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2023년 6월 30일

38. ‘프로세스로서의 중국’

- 남방, 화남 그리고 ‘도시국가’ 홍콩






얼마전 선전深圳의 시립 예술센터를 방문했다. 광둥廣東성과 선전시를 중심으로 한 개혁개방 40년 기념 전시관(大潮起珠江展覽)이 별도로 마련돼있어서 흥미있게 관람했다. 눈길을 끌던 것은 광둥성의 지형을 돌출식으로 표시한 입체지형도였다. “아 이곳은 사람이 많이 살기 힘들었겠구나.” 직관적으로 이해가 갔다. 산과 구릉, 그 사이에 존재하는 좁은 습지가 있을뿐, 평야는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아니 그 습지조차도 넓게 펼쳐진 곳은 매우 드물다. 강유역을 따라 좁다랗게 발달해 있을뿐이다. 바로 주강珠江삼각지역의 농업경작지인 사전沙田과 농업과 양어를 겸하는 상기위당桑基魚塘 등이 이곳에 위치한다.

하지만 이곳은 원래부터 존재하던 땅이 아니다. 1,000년전까지만 해도 모두 바다 혹은 갯벌이었던 곳이다. 자세히 들여다 본 적은 없지만 광둥성 동쪽의 푸졘福建성도 사정은 비슷하다고 한다. 전체 성면적의 80%이상이 산지이고 평야가 거의 없다. 이런 지역에서는 고대에 농업이 쉽게 발전할 수 없으니, 자생적으로 거대한 국가도 만들어질 수 없다. 복수의 부족국가들이 존재했다고 한다. 화하華夏문명을 대표하는 중원왕조에서는 이들을 백월百越족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백은 정확한 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많다는 뜻이다. 물론 중원왕조는 일찌감치 군대를 파견해서 이 지역들을 점령했다. 진시황, 그리고 한무제가 각각 군대를 보내서 군현郡縣과 군의 주둔지인 요새鎮를 설치하고 도시를 만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점령이라는 의미는 대단히 제한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군인들이 요새를 만들거나, 성을 축조해서 성벽안에만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거주한다. 이들이 조금씩 땅을 개간屯田해서 자급생활을 이룬다. 하지만 성밖의 주민들은 대부분 대대로 그지역에서 살아왔던 원주민들이다. 제국의 실질적인 관할권은 점과 선이지, 면이라고 할 수 없다. 현대의 신장新疆지역 생산건설병단이 대규모 도시 건설을 진행한 것도 같은 개념이다.

그렇다고 이 점들이 보잘것 없고 황량한 변방의 요새였던 것은 아니다. 농업생산이 뒷받침하지 않아도 이런 점, 즉 도시들은 상업적으로 크게 융성할 수 있다. 광저우는 1,400년전 당唐시기에 이미 국제적인 항구도시였다. 페르시아 상인들 십수만명이 거주하는 지역인 번방蕃坊이 성내에 따로 있었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광저우 성은 바로 바다에 면해있었는데 바다로 이어지는 길목에 수천척의 배가 정박해 있거나 바삐 오가고 있었다고도 한다. 훗날 지역의 술탄들이 지배하던 말래카 같은 동남아시아의 무역상업도시들을 연상할 수도 있다. 푸젠에도 촨저우泉州같은 도시가 이런 역할을 하면서 특히 송대에 번성했다.

광둥지역중에서도 지금은 가장 경제적으로 융성한 주강삼각지역이 면으로 제국의 실질적 관할권에 들어 온 것은 명청明清시기이다. 주강유역을 따라서 퇴적물이 계속 쌓여가면서 바다는 광저우에서 계속 남쪽으로 밀려갔다. 이 시기에 강을 따라 이 갯벌지역들을 간척하면서 바로 사전이 만들어졌다. 초기의 사전 간척에 자본을 투자한 것은 도시州府와 현성縣城의 상인들이었다. 그렇다면 이 작업에 참여하고, 이곳에 거주하며 이 땅을 경작하게 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이들이 후손들이 바로 지금 이땅의 주민인 광둥사람들이기도 하다.

화남華南학파라 불리는 일군의 학자들이 있다. 홍콩중문中文대학교의 데이빗 포레David Faure(科大衛), 예일대학교의 헬렌 시우 Helen Siu(蕭鳳霞), 그리고 이들과 협력한 광저우의 중산대학교 교수인 천춘셩陳春聲과 리우즐웨이劉志偉가 그들을 대표한다. 이들은 1970~80년대부터 주강삼각지역과 홍콩의 신계지역등을 중심으로 꾸준히 필드연구를 진행했다. 이들은 역사인류학이라는 연구방법을 통해, 사전을 만든 사람들의 정체를 밝혀냈다. 과거의 역사자료, 지방의 기록들, 족보와 묘비명을 들여다 봤다. 그리고 동시에 현지의 주민들을 인터뷰하고 관찰하면서 지역의 생생한 역사를 구축하고 그 의미를 살피기 시작했다.

내가 이들의 연구결과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광둥지역의 역사와 광둥사람들의 문화적 특성에 대한 특별한 관심에서 비롯한다. 지금 광저우에 거주한지 만 5년이 지나고 있지만, 나는 중화권과 직접적 인연을 맺기 시작한 2000년대 초반에도 홍콩에 수년간 거주한 적이 있다. 당시에 중국어를 배우겠다면서 선전을 자주 들락거리기도 했다. 나의 외국생활의 출발점은 바로 홍콩이었기 때문에, 이곳의 문화와 환경에 대해서 비교적 익숙한 편이다. 그리고 제2의 고향과 같은 어떤 귀속감조차 내 마음속에 생겨났다. 하지만 당시 홍콩과 국경을 마주한 광둥성은 내게 아주 낯선 존재였다. 홍콩사람들의 광둥지역에 대한 우월감과 다양한 부정적 관점이 내게 그대로 이식됐다. 그런데, 2015년에 다시 중국땅을 밟게 되고 찾은 광둥과 광저우廣州는 또다른 의미에서 이런 귀속감을 강화시켰다. 과거에 가졌던 편견과 달리 광저우는 매우 매력넘치는 지역이었다. 대도시의 마천루속 직장생활이 아니라 시골이나 도시의 동네를 훨씬 편안하게 느끼게 된 내게는 안성마춤의 ‘슬로우한’ 생활터전이었다. 그래서, 이곳에서의 정착을 꿈꾸게 됐고, 2018년에 상하이로부터 지금 내가 있는 마을로 이주해왔다.

내가 중화권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주목한 광둥의 특이성은 중국의 전체 주류 문화에서 어딘지 모르게 빗겨나 있는 이단적인 느낌과 이국적인 특성이었다. 예전 홍콩의 직장동료가 입말중심인 광둥어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이곳은 옛날에 야만인들이 살고 있던 땅이라고 이야기했던 게 인상깊었다. 당시 나는 어떤 배경 지식도 없이 막연하게 홍콩 사람들이 베트남 사람들과 혈연적, 역사적 연계가 있지 않을까 상상을 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가 한 홍콩동료에게 핀잔을 들었다. 그는 중국과 베트남의 현대 전쟁사를 들먹이며, 한족 중국인과 베트남 사람들은 견원지간이라고 내게 열변을 토했다. 나는 머쓱해져서 알았다고 대답하고 그냥 물러났다.

이번에는 제대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팬데믹때문에 집안에서 지내면서 뭔가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남방의 문화와 역사가 바로 오래된 관심사중 하나였다. 광저우의 역사를 보면서, 홍콩 친구가 그때 내게 많은 것을 감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광저우는 진시황이 군대를 보냈을 때 이를 지휘하던 장수중 한명인 조타趙佗가 남월南越국을 만든 곳이다. 그는 왕이 됐지만, 그와 협력한 귀족들, 그리고 그가 다스린 백성들은 모두 현지 주민들이었고, 이 나라는 서쪽의 광시성과 지금의 베트남 북부지역을 아우른다. 이것이 바로 베트남, 즉 월남越南이라는 나라의 역사와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다. 중원왕조나 중앙에 귀속감을 갖는 지식인의 관점에서 기술된 이와 같은 광저우 지역의 통사적 역사를 보다가, 전혀 다른 서사가 있음을 알게 됐는데 이것이 바로 화남학파 연구자들의 성과이다. 과연 스스로를 한족으로 여기는 오늘날의 광둥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한족 형성의 길고 복잡한 역사에 대해서 이 글에서 자세히 다룰 생각은 없다. 이 글은 원래 두권의 책에 대한 서평을 의도하고 기획됐다. 특히 헬렌 시우의 역저인 <<Tracing China: A Forty-Year Ethnographic Journey>>를 중심으로 한다. 또 한권은 역시 홍콩 출신의 정치경제학자로 중국 경제사와 중국의 현대 정치경제 전문가인 존스홉킨스대학 훙호펑 HUNG Ho-fung 교수의 저서인 <<City On the edge: Hong Kong under Chinese Rule>>이다. 이 책은 홍콩의 간략한 역사와 함께, 홍콩의 중국 반환을 전후한 상황, 그리고 특히 1997년 이후 홍콩의 갈등상황을 세밀하게 기술하고 있다. 역사인류학자와 정치경제학자로서 두 사람의 연구영역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지만, 광둥지역과 홍콩의 역사를 들여다 본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2016년에 출간된 헬렌 시우의 저서가 2010년 이후의 상황을 기술하지 못하는 것에 비해서, 훙호펑의 책은 2019년 반송중 시위를 포함한 가장 최근의 홍콩 상황에 대한 매우 자세한 설명이 담겨있다. 그래서 두 책을 함께 보는 것은 서로 보완이 되는 점이 있다. 또, 홍콩출신으로 미국의 명문대학에서 석학급의 연구업적을 쌓은 두 학자가, 디아스포라 홍콩인의 입장에서 홍콩과 중국의 사정을 들여다 본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 이들은 홍콩 엘리트의 입장을 대변하지만, 한편으로는 완전한 홍콩인의 관점보다는 한발 떨어져서 상황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여유도 가지고 있다. 비록 그들의 글의 행간에서 자신의 고향의 정체성이 크게 흔들리고 변화하는 것에 대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비애와 분노를 간간히 느낄 수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역량의 부족으로 이 서평을 제대로 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겠다. 특히 헬렌 시우의 책을 완독하는데 시간이 매우 오래 걸렸다. 처음엔 영어로 된 글을 간만에 아마존 이북으로 읽다보니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서평을 쓰기 위해 다시 스크롤링을 하면서,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됐다. 헬렌 시우는 책의 초반부에 자신의 학문적 배경과 방법론을 매우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런데 인문학 연구자로서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나는 이 부분을 제대로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이름은 들어봤던 유명한 학자들과 그들의 이론 체계에 대해서 “응응”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시늉이야 할 수 있겠지만, 자세한 내용을 꿰뚫기는 쉽지 않다.

특히 중요하고 내가 또 관심을 가진 부분은 탈구조주의적인 분석관점이다. 헬렌은 구조와 그 구조속에서 행위를 하는 에이전트가 어떻게 변증법적으로 작동하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지 살펴본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일종의 움직이는 타겟을 관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귀가 솔깃해진다.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내가 주목하는 또다른 인류학자인 막스플랑크 사회인류학 연구소의 소장 샹뱌오項飆 박사로부터이다. 큰 역사의 흐름과 보통사람들의 ‘경제’이성적 rational 혹은 문화적 선택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연구하는 것이 자기가 소장을 맡게 된 이후 이 연구소의 큰 탐구주제중 하나라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모두 책으로 출간된 그의 석박사 논문도 이런 흐름을 포착한 것으로 그는 설명한다. 한국의 사회학자 조형근은 역사의 흐름과 민중의 주체적 행위의 관계에 대해서 브리콜뢰르라는 설명을 한 적이 있는데, 나는 이 이야기들이 모두 같은 맥락에 있으면서 조금씩 다른 것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이야기들인지 좀처럼 감을 잡기 힘들었다. 그런데 헬렌 시우의 이 방법론을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래도 이 책을 꿰뚫는 전체 맥락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또 헬렌 시우는 이책의 서문에서 자신이 바라보는 중국과 그 역사는 단선적이고 목적론적인 것이 아니며, 고정되고 닫힌 것이 아니라, 여러 에이전트들의 작은 서사가 더해지고 합쳐지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다이나믹한 ‘하나의 프로세스 China as process’라고 이야기했다. 듣기에 매우 그럴듯하고 멋있어 보이는 이 말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그 방법론을 먼저 이해해야 할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현실적으로 40년에 걸친 광둥과 홍콩지역에 대한 다양한 민족지 기록을 하나의 맥락으로 꿰기 위해서는 그의 문제의식과 질문을 먼저 정확히 이해해야만 한다.

그래서 결심(?)한 것은 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해보는 것이다. 원래는 서평을 쓰면서 핵심을 이해하고, 그 이해가 번역에 동기를 부여하기를 기대했는데 이제 조건이 바뀌었다.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이 책을 보다 깊이 들여다보고 싶고, 번역과정이 이걸 도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짜잔~.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안광이 지배를 철하는” 명철한 이해에 기반한 하나의 흐름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내가 관심을 갖고 있던 몇몇 부분만을 간략히 다루고 싶다. 그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이 아닌가 한다. 이걸 설명하면서도 특정 주제와 소재에 관심을 갖는 내 문제의식을 더 자세히 전제 조건으로 이야기 하고 싶었는데, 그것도 시간과 이해에 따라서 계속 바뀌고 있어서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그냥 일단 내용을 이야기하고 내가 느낀 점을 말하겠다.

다시 사전이 만들어진 이야기로 돌아오자. 광둥지역에 오랜 기간 살아온 사람들, 즉 한족입장에서는 백월족으로 통칭되던 여러 소수민족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일정한 주거없이 물가와 배위에 살며 어민으로 살아온 이들이 있는데, 이들을 단민蜑民 혹은 탄카라고 부른다. 한족 중국인들은 오래전에는 이들을 인간이 아니라 서브휴먼으로 대할 정도로 차별했다. 지금도 자신의 조상이 단민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있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의 소수민족 분류체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또 다른 소수민족은 주로 산지에 살던 요족瑤族이 있는데 아직도 광둥의 산악지역에 요족 정체성을 간직한 채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 화남학파의 역사인류학 연구에 의하면 사전을 만든 사람들은 대부분 한족이 아닌 이들 소수민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초기의 대규모 투자가 중앙정부의 관아가 있는 성안에 살던 한족 상인들에 의해서 주도된 후에, 사전의 근처에는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작은 마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광둥어로 시장을 뜻하는 허墟라는 글자가 있는데, 이런 마을 자체를 墟X라고도 부른다. 초기에 이 지역에 자리를 잡고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던 상인과 지주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명의 중앙정부가 주도한 이갑里甲제에 호응했다. 정부에 호구를 등록해서 조세와 부역 의무를 지고, 자신들의 토지 소유권에 대한 국가의 인정을 획득한 것이다.

당시 명의 왕조는 유가이념에 따라 각 가문들이 사당祠堂을 지을 것을 장려했다. 이들은 이를 수용하여 광둥의 각지역 마을마다 수많은 사당을 세웠다. 이때 취한 대부분의 성씨가 족보를 새로 쓰면서 중원에서 온 성을 따랐다. 그리고 이들은 유교적 교양을 중심으로 한 학력자본을 자녀들에게 선사했다. 당연히 이중에서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들의 이름이 사당에 내걸리면서 중원 왕조가 공인한 가문의 위엄이 공고해졌다.

흥미있는 것은, 광둥의 사당문화와 대조되는 푸젠성의 묘우廟宇문화이다. 사당이 유가이념에 근거해서 조상의 신위를 모시는 것에 비해, 묘우에는 여러가지 지역신들이 모셔진다. 광둥과 푸젠에는 모두 사당과 묘우가 있지만, 그 규모와 수에 큰 차이가 있다. 그런데 헬렌 시우는 광둥에서 명청시기에 벌어진 한화 프로세스가 푸젠에서는 송대에 이뤄졌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생긴 것으로 분석한다. 송대의 중원왕조는 다양한 신을 모시는 것을 권장했다는 것이다. 중앙에서 파견한 관료와 군대, 혹은 이런 행정관청이 있는 성안에 오래 거주하던 한족이외에 농촌 지역의 엘리트들이 중화문명에 속한 한족으로서의 민족 아이덴티티와 유가왕조의 국가 이념을 장착하게 되는 변화하는 과정을 나는 나름대로 심화한화deep sinicization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중국의 명청시기에 해당하는 조선왕조 시절에 조선반도에도 딥 시니사이제이션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짐작해본다. 북송北宋때 완성된 한족 통치체제의 제도와 이념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 바로 조선왕조였기때문이다. 어느쪽이든 엘리트가 아닌 기층민중에게 민족과 국가의 이념이 확립된 것은 베네딕트 앤더슨이 주장한대로 근대국가의 수립이후였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그래서 광둥지역의 이런 변화를 조선사회의 변화와 비교해보고 이런 변화가 초래한 문화적 현상들이 심지어 현대 사회에 미치는 영향까지 비교해본다면 매우 재미있는 분석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예를 들어 그중 하나가 신분관념의 확립을 통한 타자와의 명확한 선긋기, 즉 신분요소에 의한 배제와 차별의 전략이다. 이런 전략의 현대적 실천 방법중의 하나가 바로 ‘갑질’이나 ‘학폭’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앞서 설명한대로 시장마을의 ‘한족’ 지주와 상인들은 원래는 지역의 토착민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사전에서 계속 그들을 도와 간척을 진행하고 농사를 지은 사람들은 여전히 단민이었다. 그런데, 한족 성을 갖게된 지주와 상인들, 시장마을의 거주민들은 단민들을 명확하게 타자화하고 차별했다. 이런 차별화의 흔적은 현대에 까지도 남아있는데, 이를테면 지금 내가 사는 마을은 과거에도 급제한 지주와 상인들이 많았던 반면, 바로 옆마을은 주로 이런 이런 단민출신의 어민과 농민이 거주하던 마을이었다고 이웃 주민들은 이야기한다. 물론, 민국시기와 사회주의 혁명 시기를 지난 이후, 그리고 시장자본주의화가 이뤄진 후 중국의 계급은 이렇게 조상들의 출신 성분에 의해서 나뉘지는 않는다. 또, 실제로 마을의 지주와 상인 계급이었던 향신들은 청말과 민국 시기에 도심으로 이주해서 도시민이 됐다고 한다. 내가 마을에서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빌려 사용한 사당의 가문은 청말에 중앙의 고관을 지냈던 집안으로 베이징으로 이주했는데, 심지어 이들의 직계 후손은 지금 중국이 아니라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다. 실질적인 마을의 상위신분 계급 사람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어쨌든 그럼에도 이런 문화적 낙인이 현대까지 남아 있는 것은 당시의 신분의식과 차별화 전략이 매우 강고했음을 의미한다. 헬렌 시우는 이런 신분의식 강화와 차별화가 신분의 유동이 심한 시기에 신분상승에 성공한 집단이 잠재적 경쟁자를 배제하기 위해서 취했던 전략이었음을 추론한다.

이런 신분의식 강화와 차별화 전략은 홍콩의 발전과정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영국의 식민지배가 시작되기 이전, 일찍 신계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던 지주가문 성씨들 (이들은 자신들이 송대에 이곳에 자리잡은 한족들이라고 주장한다), 지역의 단민들, 그리고 북쪽에서 이주해 와 소작농이 된 객가 한족들은 영국 식민정부와의 관계속에서 홍콩섬의 도시를 발전시키는 과정에 다양한 경로를 통해 신분과 권력관계의 부침을 겪는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훙호펑의 책에 기술돼 있다. 대륙에서 시기별로 끊임없이 인구가 유입되는데 이런 흐름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주민들의 배경에 따라서 그들이 홍콩시민으로 편입되는 과정이 모두 다르다. 즉, 광둥성의 농민, 상하이에서 온 지식인과 자본가들, 광둥성의 도시지역에서 온 사람들에게 홍콩시민으로 유입되는 문턱은 높낮이가 달랐다. 하지만 최하층민이라고 해도 정식으로 시민권을 얻고, 시간이 지난 후, 만일 중산층으로서의 위치가 공고해지면, 새롭게 유입되는 사람들에게 배타적이고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게 된다.

이런 의식은 홍콩인으로서의 정치적 정체성이나 홍콩독립주장과도 맞물리지만, 이들이 소위 중화민족이나 한족공동체에 대해서 품고 있는 상상도 시기에 따라서 모두 다르다. 예를 들어 자신의 저서 On the Hong Kong City State를 통해서 도시국가 홍콩으로서의 정체성을 처음으로 등장시켰던 지식인 친완 (Horace Chin Wank-kan)은 홍콩인의 한족문화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일상생활에서 한푸를 입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경향은 한족중심주의와 이의 확대버젼인 중화민족주의가 필요에 따라서 변주되는 형식으로 홍콩인들뿐 아니라 근대 이후 광둥성 출신의 지식인들에게서 일관되게 찾아볼 수 있다. 캉유웨이康有為나 그의 제자인 량치차오梁啟超 그리고 쑨원孫文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사회주의 중국의 수립이후 대륙의 광둥성 지식인 사회에서는 노골적인 한족중심주의 흐름이 제거됐지만, 나는 최근에도 카이핑開平의 한 화교마을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로컬 지식인을 만난 적이 있다. 반면 2019년 홍콩광복 투쟁의 주인공이었던 청년세대들은 이미 한족이든 중화민족이든 상관없이 중국인으로서의 문화적 정체성을 강력히 부정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150년간의 영국의 식민통치가 남긴 자유주의적 문화유산이 더 중요한 홍콩인 정체성의 본질로 여겨진다. 타이완의 젊은 세대가 화인華人공동체보다는 새로운 타이완 내셔널리즘을 중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근대국민국가 형성의 기반이 되는 내셔널리즘(민족주의)이 어느 시점에 형성되는가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일방의 관점에서 옳고 그름으로 가치판단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헬렌 시우가 이들 시장마을의 한족 광둥성 주민들이 원래 소수민족 출신이었음을 추론하게 하는 또다른 재미있는 역사인류학 연구결과가 있다. 이들은 명청, 그리고 민국 시기에 여성이 결혼을 한 후에도 시댁으로 가지 않고, 처가집에 계속 머무는 현상을 역사기록에서 찾아냈다. 이들은 아이를 출산한 이후에야 시댁으로 이주했는데 그래서 이를 지연시키기 위해서 남편과의 성관계를 거부하거나 심지어 완력을 이용해서 이를 막은 (정말 영화처럼 무술을 익혔다고 한다.) 여러 구체적 사례들도 논증한다. 특히, 이 지역에 비단을 직조하는 산업이 발전한 이후에는 아예 직업적인 직조인으로 남아서 여성들이 독립적으로 집단거주한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는 경제권을 확보해서 독립성은 더욱 강해졌다. 이들은 이미 유교전통과 이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사람들이었고, 지주나 상인으로서 경제력이 있었는데, 딸이 시댁에 가더라도 이들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해서 계속 독립적인 발언권을 유지하도록 지원했다. 이런 관행은 중국의 전통적인 유가 가부장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는데, 주강 삼각지역에서는 보편적으로 수용됐다. 헬렌 시우는 이들이 모계사회의 전통을 가졌던 소수민족 전통과 문화적 관습을 유교사회내에서 유지한 것으로 추론한다.

헬렌 시우는 이밖에도 70년대 후반부터 2010년경까지 자신이 관찰한 주강 삼각지역 농촌민과 도시민의 여러가지 관습과 행위를 민족지로 기록한다. 이 관찰과 분석은 모두 내용이 다르긴 하지만, 내가 파악한 일관된 ‘정서적 관점’ 몇가지가 있다. 첫째, 그는 사전에서의 농업생산과 주강삼각지역에서의 국내적, 국제적 상업적 교역을 기반으로 발전한 역동적인 트랜스로컬 네트워크를 상정한다. 정확하게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중국 내부의 자본주의와 근대 민간 사회의 맹아로 여기고 있는듯하다. 그는 마오시기 즉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이 네트워크가 파괴됐다고 본다. 그는 7~80년대 이 지역의 필드연구를 통해서 서구사회의 자유주의적 엘리트 좌파가 관찰한 현실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환멸과 광저우에서 기원한 대상인 집안출신 배경의 로컬 엘리트가 느끼는 상실감을 함께 표현하고 있다. 이런 관찰은 다시 2천년대 초반 이미 개혁개방의 수혜자가 된 광저우 중산층 도시민들의 부동산에 대한 열망, 마찬가지로 성중촌城中村에서 지대를 통해 상당한 이익을 확보한 농민들의 욕망에 대한 기술로 이어진다. 그는 이들이 과연 지속가능하지 않은 지대이익을 통해, 자신의 후대에게 문화적 자본을 물려줄 수 있을지 회의를 표시한다. 이런 불연속성에 대한 책임을 공산당의 혁명과 후속 통치행위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헬렌은 특히 당국가의 과도한 개입이 서구적인 개념의 민간사회 형성을 막는 부작용을 언급한다. 이를테면 개혁개방이후 마을의 리츄얼이 회복됐을 때, 홍콩사회와 달리 중국의 젊은 세대는 리츄얼의 문화적, 정치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공리주의적으로만 받아들인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나는 2020년대 동아시아 사회들을 공시적으로 바라보면서 헬렌 시우의 이런 비판에 대해서 다소 회의적이다. 광둥의 선전, 광저우와 같은 중국의 대도시들, 그리고 홍콩, 타이페이, 서울에서 특히 청년층에게서 발견되는 후기근대적 문제점들은 놀랍도록 공통적이다. 소위 네이좐內卷, 탕핑躺平이라고 불리는 현상이 그러하다. 어째서 데모크라시 정치 체제를 가진 후자의 국가나 지역들과 사회주의 독재정치 체제를 가진 중국이 같은 현상을 보이고 있을까? 이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정치체제보다 더 뿌리깊은 동아시아의 문화적 관습과 글로벌 자본주의 작동 기제가 결합된 결과로 밖에는 나로서는 해석하기 힘들다. 특히 중국의 정치체제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혹은 뒤늦게 도입한 시장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차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전통적인 유교관료체제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때 훨씬 이해하기 쉽다. 또, 일당독재 국가체제도 지금 체제의 전신이었던 국민당의 유산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민주정의 퇴행을 노골적으로 진행시키는 검찰관료독재정권 카르텔과 그 지지자들의 행태를 보면, 중국공산당의 열화버전이라는 느낌을 나는 많이 받는다. 대통령과 집권당의 지지율을 볼 때, 상당수 국민들이 여전히 이런 행태를 정상적이라고 느끼는 것은 고시를 통해 중앙의 권력을 차지한 집권세력의 통치행위를 묵묵히 수용하는 유교관료주의시대 백성들의 정서에 익숙한 탓이 아닌가 짐작해 본다. 즉 겉으로 운영되는 데모크라시안에 도사린 대단히 뿌리깊은 문화적 영향들이 없지않다는 것이다. 희대의 독재자인 블라디미르 푸틴도 어쨌든 민주적 투표를 통해 러시아 유권자들에게 선출된 정치지도자이고, 여전히 러시아 시민들은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현실을 본다면, 좀 더 명확한 설명이 될 것 같다.

이제 자연스럽게 훙호펑의 책에 대한 평으로 넘어가보자.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중국이 자랑하는 일국양제체제가 사실은 이미 티벳의 경우에 사용됐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일국양제체제는 사실 중국전통왕조사회가 사용하던 기미綺靡제도를 그 뿌리로 하고 있다고 훙호펑은 주장한다. 기미제도는 중원왕조정부가 변경의 소수민족을 통치하던 방식이다. 귀주나, 운남성과 같은 산악지역의 소수민족들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중원왕조는 중앙의 유교통치이념을 기반으로 하되 이들 로컬정부에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한다. 이런 로컬정부의 리더를 토사土司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지방의 호족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일국양제 체제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 체제가 한시적으로 운영된다는 것이다. 기미제도를 운영하면서, 중원왕조는 한족 농민들을 끊임없이 지역으로 이주시켜서 인구비율을 바꾼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토사를 중앙의 파견관료로 교체시킨다. 이것을 개토귀류改土歸流라고 부른다. 이때쯤 되면 원래 소수민족 주민들과 로컬 엘리트들은 정말 소수로 남든가 아니면 이미 유가이념을 받아들여서 한화돼 버린다. 한족주민과 통혼이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인종적으로도 차이가 없어진다. 조금 경우가 다르지만 앞에서 설명했던 주강삼각지역의 사례를 보면 지역민들이 스스로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자연스럽게 한족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티벳이나 홍콩 사례 모두 중국 정부가 고의로 상황을 악화시킨 것은 아니라고 훙호펑은 설명한다. 이를테면, 1989년에 벌어진 천안문 사태는 당초 중국과의 통일, 그리고 홍콩의 민주화에 적극적이었던 홍콩의 좌파와 중국 공산당 정부가 서로를 불신하게 만드는 계기로 작용하면서 결과적으로 일국양제체제가 조기에 붕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티벳의 경우에도 당초 달라이 라마와 공산당 정부의 의견이 심하게 갈라지지 않았었지만, 문화대혁명과 같은 상황이 서로를 불신하게 되는 계기로 작동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한시적인 체제이고, 기미제도의 전통에 기반한다고 본다면, 결국 변경지역의 한화 혹은 중국화는 예정된 결과라고 훙호펑은 설명한다. 그래서 이를 잘 이해하고 있는 대만은 애초부터 중국의 일국양제 체제 제안에 일도 관심이 없었다고 말한다.

훙호펑은 결론에서 홍콩과 같은 상황에 처했던 여러 지역들의 사례를 분석하면서 홍콩과 같은 식민지역들이 상당한 수준의 안정적이고 항구적인 자치권을 누린 사례는 특정 조건을 만족시킬 경우에만 가능했다고 설명한다. 홍콩과 중국의 관계가 특수한 사례는 아니라는 것이다. 두가지 조건이 만족돼야 하는데 하나는 외부 열강의 개입이 필요하고, 두번째로는 지배국가가 헌법적인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중국반환전 영국령 홍콩이 바로 그런 사례에 해당한다. 식민지는 아니지만 어쩌면 위태위태한 상태를 유지하는 대만의 사례도 그렇게 볼 수 있다. 미국과 EU, 그리고 일본의 지원약속이 사라지는 순간, 대만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할 것이다.

훙호펑의 논리를 빌자면, 홍콩, 대만 그리고 신장과 티벳의 사례는 장기적으로 모두 같은 운명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의 일국양제는 결국 한화 혹은 중국화를 위한 전환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훙호펑이나 헬렌 시우의 입장을 동정한다. 하지만, 두가지 단순한 사고방식으로의 발전은 경계한다. 그것은 첫째, 중국은 외부확장욕이 강한 침략적 정복국가여서 이들 지역과 같이 한반도를 점령하고 한화시키려할지 모른다는 한국인들이 가진 오래된 공포심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도 (즉, 민족과 국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지정학적으로도 과도한 염려이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순수한 한족정권이 한반도를 침략했던 것은 매우 오래전 단한번 벌어졌던 일이다. 즉, 한무제의 한사군 설치의 경우가 있다. 당시,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 한무제가 멸망시킨 조선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것을 지금 한반도의 국민국가나 지금의 한민족과 직접 연결시키는 것은 학술적으로는 무리한 상상이다. 고고학적인 자료만 놓고 보자면 조선은 청동기 부족국가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직 제대로 된 고대국가 형태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수당이 고구려를 침략한 역사가 있지만, 수당의 지배층은 한족이 아닌 선비족이었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있다.

그렇다면 중원의 한족왕조가 이후에 한반도를 본격적으로 침략해서 점령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침략전쟁과 식민지 유지의 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한반도를 식민화하는 것보다는 번속국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나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이 한반도를 침략할 것이라는 상상력은 이런 경제적 이해타산관계가 바뀌었을 때만 성립가능한 가설이다. 물론 만일 한국이 중국과 영토를 맞대게 되는 상황이 온다면 (지금은 북한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만일의 분쟁에 대비한 충분한 군사적 준비가 있어야 한다. 또, 군사적 위협과 별개로 중국이 과거와 같은 번속국의 위치를 강요하지 못하도록, 다양한 외부세력과의 연대와 동맹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주권국가도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특히, 열강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할 때 필수적인 일이다. 그렇다면 중국이 우리를 반드시 혹은 운명적으로 침략할 것이라는 상상은 작금의 반중/혐중 감정의 발흥과 같은 부작용을 일으킨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두번째는 우리가 국가적으로 위의 지역들의 독립을 지지하는 것이 맞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마치 윤리적으로 정당한 요구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지정학적 이유때문이다. 중국은 식량이나 에너지 자급국가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그러하다. 중국에게 있어 신장은 육로, 그리고 홍콩과 타이완은 해로로써의 일대일로의 중요한 길목에 위치한다. 두 길 모두 분쟁과 같은 이유때문에 막힌다면, 중국인구 수억명의 생명과 안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이 이 지역들의 영토권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윤리적인 요구라거나 단순한 억지가 아니다. 다만, 꼭 이런 반인권적인 방법밖에 사용할 수 없냐고 비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티벳의 경우는 좀 다른 것 같다. 중국이 티벳을 통치하는 것에, 꼭 중국의 사활적 이익이 달린 것은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중국정부의 입장을 지지하는 분과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그는 티벳 사람들 다수가 독립된 근대적 국민국가를 요구하고 있는지 불투명하다고 했고, 영토주권에 대한 판단은 해당 국가가 내리는 것이지, 외부자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의 논리에 대한 나의 반박은 이러하다.

첫째, 나는 우선 수천년 이상 에쓰니ethnie 수준의 민족국가를 유지해왔던 티벳의 역사를 볼 때, 이들이 근대적 국민국가를 이룰 준비가 안돼있다고 제3자가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설사 티벳 독립주의자들의 정치체제 목표가 달라이 라마가 지배하는 신정국가나 노예제와 같은 정치체제라고 해도 그것이 티벳민족의 결정이라면 그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이란은 지금도 신정국가체제이고, 사우디 아라비아와 같은 국가들은 심지어 왕조체제를 갖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들 국가와 민족들은 독립적인 정치체를 이룰 자격이 없는 것인가? 같은 논리로 나는 미국과 서구의 여러나라들이 중국이 민주정 체제가 아니라는 이유때문에 악의 축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정치체제 변화는 중국인민들이 결정할 문제이지 외부에서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같은 이유로 중국이 티벳 민족이 봉건적인 신정 노예체제였기 때문에 그들을 해방시켜줬다고 주장하는 것도 옳지 않다.

두번째, 영토주권 문제도 매우 애매하다. 청나라에서 티벳은 만주족, 몽골족과 함께 지배층연합의 성격을 띄고 있었지, 지금과 같이 반대로 지배당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그들에게 정당한 자치권을 허용하는 것이 맞다. 자치권을 허용했을 때, 다시 신정이 들어서고 독립을 원하는 민족주의로 발전한다면 그것 역시 티벳인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 맞다. 중국의 티벳 통치가 중국의 사활적 이익과 관련돼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미 70년 넘게 중국이 티벳을 지배하면서 많은 한족이 티벳으로 이주했고, 현지에서는 여러 이해관계가 생겼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미 중국측의 함몰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이 제대로 해결될 가능성이 없다면, 같은 논리에 의해 일방적으로 중국에게 영토주권을 포기할 것을 강요할 수는 없다.

결국 해당국가, 즉 중국은 계속적인 티벳통치의 비용과 수익을 함께 고려해서 판단할 것이다. 중국은 이미 사후 유지 비용이 충분히 적어졌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현지의 티벳사람들 상당수가 순치됐고 중국화 됐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역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티벳 민족의 슬픈 운명을 동정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역사의 아이러니를 한탄할 수 밖에 없다. 외몽골이 예전에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은 소련이 몽골의 독립을 지지했기 때문이고 티벳은 당시에 그런 행운을 얻지 못했다. 또, 나중에 중국 정부가 달라이 라마와의 협력관계를 파기하는 과정에서 중국 극좌파의 주장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이들은 당시 영토에 대한 지배욕보다는 티벳인민들을 노예제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이상적인 주장을 앞세웠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글을 마무리 하려고 한다. 헬렌 시우와 훙호펑의 광둥과 홍콩에 대한 분석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앞에서 설명했듯이 나는 광둥의 한화과정과 조선반도의 ‘딥 시니사이징’ 과정을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시사점들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자세한 비교는 물론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숙제로 남겨둔다. 또 하나의 큰 관심사는 중국 남방해양 문화가 ‘프로세스로서의 중국’, 중화문명의 미래 변화에 더해줄 수 있는 여러가지 가능성들이다. 물론 나는 이것이 무조건 긍정적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자유’, ‘열린 시스템과 창의성’ 혹은 ‘다양성’이라는 표현이 어떨 때는 사람들에게 일방적인 장밋빛 환상만을 심어주기도 한다. 과거 역사를 보면, 이를테면 남방해양 중국의 자유는 해적의 자유일 수도 있고, 자기 동포들의 고혈을 착취해서 쌓은 화교재벌의 부의 원천일 수도 있다. 그리고 지속가능하지 않은 방식으로의 자본주의 발전에 더욱 공헌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세상 모든 일에는 빛과 그림자가 함께 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과 같이 중국이 폐쇄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가운데 외부로 열린 민간의 전통이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것은 부정보다는 긍정의 에너지를 더 많이 암시한다.







김유익和&同 青春草堂대표. 부지런히 쏘다니며 주로 다른 언어, 문화, 생활방식을 가진 이들을 짝지어주는 중매쟁이 역할을 하며 살고 있는 아저씨. 중국 광저우의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오래된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데 젊은이들이 함께 공부, 노동, 놀이를 통해서 어울릴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 나가고 싶어한다. 여생의 모토는 “시시한일을 즐겁게 오래하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