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운주의 생명의 경계에게

2023년 11월 3일

4. 세상 모든 식물들에게 (2)






나는 너희의 피부를 골똘히 볼 때가 많아. 여기저기 혹이 나고, 세월을 지나 옹이라는 상흔이 남아있기도, 표면이 다 벗겨져 속살이 드러나는 곳에 바이러스가 침투되는 바람에 썩기도 하는 모습들. 그 상처에 딱따구리, 뱀 등 다른 존재를 얼떨결에 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저 있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느껴. 찰나의 자연을 보며 위로받는 건, 다들 묵묵히 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어서 아닐까.

오랫동안 본가에는 뱅갈 고무나무가 있었어. 13만원에 들여왔대. 몸집보다 작은 화분의 반은 흙이 아닌 스티로폼이 채워져 있더라. 구매한 가게 사장님께 물어보니, 요즘은 화분에 스티로폼을 넣고 반쯤만 흙을 채우는 게 관행이래. 그게 운반이 가볍기도 하고, 배수가 쉽기도 하다고. 듣는 내내 의아스러웠어. 몸집보다 작은 흙덩이들 속에서 뿌리내리는 것도 답답할텐데, 스티로폼으로 깔아둔다니. 너희가 잘 살 수 있을까? 뿌리가 흙을 거쳐 스티로폼까지 내려갔을 때, 지나친 배수에 너희는 오히려 마르지 않을까? 화훼 업계 내 스티로폼을 넣는 관행을 계속해서 문제 삼는 기사들이 많더라. 분갈이를 1년에 한 번씩 하면 문제 없다는 말을 덧붙이지만, 너희의 성장 속도는 저마다 모두 달라 언제 스티로폼까지 뿌리를 내릴지 아무도 모르는걸. 누군가의 편의에 휩쓸려 디딜 곳을 좁힌 모습이 잠깐 울렁거렸던 기억이 나.  

욕망에 의해 소비하고 소비 당하는 세계에 한동안 막연히 부정적인 감정을 들고 있었다? 요즘은 달라. 경쟁을 하며 먹고 먹히며 관계를 맺기도 하는 생태계에서, 나의 방어를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가지고 있던 불안감인 걸 알게 됐거든. 어떤 경외감과 깨달음들은 이 먹고 먹히는 관계 속에서 생기기도 한다는 걸, 지구에서 ‘무해’한 생명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됐어. 동시에 먹히는 존재가 ‘약자’일 것이란 편견이 깨졌어. 약육강식이란 말에서 비롯되는 막연한 상(相)도 함께. 어렸을 적 교과서에서 봤던 먹이 피라미드에 얽매여 나온 생각들인가봐.

초원의 얼룩말은 대개 호전적이라, 뒷발차기 한 번이면 맹수들의 턱이 부서지기도 하더라. 사자들이 혼자서 절대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고 집단 사냥을 하는 등, 포식-피식 관계여도 절대적 약자라는 건 없는데, 나는 착취와 소비를 그동안 구분하기 힘들었나봐. 너희도 동물들에게 일부러 먹히며 씨앗을 널리 퍼뜨리지? 나비, 벌, 새, 멧돼지, 다람쥐 등 다양한 수분 매개 동물들의 특성에 따라 화려한 꽃을 피워내기도, 태양의 온열을 사용하기도, 잘 붙는 몸으로 진화하기도 하면서. 동물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씨앗을 보다 더 멀리, 많이 퍼뜨리기 위해 발명해낸 네 꽃들을 지그시 보고 있으면 참 아름답다 생각해. 모든 진화는 홀로 이뤄낼 수 없고, 관계를 통한 공진화라는 걸 너희를 통해 배웠어. 어떤 관계든 우린 서로의 존재가 있어 변하는 사회 공동망인걸. 내 마음을 이해하려면 결국 타자가 있어야 하고, 타자의 욕구를 함께 헤아릴 줄 알아야 하는구나.

나는 바질을 키워. 너희를 공부하면서 내 반려 바질의 욕구에 호기심이 생겼는데, 나머지 편지는 이 친구에게 마저 쓰려해.




나의 바질 친구에게

“운주 씨는 자신의 욕구에 끊임없이 제약을 거시네요.”

1년 전 쯤, 내가 상담을 다니며 들은 말이었어. 오늘 친구가 사준 화분에 너를 옮겨심으며 이 말이 다시금 떠오르더라. 나는 내 욕구를 온전히 바라보는 게 무서워서, 해보기도 전에 지레 포기하곤 했어. 발 디딜 곳도 가뜩이나 좁은 거 같은데, 이것마저 기회비용으로 지불하고 결과를 보지 못 할까봐. 좁은 내 땅이 쩍쩍 갈라져 나를 더 불행하게 만들면 어쩌지. 더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환경에 안주하는 것이 더 이상 행복하지 못할 때, 집을 정리하며 자원 순환 가게 ‘아름다운 가게’에 물건들을 기부하고 둘러보다 널 발견했어. 선반 끄트머리에 놓여있던 바질 씨앗 키트. 그 속에 조그맣게 있던 네가, 셋째 주가 지나니 싹을 틔워 내더라. 네 무게에 버금가는 조그마한 돌을 머리에 인 채 자라는 널 보며 낄낄 웃기도 했어. 네 생명력에 위로받았던 거 같아.

바질아, 요즘 네 몸은 어때? 날이 많이 추워져서 오그라들어 있는 너희를 방 안으로, 해가 쬐는 베란다로 다시 옮기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네 욕구들이 궁금해져. 이 조그만 화분에서 사는 게, 네 욕구가 맞을까? 네 유전자에 새겨진 환경들은 이 바람과 흙 한 줌이 아닐텐데. 처음으로 네 생활사를 검색해봤어. 어떤 꽃을 피워내고, 어떤 존재를 통해 씨앗을 퍼뜨리려 드는지. 대부분 나오는 정보들이 네 식용법, 약용법, 효능, 재배법 등등이라 조금 당황했어. 네 이야기보단 너를 향한 사람들의 욕망이 너무 두드러지게 드러나 보여서. 야생에서의 네 욕구와 모습들을 찾아보기 어렵더라. 한 논문에서 네가 여러해살이 풀이란 걸 알게 됐어. 해를 거듭나며 꽃대가 올라오면 잎들은 비교적 작아지거나 질겨지고, 줄기는 목질화 과정을 거쳐 나무 줄기처럼 더 단단해진다더라. 그리고 네가 주로 벌들을 통해 씨앗을 퍼뜨리려 한댔어. 네가 피워내는 꽃이 보라색, 흰색 등 다양하다더라. 네 일생 중 큰 부분을 담당할 파트너가 벌이 아니라 나인 건 좀 유감이야. 내가 처음 널 데려올 때도, 단순히 네 잎들을 넣은 음식들을 먹고 싶어서였거든. 널 조금이나마 알고 나니까, 네가 꽃을 피워 벌을 만날 때까지 함께하고 싶단 생각이 들어. 네 신체가 이미 개량되어 씨앗을 퍼뜨릴 수 없겠지만, 해봐야 아는 거니까.

사실, 반려식물이라고 불러도 함께 한단 생각이 안 들었었어. 오늘 이후론 널 생활 동반 파트너라 느낄 거 같아. 누구나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 종국엔 마음대로 추측하고 행동해버리곤 하지만 타생명을 헤아리려 드는 상상들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걸 알아. 너와 내 관계가 단순히 피식자-포식자로 그치지 않고 동료로 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 내 공간에서 널 열심히 살필게. 올 겨울 같이 잘 넘겨보자.



2023.11.02

운주 씀







[참고 자료]

- 유혜인, “화분에 흙 대신 스티로폼 가득?…'소비자 우롱' 식물 생장 기간 늘리려면 분갈이·흙갈이 필수”, 2023.06.22.3면,
https://www.daej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70705
-박재용, 『모든 진화는 공진화다』, MID(2017), 들어가는 글
-Abdul Latif 외 5인, “Floral visitors of basil (Ocimum basilicum) at Dera Ghazi Khan, Punjab, Pakistan”, Journal of Entomology and Zoology Studies 2017; 5(2): 1027-1029






운주 경계에 선 사람들을 늘 만나고 싶어한다. 완전함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받아들이는 연습 중.

︎ uoonju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