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2021년 12월 17일
2. 파상과 태동의 생명운동
바야흐로 생태, 생명의 시대다. 팬데믹과 기후변화의 위기감 속에서 ‘생명’, ‘생태’는 익숙한 레퍼토리가 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부터 여러 차례 남과 북 ‘생명’공동체를 제안한 바 있으며, 지난 7월에는 전라북도 도의회에서 이른바 ‘생태문명 조례’가 통과되었다. 환경단체들뿐이 아니다. ‘생태’와 ‘생명’은 이제 누구나 하는 이야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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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위기와 파국적 전환담론
그러나 묻지 않을 수 없다. 생태문명의 전환, 생명공동체로의 전환은 정말로 가능한 걸까? 생명운동 40년, 후퇴하는 농촌·농업의 현실을 보면서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환경운동 30년, 돌이킬 수 없는 기후재난의 현실을 보며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전환담론(transition discourse)은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지속가능(sustainable) 전환담론, 둘째, 급진적(radical) 전환담론, 그리고 셋째, 파국적(catastrophic) 전환담론이 그것이다. 첫째, 지속가능 전환담론은 사실상 정부와 기업의 새로운 성장전략 및 정책으로 기능한다. 탄소중립 및 그린뉴딜 정책 등이 그것이다. 둘째, 급진적 전환담론은 ’탈-성장‘과 ’정의로운 전환‘ 등 급진적인 시스템 전환을 모색하는 담론들이다. “기후변화가 아닌 시스템의 변화”(System Change, Not Climate Change)를 기대한다.셋째, 파국적 전환담론은 위험사회로 널리 알려진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해방적 파국론(Emancipatory Catastrophism)’’이 적절한 예가 된다. 그리고 조금 결이 다른 김홍중의 ‘파국의 사회이론’이 있다.
그런데, 이런 수많은 전환담론들의 주장처럼 세상을 전환할 수 있는 걸까? 나의 감각으로는 비관적이다. 첫째 지속가능 전환은 경제성장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으로 읽힌다. 의미있는 전환을 기대할 수 없다는 말이다. 둘째 급진적 전환은 ‘어불성설(語不成說)’처럼 느껴진다. 시스템의 ‘자기-개혁’을 통한 자본주의의 ‘자기-부정’적 전환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가능성은 세번 째 ‘파국적 전환’밖에 없는 것일까.
2014년 세월호 사건 직후, 위험사회로 널리 알려진 울리히 벡이 한국에 와서 이른바 ‘해방적 파국을 주제로 하는 논문을 발표해 국내외에 큰 화제가 됐다. 요점은 파국이 역설적으로 성찰을 가능케 하고, 성찰은 탈바꿈(metamorphosis)을 통한 해방적 가능성을 열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사회학자 김홍중은 조금 다른 감각으로 ‘파국의 사회이론’을 제시한다. 키워드는 ‘파상력(破像力)’이다. 파국적 상황은 기존의 상(像)을 산산이 깨뜨려버린다. 물론 그 과정은 매우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파상과 통감(痛感)의 과정에서 새로운 주체성이 형성되고, 이러한 새로운 주체성의 조직화를 통해 전혀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울리히 벡이나 김홍중에게 대전환은 파국을 통과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전환은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다.
생명운동, 전환담론의 또 다른 차원
그런데 생명운동은 또 다른 의미에서 ‘파국적 전환담론’의 감각과 사유를 보여준다. 생명운동이라는 말은 40여년 전 1982년 시인 김지하가 기초하고 장일순을 비롯한 원주캠프가 함께 읽고 수정했던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른바 ‘생명운동에 관한 원주보고서’가 그것이다.
“제3세계 민중자신을 비롯한 전 인류와 전 생명계, 전 우주적인 생명의 부활, 해방, 완성을 향한 세계사적 대전환에 대해 제3세계 민중운동이 짊어진 역사적 책임의 내용이 그 확실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광활한 대륙에서, 수십억 민중의 일상적인 영성과 생존 속에서 생명운동이라는 대전변이 일어나야 하고 또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신념이야말로 죽음에 직면한 전 인류 전 중생의 유일한 희망이다”.(강조는 필자. 생명운동에 관한 원주보고서, 1982)
제3세계 민중들이 질곡과 억압과 고통에서 해방되는 ‘세계사적 대전환’ 속에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동시에 넘어서는 새로운 문명사적 비전을 예감한다. 비장하고, 엄숙하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환경위기와 빈곤 때문이 아니었다. 당시 한국을 비롯한 제3세계 민중의 고통의 무게와 더불어 1980년 광주사태 직후의 슬픔과 긴장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톨릭을 배경으로 하는 섬세한 사회적 영성 덕분이었을 것이다.(후에 생명운동의 ‘가톨릭 영성’은 ‘동학적 영성’으로 바뀐다.)
생명운동은 처음부터 대전환의 사상과 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생명’의 관점에서 기존 사회운동을 전면적으로 ‘대전환’하고자 했다. 노동운동, 농민운동, 민주화운동, 여성운동에 생명운동이 하나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운동 전체, 나아가 제3세계 민중운동 전체의 재구성을 목표로 하는 야심찬 기획이었다. 재-구성(re-construction)의 전제는 ‘세계관 재-설정(re-configuration)’이다. 물론 그 세계관이란 ‘생명의 세계관’을 말한다.
이때 ‘생명’이라는 개념은 이중적이다. 육체적이면서도 동시에 영성적이다. 이를테면 생명은 ‘생/명(生/命)’이다. 가톨릭의 언어를 빌자면, ‘밥’이면서 ‘말씀’이다. 원주보고서의 표현을 빌자면, “생명운동은 사회운동이며 동시에 영성운동”이다. 또한 “생존과 영성의 생명운동”이다. 밥상공동체운동이면서 동시에 영성공동체운동이다. 물론 초점은 ‘영성’에 있다. 1980년대 엄혹한 군사독재정권 시절, 생명운동의 급진성 배후에는 ‘영성’이 있었다.
그런데 이때 영성은 파격과 창조의 영성이다. 강고해 보이는 기존의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질서의 형성을 추동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초월성이라기보다는 잠재성이다. 수운 최제우의 천(天)에 대한 ‘노코멘트’처럼,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힘’이다. 사회주의도 아니고 자본주의도 아닌, 또 다른 사회적 형식을 발견하고 발명하려는 열망이자,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깨를 들썩여지게 하는 생명의 에너지다. ‘신명(神明)’이다. 생명운동가들은 거기에 영성, 하늘, 공허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김지하는 생명은 ‘활동하는 무(無)’라는 정의 아닌 정의를 한다. 요컨대 대전환의 통찰과 에너지는 영성적 생명사상이라는 것이다.
파국적 전환담론과 생명운동은 둘 다 생태적 위기와 파국적 현실을 대전환의 계기가 보았다. 그러나 울리히 벡과 생명운동 사이에 분명하게 갈라지는 지점이 있다. ‘성찰’과 ‘영성’의 차이가 그것이다. 파국적 전환담론에서 대전환의 계기가 성찰에 있다면, 생명운동에서 대전환의 보이지 힘은 영성이라는 말이다.
먼 훗날 시인 김지하는 ‘변혁적 생명학’을 논하며 녹색당과 생태학의 한계를 지적한다. ‘성찰’과 ‘영성’의 차이에 대한 문제의식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김지하는 영성 대신 ‘마음’이라고 말했다. (불교인들을 위한 강연이라는 점이 고려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때 마음은 주관적 의식만이 아니다. 김지하의 표현을 빌자면, 생명과 물질의 깊은 차원으로서 ‘마음’이다. 변혁적 생명학의 근거는 영성적 급진성에 있다는 말이다. 반대로 녹색당과 생태학의 문제점은 이런 깊은 마음의 부재인 셈이다.
“독일과 유럽의 경우, 녹색당과 생태학을 절망에 빠트린 바로 그 물질 속의 ‘마음’이란 이름의 ‘부처님의 자재신력’이 이제 도리어 자연과 생명 스스로를 치유·정화하는 것입니다. 과학도 생명운동도 유기농 운동과 문화예술도 사상도 다 바뀌어야 합니다. ‘환경’, ‘친환경’, ‘녹색성장’ 따위 헛 간판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김지하, 2012. 변혁적 생명학을 위하여, 법보신문.)
다시-생명운동1: 파상(破像)
그렇다면, 대전환의 관점에서, 그리고 영성의 관점에서 오늘의 생명운동은 어떠할까? 국어사전에 나와있는 생명운동에 대한 정의는 그 한계를 보여주는 증거 중 하나이다.
“생명운동 生命運動” (표준국어대사전)
- [명사]생명을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여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사회적 운동.
- [명사]환경을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여 오염된 자연을 깨끗한 상태로 되돌리고자 하는 사회적 운동.
생명운동은 이미 보통명사가 되었다. 대중화되었다. 그러나, 국어사전의 생명운동에 대한 정의가 보여주듯 이때 생명은 개체생명이나 유기체, 혹은 인간의 환경으로 좁혀진다. 특히 더 이상 ‘파격과 창조의 영성’은 없다.
팬데믹-기후재난 시대, 생명담론과 문명전환이 재-소환되고 있다. 그러나 생명운동의 현실은 반대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우리가 알고 있던 생명운동은 실종됐다. 오늘날 구글 검색과 유튜브 검색에서 만날 수 있는 생명운동들은 주로 기독교 생명운동과 가톨릭 생명운동이다. 그리고 가끔 새마을운동중앙회의 생명살림운동이다. 적어도 구글 검색과 유튜브에서는 한살림의 생명운동도 없고, 인드라망생명공동체나 생명평화결사의 생명운동도 보이지 않는다. 2021년의 생명운동은 낙태반대운동, 동성애반대운동 등 이미 보수 기독교운동에 의해 전유되었다.(우리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방법은 ‘생명운동’이라는 말을 포기하는 방법. 또 다른 방법은 ‘낙태와 동성애의 생명운동’, 즉 이른바 pro-life운동과 진짜/가짜 논쟁을 벌이며 싸우는 방법. 그러나 나에겐 둘 다 아니다.)
생명운동은 고착된 기득권적 질서가 되었다. 고정관념과 기존의 질서에 도전하고 투쟁하고 아픔을 통감하는 ‘사회적 영성’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그 사이 생태계와 사회세계는 지속불가능하게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파국적 상황은 저항과 감각과 창조의 영성을 일깨운다. 파국적 상황은 생명운동의 뭄과 마음을 동시에 충격한다. 팬데믹과 기후재난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에 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들뢰즈와 김수영으로부터 배운다. 들뢰즈의 ‘레지스탕스 생명’과 김수영의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이 반갑다.
“권력이 생명을 대상화할 때, 생명은 레지스탕스가 된다.”(들뢰즈)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김수영)
사실 생명운동은 항상 ’생명운동들‘이었다. 식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작지만, 봄이면 산과 들에 밤하늘의 별무리처럼 돋아나는 풀꽃들처럼 ’생명운동들‘은 사라질 수 없다. 또 다른 모습으로 은거 중이다. 나에게는 수많은 ’페미니즘-운동들‘이 새로운 생명운동들이다. 그리고, 2021년엔 2021년의 ’생명운동들‘이 요청된다. ’생명운동‘이란 말을 버려도 좋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은 생명운동을 보통명사로 사용하지 않고, 해체하여 ’생명-운동‘이라고 표현해보자. 이때 ’생명-운동‘은 다양한 생명감각들과 생명사유들을 바탕으로 하는 다양한 사회적 운동들이다. 그러므로 수많은 새로운 ’생명-운동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
저항의 생명운동을 재-발명해야 한다. 그것은 우선 ’파상‘(破像)적 활동으로 드러날 수 있다. 그 힘은 저항의 감각에서 출발하지만, 근본적으로 기존의 질서와 관념을 깨뜨리는 영성적 에너지로부터 나온다. ’되고 있는‘ 대전환의 파도를 타고 또 다른 세계의 지평을 연다.
그렇다. 팬데믹-기후위기 시대, 생명-운동들은 무엇보다 기존의 상(像), 다시 말해 고정관념과 세계-이미지와 인식의 틀이 깨어지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또 적극적으로 깨드려야 한다. 사회적 금기를 자각하고 또 도전해야 한다. 몸-생명의 저항감각과 영성적 생명의 ’활동하는 무‘가 파상(破像)의 에너지가 된다. 예컨대 『21세기 자본론』의 저자 피케티가 말하는 “사유재산의 신성함” 깨기를 시도해볼 수 있다. 공산주의가 몰락하면서, 사유재산은 거론조차 불가능한 불가침의 영역이 되었다. 헌법적 질서를 금과옥조로 제시하며 논의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사유재산도 사회적 구성물이다. 만들어진 것이다. 다르게 만들어질 수도 있다.
이제 탈-성장은 금기어 목록에서 뺄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자본주의라는 자기생산체계를 지탱하는 핵심 장치들인 ’주식회사‘와 ’생명보험‘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감각하다. 그리고, 예컨대 비-수도권에서 인구감소는 금기어다. 예산과 인구와 도로와 아파트는 무조건 늘어나야 한다. 그리고, 현재 가장 첨예하고 정치적인 이슈인 성소수자, 동성애, 트랜스젠더도 여전히 문명사적 쟁투(爭鬪)의 언어들이다.
다시-생명운동2: 태동(胎動)
그런데, 파상은 파상에 머물지 않는다. 파상은 ’태동‘을 동반한다. 전통적인 가부장적 질서를 깬다는 것은 동시에 새로운 가족체계를 발명하는 것이다. 예컨대 영화 <이터널스>의 동성애 다인종 가족과 같은 새로운 친밀성 형식을 만들 수 있다. 새로운 가족형식을 만들 수 있다. 이미 가부장제과 가모장제의 차원을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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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나에게 전환적 실천이란 ’파상과 태동의 이중적 활동‘이다. 파상(破像)과 함께 ‘다시-꿈꾸기’다. 1980년 생명운동의 전략은 피난 속에서 변혁적 씨앗 뿌리기였다. ’수동(passive) 전략‘이었다. (김홍중의 ’파국의 사회이론‘에서 강조되는 페이션시patiency 주체성과 연결된다.) 원주보고서는 ‘수동적 적극성’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살림은 도시의 주택가와 농촌마을이라는 가장자리에서 생명공동체운동으로 표현되는 소극적 적극성을 성공적으로 구현했다. 수많은 ‘비-자본주의’적 경우의 수 중 유력한 하나가 되었다.
우후죽순(雨後竹筍)을 떠올린다. 비 온 뒤 대나무 순이 올라오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사실은 대나무 순만이 아니다. 비 온 뒤 밭이나 마당의 풀밭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것이 대홍수거나, 큰 숲의 산불이라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벌채를 하고 새로운 수종의 나무를 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산불 후라면, 홍수 뒤라면, 사정이 다르다. 씨를 뿌려야 한다. 땅 속에서 뿌리식물들이 뻗어날 수 있도록 예비해야 한다. 그런데, 사실 씨앗은 이미 뿌려져 있다.
“또 다른 세계를 탄생시키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의 출구다.” 유럽 커먼즈 운동가들의 경구 중 하나이다. 그렇다. 다시, 생명운동의 또 하나의 결론은 ‘태동’이다. 새로운 사회적 형식을 발명하는 일이다. 동학의 표현을 빌자면, ’아직 아님‘의 잠재성을 현재화(顯在化)하기, 즉 불연기연(不然其然)의 생명운동이다. 태동(胎動)은 뱃속의 태아의 움직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시작을 뜻한다. 전환운동은 방향 바꾸기이기도 하고 탈바꿈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태동’이다. 한나 아렌트에 의하면, 태어난 것들은 세상을 구할 메시아의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김홍중은 아렌트의 ‘탄생성’을 이렇게 옮긴다.
“예수이기 때문에 메시아가 아니라, 탄생했기 때문에 메시아인 것이다.”(사회학적 파상력)
그런데 거기에는 세계관적 재-설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단일우주론과 구별되는 다중우주론이 그것이다. 최근 개봉예정인 스파이더맨을 포함해 헐리우드의 영화적 세계관의 대세 중 하나이다.
울리히 벡의 세계도 그렇고, 동학의 다시개벽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후천세상은 물론 미-결정의 카오스이지만, 그러나 단일한 세계를 전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또 다른 맥락에서 유토피아적이었다. 이때 유토피아는 이 세상에 없는 곳(No-where)이기도 하지만, 항상 단수의 세계(Uni-topia)였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적으로나 경험적으로 다중우주적 세계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니클라스 루만의 체계이론과 미셀 푸코의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 개념에서 다중 우주적 세계들에 대한 사유를 만날 수 있다.
루만의 체계이론에 의하면, 근대의 기능 분화적 사회세계는 체계들의 복합체이다. 신체가 혈관계, 신경계, 면역계의 복합체이듯이 한 세계는 세계들의 중첩적 복합체이다. 루만의 ‘초복합체계’ 개념을 떠올릴 수도 있고, 체계들 안에서 또 다른 체계의 체계 형성으로서 ‘체계분화’ 개념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한편 푸코는 비-유토피아적이며 중첩 가능한 복수의 시공간을 ’헤테로토피아‘ 개념으로 설명한다. 자기만의 방과 단골 술집과 시골 장터와 매음굴과 묘지 등등이 그것들이다. 새롭게 태동하는 시-공간으로서 헤테로토피아들이 지금 여기 있다. 푸코의 설명을 빌자면, 헤테로토피아들은 “보통 서로 양립 불가능한, 양립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여러 공간을 실제의 한 장소에 겹쳐놓는데 그 원리가 있다”. 또한 헤테로토피아들은 “십중팔구 시간의 독특한 분할과 연결”된다. 모든 사회에는 “무한히 쌓여가는 시간의 헤테로토피아들”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 안에도 이미 다양한 헤테로토피아들 이미 존재할 것이다. 우리나라 고대역사 속 소도(蘇塗)도 그런 관점에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디론가 도망칠 수 있는 곳, 상품이 없는 곳, 자유롭게 고함칠 수 있는 곳, 한없이 침묵할 수 있는 곳 등등. 헤테로토피아는 이미 존재하고 하고 있고, 이제 우리는 자각적으로 우리 시대의 소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또 다른 세계를 염원하고 예감하는 몸이 있다. ’가정법적 활동‘과 ’예감하는 몸‘이 새로운 시공간을 태동시키는 방법이다. 예컨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은 진리투쟁의 인과적 결과가 아니라, 가정법적 활동의 ‘효과였는지도 모른다. 정동적 믿음에 기초한 염원과 예감의 가정법과 가능성의 조건을 따지는 조건법은 다르다. 조건법이 아니라 가정법이 새로운 세계를 태동시킨다. ‘예감’과 ‘서사’의 만나는 가정법적 활동, 혹은 ‘정동적 서사(affective narration)’ 만들기를 실험해보자. 결론은 ‘가정법적 활동’과 ‘예감하는 몸’을 통한 또 다른 삶과 세계의 ‘태동(fetal movement, begining)’이다. (물론 그것은 사회적인 활동이다. 사회적 형식을 발명해야 한다.)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그렇다. 나에게 ‘다시-생명운동’은 ‘파상’과 ‘태동’의 생명-운동이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
다시, 레지스탕스 생명을 떠올린다. “권력이 생명을 대상화할 때, 생명은 레지스탕스가 된다.” 저항과 꿈꾸기의 생명운동을 예감한다. 그리고 또 다른 세계를 태동을 위한 ‘감각실험실’과 ‘사고실험실’, ‘생활실험실’과 ‘사회실험실’을 구상한다. 조안나 메이시가 이야기한 전환기의 이중적 과제 ‘호스피스’와 ‘산파’를 떠올린다. 40년전 생명운동의 ‘피난과 변혁’을 다시 곱씹는다.
2021년 오늘 나에게 생명운동은 ‘파상’과 ‘태동’이다. 우리의 전환담론은 개벽적 전환담론이며, 우리의 전환 담론은 ‘파상과 태동의 전환담론’이다. ‘파상 사건’ 만들기이면서, 동시에 ‘태동 사건’ 만들기이다.
옛 질서와의 부딪침 속에서 파상 사건이 일어난다. 새로운 질서의 태동은 충격과 부딪침과 조우라는 사건을 통해 일어난다. 예컨대 ‘위드 코로나’는 하나의 사건이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사건이기도 했지만, 생명에 대한 고정관념을 ‘파상’했다. 그리고, 바이러스와 인간의 만남으로 만들어진 ‘바이러스-인간’을 ‘태동’시켰다.
이제 사건과 사건을 연결하고 재-연결시킨다. 재-연결하고, 도전하고, 실험하고, 새판을 짠다. 그리고 사건과 사건이 만나서 또 다른 차원의 사건을 일으킨다. (이때 연결자(連結者)는 관찰자(觀察者)가 그렇듯이 주체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다.)
정동 이론가 브라이언 마수미는 묻는다. “어떻게 우리 자신을 사건으로 만들 것인가?” 그것은 정체성과 다르고, 포지션하고도 다르다. 정동적 관점에서 활동이란 정념, 욕구, 수단과 능력들, 그리고 강력한 절차들을 가져와 상황으로 연결하기다. 그리고 사건을 만드는 자신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새로운 사건의 연쇄가 예비된다.
다시 묻는다. “어떻게 ‘나’ 자신을 사건으로 만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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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섭(사발지몽). 생명과 전환을 화두로 오랫동안 정읍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해왔으며, 최근에는 (사)밝은마을_생명사상연구소를 중심으로 감응(感應)과 우형(又形)을 키워드로 하는 ‘또 다른’ 생명사상·생명운동의 태동을 탐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