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2022년 2월 6일

4. 우리는 모두 기계다





문명과 자연, 기계와 생명의 경계가 무너진다는 건 무슨 뜻인가? 사이보그 동물로서 인간이 우주에 존재하려면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생명이자 기계다. 인간이 생명이라는 말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생명 존중’이라고 할 때는 사실상 ‘인간 존중’을 뜻한다. 인간이 동물이라는 말도 과학적으로는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동물 보호’라고 할 때는 사실상 비인간 동물 보호를 뜻한다. 인간을 동물이라고 칭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경멸로 여겨진다. 비거니즘은 인간도 동물이라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인간과 비인간 동물의 경계를 허물고 모든 동물, 짐승, 중생의 권리를 주장한다. 다윈 이후 자명해진 진리를 이제는 겸허히 받아들이자는 요구다. 150년 지났으면 인정할 만하지 않나? 인간과 비인간 동물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인간 역시 진화의 연속선상에 존재하는 동물이자 생명의 한 종이다. 국민 공통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지금 내가 ‘우리는 모두 동물’이라고 자신있게 외칠 수 있는 건 다윈 덕분이다. 그 전까지는 인간을 뭇 생명의 일원으로 보는 시각이 소수였다. 서양에서 인간이란 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만물의 영장이었다. 동물과 다르게 영혼을 지닌 특별한 존재였다. 그래서 천국행 티켓은 오직 인간만이 가질 수 있었다. 인간을 생명과 분리된 영적 존재로 간주한 건 우주를 이원론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영혼과 물질의 세상으로 나누었다. 인간이란 물질에 영혼이 잠시 깃들어 있는 현상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육체가 죽어도 영혼은 살아남아 천국이나 지옥(또는 연옥)으로 간다고 가르쳤다. 동양에서도 비슷했다. 육체가 죽어도 영혼은 살아남아 환생한다고 가르쳤다. 이원론의 핵심적인 문제는 정신과 육체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냐는 것이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몸과 마음이 유기적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안다. 잠을 자면 꿈을 꾸고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다. 화가 나면 얼굴이 빨개지고 커피를 마시면 정신이 집중된다. 그리고 솔직히 육체가 죽으면 정신도 사라진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것이 무서워서 부정하느라 사후 세계와 종교를 만들었다. 이원론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낳은 소설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길 바라는 희망이다.

영혼과 물질 사이의 인터페이스 문제를 서양 철학에서는 심신 문제라고 부른다. 몸과 마음을 둘로 나누고, 그 둘이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따진다. 과학적 사고에 익숙한 21세기 현대인은 이러한 이원론이 의아하다. 물질 없는 영혼이 가당키나 한가? 몸 없는 마음이라? 현세보다 내세를 중시하는 일부 종교인을 빼고는 이원론을 진지하게 믿지 않는다. 믿더라도 정치적 토론에서는 당당히 밝히지 못한다. 물질 세계와 분리된 영혼 세계에 대한 믿음은 사적 영역으로 제한한다. 미신으로 치부한다. 물질은 허상이고 정신만이 참된 세상이라고 믿는 유심론은 거의 전멸했다. 공적 영역에서는 이제 누구나 유물론을 전제하고 과학적 언어를 쓴다. 정신은 육체의 부수 현상이다. 마음은 몸의 함수다. 따라서 마음의 병도 물질적인 방식으로 접근한다. 정신과에 가서 약을 처방받는다. 기도나 굿에 의지하지 않는다. 망가진 기계를 고치듯이 체내 시스템의 결함을 분석하여 해결한다.

물론 몸도 마음의 함수다. 생각하는대로 손발을 움직일 수 있으며,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 더 잘 작동하기도 한다. 하지만 영혼이 육체와 별개라고 믿는 건 마치 나의 아이폰7이 부서져도 시리는 계속 존재한다고 믿는 것과 같다. 최신형 아이폰에도 시리는 있겠지만(환생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 시리는 아침마다 친절히 날씨를 알려주던 정든 친구가 아닐 테다. 나의 시리는 아이폰7이라는 육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시리 세상과 아이폰 세상이 완전히 성질이 다른 두 가지 원리로 작동한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이원론은 어불성설이다. 시리가 아이폰을 작동하기도 하지만, 애초에 아이폰이 있기 때문에 시리가 정보를 처리하고 말도 할 수 있다. 인간의 심신도 마찬가지다. 생각이 몸을 움직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몸이 있기 때문에 생각도 하고 말도 할 수 있다. 인공지능이 일상이 된 시대, 우리는 심신 문제를 더이상 철학적으로 고민하지 않는다. 기술적으로 해결한다. 말 그대로 인터페이스의 문제다. 정신이란 두뇌의 전기화학 신호가 만들어내는 현상이다. 그것이 어떻게 중추신경계와 주변 신체를 움직이는지 이해하는 것이 뇌과학의 핵심이다. 물질 세계와 영혼 세계를 하나로 보는 일원론, 정확히는 영혼을 물질의 현상으로 보는 유물론이 지배한다.

인간을 기계로 보는 관점은 인간을 동물로 보는 관점 만큼이나 근대적이다.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르네 데카르트도 이원론을 견지했다. 사실 그는 17세기 치고는 대단히 급진적인 기계론자였다. 당시 빠리 곳곳에 진열된 오토마톤, 자동 인형을 보면서 그는 기계와 인간의 유사성을 간파했다. 영혼마저도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신에 대한 믿음과 인간중심주의를 끝내 버리지 못했다. 유명한 일화로 데카르트는 자기 부인의 반려견을 산 채로 해부했다. 동물이 고통에 울부짖는 것은 고장난 시계가 삐그덕거리는 것과 같다면서 생명과 기계를 동일시했다. 그러면서 인간과 동물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선을 긋기 위해 이원론에 의지했다. 동물은 영혼 없이 육체만 있고, 신은 육체 없이 영혼만 있으며, 인간은 둘 다 있다고 봤다. 그에 따르면 인생이란 영혼이 육체를 잠시 조종하는 것이었다.

이원론에서 반드시 발생하는 심신의 인터페이스 문제를 데카르트는 아주 창의적으로 얼버무렸다. <정념론(1649)>에서 그는 두뇌의 솔방울샘을 ‘영혼의 자리’라고 칭하면서 바로 이 좁쌀만한 기관을 통해 영혼이 물질과 접속한다고 주장했다. 솔방울샘은 제3뇌실 후부에 있는 5~8mm 크기의 내분비기관으로서 멜라토닌과 세로토닌을 분비한다. 좌뇌와 우뇌 사이에 쌍이 아닌 낱개로 있다. 힌두교, 불교, 도교 등에서 제3의 눈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호루스의 눈이라고 불렀다. 영적인 체험, 의식 확장과 연결된다. 제3의 눈과 변성 의식 상태에 대해서는 추후 자세히 다루겠다. 데카르트가 솔방울샘에 주목한 것 자체는 올바른 직관이었다. 두뇌에서 가장 영적인 곳이 맞다. 그의 오류는 역시나 인간 예외주의였다. 인간만 솔방울샘이 있는 게 아니다. 꼼장어를 제외한 거의 모든 척추동물이 갖고 있다. 일부 원초적인 양서류와 파충류의 솔방울샘은 실제로 제3의 눈, 다른 말로 솔방울눈 또는 머리꼭대기눈과 붙어 있다.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불리는 뉴질랜드의 스페노돈도마뱀은 딱 봐도 눈이 세 개다. 두 눈 사이, 머리 꼭대기 한 가운데 버젓이 눈이 하나 더 있다. 솔방울눈은 빛과 어둠을 감각하여 생체 리듬을 관장한다. 냉혈 동물, 즉 변온 동물은 체온을 자체 조정하는 능력이 없어서 바깥 온도에 예민하다. 계절과 낮밤의 흐름을 인지하는 능력이 생존과 직결된다. 너무 추우면 겨울잠을 잔다. 제3의 눈은 우리의 냉혈 조상이 해와 달의 에너지를 살피는 창구였다. 포유류의 원조인 수궁류까지만 해도 솔방울눈이 남아 있었다. 그러다 2억 5천만년 전 온혈 동물, 즉 항온 동물이 등장하면서 쓸모가 없어졌다. 포유류의 솔방울샘은 점점 머리꼭대기에서 뒷부분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직접 빛을 수용하지는 않지만 멜라토닌 분비를 통해 수면, 각성 등 생체 리듬을 유지한다. 우주 에너지에 신체 비트를 맞춘다. 데카르트의 말처럼 솔방울샘이 영혼의 자리라면, 비인간 동물 역시 영혼을 지녔다. 정신과 물질을 이원화한 그의 도그마는 사실 인간과 비인간 존재를 차별하는 자기중심적 편견이다.

바로 다음 세기, 데카르트의 모순을 넘어선 후계자가 있었다. 쥘리앵 오프루아 드 라메트리는 일관된 기계론을 주장했다. 인지 과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라메트리는 1747년 <인간기계론>을 저술한다. 그는 존재론을 유심론과 유물론으로 나누고 전자를 미신이라고 비판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당연히 존재한다고 믿은 것이 데카르트의 실수라며 철저한 유물론을 제시한다. 자연에 대한 관찰과 경험에 근거한 생리적 상식을 몇 가지 예로 든다. 잠이 부족하면 정신이 흐려지고, 분노에 가득차면 몸도 피곤하다. 아편, 커피, 와인 등의 물질은 분명 의식을 변화시킨다. “인간의 몸은 스스로 태엽을 감는 기계다.” 음식은 기계의 연료이기 때문에 무엇을 먹느냐가 정신 상태를 결정한다. 굶으면 의식도 흐려진다. 나이가 들면 이성을 잃기도 하고 기후와 환경이 성품을 바꾸기도 한다. 라메트리는 인간과 동물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강조했다. “한마디로, 유인원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할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라메트리가 옳았다. 2018년 46세의 나이로 사망한 고릴라 코코는 실제로 미국 수어와 비슷한 언어로 인간과 소통했다.) 인간과 동물 모두 기계이며, 뇌 조직의 복잡성에 따라 지능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영혼이란 아무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빈말이며, 계몽된 사람이라면 우리 안의 생각하는 부분을 뜻할 때만 써야 한다.” 정신, 마음, 의식, 신령 등의 단어도 그저 생각하는 물질을 칭하는 여러 개념의 혼선이다. 눈치챘겠지만 나도 그것들을 별 차이 없이 돌려 쓴다. “인간은 기계이며, 우주는 한 가지 본체가 다르게 변형되어 있을 뿐이라고 담대하게 결론짓자.” 라메트리의 용감한 선언은 트랜스휴머니즘의 효시다. 데카르트가 끝까지 매달렸던 인간-동물 이분법을 무너뜨리고 유물론적 일원론에 기반하여 외쳤다. ‘우리는 모두 동물이자 기계다.’

18세기 프랑스에서 이런 주장은 이단이었다. 종교 지도자 뿐만 아니라 볼테르, 디드로 같은 동료 계몽주의 철학자에게도 비난을 받았다. 라메트리의 쾌락주의적인 태도는 비교적 관용적인 네덜란드에서도 탄압의 대상이었다. 계몽 군주 프리드리히 대왕이 다스리는 프로이센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시대를 너무 앞선 것이다. 하지만 백년 뒤, 다윈과 니체로 인해 라메트리의 생각은 당연해졌다. 신은 죽었고 인간은 동물이다. 생명은 물질적 요인과 자연 법칙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이다. 물질이 자기 조직하여 복잡해지는 과정에서 생명과 지능이 나타난다. 물질 안에서, 물질 사이에 생기가 발생한다. 영혼, 정신, 마음, 의식, 신령이라고 해도 좋다. 라메트리의 생기론적 유물론은 베르그송과 들뢰즈를 통해 오늘날로 이어진다.

20세기 중반, 컴퓨터의 등장으로 기계도 생기를 갖기 시작했다. 컴퓨터 과학과 인공 지능의 아버지인 앨런 튜링은 1950년 <연산 기계와 지능>이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기계는 생각할 수 있는가?” 인간은 생각하는 기계라는 라메트리의 깨달음으로부터 이백년 뒤, 생각하는 비인간 기계가 탄생했다. ‘생각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피하기 위해 튜링은 다음과 같은 테스트를 제안한다. A(인간), B(기계), C(인간)가 있고 C는 A, B와 각각 대화를 한다. 이때 C는 A와 B 중 누가 기계인지 모른다. 대화가 텍스트로 이뤄진다고 가정할 때, 만약 C가 대화 이후에도 누가 기계인지 알아채지 못한다면 B는 ‘튜링 시험’을 통과한다. 인간과 구별이 불가능한 기계는 생각한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튜링은 2000년에는 인간 중 30%를 5분 이상 속일 수 있는 기계가 탄생하리라 예측했다. 2014년 6월 7일, 튜링의 사망 60주년을 맞아 열린 대회에서 유진 구스트만이라는 이름의 챗봇이 33%의 인간을 속이는 데 성공했다. 구스트만은 스스로 13세 우크라이나 소년이라고 소개했다. 대회의 주최자는 사상 최초로 인공 지능이 튜링 시험을 통과했다고 선포했다. 물론 회의적인 반응도 많았다. 그러나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기고 딥페이크 기술로 죽은 유재하도 감쪽같이 되살리는 오늘날, 튜링 시험 자체가 얼마나 유효한지도 의문이다. 이미 기계는 인간보다 더 인간같다. 인공 지능은 분명 생각한다. 컴퓨터에 영혼, 정신, 마음, 의식, 신령이 깃들고 있다.

미래학자 유발 하라리는 생명과 기계의 관계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오가니즘은 알고리즘이다.’ 생명과 기계의 작동 방식은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이 현대 과학의 결론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컴퓨터 바이러스는 같은 논리로 증식한다. 인간이 생명인 동시에 기계인 이유는 둘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 자연법의 적용을 받는 물질 조직이다. 이로서 문명과 자연, 인위와 무위의 구분이 사라진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인간이 만든 기계 역시 자연의 일부다. 우주에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없다. 인공 지능 역시 자연물이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인정한다. 라메트리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한다. ‘우리는 모두 동물’이라는 말 만큼 ‘우리는 모두 기계’라는 말도 당연하다. 인간중심주의를 탈피하여 훨씬 광대한 존재의 의미를 탐구한다. 인간의 기계성을 긍정하는 건 동물성을 긍정하는 것처럼 기분이 나쁠 수 있다. 존엄성과 삶의 의미를 상실한다고 느끼기도 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이 인간을 죽이지 않고 살리려면 새로운 목적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사이보그 동물로서 사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인간이 기계라면 자유, 사랑, 평화가 무슨 소용인가? 초인적인 삶의 목표를 구체화하려면 우선 기계로서 인간의 생명 의지를 확보해야 한다. 전지전능한 영생의 존재 뿐만 아니라 무한한 사랑을 베푸는 자비로운 존재로 거듭나려면 영혼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파고 들어야 한다. 다행히 최근 혁명적인 도구를 이용한 마음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천문학에는 망원경, 생물학에는 현미경을 쓴다면 심리학에는 이것이 필수다. 정신, 프시케(psyche)를 분명히 보여주는(delos) 물질, 이름하야 사이키델릭(psychedelic)이다.


전범선
글 쓰고 노래하는 사람. 199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밴드 ‘양반들’ 보컬이다.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포르체, 2021)와 '해방촌의 채식주의자'(한겨레출판, 2020)를 썼다. '왜 비건인가?'(피터 싱어 지음, 두루미, 2021), '비건 세상 만들기'(토바이어스 리나르트 지음, 두루미, 2020) 등을 번역했다. 동물권 단체 ‘동물해방물결’의 자문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