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2024년 1월 4일
43. [서평] 《樞紐》 ’허브Hub’로서의 중국
윤석열 정부의 초기 외교정책을 지켜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주권 국가의 국민으로서 굴욕감을 느꼈던 것 같다. 미국과 일본에 대한 줄서기가 너무 노골적이었다. 그 결과로 많은 부분의 정책 (혹은 심지어 영토) 협상에서 일방적으로 양보를 하는 것을 보고, 그가 한국을 위해서 일하는 것인지, 미국이나 일본을 위해서 일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보수정당’의 지지자들은 예전부터 이렇게 일방적으로 상대방에게 혜택을 주는 정책을 ‘퍼주기’라고 비아냥거렸는데 민주개혁과 진보진영의 북한에 대한 유화적 태도에 대해서 이런 표현을 사용해왔다. 또 “종북세력은 차라리 월북하라!”는 이념적 정체성에 대한 비판이 함께 따라오기도 했다. 그렇다면 같은 방식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들도 가능하다. “A: 당신들은 과거에 일본이 패전하지 않고 지금까지 한반도를 영구 지배했기를 바라는 것인가요? 혹은 B: 앞으로 한국이 미국의 51번째주가 되기를 희망하나요? ”
그런데 이런 질문을 굳이 보수정당 지지자들에게만 던질 필요는 없다. 정치적 성향에 상관없이 한국 국민 모두에게, 특히 2030세대에게 한번 물어봄직하다. 2030세대의 민족주의적 반감은 주로 중국을 향하고 있을뿐이라고 하니 정말 의외의 답변이 나올지도 모른다. 특히 예전 반미구호를 외친 적도 있던 586세대에겐 좀 인기가 떨어지지만 (하지만 그들이 자녀들을 미국 유학보내는데 열정적이다 보니 이 점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들은 미국 문화 자체를 숭상한다기 보다는 현실적으로 그리고 본능적으로 자녀들이 미국의 문화자본을 획득하는 것을 원했을 뿐이다.) 2030세대에게는 절대적 선망의 대상인 미국이라는 국가를 놓고 봤을 때 B에 대한 대답은 꼭 부정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 이들 젊은이들중 상당수가 한국을 떠나 이민을 가고 싶어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그들은 정말 한국국적을 포기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젊은 한국인들의 한국 사회에 대한 실망과 절망감의 표현이 전세계적으로 화제가 되다보니 영화로도 제작된 장강명 원작 소설 <한국이 싫어서>는 중국에도 많이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한韓민족’이나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는 나라의 존재의 당위성은 과연 무엇인가? 민족주의 교육을 받고 자란 우리 중장년 세대는 이런 질문에 제대로 답해야할 필요성을 느껴본 적이 없다. “단일민족의 반만년 역사를 가졌으며, G20과 OECD에 속하는 선진국 대열에 든, 자랑스러운 나라의 국민으로서” 조건 반사적으로 우리의 민족과 국민 정체성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일제 시대 피식민지 경험을 상기하면서 “나라 잃은 백성들이 겪는 비참한 상황”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나라’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멀리 갈 것없이,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난민들, 강대국 러시아의 침략에 영토 상당부분을 잃을 위기에 처한 우크라이나 시민들의 참상에 눈이 시리다.
그런데, 이런 불경한 질문을 던져본 참에, 조금 더 불온한 상상을 해볼 수도 있다. 예전 복거일의 베스트셀러 가상역사 소설 <비명을 찾아서>라는 작품이 있다.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배한 지 이미 100년이 넘어서 눈에 띄는 정체성의 동화가 일어나고 민족차별이 거의 사라진 상태라면 어떨까? 일본의 보통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은 한국에 대해서 호감이 더 많다고 하니, 완전히 허황된 상상이 아닐 것이다. 또, 애당초 민족국가의 개념을 갖고 있지 않은 세계의 단일 패권 제국 미국이 첨단기술이나 문화산업 측면에서 이미 선진국에 진입한 한국을 미국령으로 포함하는 것이 별로 손해보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한국을 평화적으로 합병하겠다고 제안한다면 어떨까?
유럽의 근대 국민국가 nation state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민족주의nationalism가 생겨났다. 대표적으로는 두가지 형태가 있는데 프랑스와 독일이 그 사례들이다. 프랑스는 왕과 귀족을 몰아내는 대혁명에 성공하면서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이념을 기치로 내걸로 민족 혹은 국민 정체성의 근간으로 삼았다. 이에 호응하는 공화국 시민들이 바로 프랑스 민족이 됐다. 이를 “정치적 민족주의”라고 한다. 나폴레옹은 이 사기충전한 시민들을 공화국의 군대로 잘 훈련시켜서 유럽의 전제 왕정 국가들을 침략했는데, 독일 지식인들도 처음에는 이들을 해방의 군대로 환영했다.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이 원래 나폴레옹을 찬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들어 봤을 것이다. 뒤에서 설명할 헤겔도 자신이 사는 도시 예나에 말을 타고 입성하는 나폴레옹을 보고 “저기 절대정신이 지나간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황제 등극과 프랑스군의 횡포, 그리고 지속적인 침략행위에 놀란 이들은 이에 대응하기 위한 자신들의 민족주의를 고안한다. 혈통, 언어, 문화, 역사, 영토와 같이 보다 전통적인 개념의 민족을 상상하게 되는데, 이를 “문화적 민족주의”라고 한다. 사실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이 몇가지 문화적 상징들과 함께 “우리는 원래 하나의 게르만 혈통에 속하는 민족이었다”라는 말한마디로 해결이 되는 대단히 직관적인 호소이다. 고조선이라는 청동기 부족 연맹과 단군 신화의 세계에서 홍익인간의 이념을 발굴해 근현대 한국인들이 발명한 단일민족 담론이나 한민족 정체성도 같은 이치이다. 그런데 독일인들은 칸트에서 출발한 근대 관념론 철학의 ‘종결자’들 답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들의 민족과 국가에 대한 보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당위성을 고민하게 된다. 정치철학, 역사철학이 그래서 등장한다. 그 내용들을 품고 있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이렇게 탄생했다고 한다. 역사의 발전 과정을 그의 정반합의 변증법으로 풀어나간다. 서구사회의 근대국가들은 이렇게 “진보의 역사”를 통해 자기 민족과 국가의 성립을 정당화했다. 그리고 비서구권 국가들이 정신의 자각과 이성의 작용을 통해 개인들이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근대적 문명국가가 되지 못한 것은 역사의 발전단계를 제대로 밟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근대국가의 기획과 그 실천은 비서구권, 특히 동아시아 국가들을 200년 가까이 괴롭혀 온 난제이다. 한중일 모두 예외가 아니다. 특히, 근대 이전 동아시아 문명을 대표하던 중국은 공산주의 혁명과 냉전 시대의 곡절을 겪으며 삼국중 산업화로의 이행이 가장 늦게 이뤄졌다. 그래서 이미 G2 수준의 경제대국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서방세계를 대표하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수용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또다시 근대화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됐다. 또, 청 제국의 영토를 이어 받은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의 변경지역들, 즉 티벳, 신장, 홍콩, 그리고 “중화민국의 대만”에서는 새로운 ‘통일중국’의 민족구성과 영토범위에 대한 시비도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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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출간돼, 2023년 증보판을 찍은 <허브(Hub 樞紐)>는 상하이 지역 중국 소장 역사학자들의 중국 거시역사(大觀)에 대한 10년 토론 성과를 모은 책이다. 전문외교관을 육성하는 특수대학인 중국외교학원에 재직한 바 있고, 현재는 상하이 외국어대학에 있는 국제정치학자, 역사학자 실잔 施展 교수가 집필했다. 그는 중국에 대한 새로운 역사 연구서를 쓴 것이 아니라 이미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을 헤겔의 역사철학과, 정치사회학 관점으로 분석하고 정리해서 “중국은 무엇인가?”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어 놓았다. 만만치 않은 분량과 난이도에도 불구하고 이미 40만부가 넘게 팔렸다.
우선 역사철학 관점에서 중국인들의 이상적 국가관을 살펴보자. 중국인들의 고전 역사관은 종교에 가깝다. 원시유가儒家의 역사를 기록하는 지식인이 바로 샤먼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천명을 받은 이 즉, 정통성을 가진 자가 천하의 주인이 되는데 이 정통성의 유전流轉이 바로 역사라고 생각한다. 법통法統은 왕조에 속하지만 이러한 정통성의 기준을 규정하는 것을 도통道統이라고 하고 이는 유가 지식인들의 윤리관을 따른다. 왕조가 교체되거나 심지어 비한족이 왕조의 주인이 돼도 도통을 지키면 그 정통성을 인정받는다. 진한秦漢시대 이래 천명天命을 받은 이가 천하, 즉 중원을 통일할 수 있다고 여겼다. 실제 역사에서는 통일과 분열이 거듭됐지만 13세기 이후 원元명明청清을 거치며 통일국가를 유지했기 때문에 대일통, 즉 통일국가가 잠재의식속의 국가적 이상 모델이 됐다.
중국의 역사 무대 공간은 크게 중원, 초원지대, 동남 해양지역, 서남 산악지역, 동북의 삼림과 평원지역, 그리고 지금의 티벳에 해당하는 고원지역과 신장에 해당하는 서역이 있다.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은 중원, 초원과 해양지역이다. 이러한 설명은 <허브>라는 책의 제목이나 이 책의 주제의식과도 관련이 깊다. 지금까지 중화문명과 문명 담지체로서의 제국을 중원의 농경문명 중심으로 서술하던 방식을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이다. 고대사회의 중국은 중원과 초원지대의 교섭과 융합을 통해 문명을 생성하여 해양지대로 전파시켰고, 근현대 이후의 중국은 중원과 해양의 교섭사이에서 문명을 생성해 초원지대로 문명을 전파시키고 있다(일대일로가 바로 그 상징적 재현이다). 현재 미중대결 국면에서도 많이 드러나는 중원이라는 시발점이나 ‘본체’에 집착하는 정태적이고 본질주의적 과거의 문명관이 아니라(유감스럽게도 필자가 존경하는 중국의 삼농 정치경제학자 원톄쥔의 중국생태/농경문명론이 전형적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 대륙과 해양이라는 이질적 공간의 질서들이 이곳에서 만나서 동태적으로 문명을 발전시켜 나가는 중국의 “역사적 허브”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다.
역사가 정반합의 변증법적 순환 운동을 통해서 발전한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정正과 반反은 보편성과 특수성이다. 여기서 보편성의 추구는 중국 역사에서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중국은 야스퍼스가 설명한 축의 시대에서 규정된 고대문명중 한 곳이고 유라시아 대륙에 위치한 초거대 제국이기 때문이다. 면적뿐 아니라 인구면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런 문명적 특성이 제국이라는 담지체를 필요로 했고, 다양성을 포용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보편성을 추구하게 됐다. 보편적 이상이 특수한 현실을 만나게 되면 보편성을 상실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보편적 현실을 만들어 낸다. 이런 작은 규모의 변증법적 순환은 제도적 조정으로 가능하다. 왕조의 교체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작은 순환으로 해결되지 않는 보편성의 위기가 닥치면 거대한 변화가 발생한다. 실잔은 헤겔의 역사철학을 이용해 중국역사의 대서사시를 풀어간다. 그에 따르면 중국은 역사적으로 세번의 거대한 순환을 거쳐왔고, 지금 네번째 순환기가 진행중이다.
첫번째 순환기는 상商과 주周의 봉건사회이다. 이 시기 역사행위의 주체는 주의 천자가 봉해준 영지에서 각 봉건국가를 다스리는 제후諸侯와 그 친족이자 신하들인 공경公卿이다. 여기서 전국시대를 거치며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기 전 철제 농기구와 소를 이용한 경작이 보편화된다. 이렇게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토지를 9등분하여 그 일부를 제후들에게 바치는 정전제井田制를 탈피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난다. 농민들은 제후와 공경의 영지를 벗어나 세금을 바칠 필요없는 야인野人으로 자신의 사전私田을 개척하기 시작한다.
두번째 순환기는 한漢에서 당唐에 이르는 호족豪族사회이다. 지역의 호족 세력, 즉 귀족들이 주체이다. 진시황에 이어서 거대한 통일 국가를 완성할뿐더러 초원의 유목민족 흉노를 정벌하고 싶어하던 한무제漢武帝는 군비를 확충하기 위해 많은 세수를 필요로 했다. 농민들은 이런 중앙 정부의 수탈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역 호족들의 영향권안으로 도피하려고 했고, 그들 각자의 지역 내에서 독립된 경제 활동권이 형성됐다. 이 시기 정치 권력의 향배는 중앙 정부의 황제와 지역 호족사이의 대립과 균형에 의해서 결정됐다.
한편으로 이 시기부터 중원의 농경 제국을 상시적으로 위협하는 초원 유목 제국의 존재가 부각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이는 중원 농경지대의 제국 질서가 더 이상 보편이 아닌 특수로 여겨져야 하며, 중화권안에 농경과 유목이라는 두개의 특수 제국이 형성됐음을 의미한다. 수당隋唐이 성립하기 전 남북조南北朝 시대는 유목민족이 중화민족안으로 본격적으로 융합되는 출발점이다. 이 시기에 중원의 인구가 대규모로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는 동시에 모내기를 하는 이앙법이 생겨나면서 쌀생산량도 증가한다. 인구와 경제의 중심이 남쪽으로 옮겨간 것이다. 남조는 중화문명 사상의 정수인 유교의 예악과 문화, 그리고 경제를 유지했지만 정치적으로는 불안정했다. 결국 남북조를 통일한 것은 군사적 우위를 점한 북조이다. 이렇게 통일된 당은 다시 보편제국을 완성했다.
당은 한편 서역으로부터 수많은 신문물을 받아들였다. 대표적인 것이 불교이다. 제자백가의 시대를 거쳐 한에서 유가儒家와 법가法家, 그리고 도가道家의 국가와 사회안의 상대적 위상을 정립해 사상들이 안정적으로 체제화됐다. 그런데 불가가 이를 다시 뒤흔드는 효과를 가져왔다. 또 서역의 상인들을 포함한 다양한 인종과 출신지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제국을 만들어 나간다. 전성기 당의 강한 군사력도 초원의 유목민 세력 등을 잘 활용한 덕이다. 당은 제국이 확장되던 시기에는 이런 이질적인 구성원들의 욕망을 만족시키며 번영할 수 있었지만, 전성기가 지난후에는 이 다양성이 제국을 분열시키고 결과적으로 붕괴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세번째 순환기는 송宋에서 마지막 왕조인 청清에 이르는 고대평민사회이다. 당의 후반기에 지속적인 전쟁을 통해, 호족 세력들이 소멸되게 된다. 또 당의 황제들은 자신들의 경쟁상대인 호족들 대신 자신의 세력이 되어줄 평민출신의 인재를 등용할 기반을 마련해야 했다. 이를 위한 선발제도인 과거를 실시하기 시작한다. 이 과거 제도가 안정적으로 운용되기 시작한 것이 북송시기이다. 한편으로 호족들이 주관하던 지역 권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역시 지역 거버넌스를 책임질 값비싸고 강력한 국가 제도가 필요했는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역시 관료체제였다. 정치적으로는 도덕적 가치를 거버넌스의 기준으로 삼는 ‘윤리사회’가 직업관료제와 융합된 ‘윤리-관료사회’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원적 시스템은 도덕적 이성과 관료가 지닌 도구적 이성의 충돌을 발생시킨다. 특히 현대사회에서 관료의 기능이 전문화, 고도화 됨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모순이다. 불가피한 희생자를 결정하기 위해 열차 노선을 선택해야 하는 ‘트롤리 딜레마’와 같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는 다음 단계의 네번째 순환기에서 ‘윤리-관료사회’가 세속적인 독자적 윤리관을 가진 ‘정치사회’로 이행해야 됨을 의미한다.
하지만 송은 초원에 대한 통제권을 잃고 농경에 기반한 특수제국으로 축소돼 있었다. 이때 북에는 요遼와 금金이 차례대로 초원의 유목 제국으로 자리 잡는다. 송은 요, 금과 군사적으로 맞서는 대신 이들에게 재물을 바쳐서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고 문화적으로도 크게 융성한다. 겉보기엔 굴욕적이지만 가장 경제적인 평화유지책이다. 덕분에 강남을 중심으로 농업생산량이 급증하고 수공업등이 발전하며 동남해안을 통해서 해상무역도 활발하게 진행된다.
북쪽의 요는 삼백년을 지속했는데, 요의 남방이 인구가 밀집한 농경지대, 지금의 화베이華北 지역으로 안정적인 국가 재정 확보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요는 초원의 거란족 군사귀족과 한족을 중심으로 한 남부의 농경지역을 이원적으로 지배하는 부분적인 보편제국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불교를 통해 사상적인 각성도 일어났다.
당의 사상적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 송의 지식인들은 초기에 외래사상인 불교를 배척하고 신유학을 만들었다. 실은 유교의 약점인 불교의 형이상학적 측면을 유가사상안에 녹여 넣어 사상적 보완을 실행하고 새로운 보편사상으로 탈바꿈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 학문을 집대성한 것은 남송시기의 주자朱子였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학문 체계가 과거시험의 근간이 됐다. 주희朱熹 본인은 남송시기의 비주류였는데, 그의 학문체계가 온전히 관학으로 채택된 것은 후대인 원나라 때였다. 신유학이 안정적으로 체제화한 이후에는 사회안에서 다시 불교를 포용할 수 있게 됐다. 중화문명이 외래사상을 완전히 소화하고 융합해서 자기화하고, 다시 이를 관용적으로 대하는 데에 수백년의 혼란 시기를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민들의 경제력이 늘어나고 과거를 통해 신분사회가 무너진 이후에 잠재적 관료인 사신士紳계층이 만들어졌다. 황제와 평민 사대부士大夫가 함께 천하를 다스리는 평민사회가 완성된 것이다. 이러한 제도와 사상이 문명적인 보편성을 띄면서 주변의 번속국藩屬國인 조선朝鮮과 월남越南 등으로 복제되어 운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실제로 고대사회의 보편제국을 완성한 것은 명이 아니라 최후의 왕조인 청이었다. 동북지역에서 유래한 여진女真족은 수렵, 농경, 목축을 함께 운용하는 생산양식에 익숙했기 때문에 초원제국과 유목제국이 다시 통합된 보편제국으로의 확장과 운영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래서 중원지역뿐 아니라 신장, 티벳, 몽골을 청의 영토로 통합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청의 황제는 중원의 권력자로서 유가 천자의 역할을 수행했지만 복합제국으로의 확장을 위해서 티벳에서는 신권정치, 몽골과 신장, 그리고 동북에서는 초원의 유목정치라는 다면적인 리더쉽을 보여줬다. 이것은 또다른 보편제국이었던 당의 황실이 역시 동북지역에서 유래했던 선비鮮卑족의 후예라는 사실과도 통한다.
지금도 문제가 되는 신장의 통치 방법도 대단히 정교했다. 이미 한족들이 많이 이주해있던 남쪽南疆은 중원과 마찬가지로 유교관료제와 군현제의 특성을 관철시켰지만, 북쪽에서는 이슬람 지도자에게 사회권을 주고 정치적 권력과 형사적 사법권은 청의 황실에 충성하는 현지의 귀족에게 묶어 놓았다. 이 두 세력은 겸직을 금지시켰다. 신장지역의 생산력으로는 관료제와 군대를 유지하는 재정을 자체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잘알았기 때문에 매년 중앙의 재정에서 이 지역으로 이전지출을 실행했다. 지금도 중국 정부가 지역 균형 발전과 부의 재분배를 위해서 부유한 지역에서 거둬들인 세수를 빈곤한 지역에 이전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명청시기를 거치며 농민이나 상인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고, 평민들도 사당을 짓거나 족보를 기록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평민가문들의 종족宗族사회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가문을 중심으로 뭉친 평민들이 주체가 되는 고전 사회가 완성된 것이다. 중국 남방 사회에는 아직도 이런 종족과 지연地緣, 방언을 포함한 문화적 배경을 공유하는 네트워크가 일정하게 살아 남아 있고, 동남아시아와 전세계의 화교 네트워크가 이와 겹친 채 근대 이후 상호 영향을 끼치며 발전해 온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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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네번째 순환기는 신해혁명부터 시작돼 지금도 진행중인 현대평민사회이다. 고대 평민사회와 현대 평민사회의 가장 큰 차이는 균질한 평민들 개인의 주체성이다. 이제 개인들은 정신자각을 통해 도덕적 주체성과 자기 결정권을 갖고 헌법이 보장하는 법적 권리를 부여 받은, 국가의 실질적인 주권자가 돼야 한다. 체제 내로 진입할 수 있는 시험에 합격하거나 잠재적으로 이런 능력을 가졌다는 전제하에 이들과 카르텔을 이룬 엘리트들만이 주권자이고 나머지 평민들은 엘리트들에게 “개돼지로 취급받는 어떤 사회”(근현대의 중국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가 아니다. 이 단계로의 진전을 위한 사상적 돌파구를 중국의 고전적 정치철학이 제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마치 불교가 도입되기전 우주관이나 인식론, 존재론 등이 분명치 않았던 것처럼) 중국은 서구사상의 유입과 이에 따른 충격을 받아들여야 했다.
다만 과거에는 사상이나 기술, 경제, 제도와 같이 부분적인 측면의 외래 문물 도입이 필요했다면 이번에는 전면적인 도입을 통해서만 새로운 보편성을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국은 평화로운 시기에 농업기술이 혁신되고 농지가 증가하면 인구가 급증했는데, 생산이 늘지만 인구는 그보다 더 빨리 늘어나는 내권內卷involution 현상이 일어났다. 값싼 노동력이 무한대로 공급되기 때문에 농촌에서 특히 잉여 인력이 가내 수공업형 방직과 같은 일에 종사하면서 자급자족 경제 구조를 유지했다. 자생적으로 공업화가 일어날 수 없었던 배경이다. 또, 식량생산이 한계에 이르거나 자연 재해가 발생하면 내전으로 이어져 인구가 다시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닫힌 시스템 안에서 막다른 골목으로 말려드는 순환이 반복된 것이고 “모두가 평등하게 가난한 상태를 유지”할 수 밖에 없는 원인이었다. 공업화 없이는 현대적인 무력도 확보할 수 없고, 2차 아편전쟁과 청일전쟁의 패배를 겪으면서 중국 지식인들은 “삼천 년 중화문명의 역사에 없던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중국은 앞선 언급한 독일 등 다른 민족이나 국가와 마찬가지로 이런 외부의 압력속에서 국가의 현대화를 이루기 위해서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던 ‘민족주의’를 필요로 했다. 민족주의를 통해 구성원들의 단결과 헌신을 호소할 수 있다. 바꿔 말해 국민을 동원하고 조직화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보편적 문명을 추구하는 제국과는 동거할 수 없다. 민족주의 혹은 이와 유사한 근대 이전의 부족주의는 필연적으로 제국을 해체로 몰아넣는다. 당과 청이 말기에 겪었던 일이다. 일본조차도 ‘대일본제국’의 확장욕구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는 ‘범아시아주의’를 주창했다. 그래서 만주족 황실을 가진 청을 타도하고 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해 한족漢族민족주의로 시작한 중국의 혁명주의자들은 다원적 전통제국이었던 청을 계승해야 하는 중국적 현실과 타협하기 위해 ‘한漢만滿몽蒙장藏회回’라는 5족공화共和의 ‘중화민족주의’를 타협적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사진 - 쑨원이 집필한 <민족주의>와 혁명채권
하지만 역사철학 관점으로 보자면 지역뿐 아니라 세계 속에서 자신의 보편적 위치를 추구해야 하는 중국은 다시 이런 중화민족주의를 초월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현대화 과정에서의 공산주의 이념의 선택과 혁명은 이런 모순을 해결하는 좋은 솔루션이 됐다. 민족모순을 계급모순으로 치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산당의 국제주의 이념을 통해 명목 상으로는 국가간의 모순도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개혁개방이후 자본주의를 수용한 이래, 사회주의 기조가 흔들리고 민족주의를 다시 소환하는 과정에서 이런 모순들이 재등장하고 있고, 그 내용과 정도도 심화하고 있다.
현대화를 달성하기 위해 중국은 해양문명과의 융합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해양문명은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고 네덜란드의 주도권을 거쳐서 영미세계에서 완성된 것인데, 농경문명, 그리고 초원문명을 포괄하는 대륙문명과는 매우 다른 이질적 특성을 갖고 있다. 섬나라에 해당하는 영미가 그 패권을 완성시킨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대륙 내의 주변국들과 다투기 위해서 자원을 배정할 필요가 없었고, 이러한 이점을 살려 해양으로 진출한 이후에도 다른 지역의 땅을 정복해서 영토를 확장하고 이를 관리하기 위한 비용을 지불할 의사가 없었다. 단지 자신들의 교역기지와 항로를 보호하기 위한 군사기지를 세계 도처의 항해로 길목마다 세워두었다. 이를 통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무역 거래의 계약조건을 채택하고, 이를 보장하기 위한 법체계를 받아들일 것을 상대에게 요구할 뿐이었다. 그래서 동아시아에 진출했을 때도, 청나라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파트너로 삼아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할 것을 원했다. 전형적인 대륙세력으로 자신들과 역내 이익을 다툴 러시아를 견제하는 역할도 맡겨야 했다. 영국은 청이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깨달았을 때, 그 파트너를 일본으로 교체했고, 영국을 계승한 해양제국 미국도 이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해양문명이 추구하는 원칙은 대륙과 달리 처음부터 보편적 이상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이고 경험적인 과정을 통해서 현실적인 필요에 따라 형성되고 진화한다. 법체계가 대표적이다. 영국의 헌법이나 의회제도를 포함한 정치제도도 천년 가까운 역사과정을 거치면서 차츰 만들어진 것이다. 실잔은 대륙의 성문법 체계를 “법의 발명”, 영미의 불문법 체계를 “법의 발견”이라고 칭한다. 또 이들은 장애물 없이 전 지구를 아우르는 해양세계를 활동무대로 삼기 때문에, 개인이나 비즈니스 조직과 같은 소집단에서 국가의 매개없이 바로 ‘글로벌’로 연결되는 세계인식관을 가지고 있다. 앞서 언급한 프랑스나 독일과 달리 영국인들에게 지역주의는 있을 망정 근대적 민족주의nationalism 관념이 약한 것은 이때문이다.
중국이 공산화 됐을 때, 소련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는 여전히 대륙문명의 영향권 하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제정러시아의 사상적 배경인 동방정교에는 고난을 감내하고 세계를 구원해야 한다는 문명적 사명감을 지닌 메시아주의가 있는데, 러시아가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켰을 때, 혁명가들과 노동자들이 희생을 통해 세계 혁명을 완수한다는 정조에는 이런 영향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마르크스의 예언과 달리, 공산주의가 만들어졌고 가장 먼저 공업화를 달성했던 서유럽이 아니라 (엘리트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에게 매수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전통사회의 문화적 유산을 그대로 간직한 농업문명 제국 러시아와 중국만이 혁명에 성공했기 때문에, 공산주의 진영의 국가들은 심층적인 측면에서 서구사회의 근대적 특성들을 보이지 않았다. 권위주의 혹은 전체주의 사회안에서 개인의 도덕적, 정치적 주체성을 구현할 수 없었는데 이것은 정치경제 관계를 규정하는 공산주의 이념때문이라기 보다는 전통사회의 문화적 특성과 영향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대륙문명 제국 소련의 기대에 부응했지만, 월남과 전쟁을 벌였을 때는 오히려 소련의 남하를 견제하면서 해양문명 제국 미국의 이익에 부응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제3세계 비동맹 노선을 유고슬라비아, 인도네시아 등과 함께 제창하면서 미소패권의 중립지대에서 양측의 갈등을 중재하는 중국의 세계문명적 역할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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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종식후 중국은 세계 자본주의 생산체제와 그 밸류체인value chain에 빠르게 흡수됐으며 지금은 이 체인으로부터 제거가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거대한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실잔은 냉전시대와는 또 다른 중국의 허브역할을 이 글로벌 산업체제로부터 발견하고 있다. 즉 유럽과 북미를 중심으로 한 서방세계가 하나의 블록이 되고, 아프리카를 대표로 하는 글로벌 사우스가 하나의 블록일 때, 한중일, 특히 중국이 중심이 되는 동아시아의 제조업 역량이 하나의 블록으로서 서방과 글로벌 사우스를 잇는 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구사회가 하이테크와 정보, 문화산업을 이끌고, 글로벌 사우스가 자원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면 동아시아 중화문명 블록이 중간에서 제조업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 이 허브 역할의 골자이다.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 대부분이 대륙문명에 속한다면 서방사회를 리드하는 미국이 해양문명을 이끈다는 점에서도 중국이 대륙문명과 해양문명을 잇는 허브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중국의 로우엔드low-end 제조업 기반이 동남아시아 등지로 이전하는 움직임을 10여년전부터 보여왔던 것도 실잔은 이전과 분리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넘침’으로 해석한다. 이들의 생산구조가 중국의 생산체계와 매우 밀접한 연계속에서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허브 역할’로 보자면 미중갈등과 새로운 진영간 대립은 실잔의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실잔은 중국 정부가 지나치게 빨리 미국이나 서구사회와 패권경쟁을 시작한 것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중국이 과거 서역으로부터 유입된 문물이나 사상을 받아들여 자기화하는데 수백년의 시간을 필요했는데, 근현대에 돌입해서 고작 100여년만에 문명적 독립을 선언하는 것은 특수 제국으로 남겠다는 선언에 불과할뿐 새로운 보편 제국의 완성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이 미국과 벌이는 하이테크 경쟁에서도 그 한계를 지적한다. 첨단 기술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유에서 그 수준을 높이는 두가지 형태가 있는데, 중국은 아직 후자에만 강점을 보일 뿐 전자를 달성할 문명적 수준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자본을 포함한 민간사회의 자유로운 문화나 창발성과 관계가 있다. 현대 평민사회가 도달하고자 하는 개인의 주체성 수립도 필요충분조건이다. 당장은 서구사회가 중국의 무서운 추격 속도에 긴장하고 있지만 십여년 후 중국이 기술혁신에 한계를 보일 가능성을 언급한다.
그는 2023년에 출간된 개정증보판에서 하지만 미중 갈등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허브역할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서구 사회가 자신의 강점인 하이테크의 혁신 등에 자원과 자본을 집중하면 할수록, 기반 제조업과 천연자원은 다른 블록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데 이들 블록들과 중국의 연계는 구조적으로 갈수록 깊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미중 진영갈등에도 불구하고 유지되는 ‘허브’에서 해외로 진출하는 중국인들의 역할에 더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과거 남방 해양지역의 하층 중국 농민과 노동자들이 대규모 이민을 통해서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지역내 해양문명의 유입과 새로운 질서의 구축에 기여했던 것처럼, 이번엔 중산층을 포함한 다양한 계층의 중국인들이 해외로 이동하면서 중국의 새로운 보편문명 재구성에 기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역사 발전의 당위와는 별개로 현실을 분석하기 위해서 정치사회학적 관점도 필요하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혈연관계를 넘어서는 협력이 가능한데 서로 신앙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협력관계를 만들어 내는 질서를 “자생적 질서”라고 한다. ‘사회’와 ‘시장’이 이런 질서를 대표한다. 조직이 규모를 확대하면서 이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공동체가 만들어지는데 폭력과 강제에 기반한 질서를 필요로 한다. 이를 “집권적 질서”라고 부른다. ‘정부’가 이 질서를 대표한다. 집권적 질서는 무조건 폭력에 기반할 수는 없는데 정부의 기초가 되는 군사와 재정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에게 세금을 거둬야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자생적 질서와 집권적 질서의 균형을 맞추는 과정에서 필요한 ‘제도’를 만들어 가게 된다. 이런 제도도 계속 보편성과 특수성사이의 정반합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하고 변화해 나간다. 중국은 중원의 역사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강력한 통일 중앙권력이 출현하고, 항상 거대한 자원을 적은 비용으로 흡수하고 운용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즉 태생적으로 “집권적 질서”가 “자생적 질서”와 지역의 세력을 압도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중앙권력은 끊임없이 교체되지만 집권적 질서가 강한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그 반대 이유로 초원의 유목 제국은 항상 자유, 평등, 개방을 추구하는 “자생적 질서”가 중심이 됐고, 중원의 질서에 개입해서 새로운 보편 제국을 탄생시켰다.
실잔은 블럭체인, 메타버스, DAO 등의 권력 분산형 기술, 대륙의 물리적 영토에 묶이지 않는 새로운 기술들이 사회의 거대한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본다. 이런 기술을 통해 국가의 중앙권력으로 통제할 수 없는 바텀업bottom-up 주권체가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직접적으로 중국 정부를 비판하거나 그 약화를 예견하고 있지는 않지만, 중국정부가 만드는 집권적 질서와는 본질적으로 속성이 다른 형태를 갖는 자생적 질서의 형성이 미래의 불가피한 대세임을 설명한다. 물론 이것이 미국이나 해양문명 제국이 꼭 미래의 우위를 점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현재와 같은 혼미한 상황에서 미래를 예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갈수록 상호 갈등이 심화하는 미중 두 진영이 정과 반을 반영하고 변증법적 발전의 경로를 기대한다면 한쪽의 일방적인 득세보다는 미지의 새로운 합이 출현할 가능성도 점쳐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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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여기서 던져보고 싶은 질문은 한국 사회의 역사철학적 발전 경로이다. 한국의 민주개혁 진영은 대체적으로 헤겔의 역사 진보관을 믿고 있기 때문에 식민지배나 분단 상황, 군부 독재 정권 등의 경험을 겪으면서 한국 사회가 자유민주주의를 향해서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 지금의 윤석열 정권과 같은 “검찰독재 세력의 발호”를 “군부독재종료 이후 비민주적인 앙시엥 레짐의 마지막 저항”으로 볼 수 있다는 설명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서구사회 역사 발전 모델을 그대로 적용하기 보다는 조금 더 유연한 상위 수준의 프레임으로 우리 역사를 분석해 보는 노력이 있었는지 아쉽기도 하다. 이제는 인기를 상실한 “자본주의 맹아론”처럼 발전 단계의 답을 정해 놓고 그에 억지로 맞추려는 시도만 눈에 띈다.
실잔은 중화민족이 축의 문명을 창조한 ‘세계역사민족’으로서 ‘질료’와 ‘형식’ 모두 새롭게 창조해야 하는 역사적 과제를 가지고 있다는 어려움을 토로한다. 반면 일본은 서구의 형식을 그대로 빌려서 자신의 질료를 채워넣는 것으로 독립적 주체성을 확보하고 현대화를 빠르게 진행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 한국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도 그렇고, 한국의 경우에도 서구의 형식인 시장 자본주의나 자유민주주의에 자신을 빠르게 적응시켜서 서방세계의 일원이 된 것을 자랑해 왔기 때문에 그의 지적이 틀리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실제로 여전히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의 상황이다. 포퓰리즘이 득세하는 극도로 불안정한 정치구조와 분단상황의 전쟁 긴장감 고조, 경제 양극화, 수도권 집중화 문제, 높은 자살률과 출생률의 빠른 감소 등의 문제를 보면 수치에서 드러나듯 제1세계의 평균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어떤 부분은 제3세계와 비슷하거나 더 나쁘기도 하다. 즉 우리 문제의 근원이 제1세계와 공유하는 ‘후기 근대’적 문제뿐 아니라 “방황하는 근대”에서 함께 비롯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후자의 예를 들자면 윤석열 정부의 검찰과 엘리트 관료들이 가진 법에 대한 이중적 잣대와 극도의 권위주의는 조선 사회에서 과거에 급제했던 사대부가 가졌던 (면책) 특권의식을 연상하게 한다. 이들뿐 아니라 한국인 모두를 극단적 경쟁과 계층구조 속에서 절망적인 심리 상태로 몰아 넣고 있는 “의사pseduo 신분제”의식도 그러하다. 이는 단순히 경제적 분배문제 이상의 문화적 구조에서 비롯하고 있으며 끝까지 해체되지 못했던 조선의 신분제 사회가 되살아 나고 있다는 의심조차 들게 한다. 나는 우리와 같이 중화문명의 변방이었던 광둥의 역사 특히 홍콩을 포함한 주강델타 지역의 역사를 스스로 공부하고 있는데 비슷한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전통사회에서 계층 구조가 제대로 해체되지 못한 채, 급격한 신분의 유동이 일어난 사회에서는 먼저 신분의 우위를 점한 사람들이 잠재적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서 다양한 아비투스나 중앙 권력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문화적 상징을 차용함으로써 신분의식을 강화시키고 낙오된 사람들을 ‘타자화’시키는 행위에 몰두한다. 물론 중국 남방지역은 특유의 실용주의 문화와 상업의 발달같은 경제적, 문화적 특성 때문에, 현재는 한국과 같은 비극적 상황에 처해있지 않다.
보수정당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이념의 차이와 무관하게 이렇게 민주주의나 공화정을 부정하는 태도를 보이는 정치지도자에 대한 맹목적 지지를 거둬들이지 않는 것을 보면, 국민들 중 절반 가까운 이들이 지금의 제도에 적합한 주권자로서의 정신적 자각을 이뤄내지 못했음도 알 수 있다. 최소한 우리가 추구하는 근대적 보편 이상이 한국의 특수한 현실과 여전히 큰 갭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후기 근대, 탈근대나 포스트 콜로니얼리즘에 집중하면서 ‘정치적 올바름’(PC)이나 ‘정체성 정치’와 같은 방법만을 주요한 정치적 전략으로 선택하는 것이 이러한 “전통사회와 근대”의 문제를 간과하게 하면서 더 큰 혼란의 원인이 될 수도 있음을 경계할 필요도 있다. 정의당과 소수 진보정당들이 처한 절대적 곤경이 이를 입증한다.
끝으로 우리가 문명의 중심, 즉 남들이 제시하는 ‘보편성’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입장이라면 그 보편성과 문명을 맹목적으로 수용하면서 빚어지는 부작용을 줄이기 위한 고민도 필요하지 않나 싶다. 여기서 힌트를 주는 것은 영미의 실증적이고 경험주의적인 방법이다. 즉, 외부에서 주어지는 보편적 이상과 여기에서 파생하는 윤리적 기준, 가치판단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보다는 우리의 특수한 현실을 보다 우선순위에 놓고 선택을 하는 전략을 취하는 것이다. 미국 문화와 가치를 무척이나 숭상하는 한국인들이 이들의 실용주의(prgamatism)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도 아쉽다.
앞으로 미국과 중국뿐 아니라 복수의 문명권들이 자신들의 문명 기준을 내세우는 다원적 세계가 펼쳐질 미래를 예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한국과 같이 이런 복수의 문명권 특히 미중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는 국가는 한쪽 문명에 일방적으로 줄을 서기보다는 자신의 현실과 상황에 맞는 문명적 요소들을 취사선택하는 방법이 가장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다. 그들의 맥락에 맞게 형성된 남의 문명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면 한 때는 혜택을 입기도 하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처지를 망각한 채 교조주의적 성격을 띄게 될 수 밖에 없다. 조선의 역사 경험이 그러했고, 코리안 피크Korean peak를 지났다고 손가락질 당하는 대한민국의 상황도 그런 불안감을 불러일으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