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양애진의 커뮤니티 3.0

2023년 4월 17일

3. 노마디즘과 디지털 공유지





지난 금요일, 성수동에서 열린 프리 오픈 행사에 초대받았다. 행사장에 들어서자마자 아는 얼굴들이 연달아 등장했다. 서로 본 적은 없지만 본 적 있었다. 처음 만났지만 반가워할 정도로 익숙했다. 우리는 소위 인친(인스타그램 친구)이었다. 모두 조직을 벗어나 독립적으로 일하는 이들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잠재적 동료였다. 재밌는 일 있으면 같이 하자는 이야기가 오갔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인연도 생겼다. 종이 명함 대신 인스타 아이디를 주고받았다. 디지털 정체성이 물리적 정체성을 능가하는 순간이었다. 

“Your Network is Your Net Worth.”

과거 사람과 사람의 연결은 주로 물리적 공간에서 이루어졌다. 촌과 도시는 면적 단위 당 거주 인구수부터 압도적으로 차이가 난다. 서울의 고작 아파트 단지 하나에 거주하는 인구수가 두모마을 전체 인구의 30배 이상이다. 도시의 힘은 곧 네트워크의 힘이었다. 그러나 이제 네트워크 장소는 디지털 공간으로 이전됐다. 주변에 거주하는 사람이 아닌, SNS로 연결된 사람과 교류한다. 디지털 네트워크는 새로운 생산 활동의 기반이 됐다. 인스타, 유튜브 프로필에 ‘업무 문의 메일’을 적어둔 계정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누구와 연결되어 있느냐, 몇 명의 팔로워를 가졌느냐가 곧 힘이자 돈이다. 네트워크(Network)는 이제 순자산(Networth)이다.

바야흐로 디지털 유목민들의 세상이 도래했다. 5천 년 정착의 역사를 거쳐 역대급 기동력을 가진 유목민으로 업그레이드되어 회귀한 셈이다. 책상 위에 올려두던 데스크톱(desktop)이 무릎 위의 노트북(laptop)이 된 덕분이다. 스마트폰 등장 이후, 잠시 멈출 필요조차 없어졌다. 이동 중에도 업무와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 달리는 말 대신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활 대신 메일을 쏜다. 통신 기술의 발달로 인류는 전에 없던 규모와 속도로 협력이 가능해졌다. 덕분에 더 빠르고 더 큰 혁신이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다.

인간뿐만이 아니다. 금융, 사물을 비롯한 모든 것이 네트워크화되어 유목한다. 이미 종이 지폐와 금속 동전은 일상 속에서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카드마저 플라스틱 대신 스마트폰 속의 바코드 이미지로 대체됐다. 학교에서도 교과서 대신 교과서 파일이 들어 있는 태블릿이 필수품이 됐다. NFT(대체 불가능 토큰) 기술로 인해 미술품과 음악마저 디지털 자산화가 가능해졌다. 이에 정보 기본권을 넘어서 디지털 기본권이 논의되고 있다. 대만은 초고속 인터넷 인프라 사용을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다. 이제 디지털은 ‘기본 인프라’가 되었다. 디지털 공유지가 새로운 공유지로 인정받은 것이다.

무너진 리바이어던 신화

토마스 홉스는 서양 근대 정치철학의 토대를 마련한 책 <리바이어던>을 통해 국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강력한 통치자에게 권리를 양도하는 계약을 맺었다. 그 결과 탄생한 절대권력자가 리바이어던 즉, ‘국가’다. 인류 최초의 리바이어던은 신이었다. 뛰는 왕 위에 나는 교황이 있었다. 19세기 후반,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선포했다. 신(GOD)이 사라진 빈자리를 국가(GOV)가 차지했다. 국가는 교리가 아닌 법으로 사회를 통제했다. 그러나 21세기 초, 리바이어던 신화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국가가 시민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믿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믿음을 잃은 사람들은 신뢰가 필요 없는 환경 구축을 고민했다. 그리고 2008년, 신뢰 없는 신뢰 혁명이 일어났다.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의 탄생이다.  

블록체인은 한마디로 분산원장 기술이다. 데이터를 특정한 주체가 중앙 집중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 참여자들이 공동으로 분산 관리한다. 때문에 전 세계 참여자들의 시스템을 동시에 통제하지 않는 이상, 한 번 저장된 데이터의 조작이 불가능하다. 지워지지 않는 기록의 힘은 강력하다. 위조 불가능으로 진실성을 보장했던 사례는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편찬된 실록은 왕조차도 함부로 볼 수 없었다. 볼 수 없으니 위조도 불가능했다. 사관은 왕에게도 두려운 존재였다. 말에서 떨어진 태종은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라고 말했지만 그 말 마저 기록되어 버렸다. 블록체인은 현대판 디지털 사관인 셈이다. 단 차이가 있다면, 블록체인 상의 기록에는 누구나 접근 가능하다는 점이다. 지금까지는 두려움으로 통제했다면, 이제는 투명함으로 방지한다. 사후 대처가 아닌 사전 예방이다.  

만물이 유목민이 되어 가는 반면 국가는 여전히 정주 개념에 머물러 있다. 활동 범위는 지구적으로 확장되었는데 법은 여전히 국가 단위, 지역 단위에 얽매여 있다. 법은 ‘물리적 공간’을 기준으로 제정된다. 같은 군 단위일지라도 경북 의성군의 조례가 다르고, 경남 남해군의 조례가 다르다. 팜프라촌을 남해에 만들기로 결정한 후,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남해군에 관련 조례가 있는지 살피는 일이었다. 현재 50개 이상의 국가에서 디지털 노마드 비자를 발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기준은 물리적 공간이다. 이미 우리는 지리적 한계를 벗어났다. 디지털 망 위의 법은 어떻게 해야 할까? 어쩌면 애초에 국가의 경계를 다시 설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지리적 경계 대신 네트워크 경계를 기반으로 말이다.

마을 네트워크 > 네트워크 국가

애초에 국가라는 개념은 추상적이고 유동적이고 인위적이다. 국가란 독자적 ‘정부’를 가지고 있는 물리적 영토를 말한다. ‘정치 시스템의 유무’가 기준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국가들의 탄생도 최근의 일이다. 독일의 통일은 불과 30년 전이다. 이탈리아는 로마 멸망 이후 무려 천년 동안 도시 국가들로 분열되어 있었다. 통일 국가인 상황을 더 낯설어한다. 그래서인지 이탈리아에서 만난 친구들은 대게 자신을 이탈리아인 아닌 지역명으로 소개했다. 예를 들어 제노바에 사는 사람은 ‘제노베제’라고 말하는 식이었다.

1962년, 인도 민족주의 지도자 간디는 <Village Swaraj>에서 이상적인 사회 형태는 독립적인 70만 개 마을 공화국의 네트워크라고 주장했다. 마을 자치를 통해 탈중심적 민주주의, 국가 없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2022년, 인도계 미국인 기업가 발라지는 <The Network State>에서 권력 분산형 디지털 커뮤니티 설립을 통한 새로운 국가 모델을 제안한다. 디지털 네트워크 참여자들이 크라우드 펀딩으로 물리적 영토를 확보하고, 기존 국가들로부터 외교적 인정을 받는 방식이다. 물리적 영토보다 디지털 영토가 선행한다. 대담하고 도전적이다. 물리적 거리 보다 디지털 거리가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디지털 영토를 표현하는 새로운 지도가 필요하다.
The Network State in One Image (출처: thenetworkstate.com)

마을 네트워크의 꿈이 네트워크 국가로 이어진다. 두 이상향 속 궁극적인 권력은 성숙한 개인에게로 돌아간다. 탈중심적이다. 반세기 전 무너졌던 간디의 꿈의 부활이다. 크립토 기술은 과연 새로운 국가 형태의 기반이 될 수 있을까? 실제로 네트워크 국가 형태를 실험하는 프로젝트들이 지구 각지에서는 한창 진행 중에 있다. 이어서는 몇 가지 사례를 통해 그 역동적인 움직임을 들여다볼 예정이다.



양애진경계 없는 세계를 꿈꾸는 프리워커. 대도시 중심에서 벗어난 삶의 방식을 찾아 세계 각지의 공동체를 다녔다. 미래형 촌을 꿈꾸며 팜프라를 공동 창업하고 도시 청년들이 촌 라이프를 실험하는 마을을 만들었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판타지 촌 라이프』 를 공저했다. 이후 서울로 돌아와 여러 지역과 느슨하게 연결되어 도시와 촌을 잇는 작업을 하고 있다. 자연과 문명, 로컬과 글로벌, 무브먼트와 비즈니스, 생태와 기술 사이의 경계를 탐색하며 통합된 미래를 모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