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2021년 10월 28일
4. 사회보장의 핵심은 필연성에 있다
복지국가의 정립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 중에 하나는 ‘복지국가는 필연적으로 형성되고 운영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명백하게 밝히고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이다. 복지국가는 사회보장(social security)와 국가(State)가 혼합된 것이기에, 복지국가의 필연성을 보인다는 것은 사회보장과 국가의 필연성을 각각 밝히는 것이다. 각각의 작업은 많은 지면을 필요로 하므로, 여기서는 사회보장의 필연성을 설명하고, 후에 다른 지면을 통해 국가의 필연성을 다루고자 한다.
필연성의 의미
먼저 필연성에 대해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자. 표준 국어대사전에 따르면, 필연이란 “사물의 관련이나 일의 결과가 반드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프랑스어 nécessité는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한 것 또는 그렇게 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을, 영어 necessity는 ”어떤 것이 발생하거나 이뤄져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즉 필연이란 “다른 대안이 없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을 의미하며, 필연성이란 그러한 성질을 지칭한다.
필연성에 대한 철학적 규정도 내용상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상황에서의 조건, 요소들 간의 연관, 논의나 과정의 결과나 결론, 사건이나 대상물의 효과, 진술의 진리값 등이 필연적이다라고 하는 것은 관련 맥락 내에서 해당 조건, 결과, 결론, 효과, 진리값에 대한 대안이 불가능하며 그렇게 밖에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1] 즉 필연성은 주어진 맥락 아래서 분명하게 규정되어 단지 그러할 뿐 어떤 식으로든 그와 다를 수 없음을 의미한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필연성의 근거, 구현과정, 왜곡 등 논쟁점이 여럿 있지만, 여기서는 우리나라 상황에서 가장 큰 쟁점인 필연성의 객관적 성격을 강조하고자 한다. 필연성은 해당 사안이 인간의 의식이나 의지로부터 독립되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필연성에 사람이 간여할 수 있다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보장될 수 없다. 사회보장이 필연적이라는 것은 사회보장에 대한 정치적 입장이나 윤리적 선호와는 상관없이 인간의 삶은 사회보장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보장에 대한 거부나 회피가 난무하는 우리나라에서 이는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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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회보장의 필연성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왜 사회보장을 말할 때 우선적으로 필연성을 논의해야 하는 걸까? 그 이유로 몇 가지가 제시될 수 있다. 먼저 필연성은 관찰가능한 현상, 제도, 실천 등에 대한 이해를 매우 용이하게 해 준다. 아이가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찾게 되고, 이 때문에 엄마 옆에서 햄버거를 사 달라고 칭얼대는 모습을 떠올려 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의 행동을 거의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배고픔의 해소 욕구는 필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차를 위해 가스레인지에 물을 올려 놓으면 반드시 몇 분 후에 불을 꺼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는 필연성 때문이다.
필연성은 결정이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하여 강력한 지지를 유도할 수 있다는 점도 이유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의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최소한의 삶의 수준을 보장해주는 제도이며 국민들 중 사회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분들(전체 인구 중 3% 미만)에게 제공된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끼니를 때우고 비바람을 피해 쉴 수 있게 해주는 최저의 자원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필연성에 기반한 것이기에, 이 제도는 정당성을 갖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 제도의 운영에 대해 불만을 갖기보다는 지지를 보낸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필연성은 오늘날 우리사회를 뒤엎고 있는 고통을 이해하는 키워드이기 때문이다. 필연성은 세상이 가야 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방향을 말해준다. 우리가 필연성에 의거한 현상에 대해 쉽게 이해하는 것은 세상사가 그렇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고통 받고 불행한 근본적인 이유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들’이 현실에서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삶의 질과 행복의 수준을 높이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필연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구분하고 그것을 제대로 구현되는 것에 있으며 바로 거기에 사회보장이 자리하고 있다.
필연성에 대한 이중의 왜곡 1: 시장경제 필연성의 지배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나라는 필연성과 관련하여 이중의 왜곡에 빠져 있다. 한편으로는 필연적이지 않은 것이 필연적인 것으로 둔갑하여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필연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사회에서 제대로 인식되지 않아 외면당하고 있다.
사실 필연성에 기반해 작동하는 것들은 위에 제시한 예처럼 매우 극단적인 상황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일상에서 매우 많은 활동들에 녹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시장경제가 상정하는 필연성이다. 물론 전세계적으로 봤을 때는 시장경제의 필연성은 다양한 비판에 직면해 있고 이미 그 존립근거가 무너져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는 여전히 매우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
한 연구는 시장경제를 지탱하는 인간상은 최소한 원자론(atomism), 이기주의(egoism), 그리고 합리성(rationality)이라는 세 가지 기본공리에 토대를 둔다고 말한다. 경제적 행위자는 자신의 선호를 타인에 의한 외부적 영향 없이 형성하는 독립적 개인이고(원자론), 개인들은 오로지 자신의 선호들에 의해서만 조종되고 오로지 자신의 복리만을 최대화하고자 하며(이기주의), 개인은 자신의 목적달성을 위한 최선의 수단들을 완벽하고 완전한 지식을 통해 계산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갖는다(주관적 합리성).[2] 여기에 인간은 교환하는 존재라는 요소가 덧붙여지면 시장경제의 인간, 즉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가 만들어진다.
다수의 경제학자와 시장론자들은 인간은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를 구성하는 위 4가지 속성들을 본래적으로 가지고 태어났으며 따라서 이에 근거해 모든 선택과 활동이 이뤄지는 것은 필연적이다라고 주창한다. 이 속성들이 정말로 필연적인 것인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인간은 타인의 영향에 독립적이지 않고 상호의존적임이 밝혀졌고, 경제 행위에 있어서도 비합리적인 결정이 오히려 더 많음도 밝혀졌다. 특히 인간은 호모 에코노미쿠스에 포함되지 않는 속성들을 기준으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바가 많다. 즉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환원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이 작동하는 대상과 영역은 매우 한정적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경제학자나 재정 관련 전문가들은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줄곧 주창하며 다양한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국민들을 호도한다. 정치인들은 이에 기반하여 호모 에코노미쿠스에 적합한 제도들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우리나라 국민의 대다수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공고한 믿음체계의 핵심으로 구축해 이에 맞춰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 결과, 경제 논리, 기획재정부의 논리들은 복지국가의 확대와 충돌할 때마다 승리하며 복지국가의 꿈을 무너뜨린다. 국민의 상당수는 또한 이에 동조하며 그것이 타당한 결정이라고 박수를 보낸다.
필연성에 대한 이중의 왜곡 2: 사회보장 필연성의 소거
그렇다면 복지국가의 핵심요소인 사회보장은 필연성의 맥락에서 얼마나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을까? 결과는 매우 비참한 수준이다. 주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견해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사회보장은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지 않아도 되는 것인데, 이왕이면 하면 좋은 것’, ‘사회보장은 여건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하는 것’, ‘인간은 원래가 이기적인 존재여서 타인을 돕거나 타인과 협력해 이익을 나누는 것은 손해 보는 것’, ‘협력은 도덕적인 것이어서 언제든지 하지 않아도 되는 것’ 등이 팽배해 있다. 이런 기준들은 사회보장이 토대로 삼는 필연성의 논리가 전혀 들어가 있지 않고, 오히려 사회보장은 언제든지 포기 또는 회피할 수 있는 것으로 상정할 뿐이다.
또한 사회보장은 통치권력의 행사에서도 핵심적인 기준으로 인정되고 있지 않다. 특히 대다수의 국민들도 사회보장의 필연성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사회보장의 실현을 현실정치권에 강하게 강제하지도 않는다. 이는 유럽의 복지선진국의 경우와 매우 대조되는 모습이다. 복지선진국의 일반 대중들은 사회보장제도를 지배계층과의 투쟁에서 승리하여 얻는 전리품으로 여긴다. 실제로 사회보장체계의 도입과 초기의 발전은 일반대중의 많은 피눈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사회보장체계가 구축된 다음에는 이것의 축소에 대한 강력한 국민적 저항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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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우리의 모습들은 호모 에코노미쿠스와 견줄 수 있는 사회보장의 인간상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미 관련된 많은 가치, 제도, 그리고 실천들이 현실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인식의 차원에서는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사회보장의 인간상을 담아내는 개념화가 아직 이뤄지지 않아 이를 지칭할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유럽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보다 더 많은 예들이 있음에도, 종합적 개념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다만 사회적 가치로서의 연대(solidarty)가 강조되고, 크로포트킨(Kropotkin)이 120년 전 제기한 “상부상조는 인간의 본성이며 상호투쟁보다 더 이익”이라는 주장이 최근에 주목 받고 있을 따름이다. 필자는 크로포트킨의 주장들과 연대(solidarity)를 결합하여 ‘호모 솔리다리쿠스 homo solidaricus’라는 새로운 개념이 구성될 수 있다고 보며 뒤에서 이를 제시하려 한다.
‘한국형 사회보장’의 진면목은 사회보장의 필연성 구현에 대한 억제이다
위에서 말한 이중의 왜곡은 또 다른 왜곡을 낳는데, ‘한국형 사회보장’이 대표적이다. 2010년을 전후해 우리나라에서 복지국가가 사회의 핵심 이슈로 부상했다. 하지만 이 이슈는 얼마 지속되지 않았고, 최근의 각종 선거에서도 주요 관심사의 위상을 잃고 있다. 이를 조장한 가장 중요한 논리들 중 하나는 ‘한국형 복지국가’ 내지는 ‘한국형 사회보장’이다. ‘한국형’에 대한 주장들은 대개가 사회보장 확대의 폭을 줄이고 확장의 속도를 늦추고자 하는 저의가 숨겨져 있다.
‘한국형’ 주창자들은 복지선진국이 도입∙운영하는 제도와 정책들을 왜 한국에도 적용되어야 하는지 특히 한국의 상황은 서구선진국과 다르기 때문에 다른 제도와 정책을 도입∙운영해야 한다는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한다. 제도와 정책 수준에서만 보면 이 문제제기는 수긍할 수 있다. 새로운 제도와 정책의 도입∙운영은 이미 그 나라에 구축된 가치체계, 인식판단틀, 제도, 실천 등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나라마다 상이하게 구성된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필연성과 목표의 수준에서 보면, 그들의 주장은 잘못됐다. 사실 다른 나라의 제도와 정책을 따라갈 때, 우리나라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제도와 정책 자체가 아니다. 그것들이 토대로 삼는 사회보장의 필연성에 대한 이해, 이 이해에 기반해 설정되는 목표와 그 목표를 실제로 구현하겠다는 정치적 의지가 수입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나 복지선진국이나 모두 필연성이라는 조건 그리고 필연성이 실현되지 않으면 사회구성원에게 고통과 불행이 발생한다는 조건에 동일하게 놓여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조건을 받아드리고 이에 기반해 동일한 목표를 세우는 것이 핵심이다.
선진복지국가들도 서로를 비교해 보면 정치적 상황, 권력자원의 분포, 경제적 상황이 각기 다르고 기존의 제도와 정책들이 다르다. 그로 인해 사회보장의 제도와 정책들 또한 달라, 각각의 사회보장체계도 자기들만의 것으로 구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사회보장체계가 설정한 목표의 수준과 사회보장 필연성의 구현 수준은 거의 동일하다. 2019년 기준으로,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노르웨이,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벨기에 등의 복지선진 8개국이 GDP 대비 사회지출을 25~30%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3] 이들 국가들은 동일한 목표를 그것의 실현 형태와 방식은 달리 하면서 어떤 나라는 좀더 고비용으로 어떤 나라는 좀더 저비용으로 구현할 뿐이다.
진정한 ‘한국형’이라면 복지선진국들과 동일한 목표를 상정하고, 동시에 사회보장 필연성에 대한 이해를 공고히 해 정당성의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 그리고 그 위에 ‘한국적 상황에 맞는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 해당 목표를 실제로 달성하고자 해야 한다. 지난 10여년간 건강보험 보장률(비급여를 포함한 총진료비 중 건강보험에서 부담하는 부담 비율)이 60%대 초반에 머무르는 반면, 앞서 제시한 복지선진 8개국은 85%를 넘는다. 우리의 국민연금제도는 늦게 도입되었다고는 하지만 지나치게 넓은 사각지대는 줄어들 기미가 없다. 우리나라의 사회지출의 규모는 12.2%로 복지선진 8개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런 현실을 비춰보건대, 현재 구축되고 있는 ‘한국형’은 진정한 의미의 ‘한국형’이라고 부를 수 없다. 이는 사회보장의 필요성과 목표가 소거된 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이다.
‘집중과 선택’ 논리의 진면목은 사회보장 필연성 구현에 대한 회피이다
우리나라는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집중과 선택’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사회보장의 필연성을 돌아가려는 대표적인 술수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자원 총량은 사회보장의 필연성을 구현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복지선진 8개국은 1990년대 초에 1인당 GDP(PPPs 기준)이 2만 달러 전후였으며, 이 시기에 이미 GDP 대비 사회지출(공공지출+민간법정지출)이 25%를 넘어섰다. 우리나라는 2002년에 1인당 GDP(PPPs 기준)가 2만 달러를 넘었고, 당시 GDP 대비 사회지출은 5.1%에 불과했다. 그리고 2019년 기준 우리나라의 GDP 대비 사회지출은 12.3%인데 반해, 복지선진 8개국은 이미 196-70년대에 이를 달성했고, 1980년대에는 20%에 도달했다.[4] 요컨대 우리나라의 자원 총량은 이미 복지선진국에 비견할 사회보장체계를 구축하고도 남을 정도이다.
사실 우리나라는 자원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자원의 배분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사회보장의 필연성을 구현하는데 사용할 자원의 총량이 작게 배분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미 거시적 차원에서 ‘집중과 선택’의 적용이 일차적으로 사회보장의 필연성 구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매우 부족한 양을 배당해 놓고서, 그 안에서 또다시 ‘집중과 선택’을 적용함으로써 이차적으로 사회보장의 구현을 가로 막는다.
뿐만 아니라, 사회보장에 있어서 ‘집중과 선택’은 매우 낯선 기준이다. 사회보장을 통해 보장하고자 하는 대상들 자체가 필연성에 기반한 것들인데, 어떤 것은 보장하고 어떤 것은 제외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것이 없듯이 서로 다른 필연적인 것들 중 어느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선택되지 않은 필연적인 것은 분명히 고통과 불행을 야기할 것임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사회보장의 필연성과 인간본성에 기반한 복지국가이론의 구축이 시급하다
결국, 우리사회의 사회보장의 발전 및 확대는 ‘한국형’과 ‘집중과 선택’이라는 수단으로 인해 가로막혀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앞서 지적한 필연성에 대한 이중의 왜곡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 즉 필연적이지 않은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필연적인 것으로, 필연적인 호모 솔리다리쿠스는 필연적이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이에 근거해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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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nd Strategy Annex
사실 사회보장의 필연성에 대한 국민적 몰이해는 관련분야의 학자와 전문가들 그리고 고위 공무원과 언론 및 공론장에서 주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잘못이 크다. 그들은 사회보장의 필연성에서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을 제공하지도 못했고 제공하고자 하는 시도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들이 말한 사회보장의 확대는 시류에 의거해 반짝 인기영합을 위한 것이었고 이러저러한 제도들이 복지선진국에 있으니 우리도 후발주자로서 그것을 따라가야 한다는 이유 모를 당위성에 입각한 것이었다.
필자가 보기에, 우리나라에 복지국가가 아직도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필연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제도, 정책, 실천 등의 관찰가능한 보여지는 것들만이 아니라, 이것들을 유발시키는 보다 심층적인 요소들에도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 요소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어떻게 보여지는 것들을 규정하고 있는지를 국민에게 보여줘야 한다. 요컨대, 사회보장이 갖고 있는 필연성, 이 필연성의 근거가 되는 인간의 본성, 필연성과 인간본성이 현실의 구체적인 사회보장의 제도와 실천들과 맺는 연관 등을 제대로 설명해 줄 수 있는 이론적∙논리적 토대를 제시하는 것이 매우 시급해 보인다.
이권능
[1] . Margaret Archer et al., Critical Realism. Essential Readings,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1998, p.113-4.
[2] . Screpanti, E. & Zamagni, S., An Outline of the History of Economic Thought. 2nd Edition e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p.463.
[3] . OECD, Social Expenditure Database. https://stats.oecd.org/Index.aspx?datasetcode=SOCX_AGG 2021/10/15 검색
[4] . OECD, Social Expenditure Database. https://stats.oecd.org/Index.aspx?datasetcode=SOCX_AGG 2021/10/15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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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구성원들 간 삶의 질의 격차가 심화되고 있고 사회경제적 변화들이 한국사회의 전면적인 탈바꿈을 요구하는 지금, 정치공동체의 조직, 구성, 운영에 대한 대안이 모색되어야 함. 상대적 자율성과 적응의 원리를 내재하여 내외적 환경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온 복지국가는 여전히 매력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음. 이에 아직까지 우리나라에는 안착되지 않은 복지국가를 최신의 버전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방안들을, 심층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을 동시에 고려해, 제안하고자 함. 특히 다양한 분야의 현장에서 활동중인 분들의 살아 있는 방안들을 제안하려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