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양애진의 넥스트 샤머니즘

2024년 8월 5일

3. 땅에서 솟아나는 채널

- 제주도 신당 탐사기




ⓒ양애진: 건포풍류(巾布風柳) - 300 x 300 x 300




죽임 당한 버드나무

봄날의 전주는 소리 없이 소란스러웠다. 전주시가 명품하천을 핑계로 전주천 버드나무 300여 그루를 무참히 베어버린 탓이다. 풍물굿패마고 워크숍이 있기 하루 전날의 일이었다. 참사 소식은 SNS를 통해 금세 퍼졌다. 친구들과 찾은 전주천은 학살의 잔해들로 뒤덮여 있었다. 떨어진 나뭇가지에는 채 트지 못한 씨눈들이 가득했다. 불현듯 촛대처럼 가지치기당했던 팜프라촌의 키다리 야자수가 떠올랐다. 무심한 전지에도 속이 상했는데, 무차별 벌목으로 숲이 상했다. 사라진 버드나무와 억새군락 자리에는 체육시설과 관광 케이블카와 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라고 했다. 뉴질랜드 숲은 법적 권리 주체지만, 대한민국 숲은 업적 획득 대상이었다. 초록빛 생태하천은 갈색빛 무덤하천이 됐다.


ⓒ양애진: 왼) 벌목당한 버드나무, 오) 버드나무 추모굿

우리는 버드나무를 기리는 추모굿을 하기로 했다. 이틀 뒤, 환장의 불통 현장에서 환상의 소통 굿판이 벌어졌다. 즉흥으로 계획된 작은 풍물굿이었지만 순식간에 전국 팔도에서 스무 명이 모여 마음을 보탰다. 모두 슬픔과 분노를 표현할 애도의 장을 찾고 있었다. 짜인 각본도 리허설도 없었지만 ‘통’하고자 하는 마음은 같았다. 밑동만 남은 버드나무를 둘러싸고 제각기 방식으로 소통을 시도했다. 시장에게 글을 써서 지탄했다. 버드나무에게 몸으로 춤추며 사과했다. 행인에게 말을 건네며 알렸다. 그 모든 대화들이 잘 통하도록 풍물을 쳤다. 시큰한 마음으로 시작했던 입장굿은 조금씩 흥이 돋아나는 길놀이로 이어졌다. 천변을 따라 포크레인이 있는 공사 현장까지 북을 치며 걸었다. 도심 속 낯선 풍물 소리에 몇몇 시민은 다리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버드나무 한풀이, 인간동물 살풀이었다. 소통과 신명의 장이었다.  

나무 한 그루도 정성을 다해 모시던 때가 있었다. 오래전 인간은 나무를 통해 신과 소통했다. 신의 거처인 신당에는 대개 신목(神木)이 있었다. 우주목,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채널이었다. 제주에는 1만 8천 신들이 살았다. 그만큼 채널도 많았다. 고대의 방송국, 고대의 유튜브였다. 신을 만나러 가는 길을 ‘당올레’라고 부른다. 올레는 ‘좁은 골목’이라는 뜻이다. 육지에서 신당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아직 섬에는 300여 개의 신당이 남아 있다. 그러나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다. 난개발로 속절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돌봄 없이 폐허가 되어가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가봐야 했다. 민속학자 문무병의 <제주 당올레>를 손에 들고 곧장 제주도로 향했다.

방치된 소통채널


ⓒ양애진: 왼) 송당본향당, 오)사라흘당

풍랑만큼 거친 제주 버스를 타고 구좌읍으로 향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송당본향당’이다. 제주에는 마을마다 본향당(本鄕堂)이 있다. 본디의 고향, 말하자면 마을의 뿌리가 되는 신의 거처다. 본향당마다 본풀이가 전해진다. 본풀이는 신의 일대기를 설명하는 당신화(堂神話)다. 무당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송당 본풀이에 의하면, 송당 마을은 토착사냥신 소천국과 외래농경신 백주또의 혼인으로 시작됐다. 이들의 자손들이 퍼져서 제주 마을들의 당신이 됐으니 마을의 뿌리이자 제주의 뿌리인 셈이다. 송당본향당은 신들의 어머니 백주또의 집이다. 고로 메카요, 성지순례 필수코스였다. 네이버지도에 등록된 몇 안 되는 신당 중 하나였다. 다른 대부분의 신당은 주소를 알아내기도 쉽지 않았다. 네이버는 이곳도 ‘자연명소’라고 표기하고 있었다. 도착한 본향당은 위상만큼 대우받고 있었다. 낮은 담장 너머로 반듯하게 정돈된 제단이 보였다. 돌봄의 흔적이 묻어났다. 기원의 자취도 발견했다. 이른 아침부터 굿이 있었는지 아궁이에는 연기가 나고 있었다.

옛 제주 사람들은 소를 생구(生口)라고 불렀다. ‘한 집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돌이 많은 땅에 사는 농부는 소를 사람 대접했다. 소를 잃어버렸을 때만 찾는 신당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다음 목적지인 산신(山神)이 사는 ‘사라흘당’이다. 번지수를 검색하니 송당 마을에서 멀지 않은 체오름 부근이었다. 산신의 집은 길 찾기부터 난관이었다. 지도를 따라가도 길을 잃었다. 정확히는 길이 없었다. 지번주소가 가리키는 곳은 드넓은 감자밭이었다. 인공위성 모드로 살펴봐도 당은 당최 안 보였다. 책장을 펼치고 검색창을 열었다. 실마리를 찾아 헤맸다. ‘축사에서 남서쪽’, '송전탑에서 북쪽으로 목초지를 건너 70m 지점’. 하나씩 단서들을 더듬어갔다. 답사가 탐사가 됐다. 억새밭과 감자밭을 넘어 가시덤불을 헤쳐낸 끝에 돌담과 초록색 문이 보였다. 활짝 열린 철문이 아마도 오래간만일 방문을 반겼다. 굳게 닫혀 있던 송당본향당 대문과 대비됐다. 인적이 드물었다. 당을 찾아냈다는 뿌듯함도 잠시, 긴장감이 돌았다. 조심스레 들어선 당은 적막했다. 신이 내리는 나무에는 덩굴만 무성했다. 신에게 바친 옷감은 색이 다 바랬다. 무구를 넣는 궤의 문짝은 다 뜯겼다. 긴장이 풀리고 씁쓸함이 남았다.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한 신의 집은 모두 이와 같을 것이다.

미신이 된 당신 = 삼신이 된 삼성


ⓒ양애진: 왼) 건시문(乾始門)이라고 적힌 대문, 오) 울타리가 쳐진 삼성혈

제주 도심에도 신당이 있다. 크기가 무려 1만 평이다. 제주도의 고양부 씨가 솟아났다는 세 구멍이 있는 곳, 삼성혈(三姓穴)이다. 나는 제주 양(梁)씨다. 성지(聖地) 순례는 곧 성지(姓地) 순례가 됐다. 하늘이 시작된 곳이라고 쓰인 대문을 들어서자 울창한 나무들이 나타났다. 세월을 머금은 우거진 숲은 신령스러움 마저 느껴졌다. 고목들은 한 곳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끝에는 세 시조가 태어난 구멍이 있었다. 양을나가 솟은 구멍은 어디려나. 멀찍이서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꺼림칙한 마음이 일었다. 폐허가 된 다른 신당들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이곳은 지극히 무사무탈했다. 의아함이 일었다. 마침 전시관에서는 탐라 개국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삼성신화가 영상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신화에 무언가 실마리가 있을지도 몰랐다.
삼성신화를 보면서 송당본풀이가 겹쳐졌다. 삼성신화에 속 제주도 삼신인은 땅에서 솟아나고 벽랑국 삼공주는 바다를 건너온다. 삼공주는 오곡과 가축을 가져오고 농경문화가 시작된다. 송당본풀이 속 토착신 소천국은 한라산에서 솟아나고 외래신 백주또는 강남(바다 건너 상상의 세계)에서 온다. 백주또는 농경신이라 소와 농사짓는 법을 가르친다. 두 신화의 큰 골자는 무척 유사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주체가 달랐다. 삼성신화의 주인공은 남신 삼성이다. 송당본풀이의 주인공은 여신 백주또다. 그 차이는 컸다. 고향을 떠나온 백주또는 주체적으로 배필을 선택한다. 남의 소를 훔쳐 먹은 남편과 이혼도 불사한다. 반면, 상자에 담겨온 삼공주는 아비의 뜻에 따라 혼인한다. 이후 그들의 존재감은 사라진다. 삼성신화는 남성중심의 유교적 색채를 띠었다. 전시관 밖에 걸린 팻말에는 ‘고양부 삼성재단’이라고 적혀있었다. 갑자기 어느 종갓집의 사유지에 온듯했다. 의문이 생겼다. 두 신화 사이에서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불타는 신당 = 불통의 시작

이미지 - 탐라순력도 건포배은(巾布背恩): 왼)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해 절하는 유생들, 오) 불타고 있는 성밖의 신당들

문제의 기점은 조선이다. 쿠데타로 세워진 나라는 안정이 시급했다. 지난 정권의 흔적을 지우기 급급했다.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유교적 윤리성에 집착했다. 유교 국교화의 서막이 열렸다. 이를 가리켜 종교학자 한승훈은 “조선의 종교개혁”이라고 말했다. 유교는 ‘동아시아의 카톨릭’이요. 무녀추방은 ‘동쪽의 마녀사냥’이었다. 대표적인 전장은 다름 아닌 제주였다. 삼성혈이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도 조선 중종(1562년) 때다. 제주 목사로 부임한 이수동은 삼성혈 주변에 돌담을 쌓고 비석을 세웠다. 세 성씨의 후손들로 하여금 시조에게 유교식 제를 올리도록 명령했다. 본래 무속의 굿판이 벌어졌던 곳에서는 이제 유교적 제례만 허락됐다. 무소불위의 유학자들은 신화에도 손을 댔다. 사실을 더하고 환상은 덜어냈다. 삼다도 마을의 원류 신화는 삼성씨 시조의 건국 신화가 됐다. 성(聖)은 성(姓)이 됐다. 구전된 신화는 기록된 역사가 됐다.

그로부터 140년 뒤, 신당 참사가 일어났다. 제주 목사 이형상은 129곳의 신당을 허물었다. 미신을 주도하는 무당은 교화의 대상이었다. 300여 명의 무당은 농부가 됐다. 그에게 부끄러움은커녕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업적은 그림으로 아주 자세하게 남겨졌다. 탐라순력도 <건포배은>에는 무당과 유생의 상반된 모습이 드러난다.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해 절하는 유생들 뒤로, 검은 연기가 솟구치는 신당들이 보인다. 이미 유교적인 성소가 된 삼성묘(현 삼성혈)는 성벽 안으로 옮겼다. 성 안에 들여진 사당과 성 밖에 방치된 신당은 운명이 너무도 달랐다. 연이은 합작 결과, 신목, 바위, 무당 등 신과 소통하던 채널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수많은 신당 중 하나였던 삼성혈은, 하나뿐인 성역이 됐다. 당신(堂神)은 미신으로 강등되고 삼성은 삼신으로 격상됐다. 삼성혈은 무속을 배격하고 유교를 승격한 증거 그 자체였다.  

공동체 공동화 = 공동체 공연화


ⓒ양애진: 칠머리당영등굿 전수관에서 열린 영등송별제

불통의 전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발단은 ‘마을굿 이원화’다. 집집마다 손을 보태 준비했던 마을굿은 공동체의 핵이었다. 굿판이 열리면 윗마을 아랫마을 할 것 없이 한데 모였다. 농사철에는 풍년을 기원하고, 어업철에는 풍어를 기원했다. 계절을 따르던 삶이었다. 공동의 풍요를 기원하며 공동의 결속을 다졌다. 굿판은 마을 공동체의 관계망을 형성하는 아날로그 SNS였다. 그러나 유교의 역습 이후, 마을굿은 분열됐다. 무속적 ‘당굿’과 유교식 ‘포제(酺祭)’로 갈라졌다. 주체와 기능, 외양이 모두 달랐다. 당굿은 여성이 주도하고, 포제는 남성이 주도한다. 신당은 신의 장소이고, 포제단은 제사의 장소다. 신당은 화려하다. 오방색 천을 사방가지에 매단다. 포제단은 절제한다. 네모난 돌만 정갈하게 놓는다. 무엇보다 포제는 여자의 출입을 엄격하게 금지한다. 남녀가 쪼개졌다. 분열은 이제 시작이었다. 조선의 유교국교화 이후에도 일제의 민족말살정책, 새마을운동의 미신타파운동이 이어졌다. 세 번의 치명타를 입으면서 굿은 나라굿에서 마을굿, 가족굿, 개인굿으로 점차 축소됐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마을 구성원들의 생산 현장마저 갈랐다. 공통 생업이 흩어지자 공동 풍요도 흐려졌다. 신당과 굿판의 부재는 곧 소통과 화합의 부재다. 공동체(共同體)는 공동체(空洞體)가 됐다.

3월의 제주는 유독 바람과 파도가 매서웠다. 영등할망이 오는 계절이었다. 이맘쯤이면 마을 곳곳에서 영등굿이 벌어졌다. 제주 사람들은 생업을 할 수 없는 기간 동안 도리어 가무와 놀이를 즐겼다. 신명을 돋우며 곧 시작될 생산 활동을 위해 원기를 재 충전했다. 다 옛일이다. 한 마을이 하던 일을 몇몇의 개인이 할 수는 없었다. 마을굿은 정부 후원 없이는 더는 주최할 수 없는 굿이 됐다. 제주 사라봉에서 <영등송별제>가 열렸다. 국가무형유산 공개행사의 일환이었다. 굿의 주최자는 마을이 아니라 보존회였다. 굿의 장소는 신당이 아니라 칠머리당영등굿 전수관이었다. 공동화(空洞化)는 공연화(公演化)로 이어졌다.

굿판 입구에는 ‘신이 들고나는 길입니다. 자리를 비워주세요’라고 적힌 안내판 놓여있었다. 굿은 열명(列名)으로 시작했다. 심방은 노래하듯 굿을 의뢰한 단골들의 이름과 나이를 읊었다. 풍어를 기원하는 굿답게 해녀와 선주가 많았다. 여러 제차(祭次) 중 인상 깊은 것은 씨점이었다. 심방은 “요새는 옛날 답지 않아! 해상도 오염되고 바다도 마르고!" 하고 외친 뒤, 돗자리에 좁쌀을 뿌리며 풍흉을 점쳤다. “작년에는 조기가 조금 어려웠수다!” 라며 풍요를 기원했다. 보말, 해삼, 오징어 등 구체적인 어패류명이 뒤따랐다. 주 생업이 관광이 된 제주인지라 “관광객도 많이 오게 하고!”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야말로 생활과 맞닿은 제의였다. 무속은 생존의 신앙이었다.  

신을 부르는 한, 채널은 사라지지 않는다

ⓒ양애진: 왼) 꽃이 놓여있는 해신미륵 서문하르방당, 오) 초가 켜져 있는 황다리 궤당

한 여름, 다시 제주를 찾았다. 해녀가 많은 제주 동쪽에는 돌로 벽을 쌓아 만든 해신당이 많이 보였다. 예측 불능한 날씨와 거친 자연환경은 인간을 겸허해지게 한다. 해녀들은 시시때때로 신을 만나기 위해 생업 현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당을 뒀다. 물질을 나갈 때 인사하고, 들어올 때 인사했다. 신당은 생의 현장이다. 신을 찾는 마음은 생을 찾는 마음이다. 김녕 서문하르방당 해신미륵돌은 고운 명주실을 두르고 있었다. 제단에 놓인 꽃병에는 선명한 분홍빛 조화가 꽂혀있었다. 당신화가 적힌 종이를 곱게 넣어둔 유리병도 있었다. 상귀리 황다리궤당을 방문했을 때는, 마침 당을 정비 중이던 마을 어르신이 계셨다. 당에 관한 이야기를 여쭙니, 정작 어릴 때는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다고 했다. 다른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몸이 아프고 가장 힘든 순간이 되자 떠오른 곳이 여기였다. 당할머니를 만나고 나니 마음이 편안했다. 그 후 종종 기도하러 온다고 했다. 신당의 한 구석을 가리키더니 저쪽에 자리를 만들어 산신을 모실 계획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야기를 마친 어르신은 다시 당 정비에 돌입했다. 아무도 찾지 않던 신당이 누군가의 돌봄으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다음에 오면 새로운 당도 생겨있을 것이었다. 여전히 당은 소통 창구다. 인간이 신을 부르는 한, 채널은 사라지지 않는다.






양애진경계 없는 세계를 꿈꾸는 프리워커. 대도시 중심에서 벗어난 삶의 방식을 찾아 세계 각지의 공동체를 다녔다. 미래형 촌을 꿈꾸며 팜프라를 공동 창업하고 도시 청년들이 촌 라이프를 실험하는 마을을 만들었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판타지 촌 라이프』 를 공저했다. 이후 서울로 돌아와 여러 지역과 느슨하게 연결되어 도시와 촌을 잇는 작업을 하고 있다. 자연과 문명, 로컬과 글로벌, 무브먼트와 비즈니스, 생태와 기술 사이의 경계를 탐색하며 통합된 미래를 모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