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34. 글을 마치며
- 시역(侍易), 모심의 주역으로 세계인을 만나고 싶습니다
2015년 제가 50살이 되는 해였습니다.
삶에서 새로운 10년이 시작될 때 여러 상상을 하게 됩니다.
저는 오랫동안 전라남도 곡성의 작은 산골 마을에서 전기없이 촛불밝히고 생태적 삶을 살면서 공부하고 지역에서 농사짓고 농민 운동에 참여하고, 죽곡농민열린도서관을 만들어 어린이 청소년들과 함께 공부하고 지역 어르신들과 시를 쓰며 평화 활동을 해왔습니다.
한국의 마을 공동체 운동을 대표할 성과를 얻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50살이 되던 그 해에 앞으로의 나의 삶을 다시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처럼 사는 건 이제 꼭 내가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역할과 정체성에 대해 깊이 기도했습니다.
오랜 기도 끝에 이런 정체성을 찾았습니다.
‘동아시아 인문 운동가’
앞으로 남아 있는 인생은 한중일대만조선을 연결하고 서로 소통하게 하는 과제를 하며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 일을 하기 위한 도구로 동아시아 의식의 기반을 이루는 공동의 인문 고전을 재해석하고 가르치고 책을 쓰는 작업을 하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 생각을 하고 난 2015년 1월부터 현재 2024년 6월까지 그 생각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습니다.
꾸준히 글을 썼습니다. 이화서원 카페와 페이스북에 연재하는 글을 멈춰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연재가 끝나면 책이 되고 또 책이 되고 했습니다.
그 동안 ‘시로 읽는 주역, 누구나 세상을 바꿀 수 있다.(내일을 여는책), 아름다운 세 언어, 동아시아 도덕경, 동학의 천지마음, 동학편지(모시는 사람들)’ 네 권의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번에 쓴 ‘시역(侍易), 모심의 주역(이하 시역)’도 모시는 사람들 출판사와 출판 계약을 했습니다. 올해 퇴고 작업을 하고 내년에 출판하게 됩니다.
시역은 그 동안 제가 써왔던 모든 책의 통합적 성격을 가지게 됩니다.
주역 안에다 제가 공부해왔던 도덕경, 동학, 논어 등의 생각을 서로 통합해서 담았습니다.
시로 읽는 주역 책이 나오고 난 뒤에 300회에 가까운 1박2일 집중 워크샵을 꾸준히 열었습니다.
비용을 내고, 시간을 내어 한 장소에 모여서 이틀 동안 하는 이런 공부를 이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집이 되지 않았으면 몇 번 하지 못하고 중단했을 건데, 저의 주역 강의는 모집이 꾸준히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요?
주역에는 두가지 내면화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음양 양면성의 통합이고, 또 하나는 동시성입니다.
음양 양면성은 저의 연재를 꾸준히 읽으셨던 분들은 누구나 알 수 있었을 겁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음양, 빛과 그림자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역은 세상 만물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이 양면성을 이해하는데 탁월한 인식 도구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이 양면성을 보는 눈만 가져도 삶의 통찰이 깊어지게 됩니다.
모든 일들은 드러난 것과 드러나지 않은 양쪽에서 다 논리를 다지고 있습니다.
드러난 논리, 합리성, 빛만 읽으면, 드러나지 않은 질서, 불확실성, 그림자를 보지 못하게 되고 삶의 문제를 다층적으로 읽어내지 못합니다.
이제 이런 이야기는 과학의 양자역학에서 다룰 정도로 보편적인 이야기입니다.
시역은 모든 이야기가 두 개의 짝으로 되어 있습니다.
삶의 양면성을 읽고 훈련하기 위한 연습으로 구성된 책입니다.
전부 64개의 이야기가 둘씩 짝을 지어 32개의 쌍으로 구성되어 어느 한 쪽을 읽으면 동시에 다른 쪽을 함께 보도록 구성했습니다.
이번 시역 편집은 이 관점을 일관되게 적용했습니다.
시역 편집은 양면성의 대칭 구조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
32장 목차의 대부분 제목은 대칭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새옹지마(塞翁之馬)’ 이야기에서 좋은 일과 나쁜 일을 바라보는 새옹의 눈은 양면성을 바라보는 통찰을 이해하는 대표적인 이야기입니다.
삶에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의미가 담겨있고 여러 층위에서 읽을 수 있어야 하는데 주역은 하나의 이야기를 여섯가지의 관점에서 또 음양 양면성을 적용하면 12가지의 관점에서 읽게 도와줍니다. 그런데, 이건 기본일 뿐입니다. 음양 양쪽에서 각각 한 개씩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두 개와 세 개의 이야기가 동시에 적용될 수도 있어서 경우의 수로 따지면 하나의 관점을 천 가지 넘는 조합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동시성(同時性)입니다.
동시성은 융 심리학의 중요한 개념어 중의 하나입니다.
융은 1952년에 ‘동시성, 비인과적인 연결 원리’라는 글을 발표합니다.
이 글을 쓰게 된 중요한 동기 중의 하나도 주역의 질문과 답에 대한 의미를 이해시키기 위한 의미도 있습니다.
물론 동시성은 주역을 넘어서는 시간과 공간, 인간의 정신과 물질 세계, 신학과 영성, 양자역학의 동시적 의식 전달 등 이후 수많은 논의와 실험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융과 황금 풍뎅이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융의 환자 중에 융의 치료를 의심하고 잘 받아들이지 않던 환자가 있었는데, 어느날 그 환자가 자신이 꿈에 본 황금 풍뎅이 이야기를 융에게 하고 있는데, 그 순간 창문을 끍는 소리가 나서 융이 창문을 열어보니 황금 풍뎅이가 날아들어 옵니다.
융은 그 환자에게 이 풍뎅이가 당신이 꿈에서 본 황금 풍뎅이가 맞냐고 물어 봅니다.
이 사례는 한 개인의 꿈, 생각, 상상 같은 의식 세계가 실제적인 현실 세계에서 재현된 동시성 사례입니다.
융은 인간의 정신 세계와 물질 세계 사이에는 인과율이 다 적용되지 않는다는 가설을 세우고 인과율이 적용되지 않는 또 다른 영역을 ‘동시성(synchronicity)'이라는 언어를 만들어 자신의 가설을 논증하는 글을 쓰게 됩니다.
저의 주역 수업에서는 각자의 삶에 대해 자신이 지금 맞닿아 있는 중요한 질문에 대해 글을 쓰게 합니다. 일기처럼 자유롭게 씁니다.
보통의 일기와 다른 점 하나는 그 글의 마지막에 ‘하늘의 지혜를 구합니다’ 라는 글을 쓰게 합니다.
그리고, 주역괘를 찾는 가장 단순한 방법인 동전 세 개를 여섯 번 던져서 태양, 소양, 소음, 태음 네 개의 부호를 사용한 여섯줄의 효로 구성된 주역괘를 찾습니다.
여기서부터 동시성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내가 질문한 내용은 대부분 나를 정말 고통스럽게 하거나, 나의 온 마음과 몸을 바쳐 열정을 불태우는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내 삶을 온통 휘감고 있는 그런 정신 세계의 의미가 여섯 번 동전을 던지는 물질적 사건을 거치면 어떤 새로운 의식 세계와 연결되는 경험을 합니다.
저의 주역 수업 후기는 온통 그 순간의 전율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말이 안되는 이 사건, 의미있는 우연의 일치. 동시성의 현존.
이게 세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관점 중의 하나입니다.
이런 일이 한번 두 번 일어난 일이면 그런가보다 하고 말겠지만 저는 이미 300번에 가까운 워크샵 경험을 가지고 있고, 이건 거의 매주 경험하는 제 삶의 일상입니다.
저에게 동시성은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인과성과 동시성의 융합 상태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화서원의 탄생과 역동성이 그 사례입니다.
여기서부터 일어나는 일은 저도 그 내용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수 많은 인과성과 동시성이 서로 중첩되면서 우리를 구성해 가고 있습니다.
수 많은 신비가 일어났고, 나의 의식 세계를 넘어서는 우주의 연결망을 자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동학의 시천주 의식이 생겨나던 초기,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오던 초기에 일어난 성령 체험과 비슷한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의식이 확장되고, 내면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소리에 귀기울이게 되고, 내가 가진 것을 내것이라고 하지 않고 선물로 나누는 일이 우리 안의 일상으로 자리잡아 가기 시작했습니다.
자아를 초월해서 진정한 의미의 개성화가 진행되어 나를 찾아가는 사례가 생겨났습니다.
영성과 진보의 융합성이 현실화되어 가는 사례가 이화서원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기반이 안정되고 있고, 공부하고 실천하는 성과가 쌓여가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전라도의 곡성이라는 작은 농촌 도시를 기반으로 해서 전국에 네트워킹을 만들며 일어났습니다.
저의 주역 수업은 내면화된 정확한 이름은 ‘시로 읽는 주역, 양면성과 동시성 실험 1박2일 워크샵’ 이라고 해야 정확한 내용입니다.
2016년 1월에 시로 읽는 주역 책이 나온 이후에 8년째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서두에서 말했듯이 저의 정체성은 ‘동아시아 인문 운동가’입니다.
한중일대만조선을 인문적 상상력으로 연결하는 것이 과제입니다.
2020년 코로나 이후 동아시아 과제는 상대적으로 조금 소홀했습니다.
의지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제 삶에도 감당하기 벅찬 경제적 짐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몇 년 동안 풀었습니다.
지금 저는 어느 정도는 가벼워진 상태입니다.
다시 제 정체성을 회복해야 할 시간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2025년 시역이 나오면 저는 이제 환갑이 됩니다.
다시 10년을 상상하는 시간이고, 이 다음 10년에서 제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시역이 될 겁니다. 2014년에 2015년의 50대를 상상하고 준비하듯이 지금 저는 2025년부터 시작하는 60대를 상상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 운동을 조금 더 잘해보고 싶어서 만든 책 중의 하나가 ‘아름다운 세 언어 동아시아 도덕경’입니다.
저와 고석수와 첸바이비, 한국과 중국의 이화서원 연구원들의 공동 작업이었습니다.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로 동시에 번역한 세 언어를 한권에 담은 도덕경입니다.
세 언어를 같이 읽으며 도덕경을 토론하면서 표층 의식이 아니라 도와 덕이라는 동아시아 심층 의식 단계와 언어를 사용한 상호 이해와 연결을 목표로 한 책입니다.
이 책으로 중국과 일본의 여러 형제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도덕경은 분량 자체가 워낙 작아서 한 권 안에 세 언어를 담을 수 있었지만 시역은 그렇게 하지는 못할 겁니다.
일단 한국에서 책이 나오고 난 뒤에 저는 중국어, 일본어, 영어로 구성된 파일북을 인쇄할 생각입니다. 최근에는 번역기 성능이 워낙 좋아서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 책을 가지고 동아시아를 여행하겠습니다.
한국에서 했던 것처럼 중국과 일본, 대만에서 여러 형제들을 만나겠습니다.
중국의 길림성에 가면 조선에서 오신 분들과 만나는 기회가 만들어 질 지도 모릅니다.
아마 저의 60대는 이렇게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한국에서 저를 지지하는 분들을 충분히 만났고, 그 다음 길 위의 삶을 지지받을 수 있을 겁니다.
이제 이 글을 마칩니다.
그 동안 여러 글을 써서 책을 냈지만, 연재의 기회를 얻은 것은 시역 뿐입니다.
다른백년의 이병한, 이래경 두 분 선생님에게 감사드리고, 편집을 지원한 배선우님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많은 독자들의 격려를 받으며 연재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빛살 김재형 이화서원 대표. 전남 곡성에서 이화서원이라는 배움의 장을 만들어 공부한다. 고전 읽는 것을 즐기고 고전의 의미를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하고 있다. '시로 읽는 주역', '아름다운 세 언어 동아시아 도덕경', '동학의 천지마음', '동학편지' 를 책으로 냈다. 꾸준히 고전 강의를 열어 시민들과 직접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