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32. 일상과 혁명이 함께 할 수 있는 이 도시의 공공공간은?
마라훠궈나 판다로 연상되는 쓰촨성 청두(成都)는 사실 중국을 대표하는 ‘슬로우시티’이다. 촉(蜀)의 수도이기도 했던 이 지역은 천혜의 요새이면서 비옥한 청두평원 덕에 이천년간 장강 상류의 문화와 상업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두보초당(杜普草堂)과 같은 역사적이고 아름다운 장소를 배경으로 촬영된 정우성 주연의 영화 ‘호우시절(好雨時節)’에서 그 분위기를 살짝 맛볼 수도 있다.
청두는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한 탓에 하류의 동남연안도시들로부터 서방문물의 전파는 다소 늦었지만, 거리의 찻집(茶舖)을 중심으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기 전인 20세기초 50년간 중국의 전통인문사회에 기반한 독특한 도시공동체와 공공공간 문화를 창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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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집(茶館)은 중국 역사상 당나라 때부터 존재했는데 차를 재배할 수 있고 경제가 발달한 남방지역을 중심으로 대중화한 반면 북방의 평민들은 맹물을 더 선호했다. 지역마다 찻집의 기능과 문화가 달랐다. 베이징은 원래 극장(戲院)이 찻집으로 발전한 경우인데 주로 지식인과 노인들이 찻집을 즐겨 찾았다. 양저우(揚州)는 오전 찻집이 오후에 공중목욕탕으로 변신했고, 광저우의 호화로운 차러우(茶樓)는 차보다 딤섬을 즐기는 상인과 중산층 주민들의 접대와 회합 장소로 환영받았다. 상하이는 이미 19세기부터 여성들이 찻집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는데, 민국시기 상하이의 지식인과 문화인들은 카페를 더 선호했기에 전통적인 라이프스타일을 대변하는 청두의 찻집과 대비가 된다. 이러한 지역적 차이는 차를 마시는 행위를 다르게 표현한 것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북쪽이 허차(喝茶), 남쪽은 얌차(飲茶)인데, 쓰촨은 츨차(吃茶)라고 한다. 여기서 현대중국어의 ‘먹다’라는 의미의 동사 츨(吃)은 우리도 잘아는 조주선사의 ‘끽다거’(喫茶去)나 일본어의 다방에 해당하는 ‘킷싸텐’(喫茶店)에 사용된 한자인 끽에서 유래한 글자이다.
청두에 유독 찻집이 많아진 이유는 생태환경 때문이다. 성내에는 마실 수 있는 물이 귀하고, 땔감이 부족했다. 우물물은 알칼리 성분이 많아 맛이 쓰다보니 음용수로 부적합했다. 대신 성밖의 강물을 퍼날라 식수로 사용했는데, 동네 찻집에서는 늘 뜨거운 물을 살 수 있었다. 또 대체적으로 길이 좁아서 우마차나 수레대신 멜대로 짐을 나르다보니 짐꾼들도 잦은 휴식이 필요했고 찻집이 노정에 있었다. 성밖 청두평원의 향촌마을은 다른 지역과 달리, 농가가 드문드문 떨어져 있어 촌락이 형성되지 않았다. 대신 주기적으로 시장에 나와 필요한 물건을 거래하거나 사람들과 교류를 했는데, 이를 위해 사교장소가 필요했다. 수리와 관개가 잘돼 있어 농사에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됐고 긴 농한기에 농민들이 오랜 시간 차와 잡담을 즐길 수 있는 여유로움도 찻집의 발전에 한몫했다.
청두는 차를 재배하기에 좋은 환경이라 생산량이 많았지만, 외부로 차를 수출하기에는 교통이 불편해 운송 비용이 높았다. 과거 차마고도를 통해 청두의 차를 수입하던 티벳 등지에는 인도에서 재배한 값싼 차가 들어오면서 수요가 줄어, 쓰촨 자체의 내수를 늘일 수 밖에 없었다. 청두에서 찻집이 발전한 이유는, 상대적으로 제한된 일부 자원을 공유할 필요성과 전반적인 풍요로움이 선사한 느긋한 정서가 있고, 결과적으로 여기서 생겨난 특유의 라이프스타일이 함께 한다. 그래서 청두 사람들은 청두의 삼다(三多)가 한량(閑人), 찻집 그리고 화장실이라는 자조적 농담을 자랑스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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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두에는 길목과 사당, 신당(廟宇), 도교사원(道場), 공원 등 어떤 공공장소에도 찻집이 생겨났는데 늘 5~600여개 수준을 유지했다. 찻집안에서 장사를 하려는 소상인들을 모집해 보증금을 받고, 이를 레버리지 삼아 무자본 창업을 하는 것도 가능했다. 찻집을 운영해 큰 돈은 벌 수 없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찻집이 만들어 준 거대한 서민형 경제생태계 속에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찻집에 직접 고용된 이들도 있었지만, 물담배, 이발, 발안마, 점치기, 각종 스낵을 파는 사람들, 깨진 찻잔을 이어붙여 수리하는 장인들 그리고 전통민간예인들이 그 안에서 살아갔다. 심지어 찻집 주위의 분식점과 정육점도 중요했다. 간단히 점심을 때우고 카페로 향하는 오늘날 서울의 직장인들처럼 청두시민들은 식후 찻집을 즐겨 찾았다. 고기를 손에 들고 귀가를 서두르는대신 찻집에 굳이 들른 것은, 당시에는 귀했던 식재료를 구매할 수 있는 경제력을 자랑하려는 ‘서민적 허영심’때문이었다.
찻집의 영혼은 차박사(茶博士, 중국에서는 당송시기부터 여러 직업들을 관직에 빗대어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로도 불리던 홀매니저(堂倌)였다. 이들의 접대 기술이 단골 차객(茶客)을 많이 끌어모으는 비결이었기 때문이다. 손님들은 지인이 차관에 나타날 때마다 서로 찻값을 대신 내겠다고 나섰는데, 밥과 술을 사겠다고 카드를 쥐고 계산대 앞에서 몸싸움을 벌이는 한국 사람들과 몹시 닮아 있다. 하지만, 홀매니저들은 그들의 동작과 목소리를 보고, 이 호의의 표현이 진심인지 그냥 체면을 세우기 위한 시늉인지 파악할 수 있어야 했다.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의 찻값을 내겠다는 말을 하면, 인사치레일뿐이고 그냥 각자 계산을 하겠다는 말이었다. 만일 정말 대신 차값을 내어 주는 경우엔, 연령 등 여러가지 요소를 고려해서 누구의 돈을 받아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는 노련함이 필요했다.
찻집은 걸인부터 노동자, 문인과 부유한 상인들을 포함한 다양한 배경과 계급을 가진 이들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었다. 물론 향우회나, 동일업계 종사자 등 친분과 이해관계가 비슷한 사람들이 각자 즐겨 찾는 찻집들이 나뉘기는 했다. 차한잔만 시켜 놓으면 하루 종일 앉아있어도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고 차를 마시지 않는 아이를 동반해 한자리를 차지하게 할 수도 있었다. 마시던 차를 ‘킵’하게 하고 볼일을 본 후, 다시 돌아 올 수도 있었다. 골목에서 뛰놀던 아이들이나 가난한 차객이 홀매니저의 묵인하에 다른 손님이 남겨놓고 떠난 차로 목을 축일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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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발발전에는 매일 성내 인구의 1/4인 10만명이 이곳을 찾았고, 후방의 중심이 돼 각지의 피난민이 몰려온 후에는 이 숫자가 12만명에 이르렀다. 가장 다수의 차객은 찻집 근처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다. 외지출신에 단칸방살이를 하는 이들이 이른 아침 일터로 나가기전 세면과 고단한 하루의 노동을 마친후 세족을 할 따뜻한 물과 차한잔의 여유를 찾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일거리나 비즈니스 기회를 찾는 이들에겐 미팅과 접대 공간이기도 했는데, 청두에선 손님이 왔을 때, 집에서 차를 마시기보다는 함께 근처의 찻집을 찾았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집에서 식사대접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피할 수 있었다.
찻집의 단골중엔 반청복명(反清復明)의 비밀결사이자 어둠의 세계를 지배하는 파오거(袍哥)들도 있었다. 이들은 정부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쓰촨, 청두와 인근 향촌 기층사회의 실제적 치안 책임자였다. 소수의 전업 파오거가 각자의 ‘나와바리 영역’(碼頭)과 ‘아지트’(公口)에서 벌어들이는 그들의 수입원은 애경사, 보호비, 감사비 그리고 토지와 점포거래, 각종 활동의 수수료였다. 도박장, 극장, 찻집의 운영에 참여해 보호비를 받기도 했고 아편거래에도 관여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조폭으로 진화하기 이전, 회색지대에 존재하던 강호의 협객과 건달, 일본의 초기 야쿠자를 연상하면 된다. 원래 하층민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자위 조직이다. 물론 건달중에는 양아치들이 있는 것처럼 약자를 괴롭히는 소수의 무리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내부 규율이 엄격하여 약자나 부녀자를 괴롭히거나 유교적 윤리를 위배하는 이들에게 자살을 명하는 등 매우 엄히 다스렸다고 한다. 이들은 찻집에 앉아 분쟁이 발생한 사람들의 화해조정자 역할을 맡기도 했는데, 이를 찻집재판(吃講茶, 茶館講理)라고 부른다. 일종의 민사재판을 열어, 폭력사태를 예방한 것이다. 청두사람들은 혼란한 시대에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 관료를 찾기보다 이러한 민간재판에 더 의존했다. 당연히 이 민간판사 역할은 지역향신에게 맡겨지기도 했지만, 쓰촨지역은 파오거가 많았다고 한다. 찻집이라는 공간의 공공성이 관청보다 더 강력한 신뢰의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고 볼 수도 있다. 파오거의 질서유지 능력 덕분에 청조말기 농민반란이 잦았던 다른 내륙의 성들과 달리, 쓰촨의 지역사회는 상대적으로 안정을 유지했다고 한다. 이들이 신해혁명을 전후해서 크게 활약을 한 덕분에, 한동안 공개조직으로 전환한 적도 있고, 한때 쓰촨지역 성인 남성의 30~50%가, 충칭에서는 70%가 이 조직에 가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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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집은 청두지역 거의 모든 민간대중예술의 발상지이다. 심지어 초기 영화관 구실을 하기도 했다. 이중에서도 이야기꾼(說書人)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이들의 스토리텔링(評書)은 삼국연의나 악비전같은 영웅설화와 역사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는데 충, 효, 정절 등과 같은 전통적 유교가치를 내면화하고 있었다. 지방정부와 신교육을 받은 개화엘리트들은 찻집을 “전통사회의 낙후와 게으름을 상징하는 대중문화 구악의 온상”으로 치부했다. 이들은 심지어 일본과 유럽의 희곡들은 정식고등교육을 받은 작가들의 작품이지만, 청두의 전통적인 찻집 연극은 무지한 유랑 예술가들이 쓴 저속하고 통속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식으로 편견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런 연극들은 남녀간의 사랑과 연애, 심지어 치정과 살인 등을 다룬 내용도 있어 퇴폐와 엽기문화로 규정되고 공연이 금지되기도 했다. 그래서 각본과 공연을 검열하고, 신사상을 불어 넣도록 개작하여 계몽의 수단으로 삼으려 했다. 정부의 찻집비판은 시민을 산업활동에 전념해야 하는 노동요소로만 보는 근대국가 이데올로기와도 연관이 있다. 생산해야 할 시간에 찻집에서 “시간을 죽이는” 노동자를 국가가 눈뜨고 봐줄 수 없는 것이다. 최근 중국에서 벌어졌던 공산당의 탕핑(躺平)비판이나 교육부는 경제부처라고 규정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인식수준은 동아시아 국가의 일부 엘리트들이 100년이 넘도록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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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들은 서구의 근대화와 진보 이념을 추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젊은 여성 차객의 출입을 제한하고 여성 매니저(女茶坊)들을 차별하는 가부장적 가치관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찻집은 여성에게 개방된 이 도시 최초의 공공공간이었고 상하이 피난민들이 들고 온 신풍조가 이 흐름을 가속화했다. 여성 홀매니저들은 차별과 편견, 끊임없이 이어지는 성희롱과 반대급부적 비난(이 직업군을 기녀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 사람도 많았다. 그래서 이들은 “본래 품행이 방정하지 않아서 희롱의 대상이 되도 싸다!”)속에서도 갈수록 인기를 끌었다. 최전성기인 1939년에 청두에는 400여명의 여성 홀매니저가 있었는데, 찻집노동자조합(茶事業職業公會)의 조합장으로 당시의 ‘알파걸’인 링궈정이 선출되기도 했다. 그는 업계에서 여성매니저들에게 자신의 위치가 위협당하고 있다고 느낀 남성조합원들의 ‘백래쉬’와 모함으로 결국 자리에서 밀려났다. 이때부터 찻집의 여성천하시대가 저물기 시작했고, 1945년 성정부의 금지에 따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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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와 함께 전근대적 유산으로 공격당한 것은 평민들의 종교생활이었다. 엘리트들에게는 미신으로 간단히 치부됐지만, 스스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가해한 인생유전을 풀어주는 주술적 요소들이, 고단한 삶에 지친 민중에게 제공하는 안위의 가치를 지나치게 경시한 점도 없지 않다.
찻집은 당대의 소셜미디어기능을 겸했는데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개의치 않고 말을 섞을 수 있었고, 정치적 뒷담화도 자유로와 지금의 유튜브 논객을 방불하는 ‘찻집정치가’들이 등장했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난 청두의 민간철도지키기(保路)운동은 엘리트와 민중이 연대한 최초의 사건으로 같은 해 벌어진 신해혁명(1911)의 도화선이 됐다.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경멸하던 ‘어리석은 민중’이 정치적 도구로 유용하다는 사실을 인식했고 거리의 문화는 일상생활에서 정치참여로 전환됐다.
1916년 황제를 참칭했던 위안스카이가 사라지고, 윈난(滇軍)과 구이저우(黔軍), 쓰촨(川軍)등의 서남지역 군벌들이 세력 다툼을 벌이는 가운데 1917년에 벌어진 청두의 시가전에서 많은 시민들이 목숨과 재산을 잃었다. 혁명후 악화된 생존환경 때문에 평민들은 이를 지지하지 않았고, 대신 예전처럼 자치와 상호부조에 의한 자구책을 모색해야 했다. 무능한 정부는 시민을 버리고 도망쳤다가 슬그머니 되돌아와 다시 자치권을 박탈했다.
자유로운 여론을 혐오한 국민당 정부는 찻집에 밀정을 심어 정보를 수집하고 민감한 정치적 토론은 금지시켰다. 대신 정부 선전을 위한 연단이 설치되고 정치구호를 담은 자보가 나붙었다. 1942년 장개석이 충칭으로 들어와 쓰촨성 성장을 겸하게 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노골화됐고, 이 사례는 중국 역사 최초로 치밀하고 적극적으로 조직된 대규모 정부 프로파간다 정책에 해당한다. 이 당시에 <<찻집선전의 이론과 사례>>라는 교범이 출간되기도 했다. 전시의 국가 이데올로기가 강화됨에 따라, 전선에서 장병들이 피흘리고 싸우는 동안 찻집에서 노닥거리는 피난민 차객들은 더욱 적극적인 비판과 탄압의 대상이 됐다. 찻집은 정치 선전의 장으로만 허용이 돼, 심지어는 신문열람이나 장기를 두는 행위조차 금지됐다.
청두가 고향인 <그 길가 구석 찻집(那間街角的茶舖)>, <사라져가는 옛도시(消失的古城)>의 저자인 역사학자 왕디(王笛)는 도시의 고유한 매력은 다양성과 포용성 속에서 생겨남을 강조한다. 옛도시의 거리와 찻집이라는 공공공간에서 전통과 신문물, 중앙과 지방, 엘리트와 평민, 그리고 민간의 자치능력과 제도적 국가권력의 균형이 무너질 때 사라져 간 것들을 상기한다.
청두지역사를 오랜 기간 연구한 저자는 원래 영문판으로 발표된 관련 학술서적으로 유명하다. 그가 미국의 Texas A&M대학에서 중국령 마카우대학으로 돌아와 최근에 출간한 위의 두 책은 대중들을 위한 교양서이다. 그의 학술서 중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부터 현재까지 찻집의 역사를 다룬 것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저술은 1949년 이전만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공산당 정부 집권하의 찻집의 변천에 대한 서술은 많지 않은 편이다. 영문판 저서가 몇년전 출간됐고, 최근 홍콩에서 중문판이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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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국가, 중앙, 엘리트, 근대와 계몽, 그리고 혁명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민간과 지역의 문화, 평민들의 자율과 자치, 그리고 전통이 만들어 낸 토착적 공공성과 일상의 의미를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지역의 문화가 국가의 문화를 구성하는 근본이기 때문에, 국가의 주류문화가 지역문화의 다양성을 압도해버리면, 결과적으로는 국가의 문화도 그 고유함이 소실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프랑스대혁명과 신해혁명을 비교하면서, 충분히 무르익지 않은 계몽은 일상의 요구를 혁명으로 승화시켜도, 혁명이 끝난 후 다시 일상의 진보와 평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민중이 지지를 철회했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도 지적한다.
또, 근대국가의 기획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유익은 공짜가 아니라, 일상의 자유를 희생한 대가라는 사실도 지적한다. 청두에는 1903년 일본의 것을 본뜬 경찰 제도가 도입되면서, 근대적 지방행정이 시작된다. 1928년 시정부가 공식적으로 만들어지기 전까지, 경찰은 치안과 방범 외에도 교통, 식품과 거리의 공공위생, 인력시장을 포함한 상거래 행위, 거주지 기반의 인적사항 등기, 공공공간에서의 여론관리 등 광범위하게 일상생활의 디테일을 통제하게 된다. 전통 왕조 국가는 행정력의 한계로 징세와 기본적 치안 정도 밖에 관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선입견과 달리 보통 사람들의 커뮤니티내 일상생활에서 폭넓은 자유가 보장된 것과 대조된다. 이러한 자유속에서도 자치를 가능하게 한 것은 향신이나 파오거와 같은 지방엘리트들과, 종교기관, 자선단체, 업종을 중심으로 조직된 행회(行會), 연고지역을 중심으로 뭉치는 회관(會館)과 같이 다양한 행위자들과 촘촘하게 얽힌 이들의 네트워크였다.
중국의 국민당을 포함한 동아시아 초기의 근대국가와 집권정당들은 이 생태계를 대체하면서 관리와 통제를 강화했지만 민주주의를 구현할 역량은 부족하여 실질적으로는 개인의 권리와 복리의 향상 모두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내전과정에서는 적수였지만 거버넌스의 내용적으로는 국민당을 계승한 공산당 정부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못하는 것은, 전통과 불완전한 근대의 유산을 계속 짊어진 채 가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요소들이 균형을 유지하면서 발전하기에는 내외적 상황이 너무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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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디 교수는 국민당의 역사적 과오를 맹렬히 비판하지만, 사실 내용을 뜯어 보면, 국민당을 공산당으로 바꿔 불러도 상황과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수많은 저술을 도왔던 2000년대 초반 청두의 자유롭던 분위기가 지금은 되려 사라져버린 현실도 넌즈시 언급한다. 청두시 기록관 아카이브를 마음껏 열람하고 복사해서 1차 자료로 사용했는데, 오히려 지금은 모든 자료의 열람에 허가가 필요해서, 실질적인 연구가 불가능해졌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중국 정부가 ‘역사허무주의’를 방지한다는 구실로 연구자들의 이용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역사허무주의라는 표현은 서구와는 다른 정치경제적인 발전 경로를 따라온 중화문명의 역사를 서구중심주의에 기반해서 ‘봉건’ 혹은 ‘전제’사회라는 식으로 간단히 규정함으로써, 역사발전에 대해서 왜곡된 관점을 갖게 한다는 중국학계의 주장이다. 그는 정보와 사료의 자유롭고 공개적인 유통을 막는 것이 역사에 대한 입체적인 이해를 방해하여, 오히려 역사허무주의를 부추길 것이라고 진단한다.
이렇게 보면 중국의 도시문화와 공공의 미래에 대해서 암울한 전망만이 남을 것 같지만, 성급히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인내심을 가지고 역사의 변천을 지켜 볼 일이다. 현대판 개화사상인 자유민주주의 담론이 주도하는 한국사회도 과연 앞서 언급한 요소들의 균형을 유지하며 발전해왔는지 크게 의문이 든다. 중국 못지않게 커다란 역사적 단절들과 이에 뒤따르는 추동이, 매번 사회에 충격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예를 들어 박원순 서울이 오세훈의 백래쉬를 맞고 있는데, 박원순조차 그가 사랑하던 마을보다는 “글로벌 도시로서의 경쟁력 강화”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던 후과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갈수록 강화되는 서울중심주의가 지역문화를 소멸시키고, 그 자신이 납작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서울이나 한국 전체의 문화도 퇴행할 수도 있다는 불안을 떨치기 힘들다. 아니 퇴행을 넘어 출생률의 극단적인 하락이 진행되는 현실은 솔직히 암담하다.
*필자는 2015년 거주지를 찾기 위해 중국 전역을 반년간 여행하면서, 청두를 유력한 후보지로 삼고 한달을 머무른 적이 있다. 여행을 준비하기전 들었던 슬로우시티 청두에 대한 전설같은 로망이 있었고, ‘호우시절’ 영화가 이런 판타지를 증폭시켰다. 중국 사람들이 흔히 농담으로 이르기를 비행기가 청두 상공에 도달하면 찻집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의 마작이 다그르륵 구르는 소리와 히히하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과연 청두에는 어디에 가도 찻집이 있고, 찻집마다 차객으로 넘쳤다. 차실茶室, 차탄茶攤, 차펑茶棚, 차팡茶坊/茶房, 차셔茶社, 차유엔茶園, 차팅茶亭/茶廳, 차로우茶樓, 차푸茶舖 그 명칭도 다양하다. 나는 지금도 청두라는 도시와 유쾌하고 인정많고 호방한 쓰촨사람들에게 상당한 호감을 품고 있는데, 그럼에도 이곳을 거주지로 정할 수는 없었다. 위장이 약한 나는 맵고 화끈한 본고장 마라맛 음식들이 견디기 힘들어고, 무엇보다 늘 안개와 구름이 낀 날씨때문에, 한달 가까이 햇볕을 보기 힘든 날씨도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가끔씩 쓰촨 음식을 생각하면 군침이 돌기도 하고, 쓰촨과 청두로 여행갈 기회를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