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양애진의 커뮤니티 3.0

2023년 10월 16일

12. 굿(Good) 페스티벌 

- 고대 공동체 소통 장치로서의 굿




(사진: 양애진 - 천지인, 음양, 그리고 여율)



디지털 기술로 지구 반대편의 존재와도 연결성을 느낄 수 있게 됐다. 동시에 디지털 기술의 필터버블은 확증 편향을 강화해 나와 다른 생각을 차단하고 사회를 파편화한다. 초연결은 역설적이게도 초단절이다. 커뮤니케이션의 어원은 라틴어 communicare 다. ‘공유하다’ 또는 ‘관계를 맺다’는 뜻이다. 소통은 말하자면 ‘공통의 경험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오프라인 보다 온라인이 중요해진 시대, 공통의 내러티브가 붕괴되고 있다. 소통 보다 일방적으로 상대방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담화(discourse)가 앞선다. 발산만 있고 경청은 없다. 통하지 않고 막혀 있다. 연결망의 규모가 전지구적으로 커질수록 이질적인 개인들을 묶어내는 문화가 중요해진다. 나와 너의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연대할 수 있어야 한다. 공통의 맥락을 형성할 수 있는 생활 세계를 설계하는 일이 절실하다. 따로(dis-)에서 다시 함께(com-)로의 이행이다.

고대에서 발견한 소통법, 굿

내가 속해 있는 모험하는 여성 커뮤니티 ‘우먼스베이스캠프’에서는 일 년에 한 번 리트릿 캠프 페스티벌을 주최한다. 올해는 ‘해방’을 주제로 강원도 원주에 100명이 넘는 여성들이 모였다. 버려진 터널과 웅장한 절벽이 있는 비일상적인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젬베 소리에 맞춰 아프리카 춤을 추고, 악을 지르며 몸을 부대끼고,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모닥불에 둘러앉아 날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마지막 밤에는 달집을 만들고 해방되고 싶은 것들을 적은 쪽지를 태웠다. 2박 3일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연결감을 잔뜩 느낀 채로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문득 ‘우리는 일종의 굿을 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굿은 음악과 춤, 그림, 사설, 음식과 놀이가 어우러진 종합예술이다. 말의 시대와 문자의 시대를 지나 멀티미디어의 시대인 지금,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굿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공동체 안녕을 기원하는 생활인, 무당

오래전부터 굿은 마을 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마을 단위로 구획된 단골판과 단골 조직이 있었던 것이 그 예다. (호남 지역에서는 무당을 단골이라고 부른다) 단골은 공동체의 안녕과 평화를 빌어주는 의무가 있었다. 그 대가로 주민들은 단골에게 벼와 보리를 제공했다. 남자 악사들은 대장간을 운영하며 무구도 만들고 지역민들의 도구를 책임졌다.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관계였다. 그래서 무당은 ‘세속적’ 사제다. 내세 대신 현세를, 일상생활의 지혜를 말한다. 현실과 괴리된 외계가 아닌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대지를 향한다. 속세를 떠나 개인의 영성을 추구하는 신선(仙, 신선 선)이 아니라, 속세의 희로애락을 체험하며 함께 춤을 추는 신선(僊, 춤출 선)이다. 생활 속에 녹아든 민간의 노동과 애환을 담아 한을 풀고 흥을 돋운다.

만물 생명을 모시는 마음, 굿적 사고

지난 9월, 해남에서 뵙게 된 지무 박필수 선생님은 “굿판에 있는 것들이 모두 신”이라고 했다. 집에 있는 강아지, 강아지 풀, 집이라는 건축물의 기둥과 지붕, 내가 밟고 있는 땅, 이 모든 것들의 존재가 가히 신과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물체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뜻이다. 무당을 만(萬) 가지 신 즉, 만물을 모시는 사람 ‘만신’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두모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당산나무가 생각났다. 마을 어르신들은 기쁜 일이 있으면 할아버지 앞에서 농악을 연주하고,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남몰래 할아버지에게 와서 털어놓곤 했다.

무속칼럼니스트 조성제에 따르면 무교의 근본은 한마디로 ‘생생지생(生生之生)’이다. 우주에 있는 모든 사물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어우러져 함께 살아가자는 것이다. 그래서 굿판에는 다양한 신의 얼굴이 등장한다. 감정 이입을 위해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되었지만, 사실 산신은 산이요, 용왕님은 바다요, 성주신은 집 그 자체다. 나아가 성주굿은 단순히 조상에게 알리는 것을 넘어서 집 짓는 과정을 함께 했던 연장들과의 순간까지 불러와 사물에게 존중을 표현하는 일이다. 만물을 이해해 보려는 마음이자 물질들의 조화를 꾀하는 작업이다. 그렇기에 굿에서는 그 누구도 대상화되지 않는다. 예컨대 “개를 보호하자”가 아니라 “내가 개다”라고 외치는 마음이다.  

깃발의 본질은 바람, 풍류

막힘 없이 흐르도록 하는 것, 바람의 맥을 계속 잇는 도를  ‘풍류(風 流)’라고 한다. 두모마을 위로 새로운 도로가 생기던 날, 이장님은 혀를 끌끌 차며 금산으로부터 내려오는 기운의 맥이 끊기는 일이라고 했다. 자연과 가까이서 살아온 이들은 이미 풍류를 가지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을 보는 방법은 깃발을 드는 것이다. 풍어제의 뱃기(배를 상징하는 깃발)를 보면 뮤직 페스티벌의 깃발이 떠오른다. 배의 이름이 적혀있는 뱃기는 배의 얼굴이다. 뱃사람들은 풍어를 기원하며 뱃기내림을 통해 배에 모실 신을 내려받는다. 페스티벌에서 깃발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자, 수만 명이 모이는 페스티벌에서 일행을 찾기 쉬운 방법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깃발을 중심으로 모여든다. 깃발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움직임에 맞춰 몸을 부딪히는 슬램이 이뤄진다. 만물의 바람이 깃발로 표현된다. 영화 <만신>에서 김금화 나라 만신은 말한다. “신은 빛으로 바람으로 오는 거야.”

천지공심을 만드는 음악과 춤, 율려

굿의 구조는 크게 세 단계로 나뉜다. 부정을 물리고 신을 청하는 청신(請神), 소원을 말하고 대답을 들으며 함께 즐기는 오신(娛神, 신을 본디 자리로 돌려보내는 송신(送神)이다. 여기서 핵심은 두 번째 ‘오신’이다. 무교의 신은 높고 낮음이 없다. 신과 인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신은 인간의 지배자가 아니며, 인간 역시 신을 일방적으로 숭배하지 않는다. 신과 인간은 함께 놀뿐이다. 송신까지 모두 마치고 나면, 굿을 청한 사람, 굿을 하는 사람, 굿을 보는 사람 모두가 한데 어우러져 춤을 추며 공동의 경험을 쌓아간다. 굿의 끝은 ‘공동체’다.

얼마 전 다녀온 파주 쌈 페스티벌(구 쌈 사운드 페스티벌)이 꼭 그러했다. 진짜 굿판은 공연이 모두 끝난 뒤, 높은 무대가 아닌 낮은 마당에서 벌어졌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손에 손을 잡았다. 시작도 끝도 없는 원이 만들어졌다. 일방향으로 무대를 바라보는 대신,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가 서로를 바라봤다. 빙글빙글 돌며 강강술래를 했다. 가르쳐주는 이가 없어도, 춤을 배운 적이 없어도 모두들 신바람과 신명이 나서 덩실덩실 춤을 췄다.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하는 고유한 리듬을 느끼며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것, 김지하 시인은 이를 율려(律呂)라고 표현했다. 율려는 그 자체로 생명이자, 율려 문화는 곧 만물의 생명력을 느끼는 문화다. 진동을 만드는 음(音)과 파동을 만드는 풍(風) 즉, 음악과 깃발만 있다면 모두 통(通)할 수 있다. 천지공심(天地公心)의 실현이다.

개인을 직조하는 신명의 장, 축제

굿은 이웃 간의 갈등을 풀어내던 해원상생(解寃相生)의 장이었다. 현대의 굿은 축제다. 두모마을에 들어갔던 첫 해 가을, 우리는 두모큰잔치라는 이름으로 마을 어르신들을 초대했다. 떡과 음식을 나누고 함께 농악 공연을 하고 춤을 췄다. 한 번의 축제 이후, 그전까지 낯설었던 관계가 풀어지고 말랑해졌다. 두모마을과 팜프라촌은 각자의 고유성은 유지한 채 새롭게 얽힐 수 있었다. 결국 공통의 맥락 형성을 위해서는 모여야 한다. 대신 달라질 것은 구성 방식과 구조다. 집회는 특정한 목표를 가진 획일화된 방식과 행동이다. 반면 굿은 다양한 입장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무교에는 조직도 경전도 없다. 스스로 지키는 자재율(自在律)만 있다.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바탕으로 한 중도와 중립이 중시된다. 주체성을 가진 너와 나의 마음이 통하는 것이 진정 소통이다. 필요한 것은 다양한 작은 집단들이 소통하는 장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다가 일시적으로 모이고 흩어지는 만남들이 주기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이때 “네가 내 밑으로 들어와라”, "내가 해야 한다"는 자기중심적, 자기 권력을 키우는 방식이 아니라, ‘연대'에서 오는 힘이어야 한다. 씨줄과 날줄을 엮어 망을 직조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개성이 공동체의 화합으로 이어진다. 각자의 한(恨)을 풀어내면 비로소 ‘한(뭇, 하나)’이 된다.

합(合)도 중(中)도 아닌, 접화

대지에 뿌리내린 정착 문화와 디지털로 연결되는 지구적 유목 문화가 결합하는 시대다. 공동체를 형성하는 방법도 바뀌어야 한다. 경쟁은 더 이상 공동체를 형성하지 않는다. 서로 협력하는 개인들이 사회의 원동력이다. 가령 생태주의, 비거니즘, 페미니즘 등 애초에 다양성을 내포하는 가치에는 분파가 많을 수밖에 없다. 많은 분파가 곧 많은 갈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중첩되어 있다. 향하는 목적지는 같다. 구심점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더 ‘큰’ 가치로 묶어내야 한다. 폭력적인 통일이나 기계적인 중립이 아니다. 개인의 주체성을 가지는 동시에 내적인 전체성을 확보해야 한다.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과 무기물까지도 마음 가까이 사귀어 조화를 이루는 접화군생(接化群生)의 정신이다. 정리하자면, 고대 소통법의 회복은 만물과의 연결감 회복이다.

갓생을 넘어서, 굿생

무교에 대한 오랜 멸시에도 불구하고 술과 음악과 춤으로 해묵은 갈등을 풀어내던 문화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무당이 굿판에서 방울을 흔들듯이 우리는 노래방에서 탬버린을 흔들었다. 하지만 다가족에서 핵가족이 되고 1인 가구로 원자화되면서 노래방의 규모도 점점 작아지더니 1인을 위한 코인 노래방이 되었다. 춤을 추기 어려운 협소한 공간에서 개인은  혼자 노래를 흥얼거린다. 공동의 안녕을 기원하던 굿은 개인의 길복 위주로 축소되고 말았다. 축제도 마찬가지다. 축제는 본디 신(神)을 기리는 종교적 기능을 가졌지만 오늘날에는 놀고 즐기는 유희만 남아있다. 수많은 페스티벌들은 갈등의 근원적 해소가 아니라 일상의 일시적 망각에 불과하다. 그러는 와중에 갓생 트렌드는 계속된다. ‘갓생’은 신을 의미하는 ‘God’과 인생을 뜻하는 ‘생’의 합성어로 생산적이고 부지런한 삶을 말한다. 자기 통제로 성취감을 얻는 갓생을 넘어 전체와의 연결감을 기르는 굿생을 살자. 다시, 굿적 사고를 하자.






양애진경계 없는 세계를 꿈꾸는 프리워커. 대도시 중심에서 벗어난 삶의 방식을 찾아 세계 각지의 공동체를 다녔다. 미래형 촌을 꿈꾸며 팜프라를 공동 창업하고 도시 청년들이 촌 라이프를 실험하는 마을을 만들었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판타지 촌 라이프』 를 공저했다. 이후 서울로 돌아와 여러 지역과 느슨하게 연결되어 도시와 촌을 잇는 작업을 하고 있다. 자연과 문명, 로컬과 글로벌, 무브먼트와 비즈니스, 생태와 기술 사이의 경계를 탐색하며 통합된 미래를 모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