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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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애진의 커뮤니티 3.0

2023년 6월 5일

6. 농부의 신념은 자본이 될 수 없을까?  

- 도넛 경제학과 8가지 자본 유형



(사진: 양애진 x DALL·E)



몇 년 전 이탈리아 토스카나 올리브 농장에서 머무른 적이 있다. 가지런히 줄 서있는 올리브 나무들, 그 너머에 펼쳐진 노랗고 물든 농장의 작물들, 빨갛게 익은 석류나무, 들판 사이사이를 가로지르는 구불구불한 길. 웬델베리가 말하는 ‘보는 재미가 있는 시골’이란 이런 것일 지었다. 완벽한 풍경이었다. 미술관은 한 시간도 못 견디지만 하루 내내 농촌 풍경을 바라보는 일은 당최 질리지가 않았다. 소농으로 이루어진 농촌 경관의 가치를 강렬하게 느꼈던 순간이다.

농가의 신념이 자본이 될 수 없을까?

전통적인 가족농, 소농이 홀로 서기 힘든 세상이다. 사회에 만연한 경쟁의 논리는 농업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값싼 수입 농산물에 대응하기 위해 규모를 확장하고 단일 작물을 심는다. 대량 생산 시스템은 농촌 경관을 획일화한다. 어딜 가나 비슷한 모양새가 되었다. 농장에는 농부보다 트랙터 찾기가 더 쉽다. 종자 채취 대신 모종 구매를 한다.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화학비료를 투입한다. 땅의 ‘자력’이 아닌 땅의 ‘부지’를 활용한다. 자력 잃은 땅은 스마트팜이 대체한다. 이제 농장은 공장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건실한 소농이 생산물에 대해 받는 보상은 형편없다. 자신이 기르는 유기 농산물을 정작 자신이 소비하지 못하는 경우를 수도 없이 봤다. 농촌 경관을 보존하고, 토양을 살리는 기여에 대한 대가는 아예 없다. 생태 청지기이자 지역 만물박사인 소농의 가치는 무시된다. 11년째 다품종 소량생산을 해온 논산 꽃비원은 <시골살이, 오늘도 균형>에서 자연농은 “농가의 신념을 기반으로 유지” 된다고 말한다. 마음이 아린다. 속상하다. 누구를 향해야 할지 모르는 원망이 든다. 왜 개인의 신념에만 기대어야 할까? 차라리 농부의 신념이 자본이 될 수 있다면,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

애벌레 경제에서 나비 경제로

(사진: Doughnut economics)

경제를 뜻하는 이코노미(Economy)의 어원은 그리스어 오이코노모스(Oikonomos)에서 왔다. 오이코스(Oikos)는 집을 의미하고, 노미아(nomia)는 다스리는 규율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집을 관리하는 규율, 즉 집안 살림이다. 경제학자는 ’살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20세기의 경제학은 죽임의 연속이었다. 물질적 부를 측정하기 위해 발명된 GDP(국민총생산)가 진보의 척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GDP는 시장에서 ‘화폐’로 거래된 가치에만 초점을 맞춘다. 삶의 질, 생태적 지속 가능성, 가사 노동 등 ‘풍요로운 삶’을 위해 필수적인 유무형의 것들은 자본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제된다.

영국의 경제학자 케이트 레이워스는 <도넛 경제학>에서 애벌레 경제에서 나비 경제로의 이행을 요구한다. 애벌레 경제는 기존의 ‘선형적 경제’를 의미한다. 성장에만 초점을 두고 자원 소비와 파괴를 일삼는다. 자연에서 에너지와 물질을 취하고, 만들고, 사용하고, 버린다. 폐기물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쌓인다. 순환 없는 경제 시스템 안에서 ‘유한한’ 자연은 일방적인 ‘착취’의 대상이다. 반면, 나비 경제는 ‘순환 경제’다. 성장 대신 번영에 초점을 둔다. 분해의 모든 단계마다 발생하는 자원의 가치를 재생하고 포획한다. 폐기물을 최소화한다. 자연으로 되돌아온다. ‘재생’된다. 애벌레에서 나비로의 변태다.

퍼머컬쳐 농부가 만든 8가지 자본 유형


(사진: AppleSeed Permaculture)

결국 문제는 자본 자체가 아니라 ‘단일 자본’ 중심 시각이다. 농부이자 임팩트 투자 전문가 에단 로랜드 솔로비예프는 <Regenerative Enterprise>에서 자본 유형을 8가지로 분류한다. 사회적 자본(인맥, 관계, 영향력), 물질적 자본(무기물, 인프라, 기술), 금융 자본(화폐, 통화, 증권), 생활 자본(토양, 물, 건강), 지적 자본(지식, 아이디어), 경험적 자본(경험, 노하우), 영적 자본(신앙, 의식), 문화 자본(신화, 예술)이다. 금융 자본은 그중 하나에 불과하다.  

생태계가 단일종으로 이루어질 수 없듯, 자본 생태계는 단일 자본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한정된 풀 안에서 금융 자본의 극대화는 곧 다른 자본의 고갈을 의미한다. 우리는 자본을 창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자본들을 소실하고 있는 셈이다. 금융 자본의 무한한 증식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경제는 돈의 순환만이 아니다. 진정한 경제는 금융 자본만이 아니라 다양한 자본을 바탕으로 재설계되어야 한다.  

핵을 가진 도넛 = 지구


(사진: 도넛경제학 x 8가지자본유형)

케이트 레이워스는 21세기의 경제학을 위한 직관적이고 명료한 이미지를 제시한다. 도넛이다. 도넛의 내부 원은 사회적 기초다. 누구에게도 부족해서는 안 되는 12개의 삶의 기초 요소들(보건, 교육, 성 평등 등)로 이루어져 있다. 도넛의 바깥 원은 지구의 생태적 한계선이다. 이를 넘어가면 지구의 생명 유지 시스템이 압력을 받아 9개의 자연 지표(생물 다양성, 기후 변화 등)가 위협받는다. 이 작은 원과 큰 원 사이에 조화와 균형을 이룬 최적의 지점, 도넛이 있다. 인류를 위한 생태적으로 안전하면서도 사회적으로 정의로운 공간이다. 우리는 도넛 위에 산다.

균형을 위한 ‘조정’이 중요해진다. 인식의 전환을 뒷받침할 시스템이 필요하다. 척도로 삼을 만한 구체적인 기준이 필요하다. 도넛 한가운데 에단 로랜드의 8가지 자본 유형을 넣어 보자. 도넛 가운데 핵이 생긴다. 납작했던 도넛이 동그란 구형이 된다. 지구다. 땅과 하늘 사이에 인간이 있는 천지인 형국이다. 인간 경제의 망을 넘어선 지구 생명의 망이다. 집안살림, 마을살림, 국가살림을 넘어선 지구살림이다. 비로소 한살림이다.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도넛은, 지구는, 찌그러져있다. ‘경제 성장 그만하자’며 탈성장을 외치는 것이 만사가 아니다. 그걸로는 충분치 않다. 이미 고갈된 상태 유지가 아닌 ‘재생’이 필요하다. 모든 자본을 충만하게 만들어야 한다. 궁극적인 목표는 성장이 아닌 ‘균형’이다. 소실된 자본들을 재생하자. 그런 의미에서 기후위기의 시대, 소농의 부양력이 절실하다. 소농이야 말로 가장 충만한 부를 가지고 있다. 부는 부양력이다. 생활 능력이 없는 것을 돌보는 능력이다. 소농은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 동물을 부양하고, 땅을 부양하고, 지구를 부양한다. 농부의 신념을 자본으로 만들자. 생명의 망 속에서 번영하는 인간과 비인간을 위하여.







양애진경계 없는 세계를 꿈꾸는 프리워커. 대도시 중심에서 벗어난 삶의 방식을 찾아 세계 각지의 공동체를 다녔다. 미래형 촌을 꿈꾸며 팜프라를 공동 창업하고 도시 청년들이 촌 라이프를 실험하는 마을을 만들었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판타지 촌 라이프』 를 공저했다. 이후 서울로 돌아와 여러 지역과 느슨하게 연결되어 도시와 촌을 잇는 작업을 하고 있다. 자연과 문명, 로컬과 글로벌, 무브먼트와 비즈니스, 생태와 기술 사이의 경계를 탐색하며 통합된 미래를 모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