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2023년 7월 26일
39. (친중반미민족자주) 진보 vs (친일친미반소반중문명개화) 보수 이원론?
싱하이밍 대사의 폭탄발언과 후쿠시마 오염수 배출결정의 파란을 거치며 양당간에 거친 정치적 ‘딱지붙이기’가 오간다. 지난 몇년간 고착된 ‘친일’ 대 ‘친중’이 그것이다.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인 ‘페친’ 이욱신 선생이 아래와 같이 깔끔하게 구도를 정리해 줬다.
‘(친중반미민족자주)진보’ vs ‘(친일친미반소반중문명개화)보수’
동학군이 전라도를 점령한 결과 녹두장군 전봉준과 전라감사 김학진이 평화적 타협을 봤던 ‘전주화약’이 있었다. 그는 이것이 우리가 피식민역사에서 시작된 근대화의 질곡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고 한탄한다. 마찬가지로 이런 진영논리 갈등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 집권층인 민씨일가가 청에 칭병하고 일본이 톈진조약에 의거 자동 개입하면서 조선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하게 된다.
나는 동학이 조선의 지배층에게 강제할 수 있었던 자주적 개혁과 근대화의 가능성에 대한 이욱신의 아쉬움을 크게 공감한다. 하지만 동시에, 위의 이분법 프레임과는 조금 다른 구분도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전라도 천년사>>논란을 일으킨 유사역사학자들과 그 지지자들의 비이성적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민족자주’와 ‘친중반미’가 꼭 함께 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여기서 ‘진보’는 소위 ‘범진보’를 일컫는데, 나는 이중 민주당 지지자들을 콕집어서 ‘진보’보다는 ‘민주개혁진영’이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한다.
‘진보좌파’의 경우 중국에 대한 감정이 복잡할 수 있다. 최소한 청년 진보좌파는 다른2030세대의 사람들처럼 좋은 감정을 품지 않은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왜냐하면 대개 페미니즘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 정부도 그러하지만, 중국의 전반적 사회 문화와 분위기가 가부장적이라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한국사회의 유교적 가부장 문화는 어쨌든 중국이 원조다. 그래서 이들의 중국에 대한 거부감은 어느 정도 어쩔 수 없는 본질적 요소가 있다. 또 중국사회에는 언론과 학문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이념 성향과 별개로 많은 저널리스트들이나 지식인들이 중국에 대해 거부감을 품는 것도 그래서 같은 의미로 이해가 간다.
유사역사학자들의 지지자나 후견인중에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특히 많다. <<전라도 천년사>> 논란만 놓고 보면 ‘반일’이 두드러져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후대의 위서로 추정되는 <환단고기>에 근거한 우리 고대사에 대한 만주나 중국대륙과 관련한 그들의 주장을 보자면, 중국과의 역사분쟁도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 학술적 논란의 여지가 있는 동북공정은 차치하고라도 중국대륙 북부와 동부연안에 대해 그들이 주장하는 역사적 영토는 잘 알려진대로 학술적 가치가 적은 황당한 수준이다.
민주당 지지자인 리버럴 성향의 지식인과 저널리스트중에는 다른 이유로 ‘반중’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특히, 금융경제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성향이 두드러진다. 왜냐하면 금융자본주의 담론은 영미국가가 주도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중국 당국가의 자본시장에 대한 통제와 폐쇄성을 비판하고, 기업에 대한 ‘과도한’ 간섭과 규제도 좋지 않은 것으로 본다. 나는 이것을 ‘신자유주의’선호라고 딱지 붙이고 싶지는 않다. 시장에 대한 정부의 규제와 간섭이나 ‘사유재산’의 존중의 절대성에 있어서 과연 어느 정도가 적절한지 분명하게 선을 긋기 힘든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장은 ‘정보의 투명성’과 ‘개방성’을 선호한다고 말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어쨌든 홍콩의 자본시장과 상하이, 토쿄와 서울의 자본시장중에 과연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이고 더 나쁜 것이다라고 일도양단해서 가치 판단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각각의 국민국가나 지역의 상황에 따라서 다른 정도와 특성을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여하튼 홍콩과 서울의 개방 정도를 선호하는 금융경제 전문가라면, 당연히 투자자로서 상하이의 자본시장에 대해서 좋은 평가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자연스럽게 ‘친미반중’성향을 가질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중국의 금융자본이 영미 금융자본주의질서아래 제압당하는 시나리오를 선호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얼마전 한겨레 신문에 칼럼을 기고했던 전 청와대 경제수석 박복영 교수의 《****중국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들, 위안화와 대사의 언행》****글을 보면 이런 경향을 명확하게 읽을 수 있다. 그는 오래전 출판된 중국의 경제 논객 쑹훙빙의 <<화폐전쟁>>이라는 책을 언급하면서, 중국이 오랜 기간 위안화로 달러를 대체하는 등의 방식으로 전세계의 금융패권을 노려왔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오랜 중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위안화 결제 비율은 거의 늘지 않았는데, 이는 중국정부의 정책이 개방성과 투명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신뢰가 생명인 금융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민주정이 아닌 공산당 일당독재의 권위주의 정부인 중국이 체제를 개혁하지 않는 이상 위안화는 절대로 달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글 제목이 시사하듯이 그는 싱하이밍 대사의 협박성 발언에 크게 불쾌감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주장은 결과적으로 중국정부가 경제적 영향력을 무기로 한국을 협박하는 것은 속 빈 강정같은 공갈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을 하기 위한 설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리버럴 지식인이 ‘민족자주’에 손상을 끼친 중국정부에게 반론을 제기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또 그는 경제전문가이기 때문에, 금융자본주의 담론에 근거해서 ‘반중’적인 입장을 분명히 한다. 개방성은 몰라도 정보의 투명성 측면만을 놓고 이야기하자면, 중국 정부나 중국 기업들의 태도에 문제가 많은 것도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기도 하다.
나는 예전에 리버럴이 내셔널리즘 성향을 보이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진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래서 한국의 민주당이나 타이완의 민진당 지지자들의 내셔널리즘 성향이 동아시아적 특성인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계속 던지곤 했다. 이를테면 미국 민주당 지지자들은 글로벌리스트이고, 동아시아의 리버럴들은 내셔널리스트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금 더 깊이 생각을 해보니 미국 민주당 지지자들이 내셔널리스트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그들이 지지하는 ‘네이션nation’이 하필 글로벌 제국일뿐, 국가와 정부의 권력을 통제하겠다는 의도에는 변함이 없다. 다시 정리하자면, 한국의 민주당이나 타이완의 민진당은 에쓰닉ethnic 내셔널리즘이고 미국의 경우는 제국의 (글로벌) 내셔널리즘 (형용모순처럼 들린다 ㅎ) 일 뿐이다 . 부연하자면 타이완의 독립을 추구하는 타이완 내셔널리즘은 기존의 화인들이 가진 한족 혹은 중화민족과는 차별화하는 새로운 종류의 타이완 민족을 정의한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의 고대 혈통적 기원을 중국 남부에 화하華夏족 즉 한족이 진입하기 전에 그곳에 광범위하게 거주하던 백월百越족으로 보고 있는듯 하다. 대만 원주민인 고산족이나 소위 본성本省인이라 불리는 푸졘福建성 남부 출신 한족들의 기원을 고려하면 완전히 억지스런 이야기가 아니다. 어차피 네이션의 탄생은 문화나 혈연보다는 정치적인 기획에 가깝기 때문이다. 영미의 리버럴이든, 동아시아의 리버럴이든 중산층 시민들의 정치적 영향력과 지식인 담론을 통해서 국가의 정치권력을 확보하려는 시도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예전에 리버럴의 자유주의적 성향을 무정부주의, 즉 아나키즘과 혼동했기 때문에 이런 딜레머에 빠졌었던 것이다.
박복영 교수뿐 아니라 많은 경제전문 저널리스트들이 이런 성향을 보인다. 대표적인 이는 KBS의 박종훈 기자[https://www.youtube.com/watch?v=p7jk5xJ186o&t=1s]와 삼프로TV 언더스탠딩[https://www.youtube.com/watch?v=v__LH2ujLVc]의 권순우 팀장 같은 사람들이다. 박종훈 기자는 자신이 이런 성향을 갖게 된 이유가, 과거 중국 정부가 한국기업들을 중국에서 쫓아낸 것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했다고 명확하게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이들의 ‘반중’적 시각에 조금 우려를 갖고 있다. 중국이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부당한 행동을 했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에 대한 대응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 대응을 제대로 준비하기 위해서는 ‘반중’이라는 분노의 감정보다는 냉정한 현실인식, 자기 객관화가 앞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황을 오판하고, 우리 자신을 더 큰 곤경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
우선 박복영 교수의 주장이 정확한 것인지에 대해서 나는 의문이 있다. 쑹훙빙과 같은 중국계 미국시민이자 민간인인 한 논객의 주장과 달리, 중국 정부는 일관되게 자신들의 의도가 달러패권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스스로의 앞마당과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미국을 통해서 글로벌 경제에 편입돼 급속히 성장한 중국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차이메리카’ 시스템속에 온존해왔다. 미국에서 벌어들인 달러를 통해서 다시 미국의 국채를 사들이는 식으로 달러패권을 유지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한 것이다. 그런데, 미국이 자신의 금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달러를 무분별하게 발행할 때마다, 원자재와 에너지, 식량을 달러로 수입하면서 중국 국내의 인플레이션이 유발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또, 중국은 수출업체가 달러를 벌어들일 때마다, 이에 상응하는 인민폐를 찍어서 수출기업에게 돌려준다. 이렇게 늘어난 인민폐가 부동산 시장으로 들어가서 거품을 키우거나, 생산자본, 금융자본의 과잉을 유발해왔다고 본다. 또 정부가 가진 달러 채권의 가치가 하락하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중국은 이런 달러자산의 보유를 줄이고, 중국과 무역이 활발한 국가들과는 달러대신 인민폐로 거래를 활성화시키고 싶어했다. 중국의 정치경제학자 원톄쥔의 설명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중국은 인민폐의 역외시장 거래가 늘어나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중국 국내의 자본계정을 계속 ‘타이트’하게 통제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현재의 중국은 미국을 대체하는 국제통화 패권국이 되려는 의도가 없다는 것이 중국 경제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차이나 붐>>, <<제국의 충돌>>의 저자 훙호펑은 2022년 저작인 <<City on the Edge>>에서 중국이 홍콩을 역외 인민폐 시장의 도매시장으로, 런던이나 싱가폴을 소매시장으로 삼는 수준으로만 역외 인민폐 시장을 제한적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2020년 스위프트SWIFT망 결제기준으로 인민폐는 2% 정도를 점유하고 있을 뿐인데, 이들 대부분도 중국계 금융기관들이 홍콩에서 인민폐로 발행하는 딤섬본드의 거래량에 해당한다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마저도 단지 SDR(Special Drawing Right)에 인민폐를 편입시키기 위한 IMF의 최소 기준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훙호펑이 언급하지 않은 인민폐 결제방식도 있다. 중국 자신의 인민폐 역외 결제망 CIPS나 CBDC의 일종인 디지털 인민폐 등이 그것이다. 다만 이는 제3자간의 인민폐 역외거래보다는 중국과의 무역과 자본거래를 위주로 한 네트워크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설명이 맞는다면, 애초에 박복영 교수의 현실진단은 정확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또 한편으로 중국과의 수출입량이 모두 많은 한국같은 나라의 경우, 만일 중국의 수입업체가 후자의 방식의 인민폐 거래를 원할 경우, 그것을 마다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만큼 많은 한국 수입업체들이 중국 상품에 대한 수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잠재적으로 상당한 인민폐 수요도 있기 때문이다.
박종훈의 주장에 대해서 내가 가지게 된 의문은 베트남이나 인도와 관련이 있다. 두 나라 특히 베트남이 현재 중국의 대체 직접투자 생산지로 가장 큰 관심을 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많은 인터넷 경제 유튜브 방송등에서 베트남 전문가들에게 중국과 같은 일이 벌어질 가능성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는 것을 봤는데, 비교적 합리적인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중국의 경험을 토대로, 베트남에서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 중국에서 벌어진 일은 어떤 권위주의 정부가 있는 개발도상국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과거 한국에 많은 투자를 했던 일본 혹은 서구의 자본들이 한국에 대해서 같은 불만을 토로했었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는 구체적으로 사례를 분석해 본 것이 아니라서, 박종훈의 의견을 반박할 수는 없지만, 중국은 ‘나쁜 나라’이고 중국 사람들은 ‘강탈적이라서’ 이런 문제가 발생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그의 설명에는 거부감을 느꼈다. 한국이나 베트남은 사실 중국못지 않게 에쓰닉 내셔널리즘이 강한 나라이고, 산업자본의 성장을 통해서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한 공통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식의 가치 판단이 제3자에게는 ‘내로남불’로 비추이지 않을지 의문이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의 중국에 대한 이런 평가가 금융자본주의적 시각과 결합해서, “중국은 미국의 금융패권에 굴복해야만 한다”라는 소망적 사고wishful thinking나 자기충족적 예언self-prophecy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의 문제점은 두가지이다. 첫째, 반중 감정에 치우쳐서 현실에 대한 부정확한 진단을 낳을 수 있다. 위의 박복영의 사례가 그런 것이다. 두번째로 설사 이런 기대가 맞아 떨어진다고 해도 또다른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과연 이들은 영미 금융자본주의의 승리가 장기적으로 한국 사람들의 이익과 일치하는 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판단해 본 적이 있느냐는 것이다. 나는 ‘홍사훈의 경제쇼’를 진행하는 KBS기자 홍사훈이 늘 출연하는 경제전문가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믿음이 간다. [https://www.youtube.com/watch?v=ublltlYgxQs&embeds_referring_euri=https%3A%2F%2Fdesert-outrigger-040.notion.site%2F&source_ve_path=MjM4NTE&feature=emb_title] 그는 금융경제 전문가가 아니라 탐사전문 기자이기 때문에 보다 객관적으로 상황을 인식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이들 리버럴 금융전문가들이 미국이 금융의 역량으로 중국을 제압해주기 바라는 것은 마치 한국의 극우세력이 명확히 반중의 기치를 내걸고 미국의 무력에 의존해서 중국을 제압해주기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미국 달러패권의 본질은 군사력, 특히 달러로 결제하는 에너지 자원과 식량을 운송하는 해상항로의 안전을 보장하는 해군력이라는 지정학적 주장을 따르자면 금융과 무력은 불가분의 관계로 볼 수도 있다.
이들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그것은 근본적으로 중국에 대해서 불편함을 느끼고 두려워하는 심리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니체가 이야기하는 ‘르상티망’으로 이해했다. 이것은 ‘극복할 수 없는 상대에 대한 원한의 감정’이자 ‘강자는 항상 악하고 약자는 항상 정의롭다’는 ‘노예의 도덕’이라는 설명이다. 최근 출간된 나의 저서인 ‘차이나 리터러시’에 그 자세한 내용이 담겨 있다. 나는 중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이런 감정이 뿌리 깊은 반중, 혐중의 근본적 원인이 된다는 점에서 문제일뿐더러 무엇보다 건강한 ‘자기의식’을 형성하는데 장애가 된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이런 감정은 조금 다른 의미로는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과도 닮아 있는 점이 있다. ‘상처입은 자아’가 품은 내셔널리즘에서 비롯한 반일과 반중이 실은 한뿌리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나는 주로 반중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고민을 하면서 반일정서의 문제점을 가볍게 여겨왔는데, 어찌보면 건강한 자기의식의 회복을 통해 두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이렇다. 우리 한국사람들은 일본정부와 일본인이 식민지배에 대해서 충분히 사과를 하지 않는다고 늘 생각한다. 그래서 특히 그런 일본정부를 지지하는 일본인들은 매우 부도덕하다고 여긴다. 정말로 그런 것일까? 일본 정부의 식민지배, 그리고 전쟁책임에 대한 사과가 충분하지 않은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또, 일본의 교육현장에서 이런 역사적 책임에 대한 교육이 불충분한 것도 맞다. 하지만, ‘일본인들의 양심’이라는 조금 추상적인 문제를 논하기 시작하면 단정적으로 말하기 힘든 측면들이 있다고 한다. 이유는 식민지배가 초래한 구체적인 문제들에는 식민지배라는 모순외에, 원래 조선후기부터 형성되어 있던 우리 민족 자신의 모순이 함께 작용했기 때문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그런 점을 지적한 것이 바로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이고 쌀의 수출과 같은 식민지 수탈문제에 대해서 이 점을 지적한 것은 조형근의 <<우리안의 친일>>이다. 물론 전자의 경우는 문제 자체안에 내재한 민감성에 더해서, 저자가 한국인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 일본인의 관점으로 사안을 바라봤다는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 때문에 한국사회의 공분을 사게 됐다. 결국, 건강한 사회적 논의로 진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여하튼, 가부장제를 포함한 신분제와 경제문제 등, 조선후기의 사회적 모순은 동시기 이웃나라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서도 문제가 심각했다고 한다. 즉, 상대적으로 매우 낙후된 사회였다는 뜻이다. 일본의 침략이 없었더라도 결국 왕조가 교체되든가, 더 과격한 변화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맨 앞에서 이야기한 동학농민운동이 그 대표적인 움직임이다. 그래서 반대급부로 한국의 근대화에 오히려 일본의 식민지배가 더 도움이 됐다는 뉴라이트의 주장이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나는 소위 ‘반일종족주의’라는 뉴라이트의 표현에 동의하지 않는다. 분명히 일본 식민지배의 공과를 따져 묻는다면 어느 한쪽이 월등하다고 말하기는 힘들지 모른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배함으로써 조선인, 그리고 한국인 자신이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원천 박탈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 모순이 심화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아직도 그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앞으로도 오랜 기간 일본인들에게 이 문제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나는 한국인과 일본인이라는 추상적 집단의 차원에서는 이런 도덕적 책임 이상으로 일본인들을 질책하고 집단적인 피해의식을 갖는 것이, 더 이상 우리 한국인들의 자기의식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미 한국은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만큼 충분히 부유하고 성숙한 국가가 됐기 때문이다. 자기의 운명에 대한 어느 정도의 주체적 결정권을 가지게 됐다. 징용공이든 위안부문제이든 당사자는 계속 구체적 책임을 일본 정부에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의식을 한국인이라는 민족집단 전체로 확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여성으로서 위안부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더 컸다는 한 연구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짓밟힌 약자의 피해에 공감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바람직하고 정당하다. 하지만, 피해자에 대한 공감을 넘어서, 가해자를 정죄하려는 노력은 더욱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언어로 표현할 때만 빛이 난다. 민족 대 민족이라는 느슨한 범위는 결코 구체성을 갖을 수 없다.
중국에 대한 감정도 마찬가지이다. 조선이 명청의 번속국으로 500년이상 사대의 관계를 유지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중화문명의 혜택을 받은 점도 있고, 폐해도 있다. 당시의 ‘보편문명’인 중화문명에 대한 숭상이 지나치다 보니, 자기 현실에 발을 디딘 관점은 사라지고, 중화보다 더한 ‘교조적 소중화’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 너무 익숙해진 것이 대표적인 부정적 결과다. 이 폐해가 지나쳐, 아직까지도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래서 지금은 ‘교조적 리틀 아메리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를 자처한다. 그 결과가 반중과 혐중으로 나타나는 것은 큰 역설이다.
조선왕조 시절과 달리 한국은 외형적으로 충분히 강국으로 성장했다. 미국이나 중국과 같은 패권국가와 동등할 수는 없어도, 그들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정도의 국력을 갖췄다. 그렇다면 이제 본질적인 반중 감정은 거둬들일 때가 된 것 같다. 나는 이것이 “우리는 강팀이다!” 혹은 “우리도 열강의 반열에 들었다”라는 선언과는 조금 다른 자기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이 의식에 대해서, 맨 처음에 거론한 반중, 반미의 이분법과는 다른 이분법을 들어 설명해보겠다.
그것은 진보, 보수라는 관점이 아니라 자기의식의 지향점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열강에 붙어서 살아야 한다”라거나 “스스로 열강이 되고 싶다”라는 두가지 관점이 그것이다. “열강에 줄을 서야 한다”라고 하면 지금 윤석열 지지자들처럼 친미친일을 내세우거나, 아니면 민주당의 금융경제 전문가들처럼 영미금융자본주의 체제의 신봉자가 되는 것이다. 그 반대에 서서 미국과 서구를 악의 축으로 보고 소위 대안체제론으로 러시아와 중국을 찬양하는 친중파 성향을 가진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반대로 “내가 열강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 판타지, 유사역사학의 세계에 빠져든다. 고전적인 비유를 들자면, 어떤 방식으로든 체스플레이어가 되거나 어느 한쪽에 크게 판돈을 걸고 싶어하는 도박꾼이 되고 싶어하는 심리 같은 것이다. 하지만 섣불리 ‘몰빵으로’ 줄을 섰다가 오히려 체스판의 말로 전락한 것이 지금 윤석열 정부와 한국의 상황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한다.
그럼 내가 제안하는 건강한 자기의식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어느쪽도 편들지 않는 제3자적 구경꾼 아니면 정서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가장 냉정한 도박꾼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나치게 통속적인 체스판 비유대신, 다른 예를 들고 싶은데, 나는 이를 <차이나 리터러시>에서 ‘만이蠻夷국가’ 혹은 ‘경계국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주변 혹은 부근을 살펴 관계속에서 내 위치를 제대로 파악한다. 이런 자기객관화를 통해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그리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꼭 열강이나 핵심국가가 될 필요는 없다. 마치 고만고만한 아세안 국가들이 조화와 균형을 찾는 것처럼, 다른 보통 국가들과 함께 협력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는 것이 가장 좋다.
이 글을 보고 콧방귀를 뀌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네가 뭔데 감히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주장을 ‘디스’하고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영향력을 가진 시니어 경제 저널리스트를 ‘저격’하는가?라고 말이다. 분명히 ‘경제전문가’와는 거리가 먼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 중국에서 한국 기업이 겪은 ‘불공정한 대우’에 대해서 나는 실증적으로 조사를 해보거나 정확한 사례연구를 접한 적이 없기 때문에, 박종훈씨 등의 주장을 강하게 반박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없지 않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들을 비판하는 내 주장에 합리성이 있고, 근거가 충분하냐는 것이다. 나는 내 설명의 합리성과 근거 이상으로 내 주장을 스스로 신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의 제한된 관찰과 논리체계안에서는 부끄러움이 없다. 내가 말하고 싶은 한국이라는 나라, 한국인이라는 사람들의 집단적 정체성은 이런 것이다. 내가 스스로 나를 표현하기 위해서 어떤 분야에서 꼭 한국 ‘최고’, 세계 ‘최고’가 돼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내 생각이나 경험, 그리고 내가 가진 능력들은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가 있다.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부끄러운 수준의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일을 벌이지 않는다면 말이다.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라고 말할 때, 이것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이 아니라 나와 나를 둘러싼 부근과의 관계를 충분히 고려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도, 과소평가하지도 않게 된다. 그러면서 나의 자족적인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있다. 그런 세계의 일부가 내 담론이고 나의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