귀환

- 뉴질랜드 마오리 답사기




ⓒ양애진: 몸에 새겨진 계보, 뿌리의 흔적




새만금 도요새가 마오리족 조상이라고?

뉴질랜드 마오리족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시점은 작년 8월이었다. 뜨거운 여름날 찾은 해창갯벌에는 유독 눈에 띄는 장승이 있었다. 여느 반듯한 장승들과 달리 활개 친 자태가 거친 풍랑을 떠올리게 했다. 20년 전 마오리족이 찾아와 세운 장승이라고 했다. 의아했다. ‘머나먼 곳에서 무슨 연유로 여기까지 온 거지?’ 그 대답은 어느 인터뷰 글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도요새는 마오리족의 조상새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자연생명체가 마오리와 ‘유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고로 새들이 이동하는 길은 곧 선조들이 이동하는 길이다. 도요새는 봄에 뉴질랜드를 떠나 대한민국 새만금을 거쳐 시베리아로 날아간다. 1만 2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장거리 여행을 무사히 치르기 위한 중간기착지가 바로 새만금이다. 한반도 갯벌의 상실은 곧 마오리 조상의 상실이다. 태평양 너머의 갯벌도 보호하는 이유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뉴질랜드가 일찍이 나무와 강에도 인격을 부여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제는 마오리의 생명관이 궁금해졌다. 그들의 시선을 엿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비행기에 올랐다.


ⓒ양애진: 해창갯벌의 장승들(맨 오른쪽이 20년 전 마오리족이 세운 장승)

사라진 조상들: 처절한 철저한 입국심사

자연권을 인정한 국가답게 관광비자 발급부터 남달랐다. 모든 외국인 방문자들은 비자 수수료 외에도 환경보존및관광세(IVL)로 $35불을 추가로 내야 했다. 입국심사도 까다로웠다. 심지어 ‘흙’도 반입금지 품목이었다. 등산화, 텐트, 스포츠 장비 등 외부 흙이 묻어있을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신고해야 했다. 텐트를 가져갔던 나는 따로 불려 갔다. 텐트를 샅샅이 뒤지는 입국 심사관에게 이토록 철저함의 이유를 물었다. 2000년을 산 나무가 방문객으로부터 온 박테리아로 인해 한순간에 죽어버렸다고 했다. 대응할 틈도 없었다. 처절한 현실이 낳은 철저한 예방이었다. 지구상에서 인류가 가장 늦게 도착한 대륙은 독특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었다. 포유류가 거의 없는 환경은 이상하고 아름다운 비인간 생명들의 낙원이었다. 날지 않는 새, 공룡에 가까운 파충류, 거대한 고사리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인간이 도래한 이후, 50종 이상의 동식물이 자취를 감췄다. 원시림도 75%가 사라졌다. 오랜 고립이 만든 아름다움은 외부 노출에 속수무책이었다. 보유는 유보하게 했다. 나는 한참을 검사받은 후에야 비로소 입국 승인을 받았다.

조상으로서의 자연: 테파파 박물관 자연관

마오리를 알기 위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테 파파 통가레와 박물관이었다. 마오리족 역사가 궁금해서 온 것인데 예상외로 오래 머무른 곳은 자연관이었다. 생태환경과 생활문화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지질활동이 활발한 지형에서 산다는 것은 항시적인 일상 위기를 의미했다. 지진, 화산, 쓰나미가 끊이질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위기 안에는 위험과 기회가 공존했다. 들끓는 지열 에너지는 훌륭한 생활 수단이 됐다. 살아있는 땅과 상호작용 해온 역사였다.


ⓒ양애진: 멸종된 이들을 위한 추모의 공간

멸종된 비인간 동물들을 기리는 추모의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벽면에는 굿판의 열명(列名)마냥 동식물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스피커에서는 새 후이아(huia)의 상실을 한탄하는 곡소리 같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죽은 이를 잊지 않고 그리워하는 마음은 조상을 향한 마음과 다를 바 없었다. 자연관 곳곳마다 인간은 자연의 중심이 아닌 일부이며, 자연은 인류의 조상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마오리 역사는 인류사에 포함된 자연사, 아니 인류사를 넘어선 자연사였다. 계보의 확장이다.  

ⓒ양애진: 왼쪽: 생명 없는 바다, 가운데: 마우리 스톤, 오른쪽: 생명 가득한 바다

이런 문화의 핵심에는 마우리(mauri)가 있다. 마우리는 모든 존재에 내재된 본질적 에너지이자 영혼을 뜻한다. 마오리는 마우리를 통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활력을 얻고 연결된다고 믿는다. 자연관 초입에 놓인 마우리 스톤 위에 손을 올리자, 나선형의 무늬가 빛을 발했다. 얼마지 않아 스크린 속 비어있는 바다가 다종다양한 생명들로 가득 찼다. 인간 때문에 사라지는 생명에만 익숙한 터라 인간 덕분에 살아나는 생명이 낯설었다. 묘한 감동과 환희가 일었다. 옆의 기둥에는 “마우리는 만물의 생명력이다.(Mauri is the life force of all things)”라고 적혀있었다. 박물관에서 돌아온 뒤, 본격적으로 마오리 관련 책을 찾기 시작했다. 웰링턴 중심에 위치한 오래된 중고 서점의 마오리 코너는 몇 주간의 방앗간이 됐다.

마오리의 생명관: In-dependent 아닌 Inter-dependent

❶ 생명의 끈: 파카파파(Whakapapa) 
파카파파는 조상들의 이야기와 계보를 담은 구전 전승된 계보를 말한다. 그 기원은 마오리 창조신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태초에 하늘 아버지 랑기(Rangi)와 대지 어머니 파파(Papa)가 있었다. 랑기와 파파는 너무 사랑한 나머지 서로 꽉 밀착되어 있었다. 그탓에 그들의 자녀들은 어둡고 좁은 곳에 갇혀 답답하게 살았다. 참다못한 막내아들 타네(Tane)는 두 다리로 밀어 올려 부모 사이를 갈랐다. 하늘과 대지가 분리되자 세상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후 타네는 만물을 창조하고 인간의 직접적인 조상이 됐다. 이처럼 신화적 내러티브는 마오리의 우주적 계보를 드러낸다. 랑기와 파파를 공동의 조상으로 둔 우주 만물은 한 가족이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마오리는 추상적인 힘(마우리)과 구체적인 이야기(파카파파)로 만들어진 영원한 생명의 그물망 안에서 산다.  

❷ 생명의 언어: 중첩된 나선형 시공간
마오리 언어에는 시간과 공간 개념이 없다. 생명의 끈 안에서 시간은 중첩된다. 과거, 현재, 미래는 한데 얽혀 있는 하나의 흐름이다. 조상과 후손은 언제나 공존한다. 과거의 경험은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미래의 가능성은 현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미래는 과거로부터 배운다. 이를 두고 “우리는 미래로 거꾸로 걸어간다(We walk backward into the future)”고 말한다. 과거의 사건은 시간이 흘러도 의미를 잃기는커녕 살아 움직인다. 마오리 단어 역시 고정되지 않고 유동적이다. 하나의 뜻으로 번역되지 않는다. 단어 하나는 다중 레이어들의 집합이다. 예를 들어 ‘사랑’으로 번역되는 아로하(Aroha)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는 생각(Aro), 내면과 성찰(Ro), 숨과 생명력(Ha), 관대함과 풍요(Oha)의 단어들이 들어있다. 각 단어는 전체에서 떼어낼 수는 없다. 캡슐화된 개념은 명확한 설명보다 모호한 비유로 표현된다. 부정확함이 가진 풍부함은 역설적으로 최선의 정확함이다. 지식의 영역에는 육체적 감각뿐만 아니라 직관과 꿈을 통해 얻은 것들도 포함된다. 서양과 달리 지식을 뇌가 아닌 몸-마음(body-mind)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는 탓이다. 표정, 속도, 강도, 반복, 몸짓에도 중요한 의미가 담긴다. 문자기록은 제한적이다. 구전이야말로 진의를 제대로 전달하는 제일의 수단이다. 역동성이 살아 숨 쉬는 마오리 언어는 생명력 그 자체다.

❸ 생명의 춤: 하카(Haka)
마오리 전통 춤 하카는 전투 직전 적을 위협하기 위한 춤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부족 간의 갈등은 실제 전투 대신 하카 대결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심리적 군무(軍舞), 소위 말해 기싸움이다. 죽임도 죽음도 없다. 하카를 처음 본 것은 와이탕이에서였다. 온몸을 때리며 구호를 고함치듯 외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사용하는 춤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다름 아닌 손이었다. 끊임없이 흐름을 만들어내는 손길은 물결 같기도 바람결 같기도 했다. 한없이 부드럽게 살랑거리다가도 분노가 더해지면 금세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의 거센 풍랑처럼 바들바들 떨렸다. 하카가 끝나자 실제로 큰 전투를 마친 이들처럼 기진맥진한 얼굴이 됐다. 그럼에도 눈빛만큼은 끝까지 상대를 응했다. 그 모습이 기선제압 보다 사력을 다한 대응이자 나아가 존경의 표시로 다가왔다. 문득 궁금해졌다. 왜 저토록 힘을 소진하는 방식의 춤이 됐을까? 태평양이라는 거센 자연을 터로 삼은 자들의 기세인가? 여러 부족들 간에 전쟁이 끊임없던 탓인가? 그러다 깨달았다. 아, 폭력성 과시가 아니라 불필요한 전쟁을 줄이기 위함이구나. 평화와 생명의 춤이구나!

식민화 = 계보의 단절: 혼돈 속 마오리의 혼란

서열과 계급을 나누는 ‘위계 관념’은 존재의 연속성을 끊어버렸다. 식민화는 자연 조상 감각의 단절이다. 마오리들은 다종의 개체 수 보존을 위해 항시 엄밀히 살폈다. 사냥은 엄격한 통제 하에 이뤄졌다. 후이아의 결정적인 멸종 원인은 파케하(유럽계 뉴질랜드인)들의 무절제한 산림벌채였다. 끊어진 조상들은 잊힌다. 오늘날 마오리는 부족, 민족, 시민이라는 세 가지 사회적 정체성이 뒤섞여 있다. 애초에 마오리라는 민족은 없었다. 민족성은 식민화의 부산물이다. 손쉽게 통치하기 위한 강제적 일반화였다. 본디 마오리는 다수의 부족들로 이루어져 있다. 마오리는 마오리’족’이다. 마오리 철학은 마오리 철학’들’이다. 시민성 역시 전쟁이 만든 인위적 공동 의식이다. 제2차 세계 대전에 함께 참전함으로써 마오리와 파케하는 ‘뉴질랜드인’이라는 국가시민성을 갖게 됐다. 그러나 이미 위계화된 사회에서 두 번째 시민이라는 꼬리표를 뗄 수는 없었다. 물리적 상징적 영토를 빼앗긴 시절에 그나마 유일하게 지킬 수 있던 것은 물질 너머의 것, 정신이었다. 이제 그 마오리 정신과 문화마저도 국가 브랜드를 위해 소비되고 있다.

탈식민화 = 계보의 회복: 살아있으면 반드시 변한다

다시 족보를 재확장 해야 한다. 식민화 이후 필요한 것은 탈맥락화(de-contextualize)와 재맥락화(re-contextualize)다. 식민의 역사를 도려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중심에 두고 다시 해석함으로써 진정 자기 역사화하는 일이다. 둘 중 하나(Either-Or)가 아니라 둘 다 모두(Both-And)의 방식이다. 예컨대 뉴질랜드 혹은 아오테아로아가 아니라 ‘아오테아로아 뉴질랜드’로 불려야 마땅하다. 마오리를 정의하는 기준은 이미 유전에서 문화로 옮겨갔다. “나는 1/4 마오리야”식의 혈통적 구분은 구식이다. 대신 언어와 문화를 중심에 둔다. 파케하라 할지라도 동등한 마오리(Equally Māori)가 될 수 있다. 수동적이고 기계적인 비식민화를 넘어선 능동적이고 영성적인 탈식민화다. 그리하여 만들어지는 것은 분리된 개체들의 각자 독립이 아니라, 연결된 주체들의 상호 의존이다. 하나의 맥락 하에 거느리는 통합(統合)이 아니라, 다수의 개인 간에 소통하는 통합(通合)이다. 다행히 생명 가득한 이 땅에는 지금도 인간과 비인간 동물 사이에 연속성이 존재하던 때의 흔적이 남아있다. 과거를 향하며 미래를 밝히고 있는 청사진을 만날 수 있었다.

청사진(1) 카이티아키탕아(kaitiakitanga): 수호자 정신

파카파파는 마오리 세계를 말해주는 동시에 인간 행동 가이드라인이 되어준다. 신화는 인간이 조상신 타네처럼 세상의 창조와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만물을 만든 타네의 희생은 만물을 보호할 인간의 책임으로 이어진다. 여전히 뉴질랜드 정책의 핵심 이념은 카이티아키아다. ‘돌봄, 보살핌, 수호, 책임’이라는 뜻이다. 자의식은 삼라만상으로 확장하고 시간은 다가올 미래까지 포함한다. 이는 마오리의 인사법 홍이(Hongi)에도 드러난다. 서로의 코를 맞대고 숨을 나누는 행위는 “당신과 나는 숨으로 연결되어 있어요”라는 의미다. 숨은 삶의 기운이자 생명이다. 호흡을 나눈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인 동시에 공동의 책임 의식이다. 그 책임의 대상은 호흡을 공유하는 전 생태계로 확장된다. 스스로를 탕가타 페누아(땅의 사람들)라고 부르는 마오리는 인간의 권리 이전에 인간의 의무를 앞세운다.

청사진(2) 엔스파이럴(Enspiral): 조직 대신 유기체

엔스파이럴은 긍정적 사회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의 네트워크다. 엔스파이럴 썸머페스트에 들어섰을 때 사람들은 영어 “웰컴(welcome)” 대신 마오리어 “키오라(kia ora)”로 환영해 주었다. 오픈 세레모니에서는 기존 멤버들이 만든 원에 신규 참가자들이 만든 원이 더해져 나선형을 이루다가 거대한 원으로 통합되었다. 엔스파이럴의 심볼 역시 나선형의 달팽이 껍데기를 닮았다. 내가 갔을 때는 규모가 축소되었을 때였다. 하지만 퇴보 대신 퇴비라고 했다. 비수기 대신 겨울이라는 표현을 썼다. 생태계에 사계절이 있듯이 조직에도 사계절이 있다는 것이다. 고정된 조직(Organization)이 아니라 살아있는 유기체(Organism)다.

청사진(3) 질란디아: 재야생화(Re-wilding)

웰링턴에 있는 질란디아는 세계 최초로 완전히 울타리가 있는 도시 생태 보호 구역이다. 동물원 아닌 생츄어리, 동물의 관람이 아닌 동물의 안녕을 위한 곳이다. 인간이 도착하기 이전의 상태에 가깝게 최대한 복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무려 500년을 내다본 비전이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한 것은 거대한 두 겹의 철문이었다. 포유류의 접근을 막기 위해 2m가 넘는 촘촘한 울타리를 산 전체에 둘렀다. 길이는 총 8.6km. 비인간동물 버전 만리장성인 셈이다. 타종의 집에 디딛는 발걸음은 조심스러워졌다. 기척이 나는 곳을 유심히 살폈다. 무심한 관람 대신 세심한 관찰을 요했다. 반 천년의 세월이 아득하지만 이미 100년이 지났다. 그동안 타카헤이를 비롯해 18종의 동식물들이 돌아왔다. 죽는 순간까지도 진행형일 계획을 세우는 마음의 바탕은 무엇일까? 생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생을 한정 짓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 조상 감각이다.

사라진 조상들의 귀환: TODAY is TO-DAY

뉴질랜드에서 지내는 동안 두 명의 마오리 친구를 사귀었다. 사바나는 마오리 전통을 돕기 위한 펀드레이징을 하고 있었다. 나는 마침 읽고 있던 조지나 스튜어트의 <Maori Philosophy>를 사바나에게 보여주었고, 저자의 이름을 본 그는 벅찬 표정이 되었다. 그가 지원한 프로젝트였다. 마오리 힐러 도나는 잊힌 선조의 치유 지식을 되살리고 있었다. 연구소로 개조한 집은 허브로 가득했다. 캠핑카를 타고서 전국 곳곳에서 지식을 퍼트리고 있었다. 마오리 문화는 아오테아로아 뉴질랜드의 힘의 원천이다. 그 정신을 가진 이들은 모두 이 땅의 씨앗이다.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고 자신의 땅을 잘 지킨 이들만이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다. 이로써 계보는 이어진다.

We are part of the pattern that must never be broken
We must continue the weaving, even the bruised ones
Our work will fashion the nets to catch the stars.

- Trixie Te Arama Menzies in Uenuku -






양애진경계 없는 세계를 꿈꾸는 프리워커. 대도시 중심에서 벗어난 삶의 방식을 찾아 세계 각지의 공동체를 다녔다. 미래형 촌을 꿈꾸며 팜프라를 공동 창업하고 도시 청년들이 촌 라이프를 실험하는 마을을 만들었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판타지 촌 라이프』 를 공저했다. 이후 서울로 돌아와 여러 지역과 느슨하게 연결되어 도시와 촌을 잇는 작업을 하고 있다. 자연과 문명, 로컬과 글로벌, 무브먼트와 비즈니스, 생태와 기술 사이의 경계를 탐색하며 통합된 미래를 모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