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뉴아메리카 견문

2025년 2월 17일

3. 다시 만난 세계 : 뉴 다크 에이지(New Dark Age)







1. 창간 – 뉴 스탠포드

소년이 온다.

소년이 운다. 계집아이 같았다. 뭇 사내들과는 사뭇 달랐다. 우르르 몰려다니며 어울리지를 못했다. 성장 속도도 느린 편이었다. 축구에서는 뜀박질이 느렸고, 농구에서는 몸싸움에 밀렸다. 멀찍한 곳에서 우두커니, 왕따이고 찐따였다. 유일하게 왕 놀음을 할 수 있는 것은 머리를 쓰는 일이었다.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분야가 두뇌를 쓰는 것이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똑똑하다는 자부가 있었다. 브레인 게임, 체스에 몰두한 까닭이다. 체스에서는 적수가 없었다. 압도적인 실력으로 덩친 큰 녀석들을 판판이 이겨갔다. 작은 체구로도 큰 코를 납작하게 눌러줄 수 있었다. 인텔리전스, 지능과 지성은 틸이 보유한 최고의 무기였다.

시대는 근력보다는 지력을 요하는 것처럼 보였다. 1972년, 틸이 다섯 살이었을 때 ‘세기의 대결’이 펼쳐진다. 미국의 바비 피셔(Bobby Fischer)가 당대 최강으로 군림하던 소련의 보리스 스파스키(Бори́с Спа́сский)를 누르고 체스 세계챔피언에 등극한 것이다. 1948년 동서냉전 이래 체스는 늘 소련의 마스터들이 최고봉을 이어갔다. 마침내 미소 냉전에서 미국이 소련을 앞서가는 상징적인 사건이 된 것이다. 냉철한 두뇌 싸움으로 냉전을 이겨낸 것이다. 미국 전역에 TV로 생중계되었던 그 장면은 틸의 일생을 좌우하는 원체험이 되었다. 소년은 체스 세트에 ‘타고난 승리자’(Born to Win)라는 좌우명을 스티커로 붙여 둔다. 천성으로 차분한 그 소년이 유일하게 울분을 참지 못하고 화를 내는 순간도 체스에서 질 때였다. 전술/전략만큼은 지고는 못살았다. 실제로 승승장구 13세 이하 체스 대회에서 틸은 미국 전체 1등을 쟁취한다.

체스를 하지 않는 시간에는 독서에 몰입했다. 특히나 판타지와 SF를 사랑했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 3부작은 너무나도 많이 읽어서 세세한 내용까지도 달달 외울 정도가 되었다. 아이작 아시모프와 아서 클라크도 좋아했다. 휴머노이드 로봇이 등장하고, 우주 여행을 하고, 달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석유로 만든 음식으로 기아를 해결하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동차를 타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가는 환상과 공상과 몽상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보드게임 던전앤드래곤(Dungeons & Dragons)도 즐겨했다. D&D 또한 판타지 스토리텔링 성격이 강하다. 저마다 상상의 캐릭터로 분하여 롤플레잉을 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역할은 캐릭터들의 모험을 갈무리하는 이야기꾼이자 심판으로서 던전 마스터이다. 친구들끼리 번갈아 하는 것이 일반적이건만, 유난히도 똑똑하고 지나치게 진지했던 틸은 마스터만큼은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았다. 전체를 관장하는 일은 반드시 본인이 맡아야 직성이 풀렸다. 소년 시절부터 그는 조용한 지배자였다.

대학 시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입생 환영회, 딱 한 단어로 자기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그는 ‘인텔리전트’를 꼽았다. 미국 최고의 수재들이 모인 스탠포드에서도 내가 제일 잘 나가, 자신감이 뿜뿜 하늘을 찔렀다. 대학문화는 영 마땅치가 않았다. 동기들은 술 퍼 마시러 다니고, 대마초를 피워대고, 여학생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녔다. 틸은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친구를 사귀는 것에도 무심해 보였다. 오히려 그들을 이기고 누르고 지배하려고 했다. 나 혼자만 레벨 업, 학점에서도 만점을 받는다. 너드남의 끝판왕이었다.

그의 사회적 정체성이 극적으로 변하게 된 계기는 학내 분규 사태였다. 진보좌파 선배들이 ‘서양문화’라는 필수교양 수업에 문제를 제기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셰익스피어에 이르기까지 텍스트가 온통 백인남성들로 점철되어 있다며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이다. 백인 중심주의와 서양 중심주의를 탈구축하자고 했다. 서구의 정전을 해체하려는 급진적인 운동이었다. 문화적 다양성과 젠더의 관점을 반영한 똑바른 커리큘럼을 짜라고 교수들을 다그친 것이다. 틸은 꼭지가 돌았다.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는 선배와 친구들이 지긋하게 고전을 연구하는 꼴을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주워들은 몇 마디로 궤변을 늘어놓는 이들의 촐싹거림을 참아줄 수가 없었다. 유행 따라 포스트모던 운운하며 포스트콜로니얼 이론을 읊어대는 운동권들에 심한 반감을 느낀 것이다. 자기성찰과 자아비판을 구분하지 못하고 자가당착에 빠졌다고 보았다. 혼종과 잡종을 권장하는 다문화주의에 맞서 순수의 시대를, 서양의 ‘거대한 뿌리’를 사수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대학 2학년 때 본인이 편집장이 되어 <스탠포드 리뷰>를 창간한다. 캠퍼스를 장악한 신좌파에 맞서서 사상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내걸었다. PC에 경도된 리버럴 학생들의 깨어 있는 시민(WOKE) 놀이에 신랄한 비판을 퍼붓는다. 68혁명 이래 대학을 장악한 뉴레프트를 1930년대 히틀러의 청소년단 유겐트에 빗대는 식이었다. 히피들은 나치만큼이나 편협한 사람들이라고 성토했다. PC는 결국 소련처럼 자기 파괴적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권력이 정해주는 공산국가의 몰락을 그대로 답습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대학가의 주류문화가 된 반문화(Counter-Culture)에 카운터펀치를 날린 것이다.

1987년 7월 9일 첫 호를 발간한 <스탠포드 리뷰>의 편집진은 모두 백인 남자들이었다. 12명의 이대남, 신남성들의 연대였다.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수컷들과 무리를 지으면서 틸의 아이덴티티도 달라지기 시작한다. 신좌파들이 마리화나 연기 가득한 클럽을 전전할 때, 대안우파 12사도들은 짐(GYM)으로 달려갔다. 무게를 치면서 구슬땀을 흘리며 근육을 키워갔다. 벤치프레스와 스쿼트, 풀업을 하고 트랙을 달렸다. 그들은 대학을 재차 소크라테스의 헬스클럽, ‘아테네 전당’처럼 만들고자 했다. 철인왕 플라톤은 그리스 제전에서 두 번이나 우승한 당대 최고의 레슬러이기도 했다. 플라톤이라는 이름부터가 코치가 붙여준 별칭 ‘넓은 어깨’라는 뜻이다. 과연 고대의 그리스 현자들은 유약한 ‘입진보’들이 아니었다. 글래디에이터, 상남자들이었다. 그리스 조각 같은 탄탄한 몸매를 자랑하며 격렬한 격투기로 남성미를 뿜어냈다. 강건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법이다. 탁월함은 모름지기 몸으로 입증하는 것이며, 아름다운 신체에는 그 자체로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보았다. 맨몸과 알몸을 부딪혀 아드레날린을 폭발시키면서 지-덕-체(智德體)를 함양하고 진-선-미(眞善美)를 추구한 것이다. 스탠포드를 아테네의 아카데미처럼! 스파르타 스타일의 뉴 스탠포드로! 이렇게 다시 만난 고전의 세계가 68세대 강단 지식인들과 뉴레프트 선배들보다 훨씬 더 간지난다고 여겼다. 여성과 남성 사이 경계를 흐리기보다는 더욱 남자다운 남자, 야성적인 우두머리 알파메일을 추구했다. 


(사진 출처: The Standford Review)

그 꼴통 이대남들의 사상을 갈무리한 책이 바로 <다양성의 신화>(The Diversity Myth : Multiculturalism and Political Intolerance on Campus)이다. 1995년에 출간된 피터 틸의 첫 번째 저작이다. 이 책을 공저한 데이비드 삭스는 1998년 틸과 함께 페이팔을 창립했고, 30년이 지난 2025년 현재는 트럼프 2기 정부에서 인공지능과 암호화폐 정책을 총괄하는 차르가 되었다. 틸은 스탠포드와 동부의 아이비리그를 막론하고 현재의 대학들이 500년 전 종교개혁 이전의 가톨릭 성당들처럼 부패하고 낡았다고 여겼다. 왜 술 마시고 연애하고 골방에서 이빨 까는데 무려 4년이라는 시간과 돈을 낭비해야 하는지 의아하게 여겼다. 창조력과 도전정신이 가장 충만한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을 대학에서 보내는 청춘남녀들이 정녕 안타까웠다. 더 빨리 진짜 인생을 시작하여, 더 풍부한 인생을 경험할 수 있다. 4년제 대학은 그들의 찬란한 황금시절만 낭비하는 것만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미국의 혁신을, 인류의 도약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2011년 틸 재단에서 시작한 펠로십이 바로 “20/20”(20 under 20)이다. 스무 살 이하 청년 스무 명을 뽑아서 창업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1년에 1억씩 지원한다. 단 하나 전제가 달려있다. 반드시 대학을 자퇴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지를 남기지 말고 미련을 두지 말고 구체제의 보루인 대학을 떠나라고 했다. 고등교육은 이미 심각한 버블이다. 중세의 교회처럼 곧 사라질 거품이다. 그러니 과감하게 도전하라고 했다. 미래를 개척하고 독점하라고 했다. 그것이야말로 청춘의 특권이다. 시대착오적인 대학이 청춘을 아프게 만든다. 아프니까 청춘이 아니다. 제도와 체제가 청년을 아프게 한다. 즐겁고 신나고 건강해지려면 자기다운 일을 해야 한다. 오롯이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취업을 하는 것과는 별개이다. 취업이란 구질서의 일부로 편입되기 십상이다. 창업이야말로 새 질서의 창조이다. 모든 위대한 창업자들은 저절로 자기주도 학습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면 공부도 정말로 신나고 재미가 있다. 일이 곧 공부요 놀이가 되는 것이다. 직장이 또다른 놀이터가 된다. 근질근질 어서 출근하고 싶어 안달이 나고, 미적미적 퇴근하기가 싫어 밤을 지새운다. 늙은 교수들의 낡은 대학과는 달리 생기가 돌고 활기가 넘치는 덕업일치의 장을 이룰 수가 있다.

틸 센세 가라사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찾아서 몰두하라 일컬으셨다. 그러니 부디 창업해서 창조하라. 실리콘벨리의 교주, 틸이 발신하는 20/20의 세계관이라고 하겠다. 근사한 역할 모델도 있었다. 틸은 하버드대학을 중퇴한 저커버그에게 거금을 투자하여 페이스북을 세계 최고의 SNS 기업으로 만들어냈다. 저커버그는 틸이 빚어낸 첫 번째 완성품이었다. 헤어스타일마저 로마의 황제 카이사르를 흉내 냈다. “Carthage delenda est”(카르타고는 멸망해야 한다.) 등 라틴어 어록도 즐겨 인용한다. 틸이 제시하는 20/20 세계관에 달려들고 몰려드는 20대 천재들이 늘어날수록 마침내 20세기의 올드아메리카를 벗어나서 21세기의 뉴아메리카도 가능해질 것이다. 애당초 미국은 창업가들이 세운 나라이다. 제로에서 원으로, 무에서 유로, 스타트업으로 세워진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건국의 아버지들, 알렉산더 해밀턴도 토머스 제퍼슨도 모두 18세기의 혈기왕성한 창업가들, 파운더였다.

20/20 프로그램을 출범시킨 2011년, 틸은 <내셔널 리뷰>에 “미래의 종언”(The End of Future)이라는 글을 기고한다. 콕 집어서 68세대를 겨냥한다. 신좌파들의 68혁명 때문에 기술혁명이 좌절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반문화가 반기술로 전락하면서 무수한 진보를 막아 섰다는 것이다. 1969년 7월 인류는 달에 도달하는 위대한 도약을 이루었지만, 불과 3주 후에 우드스탁이 시작되고 말았다. 사이언티스트와 엔지니어가 아니라 히피들이 나라를 지배하면서 진보를 엉뚱한 방향으로 전유하기 시작했다. 반전운동, 민권운동, 생태주의, 페미니즘 등등. 그야말로 1960년대는 정치적 급진주의가 흥성한 시대였다. 그러나 틸의 진단에 따르면 신좌파의 문화전쟁이야말로 미래를 지체시킨 원흉이다. 그 68세대들이 미국 사회의 주류가 되고 문화적 패권을 행사하면서 반세기가 가깝도록 기술의 초가속적 혁신이 선사할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탐구하지 못한 채 불모지를 방황했다는 것이다. 그 탓에 아직도 도시경영도 국가행정도 조금도 업데이트하지 못한 채, 4년마다 종이에 투표하는 19세기형 후진 정치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의 종언>이 흥미로운 텍스트인 것은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의 정렬을 새롭게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산업혁명 이후 좌파는 늘 진보였다. 우파는 항상 보수였다. 200년 이상의 고착된 구도이다. 그런데 21세기의 미국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좌파야말로 보수적이다. 변화를 싫어한다. 현실에 안주한다. 혁신에 굼뜨기 이를 데가 없다. 그들이 기득권이다. 언론과 대학과 정부를 장악하여 미국 전체의 정체를 초래하고 있다. 이제는 우파가 진보적이어야 한다. 진보적인 우파의 출현을, 우파진보주의를 도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진보우파의 근거지로 삼아야 하는 곳이 바로 IT혁명의 수도, 실리콘벨리였다. 20대 학교를 개혁했던 피터 틸은 30대가 되자 마을과 도시를 개조하고자 나섰다. 

2. 창건 – 뉴 실리콘밸리

한철 벨리도 68 정서가 가득한 장소였다. 그 화신이 바로 1955년생 스티브 잡스이다. 아이폰을 완성하여 선불교 정신을 디지털 제품으로 구현한 아이코닉한 존재였다. 내가 처음 스탠포드 대학교와 실리콘벨리를 구경한 것이 2011년이다. 11월 늦가을이었다. 동아시아 냉전사를 연구하는 역사학과 박사과정이었던지라 기술과 기업과는 멀찍하던 시절이다. 그럼에도 스탠포드에는 후버 연구소가 있었다. 대륙과 대만, 인민중국과 시민중국의 자료를 풍부하게 소장하고 있었기에 리서치 차 방문했던 것이다. 겸사겸사 실리콘벨리도 둘러보고 샌프란시스코도 구경했었다. 때가 마침 공교로웠다. 그해 10월 잡스가 사망한 것이다. 여전히 벨리는 마을의 심볼이었던 잡스에 대한 추모 분위기가 넘실대고 있었다. 잡스로 인하여 실리콘벨리는 ‘뉴에이지’(New Age)라고 불리던 신시대로 들어갔었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 라는 말이 있다. 1968년 이래 반문화 감성에 1980년대의 네오리버럴 시장을 결합하여 1990년대 이후 세계를 석권한 IT 혁명의 사상체계이다. 잡스는 히피였고, 채식을 고수했고, 꼬뮨을 찾아 방랑하였으며, 인도와 일본 등 동양의 정신세계를 깊이 흠모했다. 청년 시절 그 정신적 탐구의 소산을 IT와 결합시켜 전 세계 소비자들의 눈과 마음을 홀리게 만드는 탁월한 제품들로 완성해냈다. 수도자와 같은 자세로 기술과 예술이 완벽하게 조화된 작품을 빚어내는 비저너리였다. 즉 잡스는 비즈니스를 문화와 철학의 경지로 승화시킨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잡스로 말미암아 냉전시대 군산복합체 기업들이 즐비했던 어두침침한 실리콘벨리에 뽀샤시한 빛의 혁명을 이룬 것이다. 뉴에이지, 디지털 계몽시대의 개막이다. 백인 남성 엔지니어들만 득실거리던 냉전기 벨리에서 룰루레몬 요가복을 입은 여성들이 늘어나고 아시아 출신 프로그래머들이 주민의 절반에 육박하는 리버럴의 유토피아가 되어간 것이다. 2005년 잡스의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 연설은  역사적이었다. 전 세계 수많은 창업가들이 반복해서 돌려보았을 만큼 영감이 넘치는 영상이다. Stay Hungry, Stay Foolish, 잡스는 이 강연에서 68세대를 상징하는 잡지 <Whole Earth Catalog>의 슬로건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언급했다. 21세기 초반의 실리콘벨리가 68의 자장 아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으로 박제가 되어있다. 1960년대의 반문화(counter culture)가 1990년대의 디지털문화(cyber culture)로 전이되었던 것이다.



반골이자 반동분자인 틸은 잡스도 마땅치 않았다. 그가 만들어낸 벨리의 동도서기(東道西器) 시대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틸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2016년에 그는 뉴욕의 해밀턴 칼리지에서 졸업 연설을 한다. 명명백백 11년 전 자신의 모교에서 행했던 잡스의 연설을 겨냥하고 있었다. 헐크를 통하여 고커를 묻어버리고, 트럼프를 통하여 공화당과 공화국을 삼켜버렸듯이, 벨리의 뉴에이지도 끝장내고 싶어했다. 잡스는 졸업생들에게 당신들의 심장이 이끄는 대로 자유롭게 살라고 이르셨다. 반면에 틸은 절대로 마음 가는 대로 살면 안된다고 충고했다. 마음을 다잡고 살아가라고 했다. 자유분방이 아니라 절제와 자제, 규율을 강조했다. 자신을 갈고 닦아서 인생을 갈아 넣을 수 있는 이상향, 이데아를 찾으라고 했다. 잡스가 Whole Earth Catalog를 인용했다면, 틸이 인용한 인물은 전설적인 모더니즘 시인(이자 파시스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였다. 파운드는 해밀턴 대학의 졸업생이기도 했다. 잡스가 Stay Foolish를 내세웠다면, 틸은 파운드의 시 구절 Make It NEW를 차용했다. 잡스가 비즈니스를 문화로 승화시켰다면, 틸은 기술과 기업을 통하여 새로운 운동을 일으키고자 했다. 잡스가 창작자 크리에이터를 상징했다면, 틸은 창건자 파운더를 키우고자 했다. 아름다운 제품을 만들기보다는 이 세계를 새롭게 위대하게 건설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만든 것이 파운더스 펀드이다. 잡스가 스탠포드에서 졸업식 연설을 했던 바로 그 2005년에 발족했다. 우상파괴, 벨리의 동도서기 시대를 끝장내는 디지털-문혁을 추구했다. 동은 동이요 서는 서인 바, 그 이전의 벤처투자 생태계와도 판이한 노선을 천명한다. 투자자들은 창업자들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대신에 경영을 지도하고 감독해온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틸은 그렇게 훈수를 두는 투자 문화가 진정한 창조와 혁신을 저해한다고 여겼다. 창업자들에게는 창조주와 같은 자유와 권한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절대권력의 행사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 즉 CEO 한 명 한 명을 절대군주로 키우고자 한 것이다. 절대적 권한이 있어야만 미래로 나아갈 수가 있다. 의사소통에 능한 민주적 리더십으로는 여럿 중 하나에 그치기 십상이다. 의사결정에 탁월한 군주적 리더십만이 유일무이한 하나에 도달할 수가 있다. 전권대사 모델을 활용하여 대담한 비전을 실천하고 실현할 수 있는 이단아들을 발벗고 찾아 나선 것이다. 얼마를 벌고 싶다고 말하는 이들은 처음부터 배제했다.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다며 떠벌리는 이들을 각별히 편애했다. 특히 불가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반응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수용하고 안주하는 사람이 있고, 거부하고 도전하는 사람이 있다. 결정적 선택의 순간에 자질과 본질이 드러나는 것이다. Impossible is Nothing. 파운더스 펀드는 후자를 편파적으로 편들었다. 리버럴 빌리지를 분쇄시킬 절대주의 계몽군주들을 양성하는 반란군의 교두보가 된 것이다.

즉 스티브 잡스가 기술을 예술과 연결시켜 프로덕트를 디자인했다면, 피터 틸은 기술에 정치를 결부시켜 세상의 아키텍처를 새로이 설계하려고 했다. 돌아보면 1998년 틸의 첫번째 창업이었던 페이팔부터가 기술과 정치의 결합이었다. 최초의 인터넷 은행으로 온라인 결제서비스를 제공했던 페이팔은 중앙정부를 통하지 않는 금융혁명을 추구했다. 페이팔 초기 멤버 여섯 가운데 네 명이 미국 밖에서 태어났고, 세 명은 공산국가를 탈출해 미국에 왔다. 중국과 폴란드, 소련의 우크라이나 출신이었다. 그들 모두가 국가 없는 세상을 바랬다. 더 정확히는 국가의 권력이 최소화된 미래를 원했다. 그들은 모두 <크립토노미콘>, 암호를 해독하는 해커들이 등장하는 닐 스티븐슨의 SF소설을 사랑했다. 정부가 발행하는 지폐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막론하고 인쇄술 시대의 낡은 기술이다. 워싱턴과 월스트리트는 종이 호랑이로 전락한 ‘문서 벨트’(paper belt)를 상징한다. 돈이 정부와 종이에 묶여 있는 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갈 수 없다. 페이퍼 거버먼트는 최소화하고, 디지털 거버넌스는 최대화해야 한다. 2008년 파국적인 세계금융위기를 맞고 나서야 등장한 비트코인을 예지했던 것이다. 페이팔이야말로 가장 일찍이 달러를 대체하는 디지털 통화를 만들고 싶어했다. 

즉 페이팔을 이베이에 매각하고 손에 쥔 거금을 가지고 출범시킨 파운더스 펀드는 뼛속까지 정치적 프로젝트였다. 이름부터 정신을 표상한다. 브랜드가 곧 정체성이다. 실제로 틸과 동료/동지들의 일과라는 것도 독서를 하고 체스를 두며 정치를 토론하는 것이었다. 만약 우리가 새로운 나라를 처음부터 다시 만든다면 어떻게 구조를 짜고 제도를 설계할 것인가? 를 늘상 노닥거렸다. 마치 투자회사보다는 연구소나 씽크탱크에 더 가깝게 보일 정도였다. 그저 그들이 해야 할 일이란 돌연변이 같은 거친 원석을 찾는 것이지, 보석을 다듬고 닦으며 시간을 죽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반골 기질의 괴짜 창업자들이 아무리 기이한 행동을 하더라도 퇴출시키지 않을 것을 결의까지 했다. 올해로 창립 20주년을 맞는 파운더스는 줄곧 이 원칙을 충실하게 고수해 왔다. 실제로 이사회 표결에서 창업자의 반대편을 든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한다. 그러함에도, 아니 바로 그러했기 때문에 최고의 실적을 거둘 수 있었다. 페이스북, 유튜브, 스페이스 X, 에어비엔비, 스포티파이, 이더리움, 딥마인드, 팔란티어 등등등. 철저하게 불간섭주의에 입각한 역발상적인 투자 방식의 타당성을 입증한 것이다. 패러다임의 전환, 55년생 잡스에서 67년생 틸로 세대가 교체되고 마을의 권력이 넘어갔다. 틸을 페이팔 마피아의 대부이자 실리콘벨리의 수괴라고 부를 수 있는 까닭이다.

교주에게는 교도들이 따른다. 어록을 정리하는 교본이 만들어지고 주석을 직접 알현하지 못하는 신도들을 위한 정전이 되어간다. 그래서 발간된 책이 바로 <제로투원>이다. 틸이 자신의 창업자 투자자로서의 경험을 스탠포드 대학의 후배들에게 수업한 내용을 갈무리한 책이다. 워낙 유명한 책이라서 따로 내용을 정리하지는 않겠다. 알라딘 기록을 살펴보니 내가 처음 이 책을 산 것은 2021년이다. 아마도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기왕의 생태운동으로는 기후재앙 해결이 난망할 것이라는 판단으로, 기술로 기후문제를 해결하려는 스타트업 대표들을 찾아다니던 무렵이다. 그런데 이 참에 현재의 미국이라는 맥락을 고려하면서 재독하노라니 훨씬 더 흥미롭다. 실은 부제에 이미 본심이 담겨 있었다. 창업자들의 자기계발보다는, “어떻게 미래를 건설할 것인가”(Note on Startups, or How to Build the Future)에 방침이 찍혀 있다. 2014년 출판 이래 <제로투원>은 테크업계의 복음서가 되었다. 이 책을 공저한 틸의 사도 바울, 블레이크 마스터스도 애리조나의 상하원 선거에 도전하며 정치인으로 등장했다. 1986년생으로 84년생 밴스의 후속타로 대기 중이다. 즉 뉴 실리콘벨리의 복음서가MAGA의 복음과 합류하면서 MAGA 2.0, 뉴아메리카의 여명이 밝아온 것이다. 매체의 창간과 회사의 창업에 이어 이제는 나라까지 Make it NEW, 창제하려는 것이다.      



3. 창세 – 뉴아메리카

중국이 중화를, 인도가 힌두를, 러시아가 유라시아를, 터키가 오스만을 고차원적으로 회복해가는 21세기를 나는 일찍이 ‘반전의 시대’라고 언명한 바 있다. 벌써 한 갑자, 12년이 흘렀다. 비서구가 자신의 근본을 되찾아서 되살려가는 이 역-진보(counter-progress)의 과정이 대반전(Reversal)이라면, 미국과 서구가 자신이 이루어 낸 근대의 업적을 뒤로 물리고 부단히 갱생하는 투쟁은 ‘반동’(Reaction)이라고 불린다. 내부에서 총질하는 이들을 가리켜 골수 반동분자라고 성토하는 것이다. MAGA 2.0,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수사마저 떼어내고 제왕처럼 행동하며 난동을 부리는 트럼프는 실로 대반전시대의 대반동분자이다. 

이 ‘신반동주의’(Neo-Reactionary Movement)’는 인터넷 시대 최초의 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버드대학이나 뉴욕타임스 등 동부에 자리한 인쇄-출판 시대의 문화적 아성에서 발기한 것이 아니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진원지로 삼는 새로운 사상이다. 이들은 ‘자유주의 근본주의’의 질식할 것 같은 검열체제의 해방구를 다크 웹(Dark Web)에서 찾아냈다. <레드필>(The Red Pill)이라는 사이트가 대표적이다. 영화 <매트릭스>를 차용하여 자유주의에 세뇌당한 현대인들의 뇌를 치유해 주겠다는 목적으로 등장했다. 가상 속에서 살 것인가, 환상을 거두고 진실을 직시할 것인가. 이 레드필은 자유-민주-공화정이라는 미국의 환각과 기만을 고발하는 부호로 기능한다. 자유의 끝이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 민주의 말로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는 것. 이제는 자유니 민주니 하는 것들을 도무지 믿지 않음을, 아니 도저히 믿을 수 없게 되었음을 통렬하고도 통쾌하게 자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점점 더 좋아질 것이라고 하는 근대의 약속, 진보적 서사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이며 급진적인 도전이다.

대반동 시대의 개막을 알린 2016년 11월의 그날 밤. 틸의 집에 모였던 소수의 정예사단 가운데는 커티스 야빈(Curtis Yarvin)도 있었다. 미국의 유명한 블로거이자 소프트웨어 개발자이다. 신반동주의의 기수라고도 할 수 있다. Mencius Moldbug라는 필명으로 Unqualified Reservations라는 블로그를 운영했다. 야빈은 ‘자유와 민주주의는 더이상 양립하지 않는다’라는 틸의 테제에서 커다란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선거는 표를 구걸하는 인기 콘테스트에 불과하며 정치인의 질은 갈수록 떨어진다. 그들이 모자란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선거에 연연하니 구조적으로 시야가 좁고 단기적인 사고에 매몰될 뿐이다. 몇 십년을 내다보는 장기적 계획을 도저히 세울 수가 없다. 4년이란 무언가를 이루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지만, 무언가를 망치기에는 한없이 충분한 시간이다. 그러니 그 4년이 모이고 또 모여 40년이 되자 세상은 더욱 나빠지고 만 것이다. 이대로는 근본적인 대책의 수립도 전면적인 실행도 불가능하다. 이 치명적으로 무능한 시스템은 뉴 실리콘벨리가 신봉하는 계몽군주적 리더십과는 아득히 거리가 멀다. 이러한 체제가 더 지속된다면 필연적으로 자유는 봉쇄될 것이고 문명은 붕괴되고 말 것이다.

야빈이 블로그에 토막토막 단편적으로 올린 생각의 편린들을 일관된 체계로 정리한 사람은 영국의 철학자 닉 랜드(Nick Land)이다. 2012년 장대한 분량의 <암흑계몽>(Dark Enlightenment)을 발표한다. 이 또한 종이책으로 출판을 한 것이 아니다. 오픈소스, 인터넷에 공개했다. 프랑스혁명에 영향을 주고 그 후 민주주의를 배양한 계몽사상에 대한 가열찬 비판이다. 이성의 빛에 의한 진보라는 대서사가 말세의 대멸종 시대를 야기했다. 고로 다시 암흑의 시대가 되돌아 올 것이다. 빛은 어둠을 이길 수 없다. 태초는 어둡다. 우주는 어둠이다. 빛은 반짝 일순이지만 어둠은 영원하다. 암흑이야말로 우주의 근원이며 자연의 근본이다. 저 하늘에 별이 총총 빛나는 것은 우주의 바탕이 어둡기 때문이다. 고로 인간은 진리의 빛이라는 교만을 거두고 칠흑 같은 우주의 섭리에 복종해야 한다. 고로 이 음침한 암흑계몽은 산업문명의 좌파도 아니요 우파도 아니다. 공화당의 보수도 아니고, 민주당의 진보는 더더욱 아니다. 계몽을 격몽시키는 디지털 계몽령이며, 근대를 거슬러 올라가 다시 만난 세계, 중세로부터 무한한 영감을 얻는다. 틸은 야빈이 창업한 스타트업에도 투자하면서 신반동주의가 실리콘벨리를 넘어 미국의 정치계로도 확산되는데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트럼프의 수석전략가 스티브 배넌은 <암흑계몽>의 애독자였으며, 부통령 밴스에게 야빈을 소개한 사람도 피터 틸이다. 미국의 동부와 서부를 연결하고, 아메리카와 유럽을 가로질로 대반동의 네트워크를 촘촘히 맺어왔던 것이다. 대서양을 마주보고 유럽과 미국이 계몽주의 혁명으로 연동되었던 250년 전의 방향과는 정반대로 대반전하고 있는 것이다.



신반동주의는 일국일제, 일국가 일체제도 부정한다. 일국사회주의만큼이나 일국자유주의도 배격한다. 그들이 보기에 모든 현대국가는 사상의 자유가 없는 독재국가이다. 오로지 하나의 이념과 체제를 국시(國是)로 강제하기 때문이다. 고로 일당제와 양당제와 다당제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 중국은 공산주의를 강요하고, 미국은 민주주의를 강제한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모여서 하나의 이데올로기 아래 살아가는 근대국가는 태생적으로 불합리하다. 그래서 하나의 질서에 다양한 체제가 공존했던 왕년의 제국을 아스라이 그리워한다. 이들이 국민국가 이후로 모색하는 ‘오래된 미래’는 무엇인가? 군웅이 할거하는 유사 봉건적인 도시국가 시스템이다. 각각의 작은 도시국가가 하나의 기업처럼 작동한다. 위로는 CEO 군주를 앉히고 아래로는 일종의 주주로서 주민사회가 작동한다. 군주는 주주=주민들의 요구에 응답하기 위하여 도시를 운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시민들은 다른 유능한 군주=CEO가 다스리는 도시로 이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식시장의 거래와도 비슷하고, 유튜브 시장의 구독 모델과도 흡사하다. 더 멀리로는 탁월한 군주를 찾아 주유천하하던 춘추전국시대도 연상시킨다. 또한 초원지대의 유목사회에 빗대어 볼 수도 있다. 기업=도시 간의 혁신 경쟁으로 일국일제의 정치에 진정한 ‘민주’를 주입하자는 것이다. 이제 국민에서 해방된 시민과 주민들이 진정한 자유를 찾아서 유동하게 될 터이다. 

신반동주의는 이 현상에 ‘출구’(EXIT)라는 개념을 붙인다. 특정한 공동체와 국가에서 자유롭게 이탈하여 노마드적으로 다른 공동체와 도시국가에 이동할 수 있는 출로이다. 이는 민주주의에서 강조하는 보이스(VOICE)와는 대조적이다. 국민들은 현재의 정권에 불만이 있으면 목소리를 높인다. 집회를 열고 거리를 행진한다. 반면 신반동주의가 제창하는 유사 봉건제도에서는 불만이 있으면 그 공동체를 떠나버리면 그만이다. 단톡방에서 조용히 나가는 것이다. 굳이 어울리며 얼굴을 붉힐 이유가 없다. 실제로 신반동주의자들은 캘리포니아와 실리콘벨리를 점점 탈주하고 있다. 텍사스 오스틴으로의 이주 행렬이 부쩍 길게 늘어지고 있다. 파운더스는 플로리다 마이애미로 옮겨갔으며, 팔란티어는 콜로라도로 엑시트 한 적이 있다.

태생적으로 마을=기업=자치를 선호하는 이들이 꿈꾸는 유토피아는 국가도 은행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마을회의나 시민의회 등 주민 자치 또한 손사래를 친다. 오로지 단 하나 ‘수학’이라고 하는 우주에서 가장 아름답고 단순한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체제를 염원한다. 우주를 관장하고 관통하는 보편적 법칙에 귀의하기를 소망한다. 인간들의 인위적인 판단과 어슬프기 짝이 없는 협의와 합의로 작동하는 민주주의는 너무나도 구태의연하다. 그 모든 인간적 오류가 거듭된 오작동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에게는 탈인간적 시스템, 바꿔 말해서 자동화 프로그램이 민주주의를 배제해가는 수학의 왕국이 필요하다. 인간들이 스스로 다스릴 수 있다는 낭만적 휴머니즘에서 벗어나서 탈정치화 프로그램을 장착시키자는 것이다. 제발 너 자신을 알라, 인간을 만물의 영장에서 끌어내리고 이성의 왕좌에서 몰아내자는 것이다. 법의 정신, 법학을 대신하여 우주의 법칙, 수학을 불러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급진적 반동주의는 신묘하게도 나날이 신학의 요청과도 흡사해지고 있다. 진리 추구보다는 섭리에 귀의한다. 입법-사법-행정의 삼권분리가 아니라 수학-법학-신학의 삼위일체를 희구한다. 견제와 균형이 아니라 지고의 권력에 눈을 감고 무릎을 꿇으며 아멘, 하고 기도를 올린다. 하여 뉴아메리카는 미국 2.0이라기보다는 로마제국 2.0, 디지털 기독교제국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나니, 테크노-창세기, 미국판 원시반본(原始返本)이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넘어서 코딩으로 운영되는 수학의 제국(Datacracy)을 만들고자 하는 물질개벽의 시도는 알렉스 카프를 통해서, 민국과 왕국 넘어 신국(神國)을 탐구하고 있는 정신개벽의 풍경은 JD 밴스를 다루면서 더 자세히 논하겠다.)

물론 250년 하중의 미국 1.0, 올드아메리카의 관성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연방정부를 해체하여 중세풍 도시국가 체제(United Poleis of America)로 전환시키려는 내란선동은 자유민주공화국을 수호하려는 헌정세력들에 의해 진압될지도 모른다. 22세기의 디지털리스트와 18세기의 페더럴리스트의 전면적 충돌이 내란을 촉발하고 미합중국의 붕괴를 야기할지도 모른다. 과연 역사가 증언하는 바, 일국가 일체제가 300년 버터기가 녹록치 않았다. 그리스의 민주정도 로마의 공화정도 결코 오래 가지를 못하고 고꾸라졌다. 도리어 지상의 천국, 천년의 왕국을 지속한 것은 바티칸의 교황이 도덕적 권위로 훈시하는 중세였던 바이다. 과연 신중세가 도래할 것인가? 테크노 창세기의 복음이 자유의 여신상을 끌어내릴 수 있을까?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틸은 이미 또 다른 백업 플랜을 마련해 두고 있다. 일찍부터 해상도시를 구상했던 바이다. 바다를 떠다니는 인공적인 자치국가를 만들어보고자 했다. 지구의 70%인 바다는 육지를 점령해버린 민속풍 정치에서 완전히 벗어나 색다른 거버넌스를 실험해 볼 수 있는 무주공산이다. 그래서 2008년 4월, 시스테딩 연구소(Seasteading Institute)를 세웠다. 소장으로 앉힌 이는 당시 서른 네 살의 패트리 프리드먼이다. 전직 구글 엔지니어이자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손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나 더, 뉴질랜드도 있다. 뉴질랜드야말로 태평양과 인도양 사이에 떠 있는 해상도시국가, 율도국(栗島國)이 될 수 있다. 틸은 진작에 시민권을 취득하고 거대한 땅을 사두었다. 정녕 자유민주공화정이 이대로 장기 지속하여 미국이 폭망하고 문명이 붕괴되고 만다면, 뉴질랜드로 이주해서 인류의 리셋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그 뉴질랜드의 저택에는 패닉룸까지 갖추었다. 금괴도 모아두었고, 무기도 쌓아 두었다. 핵전쟁, 전염병, 소행성 충돌, AI의 지배 등등 근대 문명의 붕괴 이후까지 대비해 둔 것이다. 틸은 수명연장기술에도 어마어마한 돈을 투자하고 있다. 몰락 이후에도 기어코 살아남아서 기필코 신천지를 이루고야 말겠다는 신심과 야심이 징글징글하고 어질어질하다.

틸이 엑스트의 끝자락에 마련해둔 아지트의 위치를 살피노라니 피식 웃음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가보았던 곳이다. 내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공간이다. 뉴질랜드 남섬의 호수 도시 와나카(Wanaka)이다. 너무나도 맑고 깨끗하고 투명하고 아름다운 장소라서 은퇴하면 이런 곳에 머물며 책 쓰면서 살면 좋겠다 여겼다. 2020년 새해, 두어 달 뉴질랜드를 떠돌았다. 이제 보니 틸이 투자하여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낸 Airbnb를 줄곧 이용하며 다녔다. 지구법을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토착적인 원주민 사상에 입각하여 타라나키 산에도 왕가누이 강에도 법적 권리를 부여한 신문명국가를 공부해 보고 싶었다. 나는 지속가능한 문명을 탐구하기 위하여 뉴질랜드를 찾았는데, 틸은 문명 붕괴 이후의 재건을 도모하기 위하여 뉴질랜드를 점 찍었던 셈이다. 복기하노라니, 여전히 문과 티를 벗어나지 못했던 무렵이다. 그래서 겨우 법의 재설계, 지구법에 빠져들었다. 팬데믹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과학과 공학 공부에 제대로 몰두했었고, 이제는 수학으로 법학을 대체하려는 저들의 시도와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틸은 2009년 <자유지상주의자의 교육>(The Education of a Libertarian)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미래를 개척할 프런티어로 세가지 방향을 제시했다. 첫째가 가상이요, 둘째가 해상이요, 셋째가 천상이다. 가상은 사이버월드이고, 해상은 수상도시이며, 천상은 우주를 가리킨다. 내가 여전히 지구법을 붙들고 지상을 전전하고 있을 때, 그들은 10년도 더 전부터 가상-해상-천상을 넘나들며 삼체문명을 탐험하고 있던 것이다. 가히 모험가와 발명가의 나라, 천조국 미국의 저력이리라.  

틸 못지않은 천상계의 야심가가 미국에 또 한 명 있으니, 그가 바로 일론 머스크이다. 운명처럼, 숙명처럼 페이팔을 함께 창립했던 바로 그 친구이다. 동업자이자 라이벌로서 둘은 퍽이나 닮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다른 결의 인간이다. 틸이 자숙에 익숙하다면, 머스크는 자학을 즐긴다. 틸이 리스크를 고려하여 분산한다면, 머스크는 리스크를 감당하며 극한까지 몰아붙인다. 틸이 작전을 짜는 전략가라면, 머스크는 앞장서서 돌파하는 선봉장이다. 틸이 전체를 바라보는 지휘자라면, 머스크는 선발대를 끌고가는 선동가이다. 틸이 투자자(invest)라면, 머스크는 발명가(invent)이다. 머스크는 틸이 소시오패스라고 생각하고, 틸은 머스크를 사기꾼이자 허풍쟁이라고 여긴다. 두 사람이 페이팔을 매각하고 백만장자가 되었을 때, 머스크는 곧장 값비싼 경주용 자동차를 샀다. 틸을 조수석에 앉히고는 풀 악셀을 밟다가 교통사고를 내고 만다. 머스크는 아직 보험에도 들지 않았다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껄껄거렸다. 천성으로 틸보다는 머스크가 트럼프와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끊임없이 X에 멘트를 날리고 유치한 밈도 포스팅할 수 있는 관종이야말로 디지털 민주주의에 친화적이다. 2016년 틸을 대신하여 2024년에는 머스크가 전격 등장한다. 정면 돌파에 능숙한 돈키호테가 총대를 맨 것이다.

머스크는 뉴질랜드 같은 레버리지를 도모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푸른 행성 지구의 대안으로 붉은 행성 화성의 개척을 상상하는 쪽이다. 살아생전 기필코 ‘화성의 제왕’이 되어서 우주의 암흑 속에 하얀 뼈를 묻고 싶어한다. 지구별 생명의 불꽃을 암흑물질에까지 널리 흩뿌려서 찬란한 우주생명학을 창조하고 싶어한다. 틸처럼 패닉룸에 숨어들어 지구의 재건을 플래닝(planning)하기보다는 인류의 씨앗을 여러 행성에 플랜팅(planting)하여 신생인류 X들의 우주문명 XXXXX들을 창발시키려는 것이다. 그는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에는 도저히 만족할 성미가 못된다. 멈추면 결코 볼 수 없는 것들을 더 빨리 더 많이 더 멀리 보고 싶어 발정이 난 사내이다. 브레이크 페달이 없는 극악한 초가속주의자이자 극단적인 초장기주의자, 일론의 질주를 탐구할 차례이다.







이병한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개벽학은 동학 창도 이래, 이 땅의 자각적 사상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겠다는 뜻이다. 동녘의 오래된 유학과 서편의 새로운 서학이 합류한 문명의 융합을 거대한 뿌리로 삼는다. 그러함에도 한국학, 한 나라에 한정되지 않는다. 북구부터 남미까지, 인도양부터 시베리아까지, 지구적 규모로 정보를 수집하고, 지구적 단위로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특히 인간이 창조한 인공의 세계, 인공지구와 인공생명과 인공지능의 도래를 주시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간의 공진화, 생명과 기술과 의식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