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2023년 5월 10일

3. I AM

– 개인의 교차성(Intersectional individual)




Stillness by Helen Wells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가면서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      최승자, 일찍이 나는




한 사람은 하나의 층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 명 한 명이 하나의 우주라 말한 동학처럼 개인은 젠더, 국가, 인종, 언어 등 다양한 차원의 정체성이 얽혀 형성된다. 그리고 이러한 얽힘의 복잡성과 교차성을 설명한 개념, ‘Intersectionality’가 있다. Intersectionality는 처음에 미국 법 학자에 의해 쓰였지만, 그 개념은 흑인여성 운동에서 나왔다. 이는 인생을 살며 무수한 교차로를 지나듯 개인의 정체성, 집단 안에서의 정체성, 특정 이슈 안에서 정체성 등 여러 가지의 ‘나’라는 존재가 교차하는 지점들이 발생하고, 그것은 유동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결국, 이는 우리가 사고하는 방식이 사회 또는 문화적 양식에 의해 훈련되지만, 그러한 양식이 일차원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닌 다양하게 존재함을 밝힌다.

교차성의 개념은 평화학의 관점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평화학은 현실적 이슈를 다루기 위해 데이터-이론-가치의 삼각관계를 바탕으로 경험연구, 비판연구, 구조연구로 구성된다. 이때 폭력과 평화에 대한 현상적 해석을 하는데 만일 해석에 대한 접근이 구조적 차원까지 진행되지 못한다면 이는 단지 윤리적 호소나 처벌 위주의 접근으로 끝나기 쉽다. 따라서 폭력과 평화는 정신과 물질, 개인/사회/국가/지역/지구/우주, 언어/문화/이념/정치/경제/군사/사회 등 다양한 차원과 측면을 다각도로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항상 이야기의 시작이 되는 것은 ‘나’이다. 평화학을 시작할 때 나를 중심으로 하는 글을 쓰는 연습을 한다. ‘나’의 여정에 대한 세밀한 관찰, ‘나’의 언어가 가진 특징과 그것이 ‘나’에게 미친 영향 등 내가 가진 사고와 행동, 습관과 생활이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지를 뜯어본다. 그러다 보니 ‘나’는 종종 혼란스럽다, 내가 누구인지.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고 누구나 이야기하는 동시에 우리는 자신의 삶이 자신의 선택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나’를 곰곰이 들여다보면 이 존재가 만들어진 건지, 선택한 건지 헷갈릴 때가 많다. 특히나 여러 문화에서 살다 온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나의 정체성과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그러한 의문과 혼돈의 과정을 거쳐서 ‘나’에 대해 조금 알게 되면 우리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성을 인식하게 된다. ‘나’라는 존재는 몸을 가지고 물질화 되어 있지만, 실은 관계로 인해 형성됨을 자각하게 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동물의 관계, 사물의 관계 등 매순간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관계망 안에서 ‘나’는 시시각각 변화하고 형성된다. 그러니 규정된 것은 잠시 머문 것을 보는 것일 뿐 절대적이거나 고정될 수 없다.

한국 사회는 종종 ‘나’를 증명하기를 바란다. 하나의 규정된 존재 또는 고정된 정체성으로 설명되기를 강요한다. 하지만 이는 허상과도 같다. 기민하게 관찰하여 감각해야 하는 것을 틀에 가둬 사회적 요구로 치환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자주 사라진다. 당위성 또는 주장만 남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는 존재의 뿌리를 뽑아내어 자신의 힘을 잃게 한다.

교차성을 발견하는 것은 때로는 ‘나’의 존재를 흔드는 것 같지만, 겹겹이 쌓인 나의 흔적을 돌아보며 나를 다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러면서 나와 다른 존재의 접점을 찾아 가는 여정이다. 이를 통해 ‘나’는 나를 비롯해 어떤 존재도 쉽게 규정하거나 이야기할 수 없음을 감각하게 된다. 그 감각이 생명체의 상호연결성을 만드는 요소가 된다. 폭력을 평화적 전환으로 만들어내는 순간은 상호연결적 감각들이 서로 만날 때 일어난다.







이희연오스트리아에서 평화학을 연구하고 있다. 폭력과 죽음의 고리를 정치생태 안에서 해석하고, 평화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 또한, 현재 플루리버스와 가이아 이론을 한국의 동학과 연결하여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