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2024년 1월 31일
44. 광저우 역사 속의 세 가지 에피소드
- 중국 대륙의 ‘에어록air lock’, 그 2000년의 파노라마
그림0: 선사시대 광저우에 쌀을 가져다준 전설의 동물은 개였을까 양이었을까?
(Dall-e created)
이번 달에 중국 남방지역을 가볍게 둘러보고 싶다는 손님을 한 분 맞이했다. 18~19세기를 중심으로 한 광저우 역사의 소개를 부탁받아서, 광저우와 주강 델타 지역의 역사를 복기했다. 2020년 상반기 하릴없이 집안에 들어 앉아 읽었던 광저우역사에 대한 책 <광저우 전 廣州傳 1, 2>이 있다. 이 책을 계기로 중국어로 쓰여진 글들을 열심히 읽기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막 중국어 책들을 읽기 시작한 참이고, 처음 읽어 보는 중국어 역사서적이라서 독서에 꽤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이미 3년가까이 광저우에 살았지만20년전 홍콩 거주 경험을 더하면 광둥 거주는 4년이 넘었다.), 생활 체험을 제외하고 막상 광저우나 광둥에 대한 지식도 많이 부족했다. 좀 체계적으로 공부를 하고 싶어서 당시 막 출간돼 지역에서 호평을 받던 이 책에 도전했다. 하지만 두뇌 안에 해당 지식/인지 체계와 언어의 집이 제대로 지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외국어 서적을 읽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충 힘겹게 마지막 책장을 덮었는데, 그래도 그것이 계기가 돼, 계속 다양한 중국어 책을 읽게 됐고, 서평을 연재하기에 이르렀다.
여하튼 당시 실력이 부족해 꼼꼼히 읽지 못한 것 때문에, 마음속에 밀린 숙제처럼 남겨 뒀다. 이번에 다시 정독을 하면서 내가 과거 3년간 가졌던 의문이나 생각들이 실은 이 책의 영향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됐다. 내가 태생적으로 가진 날카로운 질문 능력이나 문제 의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역시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는 모양이다. 고백하자면 이번에 맞은 손님이 (최근 중국 문명사를 집필하는 작업에 열중하는 시니어 역사학자) 역시 그 시점에 공유해줬던 글들도 내 생각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그래서 오랜만에 메일로 연락을 했다가 서신을 한참 주고 받게 됐고, 그 분이 ‘남양사南洋史’ 집필을 기획하는 참에 남방 중국 방문이 성사되기에 이른 것이다.
<광저우 전>의 저자는 광둥성 출신 ‘입취밍(葉曙明)’씨인데, 학계의 역사 연구자가 아니라 출판인이자 역사 저술가이다. 최근 유사역사학 비판에 큰 공헌을 하고 있는 한국의 이문영 작가를 떠올리기도 했다. 그는 체제 내 조직에서는 이미 은퇴를 한 덕분에 중앙의 관점대신 로컬의 시각으로 광저우 역사를 기술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4년 전에 초독을 할 때도 그래서 내용이 더 흥미롭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지금은 조금 더 중립적인 시각을 유지하려고 애쓰지만, 어쨌든 당시에는 베이징이나 상하이의 주류 서사와 다른, 지역 중심의 생각을 접하면 무조건 마음이 동했던 기억도 있다. 제법 두꺼운 책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더 많이 들어있지만, 그 중 인상 깊은 세가지 에피소드를 추려서 전하고 싶다.
첫번째 이야기, “다섯마리 양(五羊)의 전설”.
광저우의 전통적 별칭은 양청(羊城) 혹은 수이청(穗城)이다. “양의 도시” 혹은 “이삭의 도시”라는 뜻이다. 광저우라는 도시가 만들어질 때, 오색구름 위에 떠있는 다섯 명의 신선이 다섯 마리 양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이 때 양들이 입에 벼의 이삭을 물고 있었다고 한다. 신선이 광저우 사람들에게 쌀을 전하면서, 영원한 풍요로움을 약속했다는 것이 이 신화의 골자이다. 짐작하겠지만, 농경 문화 전파에 대한 알레고리를 담고 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이런 전설에 크게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광저우의 상징물은 자연스럽게 다섯 마리 양이 됐다. 서울의 종로구나 중구같이 광저우의 ‘사대문 안’에 해당하는 유에슈越秀구에 가면 유에슈 공원 안에 현대적인 상징 조형물이 있고, 명나라 홍무제 시절(주원장)에 건축된 도교 사원 우선관 五仙觀에 더 오래 된 조각도 있다. 2010년에 치뤄진 광저우 아시안 게임의 상징 마스코트도 이 다섯마리 양이었다.
그림 1: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의 상징물인 다섯 마리 양
늘 문명의 중심인 중원과 변방의 관계에서 문화 전파에 대한 일방향성 경향의 서사가 존재한다. 그래서 도골선풍의 신선들이 양을 타고 와서 쌀을 전해줬다는 것이 별로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고고학, 역사학, 그리고 분자 생물학 지식으로 보자면 이것은 참으로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자생종 야생벼를 발견한 곳이든, 이를 인간이 길들여 재배종으로 만든 곳이든 모두 북방과 중원이 아니라 남쪽이고, 이곳에서 아주 오래 전에 벌어졌던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 중원의 기후가 지금의 남방만큼이나 온난 다습하던 선사시절에 이곳에서도 벼가 많이 재배됐다는 사실이 밝혀지긴 했다. 당시에는 이 지역에 코끼리나 물소, 악어 등이 서식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들의 벼 재배는 여전히 남쪽에서 이동한 민족이 전파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것은 선사시대에 오랜 시간에 걸쳐서 벌어진 일이고, 황하 중류의 중원지역에서 소위 화하족이 형성되기 이전이라는 것도 이미 명백히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벼, 특히 재배종 벼의 기원과 역사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존재하긴 하지만, 동남아시아와 인도 남부, 광둥, 광시성 등을 비롯한 중국 남부지역이 가장 유력한 후보지들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양이라는 가축의 등장은 더더욱 어색하다. 중국 남부 사람들이 선호하는 가축은 닭, 개, 돼지 등인데, 주로 북방에서 기르는 양이 어째서 뜬금없이 광저우에 등장한다는 말인가? 남방인들도 양고기를 먹기는 하지만 (물론 여기서 양은 우리가 쉽게 연상하는 울wool을 제공하는 면양이 아니라 한국에서는 염소나 산양 등으로 부르는 동물이다) 흔한 일이 아니고, 양을 키우는 일은 더욱 적다. 광둥 사람에게서 양이라는 동물을 떠올리는 유일한 연결고리는 광둥어에 자주 등장하는 ‘me 咩’라는 어휘이다. 광둥어 문장의 끝에 붙으면 의문사가 된다. 외지 사람들, 특히 북방인들이 광둥인들을 놀리거나 멸시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갈등이 있을 때,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지 못하고, 말다툼을 벌이는 ‘냐약한’ 남쪽 사람들의 모습을 ‘메~’소리를 내며 우는 양떼에 빗댄다 (여담이지만 최근 하얼빈을 찾은 남쪽 여행객들을 북방인들이 남방 감자南方小土豆라고 부른 것이 여러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비슷한 맥락이다).
무엇보다 이 양의 설화와 관련한 첫 역사적 문헌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아래와 같이 삼국시대 이후인 진晋나라이고 여기서 전국시절의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다.
“晋·顾微 广州厅事梁上,画五羊像,又作五谷囊,随像悬之。云昔高固为楚相,五羊衔谷萃於楚庭,故图其像为瑞。六国时广州属楚”
진나라 顾微의 기록에 의하면 광저우의 관아에 다섯 마리 양의 그림이 있고, 오곡을 담은 자루가 옆에 걸려 있었다. 광저우는 전국시절 초나라에 속했는데 초나라 재상이 高固였던 시절, 초나라 궁정에 다섯마리 양이 곡식을 입에 물고 나타났고, 이를 상서롭게 여겼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의 진실성 여부를 확인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이것이 광저우 도시나 쌀재배의 기원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금의 확인된 사실과 지식들을 조합해 보자면 다음과 같은 보다 설득력있는 가설들이 제기된다.
동남 연안의 절강浙江성부터 서남부를 포함한 중국 남방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민간 설화 혹은 소수민족들의 전설에는 공통적으로 천상으로부터 쌀을 가져 온 것이 ‘노랑이’ 즉 황구黃狗 혹은 참새麻雀라고 이야기 한다. 특히, 황구의 꼬리에 쌀이 묻어 왔다고 설명하는데 이것은 주로 벼이삭 끝에 열려 있는 낱알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여기에서 전국시대 초나라의 판도를 생각해 보자면 지금의 광둥성 북쪽 난링南嶺산맥의 북쪽까지 해당된다. 즉 지금의 후난湖南성 남부를 말한다. 남령산맥의 남쪽을 링난嶺南지역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광둥성의 별칭이기도 하다. 한반도 영남지역의 명칭도 여기서 빌어 온 것이다. 어쨌든 링난은 초나라의 판도는 아니었으나, 이 지역 주민들이 산맥이 가로막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나라와 일정한 교류가 있었을 것은 짐작이 가능하다. 특히 초나라에 귀속감을 느끼는 범한족 문화 정체성을 가진 이들보다는 이 지역에 거주하던 소수민족들이 그러했을 것인데, 이들 입장에서는 국가의 강역보다는 자기들이 사는 지역과 부족의 정체성이 더욱 강했을 것이다.
그래서 소위 아언雅言이라 불리는 상고上古시대의 표준 한어와 달리 후난 지역은 나름의 언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이것은 중원 문화의 영향이 어느 정도는 배어있을 초나라 궁중의 언어와 이 지역에 분포하는 지역 입말언어의 복합체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연구자는 당시의 상고 한어, 그리고 다양한 소수민족들의 언어에서 “황색, 개, 양, 다섯, 쌀” 이런 어휘들의 발음을 비교해 본다. 그렇게 해서 ‘황색’, ‘개’의 발음이 ‘다섯’이나 ‘양’과 유사하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을 논증한다.
정리하자면 주로 쌀을 재배하는 남방 소수민족(묘족苗族, 장족壯族 등)의 황구에 해당하는 단어와 양을 많이 키우는 서북방 소수민족 (藏族 지금은 티벳-미얀마어족으로 분류된다)의 언어나 고한어 (중국어는 sino-tibet어족으로 분류되며 한족 중국어와 티벳어가 같은 계열에 속한다) 등을 비교해 봤을 때, 후난지역에서 ‘황구’가 “다섯 마리 양”으로 둔갑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초나라 지역에 남아 있던 설화가 훗날 다시 광둥지역으로 역수입됐다는 가설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논점은 황구와 다섯마리양 중 무엇이 옳고 그르냐를 따지는 사실확인은 아니다. 다수의 민족들이 거주해서 소위 백월百越로 불리던 남방지역도 문자 기록이 존재하는 역사시절 이전에 나름의 문명과 문화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 중에는 쌀재배를 중심으로 하는 농경문화, 그리고 개를 포함한 가축 사육의 문화가 존재했을 것이며 이것은 중원에서 전파된 것이 아니라 그 반대였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중원 세력이 광저우를 점령한 기원전 200년 경 이후, 중원과 한족의 문화가 남방의 원주민 문화를 서서히 압도하면서 이런 설화가 주류 서사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비록 오랜 시간을 거치며 한화가 진행돼 지금은 광둥지역의 소수민족은 문자 그대로 소수민족으로 남게 됐고, 광저우의 토박이들은 모두 한족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광둥지역 방언인 광둥어도 그 역사를 천년 이상으로 추정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광둥어는 문자 기록이 없는 입말인 원주민 토착 언어보다는 오히려 수당隋唐 이후 중고中古한어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화문화권 혹은 중국이라는 현대국가안에서 광둥과 그 중심인 광저우의 위치는 베이징, 상하이라는 메인 축과는 동떨어진 변방으로 취급된다. 그래서 이런 문화주도권 논쟁이 여전히 현재적 의미를 갖는다. <광저우 전>의 저자도 이 이야기의 결말에서 만일 중원세력이 2천년전 광저우를 중심으로 한 링난지역을 정복하지 못했다면, 이곳은 쌀재배와 어로, 무역 거래가 중심이 된 남양南洋 해양문명이 주도하는 형국으로 발전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두번째 이야기, 그렇다면 진시황의 링난지역 정복의 진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중화의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광둥지역과 광저우가 등장한 것은 앞서 언급한대로 진시황秦始皇때문이다. 진시황은 전국 시대를 끝낸 후에, 여세를 몰아서 남방지역을 정복한다. 즉, 전국7웅戰國七雄중 하나였던 초나라를 멸망시킨 이후에 그 판도의 바깥에 위치하던 링난지역, 혹은 그 인근의 지역들, 즉 지금의 광시廣西성과 베트남 북부인 하노이 지역까지 세력을 뻗친 것이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이를 위해서 무려 50만의 대군을 파견했다고 한다. 물론 과장된 숫자일 것이다.
어쨌든 이런 대군을 그것도 전국 시대를 거치며 실전 경험이 풍부하고 잘 훈련된 군대를 보냈다면, 이 전쟁의 결과는 뻔하다. 당시 변변한 국가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원시적인 부족생활을 하던 이 지역 토착민들은 북에서 온 군대를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단기적인 전쟁과 점령 후의 장기적 과정과 성과는 확연히 다르다.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했던 미군이나 소련군이 결국 이 지역에서 물러나야 했던 상황을 떠올리면 된다.
처음부터 이 전쟁은 간단하지 않았다. 진秦의 군대는 정글에 투입돼 베트콩의 유격전에 맞서야 했던 월남전쟁 당시 미군의 처지와도 유사하다. 2천년이 지난 지금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주강珠江 델타 지역은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 출발점에 해당하는 광저우 지역은 직접 바다에 면해 있는 거대한 만이었다. 즉, 이곳은 산과 계곡이 직접 바다로 이어져 섬들과 거대한 습지만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인구가 거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장 마을을 점령하고 평범한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포로로 사로잡는 것은 손쉬웠겠지만, 정글로 숨어들어 지속적인 게릴라전을 벌이는 이들을 상대하는 것은 지난한 여정이었을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기후와 환경도 큰 문제였고, 험준한 산악 지대를 넘어야 하는 보급은 더 큰 문제였다. 그래서 생각보다 전쟁은 길어지게 된다. 우선 처음 왔던 군대를 지휘하던 투수이屠睢는 전투중에 사망하고, 런샤오任囂와 자오투어趙佗가 후발 군대를 이끌고 이곳에 오게 된다.
이들은 보급문제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험준한 산악지역을 넘는 육로 대신 우선 중원에서 이곳으로 연결되는 물길을 만들게 된다. 즉, 초나라에서 들어 오는 길이다. 주강에는 북강北江, 동강東江, 서강西江이라는 세개의 상류가 존재하는데, 이들이 택한 길은 서강이다. 서강은 우리에게도 잘알려진 광시성 구이린桂林의 리장灕江으로부터 연결된다. 그래서 長江의 지류이기도 한 후난성의 샹장湘江에서 광시성으로 연결되는 운하를 뚫게 된다. 이곳이 링취靈渠라 불리는 곳이다. 중국 정치 지도자들의 대형 수리 공정 애호는 유별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 2: 광둥 지역의 전통시대 도로망+수로망, 좌상단에 구이린桂林 리장灕江에서 광둥의 서강西江, 그리고 주강珠江으로 이어지는 수로를 볼 수 있다
이 사실로부터 짐작할 수 있는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구이린 등을 중심으로 한 광시성 북부의 정치적, 군사적 혹은 문화적 중요성이다. 지금은 특히 경제적 격차, 그리고 당송시대 이후부터 국가적으로 중시된 상업 항구 도시 광저우의 역할 때문에 광둥성과 광시성은 큰 위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주강 델타가 본격적으로 개발돼 비옥한 농업생산지역으로 각광을 받고 중남미에서 채굴된 은의 유입 등, 대외 무역이 국내 경제에 점차 큰 중요성을 갖게 되는 명청 시기 이후 혹은 영국의 식민도시 홍콩의 존재가 부각되기 전에는 광시성도 광둥성 못지 않은 정치적 위상을 갖고 있었다. 중원에서 군인과 민간인들이 지속적으로 유입됐기 때문이다. 특히, 광시성은 산악지역의 소수민족을 제외한 한족 주민들의 당대 표준어인 관화 사용 비율이 높았기 때문에,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향해야 하는 광둥 입시생들이 구이린에서 교사를 초빙하는 경우도 많았고, 신해 혁명 직전까지 광둥어 대신 관화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던 광저우의 월극粵劇 배우들도 광시성 관화를 배워야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물길을 통해서 보급 문제를 해결한 후에, 결국 이들은 광저우를 점령하고 요새와 배를 만드는 조선소를 건설한다. 하지만, 진시황 사후 불과 몇년을 버티지 못하고 통일 진이 멸망했기 때문에, 이곳의 군사 지도자였던 자오투어는 중원에서 들어 오는 길목을 막고 남월南越국을 세워 스스로 왕이 된다. 베트남, 즉 월남越南의 국명이 남월국에서 비롯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자오투어는 우리 고대사에 등장하는 위만 조선의 위만과 비슷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역시 5천년 역사를 주장하는 베트남 주류 사관에서도 우리의 단군 신화와 같은 전설상의 고대 왕이 민족의 조상으로 여겨지게 되면서, 남월국의 역사는 외부 민족에 의한 피식민역사로 볼 것인지, 자국의 정통 역사로 볼 것인지에 대한 긴장감이 존재하는 모양이다. 위만조선에 비교하자면 남월국은 궁궐터를 비롯해서 발굴된 유적과 유물도 풍부하고 중원의 역사기록도 많이 남은 편이어서 그냥 적당히 무시하고 지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자오투어 자신은 이미 현지인들의 의관과 풍습을 따르고 현지의 실력자를 귀족 계급이자 정치 지도자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한漢나라의 사신이 이를 보고 매우 언짢아 하며 협박을 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그는 현지인과의 협력과 융화정책을 취하면서도 중원 왕조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그의 치세에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남월국은 한무제漢武帝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100여년의 번영을 누리게 된다 (한무제漢武帝는 남월국을 멸망시킨 후 여세를 몰아 같은 장수들에게 위만 조선을 멸망시키게 한다). 남월에 정착한 중원에서 온 병사들은 모두 남성이었기 때문에, 자오투어는 3만명의 중원 여성을 보내줄 것을 요구하는데, 한나라의 황제는 고작 절반인 1만5천명을 보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대다수의 병사들은 결국 현지 여성들과 통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는 방법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서 두 가지 사실을 추론하고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광둥과 광저우는 전통시대에 중원 왕조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역 입장에서 보자면, 고립된 변경지역이자 외부세계의 영향력을 가둬 놓는 일종의 안전지대였다. 더 쉽게 비유하자면 우주선이나 잠수함에서 안전하게 외부로 출입하기 위해 출입구에 붙여 놓은 챔버인 ‘에어록airlock’같은 곳이다. 이곳에서 압력과 산소량을 조절하고, 외부에서 유입될지 모르는 미지의 유해 물질과 세균을 제거하기 위한 살균소독을 실시하기도 한다. 당송唐宋시기부터 광저우는 유명한 국제 무역항의 역할을 맡고 있기는 했지만, 당시의 대외 무역이 전통 시대 농업 기반 국가의 경제에 기여하는 정도를 생각해 보자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도가 낮았을 것이다. 특히 민간의 해양 무역과 수공업, 상업을 장려했던 송宋이라는 예외적 왕조의 경우를 고려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즉, 광저우 자체가 매우 번성한 상업도시였다고 하더라도 왕조와 국가 전체의 입장에서 보자면 예외적인 지역과 특성에 지나지 않는다. 송에 비해서 국가가 대외 교역을 보다 강력하게 통제하고 조공무역의 개념 하에서만 이를 받아들였던 명청明清시기에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건륭乾隆제가 18세기에 모든 여타 동남 연안의 무역항을 폐쇄하고 광저우 한곳으로 공식적인 대외 무역을 제한했던 것이 이런 사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그는 서구의 상인들이 쑤저우蘇州나 닝보寧波와 같은 동남연안의 항구도시에 직접적으로 드나들며 주류 중국 사회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원치않았다.
심지어 광저우에서조차 아편전쟁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서구인들은 정해진 지역 바깥으로 함부로 나다닐 수 없었으며 선원들은 상륙조차 허가 받지 못한 채 정박된 배에 갇혀 지내야 했다. 그래서 상인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생활하거나 장기 체류하며 가족을 데리고 올 수 있었던 곳이 바로 포르투갈인들이 개척한 마카우이다(광둥성 정부는 처음에 포르투갈인들이 나타났을 때 불랑기狒狼幾라고 부르며 아이를 잡아먹는 괴물로 묘사해서 현지인들이 두려움때문에 가까이하지 못하게 했다. 나중에 포르투갈인들의 상거래를 공식화한 이후에는 지금도 사용하는 푸타오야葡萄牙로 개명해 부르면서 신분 세탁을 시켜줬다). 광둥성과 주강 델타 지역이 이런 선택지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은 바로 중원으로부터 고립된 광둥성의 지리적 환경때문이었다. 나는 홍콩과 광둥성에 거주한지 도합 만 6년이 넘은 시점에야 이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늘 비행기나 고속철로만 바깥 세상을 드나들었기 때문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실이다. 그래서 중국의 다른 지역이나 외부에서 광둥성에 접근하기 위한 편리한 방법은 사실 여전히 바다를 이용하는 것이다. 바다로는 열려있되 몇몇 길목을 장악하면 대륙쪽으로는 닫혀 있는 공간인 것이다. 현대의 중국 공산당 정부가 이런 정책을 고수했던 사례는 바로 션전深圳이라는 신흥 대도시이다. 중국 대륙 내에서 실행해 볼 수 없는 과감한 실험적 개혁개방 정책이 광둥성과 션전에서 많이 이뤄졌는데 내륙지역으로의 영향이 제한적일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그렇다면 진시황이 파견한 50만명 대군의 정체는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점이다. 아마도 이들 대부분은 제국의 정예병력인 정규군이라기 보다는 범죄자나 천민 계급에 속하는 일종의 노예 병사들이었을 것으로 <광저우 전>의 작가는 추정한다. 그래서 이들은 링난 정복 전쟁과 식민화의 목적으로 죽을 때까지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게 된 것이다.
이쯤 되면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가 연상되기도 한다. 즉, 영국인들이 흉악범을 단체로 이곳으로 이주시켜 격리시킨 사실 말이다. 그래서 진시황이 엄청난 규모의 군대를 링난 지역 정복전쟁에 투입한 진짜 이유를 묻게 된다. 역사서는 물론 열대지역의 진귀한 물품을 얻기 위해서라고 기술한다. 이곳의 물산이 독특하기도 했고, 이미 그때도 동남아 지역 등과 무역이 이뤄지고 있었다는 고고학적 증거도 발견되고 있다. 그래도 힘겹게 운하까지 파야했던 것을 고려하면 그 집념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서 조선반도나 일본까지 수만명을 파견했다는 전설을 접하다 보면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다. 정복욕에 불타는 사이코패스같은 독재자와 정치 지도자의 이미지나 <시빌라이제이션civilaization> 혹은 <삼국지> 같은 “땅따먹기 게임”들에 너무 익숙해져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지만, 대외 교역의 경제적 역할이 미미했을 2천년 전이라면 이런 전쟁의 목적에 선뜻 공감이 가지 않는다. 차라리 언제라도 역심을 품거나 소요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범죄자와 불만세력들을 격리시키거나, 척박한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소멸시켜 제국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의도였다면 더 이해하기 쉽다. 흥미있는 것은 진나라에서 천민으로 분류하던 사람들의 상당수는 상업 종사자였다고 한다. 진시황이 상인들을 싫어했다는 사실 때문에, 여불위呂不韋와 진시황의 어머니의 관계를 떠올리는 사람도 많지만 야사일 뿐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광둥 정복 전쟁에 동원됐다면 어쨌든 광둥인들은 어쩔 수 없는 상인의 피를 물려 받은 모양이다. 물론 나의 뇌피셜이다.
세번째 이야기는 신해혁명의 도화선이 된 ‘보로保路운동’이다.
신해辛亥혁명은 1911년 가을 후베이湖北성 우창武昌에서 일어난 무장봉기가 성공하고, 남쪽을 중심으로 각 성에서 무장투쟁이 발발하며 다수의 지방 정부들이 전복된 것이 결정적 계기이다. 이렇게 청나라 왕조, 그리고 2천년간 이어진 중화제국이 최종적으로 막을 내림과 동시에 아시아에서 최초로 공화국이 수립된 역사적 사건이다. 1912년 1월1일 쑨원이 중화민국의 임시대총통으로 취임했고 곧이어 국가의 삼권 분립과 인민의 주권에 대한 명시를 중심으로 한 임시약법, 즉 잠정 헌법이 발표됐다. 신해혁명이전에도 10여년간 여러 지역에서 왕조를 무너뜨리기 위한 정치적 결사체가 결성되거나 이들이 주동이 된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또, 정치인의 암살을 비롯한 정치적 폭력 사태가 빈발했기 때문에 신해혁명의 주류 서사에서 가장 강조가 되는 부분은 이러한 정치와 군사행동들이다. 그리고 가장 주목을 받던 단체와 인물이 동맹회의 대표였던 쑨원孫文과 그의 동지들이었다.
하지만, 실제 이들의 군사적 역량은 북양北洋해군을 지배하던 위안스카이袁世凱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평화를 위해 쑨원은 총통 자리를 위안스카이에게 양보하게 된다. 아시다시피, 위안스카이가 다시 황제로 등극하는 바람에 공화국은 껍데기만 남고, 그의 사후에 중국은 지역 군벌들이 할거하는 시대로 접어든다. 무력을 포함한 실력 혹은 인민들의 “진정한 지지와 신뢰”를 확보하지 못한 지식인과 혁명가,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들의 이상이 힘없이 주저앉은 것은 인류 역사에서 예외적인 현상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해혁명이 성공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진보와 보수에 상관없이 상당히 두터운 엘리트층 혹은 경제력을 갖춘 도시인들이 청나라 왕조에 대한 지지를 거둬들였기 때문인데, 그 배경이 되는 중요한 사건 중 하나가 보로운동이다.
보로운동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2015년 처음 쓰촨四川성 청두成都를 방문해서 공원에 서있는 보로운동 기념탑을 봤을 때였다. 모르던 사실이라 인터넷을 뒤져보고 전개과정을 파악했다. 당시 쓰촨성, 후베이성, 후난성, 광둥성을 잇는 철도가 건설되고 있었는데, 철도 건설의 주체는 주로 민간자본이었다. 무능한 청나라 정부는 철도 부설권을 미국을 비롯한 외세에 팔아넘기려 했는데, 지역의 민간인 지도자들이 이에 반대하고, 민자를 모아서 철도 부설권을 되찾아 오게 된다. 청조의 관료들이 다시 이를 가로채려 했는데, 이에 반대하는 청두의 민간인 대표들을 학살하는 유혈 사태가 벌어졌고, 여론이 지극히 악화된 상태에서 우창의 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실제로 대중적인 항의 시위와 유혈 사태가 벌어진 것은 청두였지만 이런 움직임의 발단이 된 것은 광저우 민간인들의 조직이나 활동과 더욱 깊은 관련이 있다. 가장 초기에 철도 부설이 논의된 것은 광저우와 후베이의 우한武漢을 잇는 유에한粤漢철로였다. 이 철로는 광저우에서 출발해서 북상하는 노선이다. 앞에서 언급한 난링산맥을 통과하고 후난성 창사長沙를 거쳐 우한에 도달하게 된다. 2천년전 진시황의 군대가 간난신고를 겪으며 돌아돌아 내려왔던 길을 이번에는 근대화 운송의 첨병인 철도를 통해 직통하고자 하는 시도인 것이다.
광둥지역의 뜻있는 민간 엘리트들을 중심으로 중지眾智가 모아져서 미국에 팔아버린 철도부설권을 되찾아 오기로 마음먹은 후, 민간인 대표로 주미 공사를 역임한 량청梁誠이 미국회사와 협상을 벌이게 된다. 두배 값을 쳐주고 철도 부설권을 되사오고, 그가 새롭게 만들어질 철도부설기업의 책임자로 추대된다. 그런데 정부는 민간에서 되찾아 온 권리를 무시하고 다시 증세를 통해 자금을 모아 정부 주도로 철도를 부설하려 시도한다. 결국 민간대표가 후광湖廣총독(후난성과 후베이성)과 담판을 벌인 끝에 광둥지역은 순민간자본, 후난은 관과 민이 절반씩, 후베이는 관이 소유권을 갖는 식으로 각각 철도를 건설할 것을 합의했다. 그리고 이를 진행하기 위해 민간기업을 설립하게 된다. 이때 부유한 자본가들의 참여(소위 ‘민족자본’이다.)뿐 아니라, 대중 공모를 통해 일반 시민들도 소액주주가 될 것을 독려함으로써, 철도회사는 일정한 ‘공영성’을 담보하게 됐다(이를 애국주식愛國股이라 부른다). 이후 중국 전역에서 유사한 형태를 갖고 있는 20여개의 철도기업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중간에 량광兩廣총독(광둥성과 광시성)이 공을 가로채기 위해 강제로 광둥 구간에 대해 정부의 소유권을 되찾아오려 하면서 민간인 대표들을 구금하는 일도 발생한다. 그러나 격렬한 대중시위와 항의 끝에 결국 두손을 든다.
여기서 당시 광저우의 민간인 엘리트 그룹이 어떻게 구성돼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중국어에서는 산업 업종을 항行이라고 표현하는데, 당시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한 광저우의 각종 상인 집단을 통칭해서 72항 七十二行이라 불렀고, 이들을 대표하는 조직도 있었다. 여기서 물론 72는 그 수가 많은 것을 의미하지 정확히 72개의 업종만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잘 알려진대로 지식인-예비관료 집단인 신사紳士들이 존재했는데 이들이 자선단체를 조직해서 공공 구호활동을 펼쳤고 이를 샨탕善堂이라고 불렀다. 광저우에는 이중에서도 규모가 크고 영향력이 있는 9개의 九善堂이 있었다고 한다. 이 단체들 중 상당수는 현대식 병원 재단과도 연관이 있다. 이들은 일찌감치 여론의 조직과 계몽활동의 중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에 신해혁명을 전후해서 다수의 언론사를 창간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렇게 당시 민간 여론을 조직하던 오피니언 리더들을 신상紳商이라고 부른다. 즉 상인과 지식인이 중첩된 복수의 엘리트 집단이 존재한 것이다. 이는 명청明清시기 당시 세계적 수준이었던 중국의 상인집단이 서구의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자본을 집중하고 확대하기 보다는 자식들을 과거에 응시하게 해서 지식인 엘리트 계급으로 전환된 전통과도 연관이 있다(흥호펑의 <차이나 붐>이나 EBS ‘그레이트 마인드’의 흥호펑 편을 볼 것). 대표적인 것이 장강 중하류에서 소금산업을 독점했던 안휘安徽성 출신의 휘상徽商들이다.
상인과 신사들은 철도부설권 회수 활동을 하는 와중에 각기 자치회自治會와 자치연구회自製研究會를 조직하기도 했는데 상인들이 물질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던 반면, 신사들은 과거에 합격하는 것을 전제로 예비관료, 혹은 퇴직 관료로서 지역과 중앙정부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또 이들 중 상당수가 관아에서 리吏로 일하며 행정실무를 담당하기도 한다. 철도부설권을 량광 총독이 다시 가로채려고 했을 때, 민간에서는 베이징 중앙정부에도 직접적으로 압력을 가해서 총독을 굴복시키는데 이때 광둥성 출신 재경在京 현직 관료들을 통한 로비도 유효했다고 한다. 상인과 신사들의 연합체가 어떤 영향력을 갖을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자치회가 출범한 직접인 계기는 자경단의 조직이었다. 당시 주강 상류의 서강西江에서 도적들이 출몰하는 것에 대해서 이를 단속하는 경찰력이 충분히 미치지 못하자, 청나라 정부와 타협해서 준경찰조직의 운영권을 확보한 것이다.
광저우 상인들의 합법적인 무장조직 운영권 시도는 1920년대 민국 시기에도 있었다. 당시 중화민국 총통이자 대원수였던 쑨원과 그의 혁명동지이자 광둥성 성장, 그리고 광둥군벌인 월군粵軍의 리더였던 천지옹밍陳炯明이 반목하면서 광저우는 무정부 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이때 남방지역의 각 군벌들이 광저우로 난입해서 상인들이 영업에 심각한 지장을 받게 되자 자체적인 군사력 보유를 희망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당시 이미 사회주의의 영향하에 조직됐던 노동자 단체 공단工團이나 농촌 단체인 향단鄉團,농단農團 등의 각종 사회단체들이 앞다퉈서 자경단을 합법화해 줄 것을 신청했다. 신해혁명 이후 왕조 정부를 비롯한 전통사회 체제와 구분되는 서구적 ‘민간사회’의 개념이 전해지면서 각종 사회 단체와 이익 집단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가부장 사회의 구질서 체제를 유지하면서 과거의 리더들과 그 구성원들이 ‘감투’를 쓰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가장이 CEO가 되고, 가족 성원들이 CXO를 자처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더 큰 혼란을 염려한 정부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광저우 전>에는 다뤄지지 않지만 이 당시의 현실을 묘사한 90년대 소설<광저우 갓파더 廣州教父>를 보면, 이와 같은 각종 단체들의 활동 이면에는 불법적으로 무장한 범죄조직과의 협력이나 경쟁관계도 존재했다. 이 소설은 TV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는데 광둥판 ‘김두한’의 일대기라든가 SBS 드라마 <야인시대>를 연상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민자와 공모로 설립된 광둥성 철도부설기업의 총책임자는 광둥성 중산中山 출신의 정관잉鄭觀應이라는 신상紳商이었는데 그는 소위 ‘매판買辦’상인의 대표격인 인물이기도 하다. 영어로는 comprador로 불리는 매판상인은 일찍부터 서구 상인들과 협업을 하거나 그들의 업무를 대행하던 에이전시agency 역할을 하던 사람들이다. 과거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8~90년대 대학가에서 매판자본이란 표현은 국내의 재벌기업들에 대한 비칭으로 지금의 ‘토착왜구’쯤에 해당한다) 부정적인 면모만이 강조됐으나 개혁개방후에는 개화선각자와 근대화 지식인으로 재평가 받기도 한다. 하지만 철도건설 사업은 각 지역과 단체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총책임자가 잔티엔여우詹天佑라 불리는 중국 최초의 철도 엔지니어로 교체되기도 한다. 그는 중국 최초의 도미유학생 그룹의 일원으로 예일대학에서 수학했다. 19세기 말에 청나라 정부는 광둥성 특히 중산지역을 중심으로 우수 아동 120명을 관비로 미국에 유학보내는데 이들 중 일부가 중국의 대표적 개화지식인으로 공헌을 한 것이다. 이들 광둥성 출신들이 관비유학 기회를 많이 얻은 것은 북방의 명문가가 자제들을 서구사회로 보내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정관잉의 선임자격인 전직외교관 량청도 도미유학 아동중 한명이다. 그는 광저우 황푸마을 출신인데 이 마을이 바로 건륭제가 광저우를 대외무역의 유일한 합법적 창구로 지정했던 기간, 백년 가까이 항구와 세관이 위치하던 곳이다. 그래서 이곳에 부유한 상인가문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는 주미공사로 재직하면서 미국으로부터 의화단운동사태 배상금 일부를 되돌려 받아, 이 자금으로 베이징의 칭화清華대학을 설립하기도 한다. 이렇게 서구인들과의 협상에 능했기 때문에 철도부설권 회수 담판에도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량청, 정관잉이나 잔티엔여우와 같은 주강 델타지역 출신의 엘리트들이 서구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지식 자본, 인적 자본과 물적 자본을 쌓아서 중국 근대화의 선구자 역할을 한 사실이 역시 근대화의 상징중 하나인 철도사업과 이들의 인연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그림 3: ‘매판상인’들에 대한 평가는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서는 중립적이다.
철도건설 과정이 순탄치 못한 것을 이유로 량광 총독은 재차 철도부설권을 국유화하려 하는데 이 때, 민간 주주 기투자분의 전액 보상을 거부한다. 또, 주식 대금의 분기별 미납분도 계속 징수하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당연히 대주주와 소액주주 모두 크게 반발했고 특히 앞서 설명한 쓰촨의 보루운동이 펼쳐지게 된다. 시위 등으로 정치적 실력행사를 하던 쓰촨에서의 유혈사태가 결국 우창 봉기로 이어졌다면, 광둥지역의 저항 방법은 상인들이 주도하는 만큼 경제 논리와 수단이 사용됐다. 정부의 재정운용에 타격을 주기 위해서 상인과 시민들을 독려하여 청 정부가 발행한 지폐의 사용을 거부하고 이를 은으로 반환 받으려 한 것이다. 당시 청정부는 은본위제를 시행했기 때문에 국유은행인 대청大清은행 금고에 보관한 은을 담보로 지폐를 발행했다. 1944년 브레튼우즈 체제에서 금본위제를 시행하면서 미화 35달러를 금 1온스로 고정한 것에 비견할 만하다. 사람들이 은행으로 몰려와 줄지어 은을 인출했는데 지금식으로 설명하자면 ‘뱅크런’이 발생한 셈이다. 당황한 청정부는 본격적인 무력 탄압과 언론 탄압을 시도한다. 이때 다수의 민간인 지도자들이 홍콩으로 피신하고 홍콩에서도 항의 시위를 조직한다.
이상은 신해혁명의 배경이 되는 철도부설 프로젝트 진행 과정에서 어떻게 광둥지역의 민간사회와 왕조 정부가 대립했는가에 대한 약술이다. 원래 전통 중국 사회에서 신사와 엘리트 상인들은 모두 정부에 협조적인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상인들은 이익을 위해서 ‘외부 세력’과 결탁하기도 하고 폭력 수단을 불법적으로 소유하기도 했다. 이 글에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대표적으로 남방의 비밀결사 ‘천지회天地會’에서 파생한 무력을 소유한 집단들은 신사와 함께 지역 기층사회의 거버넌스를 담당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들은 현대의 조직폭력집단과 마찬가지로 겉으로 드러나는 합법적인 사업과 함께, 엔터테인먼트 산업, 도박, 유흥업, 매매춘, 마약판매와 같은 업종에 종사하기도 했다. 물론 상인들에게 ‘보호비’를 뜯어내면서 치안질서를 유지하기도 한다.
이렇게 왕조정부나 그 관료체제를 지탱하는 엘리트 계층인 신사와 구분되는 “다른 종류의 엘리트들”이 이끄는 ‘회색 지대’를 전통적으로 중국에서는 강호江湖라고 부른다. 상인, 무술인, 종교인,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되기를 희망하지 않는 지식인(游士) 등이 대표적이다. 천지회와 그 파생단체들의 경우 ‘반청복명反清復明’의 기치를 내걸고 있었기 때문에 초기에 쑨원의 동맹회를 적극지지하며 청정부를 타도하는데 협조하기도 했다. 폭력과 범죄, 정치적 모반이나 비밀조직 등이 드라마틱한 면모 때문에 스테레오 타입 이미지로 많이 부각되지만, 실제 이들의 본질은 정부의 힘이 미치지 않는 영역에서 자치와 상호부조를 위해 만들어진 조직으로 보는 학술적 시각도 있다 (David Faure). 이들은 광대무변한 농민과 평민 사회, 그리고 유가 왕조체제와 그 지지세력인 지식인 엘리트들과도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다. 다만 공식적인 정치의 영역이 비어있는 공간에 스며들어 전통사회가 유기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기능한 전통 중국 ‘사회’의 일부인 것이다.
그림 4: 광둥성과 그 중심에 위치한 주강 델타는 산악으로 둘러싸여있지만 바다로는 트여있는 중화대륙 남방의 ‘에어록’이다.
100여년전 세기가 전환되는 시점에, 광둥이라는, 대륙과 고립되어 있으나 바깥 세계로는 활짝 열려있던 특별한 지역에는 매우 다양한 행위자들의 동학이 유례없이 극적인 드라마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서구의 시민사회가 형성되는 것과는 다른 맥락과 경로로 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현대사회’의 싹이 트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마오쩌둥 시대를 거치면서 이런 변화는 많은 굴절을 겪기도 했다. 여하튼 당시 이 지역에서 벌어진 상황들은 따지고 보면 이 글의 다른 에피소드들이 설명하는 것처럼 대륙의 ‘에어락’이라는 지정학적 이유로 2천년전에 막을 연 대서사시의 연속선 상에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미중갈등과 시진핑 시대의 새로운 조정 국면에도 불구하고 이 서사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 참고 자료
叶曙明, 《广州传 上/ 下》, 广东人民出版社, 2020
冯沛祖, 《广州教父 上/ 下》, 广东旅游出版社, 1997
刘付靖, “百越民族稻谷起源神话与广州五羊传说新解”, 中南民族大学学报(人文社会科学版) Vol 23 No 2, Mar.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