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양애진의 커뮤니티 3.0
13. 바다괴물과 마고할미
- 기독교 물질문화에서 고대 영성문화로의 전환
기후위기 = 문화위기
지난 주말 남원 실상사에서 지리산정치학교 6기가 열렸다. 좌우이념을 넘어선 문명 전환을 위한 생명정치를 논하는 자리에 걸맞게 경상도와 전라도의 접경 지대에 있었다. 토론 대신 대화와 연찬의 방식으로 진행됐다. 여타 세미나나 컨퍼런스와는 달리 앞뒤 구분 없이 동그랗게 앉았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개인의 서사와 소망을 발화했다.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들은 다양했다. 세월호 참사, 촛불 집회 등 전국을 뒤흔들었던 이슈뿐만 아니라 동네 계곡을 지키기 위해서, 마을 어르신들을 돕기 위해서 등의 일상 속 사유들이 나왔다. 공통점은 모두 피부로 와닿는 이야기라는 점이었다. 새삼 정치란 ‘느끼는 것’이구나 생각했다. 그러자 온종일 딱딱한 의자에 앉아 ‘머리’만 맞대고 ‘언어’로만 소통하는 상황이 아쉬워졌다. 소위 ‘정동’을 느끼기 쉽지 않았다.
문명 전환을 이루는 것은 사실 문화이자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생활이다. 근대 이원론은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고 이성을 가진 인간을 세상의 중심에 놓았다. 인간 중심 문화에서 물질은 인간에 종속된 객체이자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가 기후위기다. 자본주의라는 물질문화는 소비와 끝없는 성장을 조장하는 것을 넘어 실존과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인터넷 초기 상업적인 활동을 뜻했던 도메인 확장자 ‘.com(닷컴)’이 오늘날 개인과 조직 모두를 아우르는 다목적성의 도메인이 된 것처럼 물질문화가 모든 것을 잠식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것은 문화위기다.
근대문화의 뿌리, 기독교
미국의 종교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는 서구문명의 발전은 전적으로 기독교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기독교와 이성의 승리>에서 기독교의 특징을 “이성적인 신앙”이라고 말한다. 오직 기독교만이 이성과 진보를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앙적토대는 서구 사회가 과학 기술의 중요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도록 했다. 기독교가 주도권을 행사한 서구에서 과학적 진보와 자본주의 성장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더군다나 근대의 시작을 알린 종교개혁은 개인주의 발전을 가져왔다. 성경이 대중어로 번역되고 배포되면서 개인의 자율성은 더욱 커졌다. 개인이 교리를 스스로 해석할 수 있다는 만인제사장설이 널리 퍼졌다. 이제 중개자가 없이도 개인과 신 사이의 직접적인 교류가 가능해졌다. 종교개혁을 기점으로 속(俗)은 급속도로 성(聖)을 잠식해 가기 시작했다. 국가는 교회를 이겼고, 자유와 평등으로 무장한 ‘개인’은 민주사회의 시민이자,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주체가 됐다. 근대는 곧 기독교화다.
실상사에서 찾은 실마리, 마고할미
고대의 신(神)문화 신(新)문화, 영성문화
서양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대결로 시작된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에게 먹히고 갇힌다.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은 경쟁을 당연한 것으로 만든다. 반면 한국 고대 신화에는 지배하는 자도, 지배받는 자도 따로 없다. 조율과 조화만 있다. <부도지>에 따르면 “마고는 자연의 소리(音)에 따라 악기를 만들어 소리로써 다스렸다. 이에 따라 성 안의 사람들은 음악의 소리에 따라 조화롭고 자연스럽게 다스려졌다. 즉 율려(律呂)에 따라 다스려지던 '율려시대'였던 것이다.” 다양한 만물의 소리를 조화로운 상태로 조율한다. 거기에서 비롯되는 아름다움은 자연스러운 변화를 자아낸다. 마고는 태초의 무(巫)인 셈이다.
마고 정신은 한반도 남쪽 끝에서부터 백두대간을 넘어 북쪽으로 이어진다. 해남 두륜산 명칭은 ‘백두산’의 ‘두’와 중국 신화 속 곤륜산의 ‘륜’을 가져다 지었다. 곤륜산은 중국 대륙에서 서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며, 하늘만큼 높고 귀한 보옥이 나며 신선들이 산다는 곳이다. 정상에는 태초의 여신 서왕모가 산다. 다큐 <아시아 샤머니즘 루트 대탐사>도 제주도에서 시작해서 몽골을 지나 육지의 가장 북쪽인 바이칼로 거슬러 올라가며 하나의 공통된 의식을 발견한다. 신은 음악이자 음 그 자체다. 모든 샤먼들은 신과 교감하기 위해서 북을 두드리고 방울을 울린다. 신은 자연이다. 몽골의 샤먼들은 신과의 만남(접신)에 들어서는 과정에서 늑대 같은 비인간 동물의 울음소리를 낸다. 말하자면, 영성이란 하늘과 땅, 나무 모든 자연에 정령이 깃들어있다고 믿고 기리는 마음인 것이다. 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 理化世界=濟世理化)다. 이때 인간(人間)은 천지간의 모든 만물(天地萬物)을 의미한다. 신성과 인성의 조화를 추구하는 신인합일(神人合一) 정신이다.
종교에서 영성으로, 영적 휴머니즘
자유의 다른 말은 불안이듯, 구별의 다른 말은 분열이다. 타인과 나를 구별하는 순간, 나는 타인으로부터 소외된다. 각자 고립된 이들은 눈앞이 가려진 상태로 서로 대립하고 경쟁한다. 대립과 투쟁의 이론은 이제 생을 다했다. 앞으로의 사회 정의는 영성과 함께 가야 한다. 분리된 머리와 몸을 재통합해야 한다. 이에 종교학자 길희성 교수는 문명위기의 탈출구로 종교에서 영성으로의 이행, 세속적 휴머니즘에서 영적 휴머니즘으로 이행을 제시한다. 영적 휴머니즘이란 자연 즉, 신과 일체감을 가지는 것이다. 근대 이분법적 사고관을 극복하기 위한 포월적 신관(包越的 神觀)이다. 만물에 내재하면서, 동시에 초월한다. 일찍이 해월 최시형도 사람을 하늘같이 섬기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을 주창한 바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성 문화로 전환할 수 있을까?
예술이 만든 혁명, 종교개혁
다시 종교개혁으로 돌아가보자. 종교개혁은 역사상 가장 성공한 미디어 캠페인이었다. 기독교를 두 개로 쪼개버린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미디어의 귀재였다. 당시 대부분의 소통은 강연과 문자로 이뤄졌다. 그러나 언어는 소통의 도구이자 소통을 가로막는 장벽이었다. 신의 언어로 불리던 라틴어는 신과 신자들 간의 소통을 막았다. 당시 책들은 대부분 길고 비싸고 라틴어로 되어있었다. 루터는 라틴어가 아닌 일반 독일어로 작성했다. 루터의 책은 16페이지를 넘기지 않았다. 비싼 제본도 하지 않았다. 팜플렛의 시초였다.
루터는 매체가 메시지의 아름다움을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사람들은 초상화나 성화를 우상화될 수 있다며 부정적으로 봤다. 그러나 예술에는 선악이 없다고 여겼던 그는 성경 속에 적극적으로 예술적인 삽화를 포함했다. 엘리트들의 언어에서 대중을 위한 그림으로 이행이다. 현대 밈의 시초다. 95개 조 반박문은 미학적으로도 뛰어났다. 아름답고 장식이 된 제목, 타이포그라피, 일정한 간격은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완성된 팜플렛은 당대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독일 전 지역으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뿐만 아니라 루터는 처음으로 찬송가를 개발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림과 음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했다. 논리적 설득이 아닌 감각적 감화를 일으켰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인쇄술과 텍스트와 예술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결과이자, 문화가 만들어낸 혁명이었다.
만인사제에서 만물신선으로, 고대의 회복
루터가 그러했듯 그림을 그려보면 어떨까. 이성과 대결 구도로 만들어진 신화부터 무너뜨려야 한다. 근대 국가를 대표하는 리바이어던을 신문화로 재해석해보자. 본래 리바이어던은 구약성서 욥기 41장에 나오는 바다의 괴물인 레비아탄이다. 인간의 힘을 넘는 매우 강한 동물을 의미한다. 홉스는 국가를 이 동물에 비유했다. 리바이어던이 입은 것은 쇠사슬 갑옷처럼 보이지만 자세히보면 작은 인간들이 뭉쳐서 만들어진 형상이다. 국가의 절대권력은 무수한 작은 사람들의 자연적 권리를 위임함으로써 형성된다는 의미다. 리바이어던이 손에 들고 있는 칼과 십자장은 힘의 상징이다. 국가가 속세의 일뿐만 아니라 종교에 관해서도 전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선 바다괴물을 이룬 사람 무리부터 해체하자. 대신 마고할미를 둘러싸고 둥글게 둥글게 강강수월래를 추자. 2000년 전, 마한의 젊은 농촌 여성들은 밝은 달밤에 손을 맞잡고 원을 그리며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췄다. 고대에는 춤과 음악도 분리되지 않았다. 둥근 만월을 모방했던 주술적 성격을 띤 유희다. 숭배의 현장이 아닌, 수평과 원현의 현장이다. 배타적인 성 대신 마고성을 그리자. 본디 국가란, 적의 침입을 막는 ‘성벽’이 아니라 ‘매화’로 둘러싸이고 음악이 흐르며 젖이 샘솟는 ‘낙원’이었다. 마고성은 인간이 만든 최초의 낙원국가였다. 고로 고대의 회복은 곧 낙원의 회복이다. 칼과 십자장 대신 음악과 춤으로 조율되는 세상을 그리자. 만인 사제에서 만물 신선으로의 이행이다.
신인(神人)들의 강강술래를 꿈꾸며
지리산정치학교에서 신당 창당 발표를 듣던 중, 정치성향을 4분위로 나눈 맵을 보면서 ‘과연 나는 저 중에 어디에 속할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굳이 나를 저기에 욱여넣어야 하는가 의문이 들었다. 뉴스에서는 항상 이분법의 대결 구도를 그리고 적군과 아군을 나누고 승패를 가르기 바쁘다. 니 편 내 편을 구분하는 분별심은 대립과 갈등만 낳을 뿐이다. 신영복 선생님은 <담론>에서 ‘아름다움’이란 뜻은 ‘알다’ ‘깨닫다’라고 말했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세계와 자기를 대면하게 함으로써 자기와 세계를 함께 깨닫는 것이다. 자기 성찰이자 세계 인식이다. 나를 확장함으로써 자아와 타자의 경계가 흐려진다. 신인(神人)의 마음가짐이다. 주체적 개인들의 조화는 주권의 소멸이 아니다. 오히려 비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주권의 회복이다. 인간 주권에서 만물 생명권으로의 이행이다. 생명의 위상은 새롭게 바뀐다.
정치는 우리가 삶을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정당을 선택하는 기준은 신념도 있겠지만 가장 기저에는 사랑이 있다. 사랑은 존재보다 관계를 앞에 둔다. 섣부르게 상대방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인내하며 상대방을 이해해 보려 애쓰는 마음이다. 공동체의 조화를 이끌었던 무교의 본질이 지극한 사랑이었듯이, 정치의 본질 역시 사랑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머리가 아닌 몸과 마음을 맞대는 장(場)이다. 남해군에서는 면민체육대회와 군민체육대회가 번갈아 일어난다. 올해의 적군이 내년의 아군이 되니 승패에 집착하지 않고 사회적 관용이 넓어진다. 새로운 장은 새로운 관계 맺음을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철인(哲人)이 아닌 예인(藝人)이 정치를 하면 어떨까? 문화 기획자와 예술가의 시선으로 만들어가는 정치, 타겟을 위한 것이 아닌 모두를 아우르는 정치, 신인들의 강강술래 같은 정치를 꿈꿔본다. 주체적인 개인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정치를 만들어 나가면서 손에 손잡고 춤을 추며 ‘원’을 만들자. 결국은 아름다움과 사랑이 세상을 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