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2023년 1월 12일

33. 현대의 나관중, 마작가 미드에 ‘삘받고’ 삼국지를 새로 쓰다



출처 : sensor tower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자로 공식선거운동을 시작하던 날 “제 주변의 부패도 읍참마속泣斬馬謖하는 대통령이 될 것”이라며 큰소리를 쳤다. 그런데 그의 당선에 적지않은 기여를 한 2030세대는 과연 이 사자성어의 의미를 알아들었을까? 소설 삼국지(三國演義)를 읽어보지 않았다면, 제갈량이 가정전투에서 군령을 어기고 경솔한 작전을 펼쳐 북벌의 실패를 자초한 ‘최애‘부하 마속을 눈물을 머금고 참수했다는 이야기를 모를 수도 있기에 하는 말이다.     

인터넷 작가로 출발해 역사미스터리, SF, 환타지 등 온갖 장르를 넘나들며 뛰어난 입담을 선보여 ‘문학귀재(鬼才)’로 불리는 작가 마보융馬伯庸은 <조연삼국지三國配角演義>라는 연작소설에서 이 사자성어와는 또다른 결말을 선보인다. 마속이 친구로 여기던 정적의 음모에 빠져 패장의 누명을 쓰게 됐으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가 훗날 복수에 성공한다는 이야기이다. 역사서 삼국지(三國志)에는 그가 도망쳤다거나 옥사했지, 참수형에 처해졌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다양한 역사서들과 당시의 생활/풍속사 지식, 그 빈틈에 대한 합리적 추론을 바탕으로 삼국지와 동시대의 시부詩賦 등을 여덟가지 에피소드로 새롭게 풀어낸다. 지(知)략의 상징 제갈량을 비롯해, 인(仁)자한 덕장 유비현덕, 충절과 의리의 무(武)인 ‘상남자’ 관운장, 용(勇)기있고 늠름한 조자룡, 간웅 조조 등 중화문화속에 박제된 영웅들과 그들이 상징하는 이념적 기호를, 또 다른 조연급 인물들의 감춰진 역할을 통해 재해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중 위진남북조시대의 대표적 문학시가인 《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와 《낙신부洛神賦》를 토대로 쓴 두 편의 작품은 문체를 비롯한 다양한 실험성이 인정받아 순수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삼국신어新語>편도 역시 당시 시정의 여러 이야기를 묶어 전하던 고전 《세설신어世說新語》의 문체를 활용하고 있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후한後漢말의 역사 삼국지를 토대로 천년후 나관중이 명나라 때 소설 삼국지를 썼듯이, 그는 이천년후에 다시 자신만의 삼국지외전을 쓰고 있는 셈이다. 이 소설에서 역사적 사실을 들어 자신의 추리를 꼼꼼하게 논증하는 그의 서술방식은 문학계에서 고증考證문체라고 불리기조차 한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새롭게 풀어낸 이야기 모두 여전히 기존의 삼국지가 가진 영웅과 책사, 미녀들을 둘러싼 영토와 권력 다툼의 서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에, 새로운 역사해석이라고 보기에는 많이 미흡하다. 실험적 작풍은 추리력과 상상력, 그리고 고전 문체를 활용한 지적유희에 그치는 것인가?

그림1) 《낙신부洛神賦》는 <7보시>로 유명한 조조의 아들 조식曹植이 지은 시부詩賦이다. 그림은 시에 영감을 받아 후대에 그려진 것이다.

마보융의 작품들은 이미 상당수가 한국에 번역 소개돼 있다. 만주족 출신에 뉴질랜드 유학파로 외자기업에 십년간 근무했던 그는 사실 서구 대중문화의 애호가이다.  데뷔작 <풍기농서風起隴西>는 미소냉전 시기를 다룬 프레데릭 포사이스의 첩보소설을 삼국지이야기에 녹였다. 최고의 히트작 <장안24시長安十二辰>는 미드 열풍의 원조격인 <24>를 당나라 현종시대 장안으로 무대를 옮겨 뛰어난 상상력으로 재창조한 작품이다. 가상도시 장안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소설 <용과 지하철>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진한 향기가 느껴진다. (그는 원작의 제목에서 중국어휘 ‘지철地鐵’대신 일본식 표현 ‘지하철地下鐵’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서구의 현대대중문화를 완벽히 소화해서 중국 고전의 배경속에 천의무봉으로 재현한 것이다. <풍기농서>를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그는 김용의 작품과 같은 중화문학계의 무협이나 역사물과 달리 일부러 번역체를 사용해서 이 기막힌 조합을 명확히 표시했다고 한다. 

그림2) <장안24시>의 장소경은 미드의 고전 <24>와 잭 바우어를 떠올리게 만든다

조연삼국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그의 작품들은 문체의 긴장감이 넘치고, 이미지 재현성이 풍부하기 때문에 대개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됐다. 그중 <풍기농서>와 <장안24시>는 드라마가 한국에 소개됐다. 특히 <장안24시>는 거액의 제작비와 화려한 출연진의 면면에 힘입어 중국내에서 높이 평가를 받았다. 한한령의 공백속에 스토리텔링과 기술적인면에서 일취월장한 중국 드라마의 대표작으로 꼽힐만하다. 결과적으로 중국 시청자들의 ‘국뽕’을 고취시키지만 실은 동서문화 요소가 결합됐기 때문에 이런 수작이 나온 것이다. 마치 K-문화가 다양한 문화적 요소를 섞어 잘만든 짬뽕이기 때문에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작년에는 <조선구마사>라는 드라마의 지나친 중화풍이 큰 비판의 대상이 됐지만, 올해 나온 <외계인>이나 <환혼>은 그보다 더 심한 수준으로 중국의 문화적 요소를 사용해도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 애초에 학술적 역사기록이 아닌 대중문화의 표현영역에서 다양한 문화적 요소를 차용하는 것을 과도하게 나무라는 것은 정통성에 목매는 문화적 권위주의와 편협한 민족주의에 불과하다. 중국에서도 최근 가상역사 드라마의 고증이 불성실하다거나 ‘왜색’이 지나치다는 소분홍 애국주의자들이 비판이 적지 않지만 큰 호응을 얻지는 못한다.  

그림3) SF역사 판타지물인 외계인은 현대와 고려시대를 오가는데, 중화풍이 매우 농후하다.

마보융의 작품은 문체와 장르의 다양한 시도 외에 글에 담긴 메시지도 계속 진화하고 있다. <장안24시>에서는 <24>의 잭바우어와 마찬가지로, 반테러활동이라는 소재에도 불구하고, 국가주의를 비판하고, 국가와 왕조대신 보통사람들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 헌신하는 하드보일드풍의 ‘고독한 영웅’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성당盛唐시기 인구 백만의 수도 장안은 현대의 뉴욕, 런던, 베를린, 토쿄 같은 글로벌 메트로폴리스에 비견할만했다. 때문에 다양한 민족출신의 등장인물을 통해 한족중심주의를 비판하기도 한다. 앞서 거론한 <조연삼국지>보다 훨씬 강한 상업성과 대중성의 엄호속에 한편으로는 진보적 이념을 설파하는 것이다. 그런데, 2019년작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 명나라顯微鏡下的大明>는 아마추어 역사학자이기도 한 그가 이미 말랑말랑한 환상이나 국가이념이 주도하는 서사, 상업적인 영웅활극을 재해석하는 수준을 뛰어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엔 <장안24>의 주인공 장소경이 슬쩍 암시했던 미시사속 보통사람들의 삶을 주제로 삼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다시 거시사와 연결시켜 제도로 표현되는 중앙의 정치와 지역의 생활정치가 어떻게 만나는지 보여준다.

이 이야기는 수리에 밝은 한 군졸출신 평민이 말단회계직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며 지역세금 장부를 살피다가 문제를 발견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다. 한 마을에서 유래가 불분명한 명목의 거액의 세금을 이백년간이나 납부하고 있었는데 제도적 모순과 결합돼 부담이 가중되고 있었다. 그는 마을 주민들을 대표하여 공정한 징세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마을간의 이해가 충돌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각 마을의 향신들과 각급정부 관료들이 개입했지만 수년간 분쟁이 해결되지 못하고 결국 작은 민란으로 사태가 번졌다. 이 사건은 장거정張居正이 추진한 일조편법一條鞭法 개혁요구의 정당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올바른 정치적 명분이 되기도 하지만, 현실에서는 상하로 얽힌 지나치게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때문에 정의롭고 합리적인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설사 정의로운 대의가 존재하더라도 이를 복잡한 현실에 적용하려 할 때, 항상 이상적인 결말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며 선악을 명백하게 나누기 힘든 넓은 회색지대가 존재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그림4) 마보융의 최신작중 하나인 <현미경으로 본 명나라>의 첫 에피소드는 평민지식인 청런칭程任卿이 옥중에서 편집한<사견전서絲絹全書>를 토대로 쓰였다.

하지만 이 과정의 주역으로 몇명의 평민영웅들이 있었고, 이들이 왕조정부를 상대로 투쟁하고 타협하면서 보여준 용기와 끈기, 그리고 지혜는 동아시아가 만만치 않은 민간사회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잘 보여준다. 이 전말이 후대에 다시 역사 논문들과 이 작품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도, 왕조가 편찬한 정사속 한줄 기록이 아니라 투쟁의 주역중 한명인 평민지식인이 옥중에서 남긴 공평무사하고 세밀한 역사기록 덕이다. 윤대통령은 몰라도 한국의 청년들은 마보융을 읽다가 다시 삼국지를 들추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