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2022년 11월 25일

24. 디지털 민주주의와 제곱투표





민주주의는 기술의 문제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시행하는 대의 민주주의와 투표제는 18세기 미국과 프랑스의 기술적 한계에 의해 정의되었다. 국가는 시민에게 한 표씩 준다. 지역마다 투표소를 설치하고 감독한다. 시민은 여러 후보 중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또는 가장 덜 싫어하는) 사람을 고른다. 여러 명을 고를 수도 없고, 한 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표기할 수도 없다. 사실 누가 되어도 상관 없는데 이 사람만은 꼭 안 됐으면 할 수도 있다. 그런 의지는 지금의 투표제가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 한 사람이 한 표씩 “최애” 후보에게 주고, 그것을 그냥 더해서 순위를 가른다. 만약 인민의 일반의지를 더 정밀하게 반영할 수 있는 투표제가 있었다면 예를 들어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투표의 기술은 민주주의의 성패를 가르는 것인데, 지난 이백 년 동안 사실상 업데이트된 것이 없다. 아직도 투표소에 모여서 종이에다가 도장을 찍고 제출하면 국가가 일일이 확인한다. 과연 이게 최선일까? 인민이 주권자로서 의사를 표현하는 더 효과적인 방법이 없을까?

대의 민주주의 자체도 아쉽다. 왜 고대 아테네처럼 직접 민주주의를 하지 않는가? 5천만 대한민국 국민의 의지를 300명의 국회의원이 대표할 수 있을까? 18세기 미국과 프랑스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가장 발전된 교통 및 통신 수단으로도 모든 인민의 뜻을 헤아릴 수 없었다. 증기선이 최첨단이었다. 겨우 철도가 놓이기 시작했다. 마을마다 대표를 뽑아서 수도에 모인 후, 거수나 투표로 의견을 묻는 것이 최선이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인구가 2천8백만 명이다. 대의 민주주의는 근대 국가의 규모와 기술적 한계가 맞물려서 어쩔 수 없이 수용한 타협안이다. 민주주의의 이상이 아니다.

디지털 민주주의가 온다. 인터넷의 발달로 직접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커졌다. 과거에는 중요한 의제가 있을 때마다 전국민의 표를 다 받아서 확인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면 이제는 그렇지 않다. 충분히 가능하다. 기술적 제약보다는 직접 민주주의가 가져올 불편과 불안 때문에 꺼리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운영했던 청와대 국민청원이 그나마 혁신적이었다. 누구든 청원을 올리고 20만 명 이상의 동의를 받으면 청와대가 답변했다. 공론화 효과가 탁월했다. 하지만 번거로운 일이 많았다. 윤석열 정부는 곧바로 폐지했다. 국민청원을 통해서 대한민국 국민은 디지털 민주주의 맛을 보았다. 국회의원을 바이패스하고 직접 최고 행정 권력과 소통했다. 본인 인증과 투표 관리 체계의 보안만 확실하면 국가 중요 의제에 대한 국민 투표도 해볼만 하다. 18세기 민주 혁명의 한계를 보완할 기술적 해법이 이미 우리에게 있다.

투표 방식 자체를 업그레이드하는 것도 중요하다. 모두가 똑같이 한 표씩 내는 것은 다수의 폭정을 정당화한다. 먹히기 싫은 양과 먹고 싶은 늑대의 의지를 동등하게 치부하는 셈이다. 의지의 정도까지 반영한다면 당연히 양을 살려야 할 것이다. 현재의 시스템은 특정 의제와 깊이 연결된 소수를 그다지 상관 없는 다수가 쉽게 지배하는 구조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구현함에 있어서 효과적이지 못하다. 동성 결혼이 대표적이다. 성소수자에게는 일생 일대의 중요한 문제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않다. 종교나 편견 때문에 반대할 뿐이다. 하지만 투표를 하면 손해 볼 게 많은 소수자의 한 표와 이득 볼 게 없는 다수자의 한 표가 똑같이 치부된다. 각자 무엇을 선호하는지 뿐만 아니라 얼마나 원하는지까지 파악해야 복지를 최대한 증진할 수 있다.

사실 일인일표제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는 일찍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프랑스 혁명 당시 콩도르세가 제안한 방식이다. “최애” 후보만 고르는 것이 아니라 후보들에 대한 선호도까지 전부 표기한다. 이중에서 다른 후보랑 일대일 경쟁시 모두 승리하는 사람을 “콩도르세 승자”라고 한다. 제일 많은 이가 선호하는 후보를 고르기 때문에 일인일표제보다 더 민주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일부 국가들은 결선투표제나 선호투표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콩도르세 방식을 완벽히 구현하려면 굉장히 까다롭다. 지금처럼 국가가 일일이 표를 확인하고 계산해야 한다면 말이다. 아직도 한국과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일인일표제를 고수하는 것은 더 나은 방식이 없어서가 아니다. 번거롭기 때문이다.

최근 블록체인 기술의 보급으로 각광받는 투표제가 있다. 바로 제곱투표(quadratic voting)다. 일인일표 대신 표를 살 수 있는 토큰을 여러 개 발행한다. 인당 토큰 수는 10개든 100개든 임의로 정한다. 각자 후보에게 한 표씩 주는 게 아니라 원하는 만큼 줄 수 있다. 다만 표의 값이 개수에 비례해서 올라간다. 첫번째 표는 토큰 한 개, 두번째 표는 토큰 두 개, 이런 식이다. 예를 들어 내가 후보 A, B, C 중 A를 특히 좋아해서 한 표가 아닌 두 표를 주고 싶다면 토큰을 두 개가 아닌 총 세 개 지불해야 한다. 세 표를 주고 싶다면 (1+2+3=6) 여섯 개를 낸다. 결국 나는 10개의 토큰 중 여섯 개를 A에게, 세 개를 B에게, 한 개를 C에게 지불한다. 각각 3표, 2표, 1표씩 던진 것이다. 콩도르세 방식보다 나의 의지를 더 세밀하게 반영할 수 있다. 제곱투표에서 나의 n번째 영향력은 n의 값을 갖는다. 그렇다면 왜 “제곱”인가? 나의 n번째 한계비용은 n이지만 표 n개의 총비용은 대략 n^2/2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다섯번째 표의 값은 토큰 5개이지만, 표 5개의 전체 값은 약 5^2/2=12.5, 정확히는 15다. x축을 표 수, y축을 표 값으로 그리면 사실상 기울기 1의 정비례 그래프다.

제곱투표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윌리엄 비크리(1914~1996)의 개념을 마이크로소프트 연구소의 글렌 바일(Glen Weyl)이 발전시켜 착안한 것이다. <래디컬 마켓: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뿌리째 뽑다(2019)>에서 주장했다. 이더리움 창립자인 비탈릭 부테린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블록체인 생태계에서 퍼지고 있다. NFT로 토큰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제곱투표를 실험할 토대가 넓어졌다. 정치 뿐만 아니라 후원 모금, 기업 의사 결정 등 여러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다. 대만에서는 이미 대통령 주최 해커톤에 적용하기도 했고, 정부가 운영하는 디지털 민주주의 플랫폼 “join.gov.tw”에도 도입했다. 바일은 대만의 디지털 장관 오드리 탕의 말을 자주 인용한다. 탕이 직접 쓴 본인의 직무 내용이다. 시 같기도, 기도 같기도 하다.

“사물인터넷”을 존재들의 인터넷으로 만들자

“가상 현실”을 공통의 현실로 만들자

“머신 러닝”을 협력 학습으로 만들자

“사용자 경험”을 인간적 경험으로 만들자

“특이점이 온다”는 말을 들으면 기억하자: 복합성은 이미 여기 있다”

디지털 혁명이 민주주의의 확대로 이어질지, 전체주의의 도구로 전락할지 미지수다. 탕 장관의 신조가 매우 절묘한 시대다. 제곱투표는 하나의 예시일 뿐이다. 새롭게 상상할 수 있는 디지털 민주주의의 혁신은 무궁무진하다. 만물이 서로 연결되는 만큼, 모두의 이익을 대변할 기술도 발전한다. 18세기의 관성에서 벗어날 21세기 디지털 민주 혁명을 꿈꾼다.

근대 혁명은 대서양 혁명이었다. 미국 동부와 영국, 프랑스 등 서유럽이 주도했다. 크리에이터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고 선언했다. 디지털 혁명은 태평양 혁명이다. 미국 서부와 대만, 한국 등 동아시아가 이끈다. 더이상 하나의 크리에이터, 유일신에 의존하지 않는다. 만인이 크리에이터로서 평등하다. 고로 더 민주적이어야 한다. 사물인터넷 대신 활물과 생물의 호혜망을 건설하고, 메타버스 대신 전일적이고 통합적인 현실을 구현한다. 인공지능 교육은 인간과 기계의 상호 학습이어야 하며, 인간은 웹 사용자 또는 데이터 제공자이기 전에 영장류 동물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싱귤러리티를 기다리기 전에, 지구 뭇 생명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예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기계를 통해 인간이 더 인도적으로 거듭나고, 기술을 통해 사회가 더 아름답게 변모하는 길이다.


전범선
글 쓰고 노래하는 사람. 199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밴드 ‘양반들’ 보컬이다.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포르체, 2021)와 '해방촌의 채식주의자'(한겨레출판, 2020)를 썼다. '왜 비건인가?'(피터 싱어 지음, 두루미, 2021), '비건 세상 만들기'(토바이어스 리나르트 지음, 두루미, 2020) 등을 번역했다. 동물권 단체 ‘동물해방물결’의 자문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