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양애진의 커뮤니티 3.0
2023년 12월 15일
14. 세계 끝의 버섯 인간
- 연재를 마치며 하는 새로운 다짐
(사진: 양애진 x DALL·E - 버섯인간과 지구사발통문)
지난 11월, 서울 연희동에서 한 달 동안 유어보틀위크가 열렸다. 유어보틀위크는 1년에 한 번 동네에서 열리는 ‘제로웨이스트 페스티벌’로 이 기간만큼은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는 문화를 만들고 있다. 2년 전 서포터즈로 연을 맺었던 나는 올해는 기획단으로 참여했다. 거대한 담론일수록 구체적 행동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몽상성 대신 구체성이 필요하다. 시작은 작은 동네에서부터. 그래서 이번 기회에 가장 시도해보고 싶은 것은 커뮤니티 자본과 커뮤니티 화폐 실험이었다. 화폐로 환산되지 않던 동네의 비경제적 자본을 프로그램 형태로 가시화하고,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돈 대신 제로웨이스트 실천으로 쌓은 점수 ‘보틀’로 지불하는 순환 프로세스를 구상했다. 일상 속 작은 행동들이 다양하고 풍부한 동네 자본 생태계로 피어나는 상상을 하며 포스터를 그렸다.
(이미지: 2023 유어보틀위크 포스터와 도식, 보틀팩토리)
낯선 개념과 높은 장벽으로 참여가 저조할까 봐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의외로 프로그램 호스트 모집은 순조로웠다. 반려인의 추억이 깃든 옷을 수선하여 반려견에게 물려주는 ‘니옷내옷’, 입지 않은 스웨터로 겨울 모자를 만드는 ‘어글리햇’ 등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허물고 폐기물의 재생을 이끌어내는 프로그램도 더러 있었다. 나는 ‘버섯의 밤’이라는 프로그램을 열었는데, 인류학자 애나 로앤하웁트 칭의 <세계 끝의 버섯>을 읽고 각자가 가져온 버섯들을 모아 포틀럭 버섯전골을 먹는 모임이었다. 책은 송이버섯 공급망을 추적함으로써 자본주의를 둘러싼 이분법적 시각에 벗어날 것을 제안한다. 전목적적 화폐 세상에서 나름의 틈새를 만들어보려는 이번 유어보틀위크와 잘 어울렸다. 책모임이 끝나갈 무렵, 나는 대뜸 선포했다. “이제 버섯 인간이 되겠어!”
시민이 된 사물, 사물이 된 인간
데보라 코웬은 <로지스틱스>에서 오랜 군사 기술이었던 로지스틱스(logistics)가 전지구적 경제를 추동하는 물류 시스템이 되고, 나아가 그 자체로 생명이 되고 있음을 포착한다. 애초에 공급 사슬망 보안은 인간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전장에 음식과 연료를 공급하기 위해서 사물은 안전하고 빠르게 순환되어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보안의 목표는 점차 인간의 안전에서 사물의 순환으로 넘어갔다. 시스템의 안정성에 있어 인간의 불안정성은 위험 요소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원활한 산업 유통망을 교란할 여지가 있는 인간은 신뢰할 수 없는 자원이 됐다. 오늘날 기업은 휴먼에러를 최소화하기 위해 휴먼리스크를 관리한다. 새로운 보안법은 사물을 우선시하고, 사물의 유통망은 세계 영토의 경계를 바꿀 정도로 강력하다. 공장이 된 지구에서 사물은 시민성을 획득한다. 반면 인간은 시민권을 박탈당한 채 상품 흐름의 부속품으로 전락한다. 인간 삶을 위한 시스템이 인간에 대한 소외로 귀결되는 역설이다. 인류세란 어쩌면 인간의 지위가 가장 낮아진 시대다.
비단 개인의 서사만 톺아봐도 인간이 상품이라는 사실은 명백해진다. 우리는 이미 스스로를 상품화하는 데에 익숙하다. 자본 가치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모두 동일한 기준으로 수치화될 수 있어야 한다. 교육은 호환이 가능한 재고품으로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변모했다. 상품가치는 성적으로 매겨진다. 스펙은 품질, 학벌은 상표다. 이력서는 인간의 바코드다. 결혼 회사는 상품으로써의 인간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곳은 결혼 회사다. 집안, 학벌, 외모, 연봉, 해외 경험 여부 등 구체적인 측정 기준에 따라 등급이 나뉜다. 획일화된 사회는 우열을 가리기 위한 경쟁의 논리가 지배한다. 고급 상품이 되기 위함이다. 디지털 혁명 이후 인간의 상품화는 일터가 아닌 일상에서도 이뤄진다. SNS 사용 기록과 데이터도 상품이 됐다. 미국의 미디어 이론가 더글러스 러시코프는 “돈을 내지 않고 사용한다면 당신이 상품이다"라고 이미 말한 바 있다. 시간 노동이 데이터 노동으로 이어질 뿐, 탈노동, 탈상품의 가능성은 보이질 않는다.
생산과 생활 통합의 기원, 예악(禮樂)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생산 현장과 생활 현장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일과 놀이 사이에 구분이 생겼다. 그러나 사실 오랜 기간 동안 일과 놀이는 하나였다. 예악의 기원을 살펴보자. <예기>에서는 “본래 예의 시초는 먹고 마시는 행위에서 비롯되었다(夫禮之初 始諸飮食)”고 했다. 기록에 따르면 상고 시대 사람들은 곡식을 먹고 술을 마시는 내내 흙으로 만든 북을 두드렸다. 이는 신에 대한 공경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예를 뜻하는 한자 禮(예절 례)는 示(보일 시)와 豊(풍년 풍)로 이뤄졌는데, 示의 갑골문은 제사상 모양이다. 즉, 신에게 풍성한 음식을 올린다는 뜻이다. 그 자체로 제의성이 짙다. 이처럼 예와 악은 단독으로 설 수 없으며 언제나 함께 한다. 생산의 바탕은 도덕이며, 근본은 예(禮)이고(경제학의 창시자 애덤 스미스는 도덕학자였다), 생활의 바탕은 음악이며, 근본은 악(樂)인 셈이다.
음악은 사회 질서를 구축하는 데 핵심이었다. 고조선의 신시(神市)는 생산과 생활이 뒤섞인 축제였다. 당시 흩어져 살았던 제족들은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해 10년에 한 번씩 부도에 모였다. 신에게 바치기 위해 음식과 물건들을 가져와 물물교환을 하는 난장이 열렸고, 음악을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다. 신라 신문왕(神文王) 시대, 낮에는 둘로 나뉘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지는 대나무가 있었다. 용은 왕에게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이라고 했다. 왕은 피리를 만들고 ‘물결을 쉬게 하는 피리’라는 뜻으로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이름 붙였다. 나라에 근심이 있을 때마다 만파식적을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전염병이 사라졌다. 음악으로 이룬 태평성대다. 조선의 세종은 음악으로 경제의 표준 척도를 세웠다. 도량형 도구로는 황종율관이라는 피리가 쓰였다. 도량형의 기준은 척(尺)이라고 불렀다. 12율의 기본음인 황종음을 내는 피리의 길이는 황종척(黃鐘尺)이다.
패치들로 얽혀있는 다종의 세계
진보에 대한 환상은 선형적 흐름에 대한 강박으로 이어진다. 단일한 모양으로 만들기 위해 가지치기하듯 다른 존재들을 지워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나 칭은 여전히 세상은 온갖 패치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500페이지가 넘는 <세계 끝의 버섯>는 송이버섯 공급 사슬을 구성하는 모든 주체들의 서사가 병렬적으로 이어진다. 논리의 세계와 진보적 시간관을 해체하는 구성이다. 책 전체가 다양한 패치들의 배치인 것이다. 또한 위험으로 간주되던 교란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세계의 다종성은 ‘교란’에서 발견된다. 예컨대 산불, 홍수, 채집인들의 갈퀴질 등은 송이버섯이 자라기 좋은 환경이 된다. 고정되고 안전한 환경에서는 송이버섯이 자라지 않는다. 교란이 만들어내는 다종성 덕분에 숲은 끊임없이 소멸과 재생을 반복하며 영원성을 획득한다. 다종 간의 차이와 갈등이 오히려 새로운 생명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애나 칭은 말한다. “생명선은 얽혀있다. 사물을 바꾸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거의 모든 발달은 공동발달이다.” 인간과 비인간이 뒤얽혀 있는 다종의 세계에서는 인류세도 오만한 개념이다. 역사를 나누는 단일한 구분이나, 진보를 향한 단일한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교란 이후는 또 다른 교란이 존재할 뿐이다.
경계를 분해하는 버섯인간, 프리워커
그렇다면 버섯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 송이버섯은 인위적인 대규모 재배가 불가능하다. 송이버섯의 주 채집자는 세계 곳곳에 퍼져있는 이주민들이다. 이들은 자본주의 바깥에서 생계 수단, 취미 생활, 선물 등을 목적으로 송이버섯을 채집한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송이버섯은 브로커들을 통해 단일한 상품이 되어 일본으로 보내진다. 일본인들은 대개 관계 유지를 위해 송이버섯을 구매하고 선물한다. 이처럼 상품과 선물의 경계를 넘나드는 송이버섯은 자본주의와 그 바깥의 경계를 흐리는 탈이분법의 존재다. 동시에 버섯은 유전적으로 다양한 포자를 가진 모자이크형 몸체를 가졌다. 앞으로 버섯인간이 되겠다는 다짐은 ‘세계 패치의 일부로서 다종의 존재와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 맺으며 살아가겠다’는 결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송이버섯은 프리워커와 닮았다. 프리랜서와 프리워커는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구별되는 개념이다. 프리랜서 어원은 중세 유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정 영주를 섬기지 않고 자유계약(free)에 따라 보수를 받고 일정 기간 동안 전투를 담당해 주는 기사(lancer)를 프리랜서라고 불렀다. 충성이 아닌 보수를 위해 실리적으로 움직이는 직업 군인이었다. 오늘날 프리랜서는 고용주에게 전속되지 않고 프로젝트나 일을 독립적으로 수행하는 개인을 지칭한다. 반면, 프리워커는 ‘삶의 태도’에 가깝다. 원하는 일을 스스로 만들거나, 자신만의 일하는 방식을 찾아가는 주체적인 사람을 말한다. 소속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다. 소속이 없을 수도 있고, 소속이 여러 개일 수도 있다.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불안정성과 불확정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새로운 노동 방식이다. 자유를 위한 탈상품의 태도다. 경계인을 넘어 자유인이다.
대동(大同)을 꿈꾸며, 지구사발통문
프리워커는 경계를 분해한다. 일과 놀이를 재-통합한다. 코로나를 기점으로 가속화된 디지털화와 원격근무 덕분에 일터와 삶터가 일치되고 있다. 독립된 프리워커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협력이 필수다. 어제의 경쟁자는 오늘의 협력자가 된다. 인간과 비인간이 얽혀 있는 세계에서는 차이도 모두 부분적·일시적이다. 중요한 것은 차이의 해소가 아니라 차이의 수용이다. 동학농민운동이 꿈꿨던 새로운 경제공동체는 모두가 절대적으로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부족한 것을 채워주고 여기 남는 것과 저기 부족한 것을 교환하는 경제생활이었다. 유무상자(有無相資)다. 그러나 분절된 업무가 중심인 현대 도시에서 소외된 자들은 잉여 인간이 된다. 재화를 생산하지 않아도 공동체에의 사회적 관계망을 구축하고 유지하는 분배노동은 지워진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자주 만날 수 있는 까치밥은 인간이 비인간 존재들을 모시는 마음이자 분배의 미덕이다. 김지하는 이를 잉여가 아닌 여량(餘糧)이라고 했다. 분배 후에 남기는 것이 아니라, 분배 전에 미리 떼어 두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기대어 산다. 필요한 것은 경쟁과 개별성이 아닌 ‘협력과 사회성’이다. 우열 가리기가 아닌 함께 하기다.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적힌 사발통문을 꿈꿔본다.
커뮤니티3.0 연재를 마치며..
넥스트 커뮤니티에 대해 쓰겠다고 했는데 역설적으로 자꾸만 고대를 돌아보게 됐다. 처음 <커뮤니티3.0> 연재를 계획할 당시만 해도 관심의 흐름이 예악과 무교까지 이어질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궁극적으로, 커뮤니티3.0의 방향은 지구일 수밖에 없다. 세계화 이후의 목표는 지구화가 되어야 한다. 건(乾)의 시대에서 곤(坤)의 시대로의 이행이다. 무(巫)를 통한 망(网)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