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2022년 9월 21일

23. 누구를 위하여 대문을 잠그나?

- ‘제로코로나’ 정책을 둘러싼 중국정부의 윤리와 보통사람들의 윤리



 출처 : https://www.buzzfeednews.com/article/gabrielsanchez/thousands-people-crowded-public-spaces-china-coronavirus[/caption]


미국과 중국에서 중국정치를 공부하고 있는 한 페친과 페북상에서 제법 긴 토론을 했다. 그는 중국 정부가 "오피니언 리더 계층”으로부터 여론을 수집하고 반영하는 메커니즘에 대한 자기 생각을 짧게 정리해서 공유했다. 내가 여기에 커멘트를 달면서 긴 댓글 토론이 이어졌다.

이 내용에 대해서 나는 별로 아는 바가 없다. 그러니 내 의견을 밝히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중국에도 KOL(Key Opinon Leader)이라는 유행어가 있다. 주로 비관방매체나 소셜미디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명인사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분명히 사람들의 소비행위나 생각에 영향을 많이 끼친다. 하지만 정부 정책과의 관련성은 여전히 좀 모호하다. 그래서 나는 그런 의미에서 중국에서의 오피니언 리더라는 그룹은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져있는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이를테면 비당원 엘리트들을 오피니언 리더로 볼 수 있을 것인가?) 또, 이들의 오피니언이 정부 정책에 반영되는 메커니즘이 한국 사회와는 좀 다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서 (미디어를 통해서 의견을 표명할 때, 레거시 미디어이든, 소셜 미디어이든 검열이 존재한다.) 이 내용은 중국사회내 여론형성의 특수성과 디테일이 충분히 설명될 수 있을 때만 의미가 있을 거라고 내 생각을 밝혔다. 구체적으로 이 글에서 논하고 싶은 내용인 ‘위드코로나’와 ‘제로코로나’정책의 경우에도, 중국의 기모란정도에 해당하는 KOL이었던 장원홍(張文宏)은 작년 연말부터 현재 중국 정부의 방침인 제로코로나 대신 위드코로나를 주장했다가 모종의 공격과 비판을 받고 입을 다물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물론 정부의 이런 결정 이전에 내부적으로는 공개되지 않은 치열한 논쟁이 있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장원홍은 그 직책상 (국가전염병의학센터 주임, 푸단대학부속 화산병원 감염과 주임)  완전한 비관방인사로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림1 장원홍은 위드코로나 논쟁 당시 심지어 박사학위 표절시비에 휩싸이기도 했다. 1969년생의 국가급 전문가가 뒤늦게 이런 시비에 노출된다는 것은 모종의 의도적 인신공격이나 여론공작의 가능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주제와 관련해서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아래의 세번째 질문이다.  

"중국 당국가는 과연 1. 대도시에 거주하는 엘리트 중산층의 여론과 2. 중소도시에 거주하는 중위집단의 보통 중국인들, 3. 그리고 상대적으로 기층에 해당하는 농민과 농민공, 블루칼라 노동자의 여론중 어느쪽을 가장 중시할까?"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이니 당연히 기층민중을 가장 중시해야 한다라는 이념적 판단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미 도시화율이 60%를 넘은 상황에서, 예전처럼 농민이 다수의 인구라고 이야기하기도 힘들고, 중국의 중산층에 해당하는 “먹고 살만한” 중간소득계급에 속하는 인구가 이미 5억을 넘는다고 판단하는 분석도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소수의 엘리트와 다수의 기층민중이라는 도식적인 프레임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궁금증을 더하게 만드는 것은 팬데믹 시국에서 바깥 세계와 달리 여전히 제로코로나 정책을 유지하는 중국정부의 방침이다. 제로코로나 정책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제로코로나 방침을 철회했을 때, 어떤 일이 생길 것이고, 어떤 집단의 여론이 가장 동요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일까?

공산당 내부에서는 다양한 논의가 펼쳐졌을 것이라고 짐작되지만, 이런 논의들이 대중에게 공개된 적이 없으므로, 자세한 논리를 알 도리는 없다. 하지만, 상하이 록다운이 벌어지기 직전과 그 이후의 보도를 보면, "위드 코로나”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몇달만에 중국의 공중보건의료 시스템이 붕괴하고 수백만명이 사망할 수 있다라는 시뮬레이션 결과가 나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피해가 집중되는 곳은, 의료인프라가 취약하고, 백신접종률이 상대적으로 낮은 고령자들이 많이 사는 농촌지역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다시 거칠게 이분법적으로 판단한다면 (앞서서 이런 관점을 부정적으로 판단했음에도), A 도시 vs B 농촌, A 경제 효율을 중시하고 해외의 변화에 민감한 중산층엘리트 vs B 농촌을 중심으로 좋은 의료인프라의 혜택을 보기 힘든 기층민중이라는 구분과 이해관계의 상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서 A와 B의 중간에 속하는 수많은 ‘보통사람’들도 존재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농민공을 포함한 도시 노동자와 도시의 자영업자들은 제로코로나 정책에 의한 내수 위축때문에 생계에 위협을 받고있다. 편의상 이들을 다시 C그룹이라고 부르자. 이들은 얼핏 생각하면 제로코로나 정책에 반대할 것 같지만 이들의 부모 세대가 여전히 농촌에 남아있는 고령의 농민이라고 한다면, 이들이 선뜻 어느 한쪽편에 서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A그룹을 상징하는 이들이 바로 상하이 시민들이다. 상하이 시민들의 중앙정부와 시진핑을 비롯한 베이징의 공산당 지도층에 대한 반감은 올해 들어 극에 달한 상황이고, 이들 중에는 봉쇄가 해제된 이후 해외로 떠난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런 사회적 유동을 표현하는 룬潤(run)이라는 조어가 크게 유행하고 있다. 최근 시정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상하이 시정부내에 미국의 스파이가 많다는 소문이 유포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상하이 락다운과 상하이 시민들이 받은 고통이 미국의 스파이 활동과 직접 연관이 있지는 않을 터이니, 내부의 적을 만들어 불만을 잠재우려는 마녀사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여론은 A그룹의 확대를 막기 위한 유효한 수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 정부의 제로코로나 정책은 B의 편을 들기 위한 것이었을까? 그리고 중국정부에게 농촌에 거주하는 고령 농민의 생명과 안위는 국가 최우선과제였을까? 그들이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면 그건 윤리적 판단보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나는 아마도 이것이 중국 보통 사람들의 보수적 가치관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여기서 내가 말한 보통사람은 주로 B와 C그룹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중국 정부는 당연히 윤리적인 차원의 생명권을 그 이유로 내세울 수 있다. 수백만명의 목숨이 경제를 비롯한 모든 다른 요소들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중국 정부의 생명권 강조가 일종의 숫자로 표현되는 실적주의와 공리주의의 관점을 벗어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개개인의 생명을 중시하는 근대적인 인권관념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여러가지 지정학적, 역사적 정당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신장, 시장 혹은 홍콩에서 벌어진 인권침해를 정당화한 것은 항상, 경제적 논리이자 상대적 다수의 평화와 행복권에 대한 강조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갑자기 수백만명의 생명이 수억명의 행복보다 중시되는 논리가 등장한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래서 내가 짐작하기로 정작 생명권을 걱정했던 것은 정부가 아니라 중년 이상의 보통사람들일 것이다. 즉, 이들이 가족중에 존재하는 노인들의 안위에 대해서 크게 염려하고 있을 것이다. 평소에 공산당 정부의 권위주의적 정책을 큰 불만없이 수용하는 중국 시민들이라도, 가족중에 실제 사상자가 생겨난다면, 민심이 크게 이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게 특정지역이 아니라 (우한의 경우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상황을 중국 정부는 두려워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중국 정부의 백신접종 정책에서도 드러난다. 농촌 노인들의 백신 접종률이 상대적으로 낮아서 문제라고 하는데, 왜 정부는 여전히 이들에게 백신접종을 강요하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한국같은 나라들과 달리, 왜 중국 정부는 노인들에게 가장 나중에 백신을 접종한 것일까? 그것은 당연히 부작용에 의한 사망 등을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백신 부작용에 의한 사망과, 바이러스 확산에 의한 사망의 장단점을 비교했을 때, 중국 정부는 여타국가들과는 다른 판단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최대한 보수적인 선택이었다. 백신을 강요하는 대신에 아예 바이러스의 전파를 차단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림2 2020년 봄, 우한이 봉쇄된 이후, 전국적인 락다운이 실행됐을 때, 농촌마을에서는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고, 덕분에 의료인프라가 부족한 농촌에서도 팬데믹으로 인한 감염자와 사상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다시 정리하자면 중국인들은 ‘추상적인’ 도덕적 이념 (지금은 PC로 대표되는 경우도 있어서 각 사회에서 쟁점이 된다)이나 경제적 이익보다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사람들의 안위와 생명에 더 신경을 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여전히 혈연, 지연 등의 각종 연고와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중국의 보통사람들이, 미얀마나 우크라이나 사태 등의 국제문제와 관련해서 관심을 덜 갖는 것도, 중국 국가가 취하는 이념적 태도와 함께, 이런 현실적인 관계상 거리감의 영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부의 신장, 시장문제도 민족감정뿐 아니라 이런 거리감의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중국 정부는 머나먼 이국의 사정이나 변강의 문제에 대해서 내부여론과 관련한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아도 된다 (독일시민들이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서 러시아의 천연가스를 수입하지 않고 버텨야 한다고 주장하는 여론, 혹은 그 반대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간접적으로 촉발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됐다고 여겨지는 나토의 확장을 반대하는 여론 등).      

하지만, 중국인들의 현실적이고 보수적인 윤리관은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비윤리적’인 것은 아니다. 사회와 공공에 대한 서구화된 상상력을 갖는 우리와 윤리적 감각이 다를 뿐이다. 한국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중국인의 비윤리적 이미지는 아래와 같다.

“중국인들은 매우 이기적이다. 그래서 곤경에 처한 타인을 잘 돕지 않는다. 중국인들의 이런 비도덕성은 중국인들의 전통적인 물질주의, 배금주의, 그리고 전통적 가치관을 부정하는 공산주의 등에서 비롯했다.”

여기서 중국인이라는 대상은 너무 모호하지만, 한국인들이 중국인에 대해 갖고 있는 부정적인 인식은 펑츠瓷사건과 같은 수많은 일화들이 가십성 기사로 지속적으로 보도되면서 중첩된 결과로 형성됐다. 펑츠는 문자그대로 해석하면 도자기에 부딪힌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한국으로 치면 일종의 자해공갈행위에 해당한다. 10여년전쯤 중국에서 유행하던 말이다. 길을 가다가 갑자기 쓰러진 노인을 도와줬더니, 너때문에 다쳤다고 억지를 부리며 배상을 요구했다는 사건들이다. 이를 계기로 길에서 곤경에 처한 사람을 마주쳐도 중국인들이 어지간하면 돕지 않으려 한다는 서사가 만들어졌다. 이와 유사한 일화들은 수도 없이 많다. 이를테면 버스안에서 누군가 소매치기를 당하거나 성추행을 당했는데, 다른 승객들이 말썽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 이를 알면서도 외면했다라든가. 중국인들이 남의 일에 상관하지 않는 것은 문화대혁명시절 무고를 당해 피해를 입거나 목숨을 잃은 비극적인 상황들을 떠올리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따르면서, ‘냉혹한 중국인’ 서사가 더욱 강화된다. 

이러한 서사는 대개 한국인들이 스스로에게 가지고 있는 정치적 진보성이나, 의협심 넘치고 정의로운 시민영웅집단 (‘촛불시민’이라는 언어로 표상된다.)에 대한 상상적 이미지와 대비돼, 더욱 깊은 인상과 조작된 기억으로 남게 된다. 몇년전 주간지 시사인의 기사에서 심신미약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이 아파트 단지에서 돈다발을 뿌렸는데, 한국에서는 100% 회수가 되고, 중국에서는 60%정도 밖에 회수되지 않았다는 에피소드를 전한 적이 있다. 나는 나라나 인구집단의 크기 때문에, 지역적 편차가 심하고, 경제발전 정도, (외형적인) 사회적 신뢰자본 수준의 엄연한 차이가 있는데, 이런 극단적인 사례를 들어 단순하게 한국 사회의 도덕적 우위를 자랑하는 이 글이 사리에 맞지도 않는다는 생각이 들뿐더러, 100% 회수라는 한국사례의 강박적인 결과가 조금 ‘변태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내 생각에 이런 한국인들의 자기 아이덴티티 설정은 장점과 단점을 공유한다. 여기서는 단점을 지적하고 싶은데, 지나친 도덕적 우월감이 다른 민족이나 사회집단을 과도하게 비난하고 공격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낯선 사람을 돕지 않거나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공감하지 않는다라는 생각은 편견이라고 생각한다. 내 경험으로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낯선 중국인들이 특별히 더 이기적이거나 적대적이지 않다. 최근에 광둥TV의 몰래 카메라 프로그램을 (아주 오래 전 프로그램인 "이경규가 간다”를 연상하게 된다) 유튜브에서 시청한다. 광저우뿐 아니라 중국 전역의 도시들에서 촬영된 에피소드들이다. 일반인 연기자들이 나와서 A가 B를 괴롭히는 각종 장면을 연출한다. 예를 들어 카페에서 남편이 스마트폰 삼매경에 빠진 채, 출산우울증을 호소하는 부인을 타박하거나, 길거리 카페에서 양아치들이 갈증을 호소하는 치매 노인을 놀려 먹는 장면을 연출하는 경우가 있다. 대개의 경우 A가 떠난후 주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B를 찾아가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하고 응원한다. 그리고 걔중에 의분을 참지 못하는 열혈인사가 한두명 있어, A와 치열하게 말싸움을 벌이거나 심지어 몸싸움을 벌이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중국인들이 보이는 반응은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 도덕감정을 포함한 정서가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림3 식당에서 친구를 괴롭히는 청소년들을 (실제로는 일반 연기자) 발견한 옆자리의 성인이 큰소리로 꾸짖고 있는 것을 몰래카메라로 촬영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중국인의 윤리의식에 대해 가진 생각을 설명하기 위해서 가져다 붙인 역사적인 해석은 대개 이런 것들이 있다.

* 중국인들의 전통적인 물질주의

* 과도하게 많은 인구와 전통적인 가치관 때문에 개인의 권리와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

* 문화대혁명 시기의 홍위병 활동에서 드러난 광기와 몰가치적 상황

* 개혁개방후 급격한 경제성장이 초래한 빈부격차와 불공정하게 부를 획득한 부패한 관료들이나 졸부들이 만든 아노미 

이 설명들은 각각의 진술을 볼 때 틀린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이유들 때문에, 당대 중국인들이 특별히 비윤리적일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한국인들이 기대하는 비정상성의 이미지가 농축된 상상의 결과에 가깝다. 소위 대륙의 XXX 시리즈와 같은 맥락이다. 기본적으로 중국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유교적 가치와 윤리를 의식속 깊이 내장하고 있다. 서구화의 정도와 이에 따른 ‘사회'에 대한 관점은 차이가 있지만, 개개인의 덕성에 대한 전통적인 윤리관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한국인들이 특히 위에 나열한 마지막 이유를 중시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어려움도 비슷한 원인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중국의 거장 쟈장커賈樟柯 감독이 만든 영화들이 알게 모르게 이런 이미지를 강화한다. 지금 상업적으로 전성기를 맞고 있는 한국 느와르의 하드보일드한 면이나 잔혹한 현실을 다양한 형식으로 묘사한 기생충, 오겜 등과 공통되는 지점이 있다. 역설적으로 중국인들은 한국 대중예술을 많이 접하면서 한국사회가 전세계에서도 드물게 중국보다 더 치열하고 살벌하게 경쟁하는 곳이라는 사실, 즉 좐卷하다는(네이주안內卷, involution의 상태를 표현하는 형용사와 동사) 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림4 자쟝커의 영화 톈주딩(天注定 2013). 그의 과거 영화들은 중국사회의 부조리함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잘알려져 있다

급속한 경제 발전은 분명히 중국사회에 일시적으로 아노미적 상황을 가져왔지만, 소강사회의 달성, 즉 전체적인 먹고사니즘의 문제가 해결된 뒤에는 다시 전통적 윤리관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강하게 되살아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문제는 중국을 동유럽, 혹은 푸틴 집권 이전의 러시아와 비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1989년 베를린 장벽과 소련의 해체 이후 동유럽국가들의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큰 사회적 격변을 겪은 것과 비교하자면, 중국은 상대적으로 큰 혼란없이, 체제를 유지하면서 사회를 발전시켜 왔다. 설사 시진핑 정권의 전체주의적 성격에 거부감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미국이 중국의 부상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여러 제재조치를 취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중국이 스스로 몰락할 것이 자명하다면, 당연히 이런 조치들은 필요하지 않다. 

중국의 상대적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은 윤리의식을 포함한 사회적 신뢰자본의 크기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중국의 경우 이런 윤리의식은 공산주의보다는 전통적인 유교적 공동체주의에 기반한다. 중국은 농촌의 곤경속에서도 마을 공동체를 최대한 유지해왔고, 도시에서도 직장을 중심으로 한 단위單位와 대원大院이 결합된 마을 공동체가 유지됐다. 오히려, 97년 아시아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대형 국유기업의 도산과 정리해고, 단위&대원의 해체가 일어나던 시점이 한국의 IMF 충격과 비슷한 사회적 혼란의 시기일지도 모른다. 2003년에서 2007년 사이 내가 겪었던 션전과 베이징의 상황에 비교했을 때, 2015년 이후 상하이와 광저우에 거주하면서 경험하는 중국 사회는 기본적인 사회질서가 훨씬 안정돼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중국사회의 윤리가 국가와 가족사이에서 어떤 공공의 윤리로 발전할 수 있을지는 더 오래 지켜봐야할 일이다. 특히, 대도시에서 단위&대원 공동체가 해체된 이후, 뚜렷이 이를 대체할 새로운 구조가 나타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의 무리한 제로코로나 정책 고수는, 이런 사회집단간의 이해관계를 조절하고 균형을 맞춰서, 행위와 실천의 규범으로 나타나야할 새로운 공공 윤리의식을 형성하는데 실패하고 있는 결과일 수도 있다. 흔히 외부인들이, 당국가를 맹목적으로 신뢰한다고 여기는 중국의 기층민중들, 그리고 그중에서도 보수적인 노년층이 왜 한사코 백신접종을 거부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 의사결정이 감당해야할 개인적 리스크를 왜 여전히 가부장 국가의 책임으로 남겨두고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볼 일이다.   







김유익和&同 青春草堂대표. 부지런히 쏘다니며 주로 다른 언어, 문화, 생활방식을 가진 이들을 짝지어주는 중매쟁이 역할을 하며 살고 있는 아저씨. 중국 광저우의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오래된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데 젊은이들이 함께 공부, 노동, 놀이를 통해서 어울릴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 나가고 싶어한다. 여생의 모토는 “시시한일을 즐겁게 오래하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