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양애진의 커뮤니티 3.0
10. 녹색계급과 태극의 길
- 신기후체제의 정치와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
기후 재앙이다. 기후 위기를 넘어섰다. 연이은 폭염 속에서 영화 <수라>를 보기 위해 집 앞 영화관을 찾았다. ‘수라’는 새만금 간척사업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갯벌의 이름이다. 새만금 방조제가 완전히 닫히던 날, 빗물이 바닷물인 줄 알았던 조개들은 땡볕에서 떼죽음을 맞았다. 새하얀 해변이 새하얀 조개 무덤이 되었다. 세계 최대의 방조제 건축은 곧 세계 최대의 갯벌의 상실을 의미했다. 새로운 땅은 사실상 죽음의 땅이 됐다.
죽음의 땅에서 벌어진 두 개의 제(祭)
말 많고 탈 많았던 잼버리가 폐영했다. 새만금은 나무 한그루 심지 못할 정도로 염분 가득한 땅이었다. 농지확보 명분이 무색했다. 그늘 하나 없는 270만 평의 편평한 부지에서 열린 축제는 폭염과 폭우에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태풍 소식을 앞두고 각국의 청소년들은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국제 축제는 국가 위기가 됐다. 잼버리 정신은 금반지 정신이 됐다. 국민은 사과했고, 기업은 지원했다. 언론은 기업과 국민의 희생을 추앙했다. 국경과 문화의 장벽을 초월한 유쾌한 축제는 K-POP과 K-국민국가주의로 귀결 됐다.
모든 언론이 잼버리만을 주목할 때, 근처 해창갯벌에서는 새만금 장승제가 열렸다. 2003년, 네 명의 성직자들은 갯벌을 살리기위해 이곳에서 서울까지 삼보일배를 떠났다. 기성세대들이 미래세대에게 보내는 사죄였다. 그 후 20년이 지났음에도 잊지 않고 다시 모였다. 개신교, 천주교, 불교, 원불교 교당인 작은 컨테이너들에는 다시 벽화가 덧대졌다. 새로 만든 어린 장승들을 세우고, 억울하게 죽어간 뭇 생명들을 기리며 제사를 올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수라 갯벌의 조개들은 메말라 갔다. 잼버리를 위해 새만금호의 수위를 낮춘 탓이었다. 마이너스 경제 효과와 국가 망신만 외치는 상황에서, 또다시 갯벌 생명은 외면됐다. 씁쓸하다. 정녕생태주의는 개발주의를 설득할 수 없는 걸까? 갯벌 보존 운동의 의지는 이어가되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생태 운동은 어떻게 해야 정치적 조직력을 갖출 수 있을까? 공통의 지향을 어디로 설정하고 누구와 공유해야 할까?
❶ 외계에서 대지로 | 신기후체제의 정치
(이미지: Bruno Latour <Down to Earth>)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브뤼노 라투르는 <Down to Earth>에서 생태정치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라투르는 기후변화가 지정학적 이슈의 핵심이며, 부의 불평등 문제와도 직결된다는 점을 꼬집었다. 결정적인 사건은 트럼프의 파리 기후 협약 탈퇴였다. 마치 자신들은 다른 행성에 살고 있다는 듯이 자신의 영토를 이 세계 바깥으로 분리했다. 기후변화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기후변화 부정론자의 존재가 드러난 계기였다. 이로써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는 부유한 나라 대신 가난한 나라가, 기성세대 대신 미래세대가 받게 됐다. 기후위기와 심화 되는 불평등의 위기를 보며 라투르는 현재를 신기후체제라고 선언했다.
그는 지난 50여 년간 정치지형을 '로컬(Local)’과 ‘글로벌(Global)’의 양극 구도로 설명했다. 글로벌은 산업화, 도시화, 식민지화로 대변됐다. 로컬은 비교대상으로서 존재했고, 근대화를 위해 버려졌다. 그러나 영원할 줄 알았던 글로벌의 수명도 다했다. 지구에는 더 이상 확장할 곳이 없다. 이때 나타난 트럼프주의는 ‘외계(Out of This World)’를 지향하며 로컬과 글로벌 극단을 모두 흡수하기 시작했다. “비현실로 이륙”을 비판하며, 라투르는 반대로 지구를 향하는 정치를 주장한다. 이때의 지구는 구형의 행성이 아닌 ‘대지’다. 외계의 대극에 새로운 유인자 ‘대지(Terrestrial)’를 추가했다. 정확히는 임계 영역(Critical Section)을 지칭한다. 지구에서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곳은 불과 몇 킬로미터 두께의 얇은 층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향해야 하는 곳은 신기루의 외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거주지인 대지다. 근대의 인간(human)에서 대지의 흙(humus)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❷ 생산에서 생성으로 | 녹색계급
브뤼노 라투르의 신기후체제는 니콜라이 슐츠의 사회적 계급 이론을 만나면서 더 구체화된다. 지구사회적 계급은 “지구 차원의‘거주 가능성’을 떠맡는 계급”이다. 그들은 생산수단이 아니라, 거주지를 ‘박탈당하지 않을 권리’를 위해 투쟁한다. 뉴질랜드의 마오리족 사람들은 자신의 조상을 ‘도요새’라고 생각한다. 모든 자연생명체는 유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2002년, 새만금 간척사업 소식을 들은 마오리족은 조상의 서식처를 보호하기 위해 서해 갯벌을 찾아왔다. 서해갯벌은 뉴질랜드를 떠나 시베리아로 이동하는 도요새들에게 매우 중요한 길목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하면 산란율이 감소하게된다. 국적도 인종도 달라도, 갯벌이라는 물질적 조건을 공유하기 때문에 연대가 이뤄졌다.
근대인에서 대지인으로의 이행은 기존의 생산 시스템이 아니라 ‘생성 시스템’적 사고를 해야 실현될 수 있다. 생산 시스템은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고, 지구를 ‘자원’으로 축소하고 착취의 대상으로 보는 인간중심적 관점이다. 반면, 생성 시스템은 이원론에서 벗어나 인간과 비인간 모두 ‘지구족’의 일원이자 상호 의존하는 탈인간중심적 관점이다. 때문에 생산 시스템에서는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들 간의 상호작용이 중요해진다.
❸ 현실정치에서 사물정치로 |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
라투르는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NT)에서 사회를 인간과 비인간의 복합체로 바라본다. 자연/문화, 자연/사회, 주체/객체의 분리를 거부한다. 인간, 물체, 아이디어, 기술 등 네트워크 내의 모든 요소들이 대등한 행위자로 간주된다. 이점에서 영화 <수라> 엔딩 크레딧은 귀감이 됐다. 캐스트는 저어새, 청게, 민물가마우지 등 갯벌을 이루는 비인간 생명체들의 이름이 반 이상이었다. 갯벌 자체도 포함됐다. 행위자 간에 맺어지는 관계는 행위자 존재의 의미를 결정한다. 새만금 간척 이후에도 희미하게나마 살아있던 갯벌은 새만금생태조사단의 관찰로 이어졌다. 조사단의 포기하지 않은 기록 덕분에 영화 <수라>가 탄생했다. 영화는 갯벌에 대한 관심 재고와 신공항 반대 운동에 영향을 주고 있다.
앞으로 다양한 비인간과 동맹을 맺고 힘을 빌리는 것이 중요하다. 만물에 동일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우선이다. 마오리족은 1870년부터 황거누이 강의 인격을 인정받기 위해 정부를 상대로 싸워왔다. 2014년, 황거누이 강은 마침내 인간의 지위를부여받은 세계 최초의 강, 법인(legal person)이 됐다. 만물을 모신다. 경천(敬天), 경인(敬人)에서 경물(敬物)로 나아간다. 인간만을 대변하던 정치에서 사물(res)을 대변하는 정치, 진정한 공화국(res public)으로의 이행이다.
대지로의 길 = 태극의 길
결국 생태 정치의 방향은 추상적인 뜬구름이 아닌 구체적인 거주지다. 생명 이전에 생존이다. 이상적인 동시에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브뤼노 라투르의 생태 정치 프레임워크는 태극기를 닮았다. 외계는 하늘(乾), 대지는 땅(坤), 글로벌은 불(坎), 로컬은 물(離)이다. 태극의 중심축이 하늘로 향하기 시작하면, 태극의 균형이 깨진다. 해수면이 상승하기 시작한다. 불균형 심화는 점차 가속된다. 태극은 금세 파랑으로 뒤덮인다. 물바다가 된다. 공통의 거주지가 사라진다. 축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뒤돌아서 대지로 향해야 한다. 궁극은 태극이다. 대지로의 길은 곧 균형과 조화의 실현이다. 인간과 비인간을 아우르는 태극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