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2023년 6월 1일
37. 서평: 『식민지 조선 지식인, 혼돈의 중국으로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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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천착하는 중국의 인문학자, 역사학자들은 셀 수 없이 많다. 현존하는 이들중에도 석학으로 꼽히는 사람들만 한 다스가 넘을 것이다. 그중에서 내가 ‘애정하는’ 이는 푸단復旦대학교의 거자오광葛兆光이다. 그가 중국의 젊은 역사학자 십수명과 함께 편찬한 ‘중국에서 출발하는 글로벌 히스토리(Global history 全球史)’라는 시리즈가 처음 눈길을 끌었다. 여기서 글로벌 히스토리는 우리가 흔히 세계사(World history)라고 부르는, 국가나 민족을 단위로 개별적으로 쪼개진 역사의 합집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주제 영역을 좇아 지역적 혹은 전지구적으로 그 흐름을 서술해 나가는 역사기술 방법을 일컫는다. 도자기나 향신료처럼 물건의 역사를 추적하는 생활사나 사회사를 비롯하여 사상사나 종교사와 같이 추상적인 주제는 물론, 전쟁과 질병, 환경의 역사와 같이 다양한 영역의 역사를 망라한다. 여기서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한 실마리와 중심축, 그리고 일정한 관점은 필요하기 때문에 ‘중국에서 출발하는’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하지만, 중국의 사료뿐 아니라 다양한 국가에서 만들어진 1차 사료와 역사서를 참조하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글로벌 히스토리가 된다. ‘중국에 발을 딛고 세상 만사를 바라본다’라는 표현이 적절할지는 모르겠으나 내게는 전지구적 조망과 지역적 필요가 균형을 이룬 관점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중국의 역사를 바라 봄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균형을 강조한다. 원래 사상사와 문화사에서 출발한 그의 연구는 2006년부터 시작된 “주변에서 바라보는 중국”이라는 연구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원래 중국인들은 오랜 기간 중화중심주의 관점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봤는데, 근대의 격랑속에 중국의 구체제가 붕괴하면서 서구/일본의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보편의 중심축이 중화내부에서, 외부에 존재하는 서구로 이동한 것이다. 이런 상반된 관점은 마치 전신 거울로 자신의 앞면과 뒷모습을 비춰본 것과 마찬가지이다. 중국인들이 다양한 관점으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 것은 좋은 일이지만, 과연 이것으로 충분하냐고 그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중국이 아주 오랜 기간 자기 주위의 이웃들과 관계를 맺어왔지만 중화중심주의에 취한 나머지, 이웃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들도 당연히 중화문명 천하관으로 중국을 우러르기만 했을 터이니 따로 돌아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오만한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마침 중국 연구자들에겐 이점이 하나 있다. 이웃 나라의 지식인들이 오랜 기간 한자를 사용해서 역사를 기록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 일본/류큐, 베트남 등의 한문기록을 효율적으로 낱낱이 살펴본다. 예를 들어 조선의 연행록은 좋은 연구대상이 된다.
그 반대편에 선 한국인들은 스스로를 이해하는 준거의 틀로 늘 남의 관점을 사용해 왔다. 50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중화를 보편의 기준으로 삼아왔고, 근대에 와서는 이를 대체하여 과거 100년, 그리고 오늘날까지 30년간 일본과 미국/서구를 참조점으로 삼아왔다. 그런데 이렇게 외부의 타자를 보편의 기준으로 삼게되면 주체를 해체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도 식민성을 벗어나기 힘들고, 문명 대 야만과 같은 이분법적 사고속에서 쉽게 자기비하에 빠지게 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민족의 전통에서 자신의 준거를 재발견하고 싶어하는데, 근대 국민 국가의 기반이 되는 민족주의는 유럽에서의 태동시기부터 한계를 갖고 있다. 본래 제국주의적 욕망과 함께했기 때문에 건강한 근대적 주체성을 키우는데 그치지 않고 다른 민족과 국가에 대한 배타성과 공격성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근대 군국 국가 일본이 가장 좋은 사례이다.
중국인 연구자 저우샤오레이(周曉蕾 이하 주효뢰)는 조선왕조 시기의 한문기록을 살펴본 거자오광과 달리 근대시기의 한국지식인들이 이웃인 중국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연구했다. 특히 근대계몽시기(1895~1910)와 무단통치기(1911~1920)의 기록들 그리고 1920년대 각각 중국의 만주, 상하이, 베이징을 직접 방문했던 지식인들의 관찰 기록을 집중적으로 살펴봤다. 이 사료들은 이미 국한문 혼용이기 때문에, 순수한자 기록과 다른 시각으로 전환했을 것이라는 점이 형식과 내용에서 일치한 채로 드러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박사연구를 수행한 주효뢰는 (그의 모교이자 현재 재직하고 있는 북경외국어 대학은 한국외국어대학교와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다) 한국어가 능통하기 때문에 결과도 한국어로 출간됐다. 그래서 거자오광의 연구와 달리, 당시 중국을 바라보는 조선인들의 시각은 오히려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 더 많은 시사점을 준다. 100년전 한국인이 세상에 대한 관점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중국과의 비교 평가속에 스스로의 근대를 어떻게 성찰했는지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중국을 방문하거나 체류하던 조선인들의 목적은 조선을 근대화시킬 방법의 실마리를 찾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기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은, 당시 조선인들이 중국을 바라보던 다양한 관점들이 내가 오랜 기간 중국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총망라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오늘날의 한국인들이 중국을 바라보는 관점들을 모두 담고 있다. 문서나 영상으로만 접하던 중국, 여행자로서 주마간산격으로 둘러 본 중국, 일터로써, 시장이나 자원으로써 상대하던 중국, 그리고 나름의 인생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무대로써의 중국,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하는 삶터로써의 중국이다. 내 안에서 중국이라는 ‘개념’ 혹은 ‘장소’는 이렇게 끊임없이 면모를 일신해왔다. 그런데 나를 비롯한 한국인들에게 100년전의 관점들이 충분히 종합적으로 성찰되지 못한 채 오늘날 다시 재현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주효뢰는 식민지 경험과 전쟁의 참화 속에서 큰 혼란에 빠져있었던 한국인들이 과거 자신들의 관점을 정리하고 확산시킬 여유를 갖지 못했던 것 같다고 지적한다.
내가 처음으로 중국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80년대 초반인 중학교 시절이었다. 일본 공영방송 NHK의 명작 다큐멘터리인 <실크로드>를 즐겨봤는데 배경음악과 함께 어우러지는 둔황 석굴의 아름다운 벽화에 홀려서 역사학자가 되기를 꿈꾼 적도 있다. 삼국지는 이보다 조금 어렸던 초등학교 시절에 접했는데, 우리와 같은 중장년 이상의 기성 세대는 어쨌든 ‘우아한 고전 중화문명’을 학교에서 배울 기회가 있었다. 그 때문에 현실의 중국이 아닌 역사속의 중국, 문헌상의 중국에 대해서는 일정정도 모화사상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이런 자기 역사인식에는 조선의 성리학이 도달했다는 높은 수준에 대한 자화자찬과 같은 소중화의식이나 이와 같이 강대한 중국에도 맞설만한 저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고구려 중심의 고대사에 대한 긍정이 포함돼 있다. 한편으로는 중국과 같이 농경문명에 속하는 조선반도의 국가들에 대한 자기 인식이 있고, 그 대척점에 서서 조선반도를 침략했던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을 포함한 만주족들과 몽골을 위시한 북아시아의 유목민족들에 대한 멸시와 경계의 감정도 공존했다. 조선말의 유학자 지식인들이 가졌던 현실인식이 이와 같았던 것 같다. 그들은 중화문명이 복원됨으로써, 그 질서안에 놓여있던 조선도 함께 안정을 회복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차례로 이런 기대를 무너뜨렸고, 개화지식인들과 개신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근대적 국민국가를 세우기 위한 민족주의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초기의 민족주의는 사회진화론에 기반해서 적자생존과 우승열패의 논리를 적극 수용하고 동시에 탈중국을 전면에 내세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독립신문이나 독립문이 중국에서의 독립을 상징한다. 그래서 일본은 배우고 따라야할 모범이지만 중국과 중국인은 그 반대의 열등한 반면교사로 서술되기 시작했다. 당연히 유사제국주의적인 성향을 띄게 됐기에 심지어 조선도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처럼 중국을 침략해서 만주의 고토를 회복하고, 전쟁 배상금조차 받아낼 수 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당시 대표적으로 단재 신채호의 고대사 정리는 단군 신화를 역사로 기술하기 시작하면서 만주의 고대 영토뿐 아니라, 심지어 중국의 동부연안지역까지 한반도인들의 영토였다는 주장으로 발전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유사역사학의 뿌리를 이루게 된다. 신채호는 이밖에도 강감찬이나 을지문덕과 같이 중국에 맞서 싸우는 영웅전기를 다수 집필하여, 조선인의 탈중국화를 고무한다.
이때부터 일본을 ‘올바른 근대적 문명’의 참조점으로 삼으면서 일본인-조선인-중국인의 민족적 위계질서가 자리잡게 된다. 중국인은 “나태하고, 더럽고, 거짓말하고, 거만하고, 부패했으며 재물밖에 모르는 호색한”들이라는 관념이 형성됐다. 특히, 중국인 농민과 쿠리苦力로 불리는 노동자와 하층계급의 민중을 대할 때 조선인 지식인들도 이들을 경멸에 찬 시선으로 바라본다. 상하이에서는 위계의 최상단에 백인들이 추가된다. 조선지식인들에게 백인들이나 일본인들에게 받은 모욕과 차별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동시에 중국인들을 똑같이 하대할 수 있다는 심리적 특권이 주어졌다.
중국에 있는 조선인은 조선인이라는 정체성보다 일본식민지 주민, 혹은 일본의 대리인이라고 여겨지면서 정체성에 혼란을 겪게 되는데, 이런 내외적 인식이 중국인과의 반제연대에 방해물로 작용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독립운동의 성지로만 여겨지는 만주에서 실상 평범한 조선 농민들은 일본인과들의 관계가 우호적인 반면, 중국인들과는 일상적 갈등관계를 빚었다고 한다. 일본이 가장 먼저 영향력을 넓혀간 만주지역에서는 일찍부터 중국인들사이에 반일감정이 싹트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침략자의 대리인인 조선인들이 달가울 리 없었다. 중국 정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조선인들에게 토지경작권을 댓가로 중국 국적을 취득하고 중국식 복색과 풍습을 받아들이라는 권유를 했다. 당시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은 그 수가 100만명에 달했는데, 전체 조선인구의 5%에 해당한다. 만보산 사건과 이에 대한 오보가 영향을 끼친 조선에서의 화교학살사건은 오늘날 일본인들의 음모로만 해석되지만, 그 배경에는 이런 갈등구조가 존재했다고 한다. 과거 사드사태가 벌어졌을 때, 중국인들의 반한감정이 일시적으로 높아졌지만, 민간에서는 눈에 띄는 한중갈등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의 대미대일종속 외교가 지속되고 반도체 수출 규제 등이 구체화하면, 한국인들이 다시 미일의 대리자로 낙인찍혀 과거과 같은 민간차원의 심각한 갈등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 같다.
내가 중국 땅을 처음 밟게 된 것은 홍콩에 거주하던 2003년~2005년 시점이다. 나는 당시 다국적 기업의 금융IT컨설턴트였는데 홍콩의 한 은행을 고객으로 삼은 대형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다. 중국어도 배우고 중국을 접해보고 싶다는 호기심에 들떠 주말에 자주 옆동네인 션전으로 마실을 갔다. 당시 그곳에서 전자부품관련 사업을 하거나 화웨이와 같은 중국회사에 고용된 한국인 핸드폰 엔지니어들과도 어울렸다. 내가 직접 느꼈던 분위기나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당시의 션전은 특히 제1세계인 홍콩과 비교하자면, 위험하고 불안정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원과 자본이 넘치는 기회의 땅으로 여겨졌다. 나의 미국인 상사는 농담처럼 션전을 ‘와일드와일드 웨스트’라고 불렀는데, 조선인들에게는 만주땅이 아마 그렇게 여겨졌을 것이다.
당시의 조선 지식인들은 만주땅에 두가지 의미를 부여했는데 하나는 민족주의적 역사관으로 빚은 회복해야 할 옛 영토, 그리고 또 한가지는 무진장한 천연 자원의 보고였다. 당시 일본이 채굴권을 갖고 있는 푸순의 탄광은 아시아 최고의 매장량을 가진 석탄광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조선 지식인들은 만주땅에 알뜰하게 영유권을 챙겨두지 않은 조상들을 원망하는 감회를 많이 남기고 있다. 하지만 지하자원에 대한 요구는 다분히 근대국가적 발상이므로 의미없는 푸념일뿐이다. 과거 농업사회의 영토를 다투는 전쟁은 날씨가 좋은 비옥한 토지에 국한한다.
나는 홍콩생활에 이어 2005년 베이징으로 이주하면서 대륙을 나 자신의 기회의 땅으로 삼기로 했다. 대륙의 한 은행을 고객으로 삼는 유사한 IT프로젝트를 내가 소속된 회사가 수주했다. 장기 출장 형태로 지낸 홍콩과 달리 이번엔 서울 사무소에서 베이징 사무소로 적을 완전히 옮겼다. 홍콩/션전과 베이징은 당연히 전혀 다른 느낌과 환경을 가진 도시였지만, 나는 여전히 소위 ‘엑스팻expat’이라 불리는 ‘외국인 전문가’의 대우를 받고 있었다. 일종의 유사백인 신분의 특권을 누린 것이다. 우리 프로젝트에는 유럽과 미국에서 온 직원들, 그리고 홍콩이나 싱가폴에서 온 직원들과 중국인 현지 사무소 직원들이 있었다. 회사와 프로젝트의 실질적인 거버넌스 구조로 볼 때, 유럽과 미국출신 백인들이 제1계층, 홍콩, 싱가폴 출신이 제2계층, 중국인 현지 직원들이 제3의 계층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나는 제2계층에 속한 셈이었다. 당시 제1계층에도 유색인종 특히 화교출신 직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흔히 아시아인들이 보이는 나이브한 태도인지 공격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한 백인들과 달리 1.5 혹은 2계층에 가까운 느낌을 주었다.
내가 접하던 중국인들은 다시 두 그룹으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위의 제3계층 동료직원들이나 그 네트워크안에서 만나게 되는 중국인들은 현지의 최고 엘리트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외에도 일상생활에서 접하게 되는 보통의 중국 사람들이 있다. 편의상 이들을 제4의 계층이라고 부르자. 상점이나 식당의 종업원같은 서비스업 종사자들일 수도 있고 그냥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익명의 행인이나 농민공 노동자들일 수도 있다. 사실 당시에 나는 이들과 교류를 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션전을 들락거릴 때 마주친 중국인들도 따지고 보면 이 제4계층의 중국인들이라고 볼 수 있다. 100년전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만주나 상하이는 평범한 중국 사람들이 생활하는 공간으로서의 장소감은 없고, 일본인이나 서양인들에게 ‘발견되고 개척되고 개발된 땅’이었는데, 2003~2007년의 션전과 베이징이 나에게는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중국이 WTO에 가입을 하게 되면서 중국 대륙의 금융기관들도 서구의 업무 조건을 갖출 것을 요구 받게 된 것이 내가 참가한 베이징 프로젝트의 배경이었다. 독일과 스페인에서 개발된 소프트웨어를 가져와 중국 현지은행의 요건에 맞게 맞춤화 개량을 하는 것이 그 주요한 내용이었다. 공산주의 혁명으로 중단됐던 서구적 근대화가 1978년에 재개됐는데, WTO 가입은 그러한 변화가 새로운 단계로 진전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일은 제1계층의 서구인들뿐 아니라 제2계층에 속한 우리들에게도 큰 역사적 흐름에 참가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줬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2년간 제대로 진척을 보지 못하다가 중단됐다. 중국 고객은 값비싼 용역비를 다 제공할 의사가 없었는데, 우리의 유럽인 보스도 이 프로젝트가 최종적으로 수익을 가져다 줄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중국 고객이 무조건 기존의 소프트웨어 기능을 받아들여 업무 프로세스를 바꾸든지, 아니면 갭은 알아서 수작업으로 메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당시에는 중국 고객이 애초부터 그런 투자를 할 가능성은 없었기 때문에, 관건은 다국적 기업인 우리 회사가 당장의 손해를 감수하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투자를 할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였을 뿐이다. 그런데, 제1계층 사람들은 이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글로벌기준에 맞지 않는 중국인들의 비합리성과 탐욕을 비난하면서, 프로젝트를 중단시켰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스스로의 근대화 역량에 한계를 느낄 때마다, ‘우리’를 동아시아로 확장시키고, 그 안에서 기댈만한 맹주를 찾으려고 했다. 특히 서구인들의 제국주의에 대응하기 위해서 같은 피부색을 가진 동맹 상대를 찾아야 했다. 처음에는 일본에 기대를 걸다가, 나중에는 1911년 신해혁명에 성공해서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을 수립한 중국에도 기대를 갖게 됐다. 하지만 주효뢰의 주장에 의하면 이런 의존방식은 상황에 따라 전술적으로는 유효한 도구일 수 있지만, 사상적, 이론적 일관성과 이에 따른 원칙과 기준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언제라도 모순적인 상황으로 돌변할 수 있다. 1930년대 조선인들의 내선일체적 정체성이 강화되고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여 지배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조선인들이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 주장으로 다시 기울게 된것도 이때문이다. 그래서 이건 ‘친일 변절’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전환이고, 늘 강한 동맹의 존재에 의탁하려는 경향은 중국과의 오랜 사대관계에서 생겨난 습관일 수 있다고 주효뢰는 제3자의 입장에서 평가한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누가 자신의 동족인지를 정했다. 중국과의 연대를 주장할 때는 역시 문화적인 의미에서 동문동교同文同教인 중국과의 연대를 강조하기도 하고, 만주의 영토 영유권에 대한 욕망을 드러낼 때는 여진, 말갈, 숙신 등 역사상 만주의 제 족속들이 모두 한민족과 동일한 뿌리라고 주장한다. 나는 2008년에 처음으로 둥베이 지역과 백두산을 여행했다. 당시 서울에서 션양으로 들어가, 기차를 타고 이틀간 여행을 한 끝에 백두산에 닿을 수 있었다. 기차표를 미리 예매하지 않고 기차역에서 직접 구매했는데 표가 없어서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가는 야간 열차를 탔다. 첫 기착지는 고구려의 수도가 있던 집안集安이었는데 유명한 광개토 대왕비와 장수왕릉, 그밖의 고구려 고분 등을 관람했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볼 수 없던 거대하고 수준높은 구조물을 본 기억이 생생하다. 90년대부터 많은 한국인들이 그곳을 찾아 감격을 표시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밤기차로 다시 하루를 보내고 오전에 이도백하에 닿아서 천천히 천지쪽 등산로로 걸어 올라갔다. 이때 중국쪽 백두산 지역(중국에서는 장백산이라 부르는)이 여진족의 민족성지이자 발원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군데 군데 만주족 샤먼의 다양한 종교적 기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때 문득 고구려나 발해의 역사속에서 한민족과 연합국가를 이뤘던 만주족의 실체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됐다. 당시 둥베이 지역을 처음 방문했던 나는 일종의 소중화의식에 물들어 있던 탓에, 둥베이를 나와는 차별되는 야만의 영토이자 비문명의 세계로 상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때 과연 한족과 만주족 중에 누가 한민족과 더 가까운 것일까 다시 생각하게 됐다. 나의 소중화 의식은 심지어 인종주의적 성격도 띄고 있었다. 그래서 베이징에서 자주 마주치는 만주족 출신 중국인들에게도 미묘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반대로 한족 중국인들이 만주족 동료들을 청나라 왕족이나 귀족의 후예라면서 공주님, 왕자님으로 장난스럽게 부르는 것이 영 어색하게 느껴졌다. 어쨌든 나는 당시 운좋게 천지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곳은 날씨가 변덕스럽기 때문에 모든 이들에게 그런 행운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고, 조상3대가 공덕을 쌓아야 천지를 친견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민족주의 뽕’의 정점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드라마’가 연출된 것이다.
고구려를 중심으로한 고대사의 한민족 정통성을 강조하면서 우리 조상은 나약한 농경민이 아니라 호전적인 기마민족이었다는 식의 역사적 해석이 등장한 지 꽤 오래된 것 같다. 몽골이나 만주족의 언어가 한국어나 일본어와 같은 트랜스유로아시아 어족에 속한다는 것도 그런 이유로 들 수 있다. 그런데, 최근의 유전생물학 분석 결과를 접하고 나서는 우리가 누구와 더 가깝냐고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현대의 한민족은 유전적으로는 만주족이나 북부 중국인 한족과 거의 비슷한 정도로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한민족 초기 조상중의 일부가 둥베이지역에서 남하한 것도 맞지만, 다시 쌀을 한반도로 가지고 들어 온 것은 중국 대륙의 산둥반도등에서 건너온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 역사시대에도 북부 중국인들이 전란을 피해 한반도로 이동하거나 심지어 한사군이 설치돼 3~400년 가량의 오랜 시간을 현지의 한반도인들과 잡거했다고 하니, 다시 한족의 피가 한민족에게 섞여 들어온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화적으로든 혈연적으로든 현대의 한민족은 둥베이에서 남하한 만주족 계열, 그리고 중국대륙의 북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의 영향을 고루 받았을 것이다.
베이징으로 건너갔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만주나 상하이와 달리 현지인들, 특히 베이징의 고급 지식인들과 깊은 교류를 나눌 수 있었다. 1920년대의 베이징에서는 1919년의 5.4운동 이후 신문화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대학등을 중심으로 다양한 서구의 사상이 소개되는 동시에 중국의 근대화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이뤄지고 있었다. 조선 지식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중국의 혼란한 상황뿐 아니라 중국의 미래 비전에 대해 고민하는 중국인들의 생각을 들여다 봄으로써 동시대의 중국에 대한 입체적인 이해를 할 수 있었다. 그에 따라서 서구나 일본이라는 보편의 기준이 아니라 반식민지 상태에 놓인 전통사회 중국을 참조점으로 놓고 ‘조선의 근대화’에 대해서 돌아볼 수 있게 됐다. 여기서 전통과 근대, 야만과 문명이라는 이분법적 구도가 아니라 근대로 가는 다양한 경로를 모색해 볼 수 있는 여지를 발견했다.
주효뢰가 주목하는 두 인물의 사례를 검토해볼 수 있다. 과거 폐쇄적인 민족주의 성향으로 기울었던 신채호는 베이징 체류 이후, 아나키스트로 변모하게 된다. 스스로 제국주의적 성향을 갖는 우파 민족주의의 모순성과 한계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더욱 흥미로운 사유를 보여주는 지식인은 개벽잡지의 베이징 특파원인 이동곡이다. 특히 이동곡은 일본 유학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과 중국 근대화의 사상적 조류와 현실을 비교해 보는 것이 가능했다. 이동곡의 중국 근대화에 대한 사유는 이채롭게도 당시 베이징에 머물렀던 미국인 철학자 존 듀이, 그리고 20년후에 비슷한 생각을 보이는 일본인 사상가 타케우치 요시미竹内好와 비슷하다. 루쉰 연구자인 타케우치 요시미는 훗날 ‘방법으로서의 아시아’, ‘방법으로서의 중국’이라는 사유를 선보였는데 일본의 근대화가 표면적인 것인데 비해서, 중국의 근대화가 더욱 근본적인 것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물질적으로는 빠른 근대화에 성공했고, 반대로 중국은 이에 실패했기 때문에 큰 곤란을 겪고 있지만, 중국의 경우가 보다 본질적인 변화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기적으로는 안정적인 근대화를 이루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낙관적인 견해이다.
이동곡은 원래 이런 의문을 가졌다고 한다. 중국은 조선뿐 아니라 일본보다 서구문물을 훨씬 일찍 받아들이기 시작했는데, 왜 표면적으로는 일본에 뒤쳐지고 근대화에 실패했던 것일가? 명청시기에 중국을 찾은 서구의 지식인들이 활발한 교류를 펼쳤던 기록들이 다수 존재한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근대화 방법의 다양한 경로와 서로 다른 타임스케일이다. 이 차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요시미가 루쉰을 빌어 이야기하는 일본의 전향轉向와 중국의 회심回心을 비교해 볼 수 있다. 회심은 옛 자아를 철저히 부수고 스스로를 돌이켜보면서 왜 남과 다를까를 반성해 보는 방법이다. 전향은 어디가 다른지 살펴서 부분적으로 보충하는 방법이다. 회심을 통해서 차이를 기정사실로 여기고 자기가 나갈 방향을 결정하면 이를 새로운 창조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 단순한 모방에 그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듀이와 요시미 그리고 이동곡의 공통점은 그들이 장기간 중국에 체류하면서 중국인들과 깊은 교류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는 점이다. 듀이는 베이징에 2년간 머물렀는데 초반에는 중국에 대해서 많은 불평을 했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생각을 바꿨다고 한다. 요시미는 유학생으로 베이징에 머물기도 했고, 중일전쟁에 참전을 한 경험도 있다. 그리고, 듀이가 중국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바꾸게 된 글을 접하고 깊은 공감을 표시했다고도 한다.
내가 중국으로 돌아온 것은 2015년경이다. 2012년에 토쿄에 머물고 있을 때, 커리어 전환을 결심하고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하자센터의 설립자이자 문화인류학자, 페미니스트 활동가인 조한혜정 선생을 만나게 된 것이 계기였다. 조한의 권유에 따라서 일본의 농촌으로 가서 ‘비전화공방’이라 불리는 자급자족생활연구센터에서 일년 정도 연수기간을 보냈다. 2013년 서울로 돌아와서 하자센터에서 2년 정도 일했는데, 이곳은 청(소)년, 교육, 돌봄, 생태적 전환을 비롯한 사회적 공공의제를 실험해보는 일종의 소셜 리빙랩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나는 비전화공방과 하자센터의 3년 정도 전환기를 자산으로 삼아, 중국에서 비슷한 일을 벌여보고 싶다는 욕심을 갖게 됐다. 2015년에 적절한 정착지를 찾아 중국을 반년정도 여행했다.
2016년에 본격적으로 상하이 근교의 총밍崇明섬에 정착했고, 중국인, 한국인 친구들 몇과 함께 일종의 생태교육 생활공동체 실험을 일년정도 진행했다. 2018년에 광저우로 이주해서 지금까지 광저우 근교의 마을에 살고 있다. 그리고 2020년에는 중국인 아내와 가정을 꾸렸다. 2015년부터 내가 겪은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간단히 정리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2015년에 중국을 돌아볼 때는 여전히 서구적 근대 혹은 한국이나 일본이 함께 겪은 후기근대적 경험과 교훈을 중국에 전파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이동곡도 주목했던 량슈밍梁漱溟의 사상적, 실천적 후예인 향촌건설운동 활동가들, 그리고 그들의 이데올로그 원톄쥔溫鐵軍과 교류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여전히 한국을 포함한 서구사회를 보편(후기근대의 생태적 전환)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동시에, 중국의 회심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함께 협력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한 것이다.
상하이에서의 생활경험중에 느꼈던 감회들중에도 조선의 지식인들의 그것을 반복한 점이 있다. 상하이 사람들이 지나치게 서구/일본 문화추종적이고 소비지향적이라고 불만을 품었는데, 특히 좌파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지식인들도 같은 불평을 했다고 한다. 당시 전체적으로 중국의 근대화 결핍을 비판하면서 한편으로는 국지적으로 상하이의 근대화 과잉을 비판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 때 상하이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갖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상하이가 가진 나름의 맥락과 특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됐다. 그것은 전체적인 중국인과 중국사회, 그리고 중국의 각 지역과 그곳에 속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속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한국인과 한국사회에 대해서도 그렇게 느낀다. 물론 한국에 대해서는 기대가 더 큰 만큼 가장 현상을 받아들이기 힘들기도 하다.
나는 팬데믹을 계기로 이런 활동을 모두 중단하게 됐고 지금은 주로 당대 중국 문화예술계의 동향을 한국사회에 글로 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샹뱌오項飆라는 중국출신 지식인의 책을 한국어로 번역했는데, 그의 생각에 영향을 끼친 사람중의 한명은 중국 현대 사회학/인류학의 선각자중 한명인 페이샤오퉁費孝通이다. 량슈밍을 비롯한 당대의 중국 사상가와 실천가들이 주로 중앙과 공공의 관점에서 중국 근대화를 고민한 것과 달리 페이샤오퉁은 지역의 개별성을 중심으로 사유했다. 이런 지역의 지식인 문화를 대변하는 것이 전통사회의 향신계급이다. 샹뱌오에 따르면 페이는 또한 중앙의 이념과 지역의 다양성 혹은 자치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이 오래된 시스템을 안정되게 유지할 수 있는지를 실증적으로 잘 설명했다고 한다. 페이의 이런 생각은 80년대 후반에 발표된 중화민족 다원일체론에서도 잘 드러난다.
지금 중국 정부를 이끄는 지도자인 시진핑과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들이 내세우는 중국특색 현대화(중국에서는 modernization을 근대화보다 현대화라고 쓰는 경우가 더 많다.)와 다원적 보편주의는 과연 100년이 넘게 진행된 중국의 회심적 근대화를 잘 계승하고 있을까? 나는 정치경제 시스템과 제도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평가를 할만한 식견이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한 답은 유보하기로 한다. 하지만, 지역의 문제들, 혹은 문화의 영역으로 좁혀서 보자면, 긍정적으로 보기 힘든 지점들도 많이 존재한다. 수많은 예를 들 수 있겠지만 최근에 불거진 한 스탠드업 코미디언의 설화 사건과 이 사건을 바라보는 애국주의적 사회문화 평론가들의 시각이 좋은 분석 사례를 제시한다.
중국에서는 몇년전부터 미국식 스탠드업 코미디가 크게 유행하고 있다. 미국식 자유주의 문화를 즐기는 대도시의 젊은 힙스터들이 특히 좋아한다. 작은 클럽에서 수십명 혹은 수백명의 관객을 대상으로 오프라인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풍자적 표현이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지난 5월초 한 코미디언이 자신이 키우는 유기견 출신의 개를 형용하면서, 시진핑이 인민해방군을 찬양하는데 사용한 8자 표현을 쓴 것이 큰 문제가 됐다. 이 부분은 원래 검열을 통과한 대본안에는 들어있지 않은 애드립이었다고 한다. 관객중에는 해외 유학경험도 있고 중국의 영어 대외선전매체인 CGTN에서 일하는 언론종사자가 한명 있었는데 이 사람이 코미디언을 당국에 고발했다. 이 코미디언은 출연정지를 당했을 뿐 아니라 그의 소속사(중국에서 가장 큰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 단체이다)도 한동안 공연을 할 수 없게 됐고, 소속사는 수십억원에 달하는 벌금형 처분을 받았다. 현재 중국 공안이 이 코미디언에게 형사적 처벌을 적용할 것인지 여부에 대해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 코미디언이 시진핑이나 인민해방군을 조롱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파급력이 크고 확산이 쉬운 온라인 공간도 아니고 오프라인 공연장의 한마디 표현때문에 이 정도의 처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기본적인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현대사회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어쨌든 흥미있는 분석지점은 그의 처벌에 대해서 논한 평론가의 시각이다. 그는 코미디언과 그의 소속사가 처벌을 받는 것은 매우 당연하지만, 형사처벌만은 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논리는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빈대잡다가 초가삼간을 다 태운다”이다. 당연히 상식적인 주장이다. 중국의 애국주의 지식인들도 현재의 소분홍 여론몰이와 이에 호응하는 정부의 직접적 처벌이 과도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코미디언과 소속사가 형사처벌을 제외한 다른 징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논리에서 우리는 현재 중국 정부가 주장하는 “중국식 보편논리”의 허점을 짚어 볼 수 있다. 그는 서구사회의 정체성 정치와 캔슬문화를 거론하면서 서구사회에 일종의 금기적 표현과 이 선을 넘었을 때의 사회적 징벌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에도 중국 나름의 금기가 있다고 이야기 한다. 서로 다른 사회에는 서로 다른 상식과 보편원칙이 존재한다는 논리에서 나온 주장이다.
그는 J.K.롤링 사건을 언급하며 서구사회에서는 예를 들어 유태인, 인종, LGBT와 같은 사안에 대해서 함부로 발언하면 ‘정치적 올바름 PC’를 근거로 사회적 징벌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는 인민해방군을 모욕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이 중국인뿐 아니라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는 보편으로 해석될 수 없는 단순한 이유들이 있다. 첫째, 서구사회에서는 성폭력 등의 범주를 제외하고 PC를 근거로 공권력이 직접 개입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오로지 비판 여론과 소비행위를 통해서만 상응하는 사회적 징벌 작용이 일어나고 사법적으로는 명예훼손 등의 민사적 소송이 제기되는 경우가 있을뿐이다. 소비자들이 특정 대상을 인터넷상에서 비판하고, 그에 대한 구매 행위를 철회하는 것은 중국에서도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왜 중국에서만 이런 문제들이 사회적 징벌에 더해서 공권력의 추가처벌로 이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 둘째, 정체성 정치의 상당부분은 본질적인 요소에 기반한다. 인종이나 성정체성은 일부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타고난 특질에 해당한다. 남이 이를 싫어한다고 해서 비판의 대상이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민해방군이란 조직은 본질이 아니라 실존적인 형태이다. 자기가 선택할 수도 있고, 그 성격은 얼마든지 바꿔 나갈 수 있다. 따라서 비판은 당연히 허용되어야 한다. 이 조직은 무오류도 신성불가침의 존재도 아니기 때문이다. 세째, 여기서 문제가 된 풍자의 상대가 인민해방군인지 아니면 시진핑인지 분명치 않다. 만일 시진핑의 표현이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사용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이것은 더 큰 문제이다. 인민해방군이라는 조직의 명예보다 실은 정치지도자 개인의 권위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한 처벌의 동기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중국주류사회가 주장하는 어떤 보편이나 그 보편의 이유는 현대사회에서의 보편가치와 부합하지 않는다. 흔히 명예훼손과 관련해서 보편에 대한 사회적 의제가 되는 무슬림의 경우와도 다르다. 개인과 집단의 종교적 신념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 것인지는 현대사회에서도 일방적으로 판단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그래서 마호멧에 대한 서구사회의 과도한 풍자에 무슬림들이 격렬하게 반발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일부 공감을 표시한다. 어떤 문화권이든 전통사회의 관념과 생활문화가 유지되는 것을 일정하게 인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민해방군은 명백히 현대화된 조직이다. 중국의 최고 정치 지도자라는 직분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식 현대화가 일정부분 보수성을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근대국가와 공산당이라는 근대적 이념정당이 전통사회의 ‘신성불가침’ 논리를 들이댄다는 것은 자신들이 ‘충분히 현대화되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중국식 현대화’라는 표현을 일도양단해서 평가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중국의 금융개방이 충분치 않다는 이유로 중국을 비판하는데, 이와 같은 금융자본주의라는 현대성은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보편의 원칙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 용도폐기된 신자유주의 이념과 이 이념이 실현된 사회의 한 특징으로서 현대화가 낳은 많은 부정적 요소를 품고있다. 중국 정부가 금융 현대화를 추진함에 있어서, 이런 폐해를 경계하고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을 우리는 오히려 중국식 현대화의 장점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위에서 언급한 표현의 자유와는 다른 측면이다.
미중갈등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시각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다. 한국에는 직접적인 여러가지 피해도 돌아오고 있다. 이 갈등의 이유중 하나는 근대화/현대화에 대해서 다른 정의를 가지고 있는 중국과 서구의 시각차이에서 비롯한다. 물론 그 근저에는 권력과 금력을 다투는 헤게모니 경쟁이라는 보다 실질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한국사회가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의 80~90%는 미국사회와 그 담론의 핵심인 소위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동시에 이에 대한 문제점 즉 타자를 보편으로 우리에게 이식함으로써 주체가 분열되는 것을 의식하기 때문에 다시 민족주의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우파민족주의는 여전히 사회진화론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한민족의 배타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결과적으로 한국인들이 중국을 바라보는 100여년전의 시각이 다시 똑같이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다. 차이가 있다면 중국도 100년전의 종이호랑이가 아니고 한국도 규모로 따지면 세계 10위권의 선진국에 속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잊혀졌던 이동곡의 관점을 혹은 타케우치 요시미의 생각을 톺아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꼭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나 ‘방법으로서의 중국’일 필요는 없다.
또 동아시아나 근대/현대와 같은 지나치게 거대하고 추상적인 담론에 휘둘리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지역과 현실의 문제들에 천착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우리들의 방법이 무엇인지 차분히 생각해 볼 기회를 많이 갖을 수록 좋을 것이다. 내가 번역한 샹뱌오의 책 제목 ‘방법으로서의 자기’는 딱 이런 사유와 실천에 걸맞는 구호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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