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5. 국가와 가족 사이에서 방황하는 중국의 젊은 창작자들이 선택할 새로운 ‘시대정신’은?
작년 7월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일을 전후해서 장안의 화제가 됐던 《각성년대覺醒年代》라는 드라마가 있다. 창당의 주역이었던 중국의 사상가이자 혁명가 천두슈(陳獨秀)를 주인공으로 하지만 신해혁명과 5.4운동 이후 일본과 중국을 배경으로 근대중국의 길을 열기 위해 뜨겁게 토론하는 보수와 진보, 좌우를 망라하는 기라성같은 지식인들이 등장한다. 이 드라마의 성공이 이례적이었던 것은 정부와 당의 프로파간다와 그 담론을 뜻하는 소위 ‘주선율主旋律’ 작품이 대중에게 폭넓게 받아들여졌을 뿐아니라 어쩌면 이 주제에 대해서 상당한 거부감을 갖을만한 비주류 청년 지식인과 예술가들조차 호응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 대한 비판은 기껏해야 여성 혁명가들의 역할이 충분히 주목받지 못했다는 페미니스트들의 불평이 해외 중국정보전문매체에 실린 정도이다. 역시 뒤를 이어 공개된 주선율 드라마 《산해정山海情》은 서북지역을 개척하고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선배들의 노력을 감동적으로 묘사해서 역시 호평을 받았다. 삼십년간 진행한 농촌빈곤구제정책 성공을 선언한 중국정부가 뒤를 이어 ‘도농빈부격차해소’를 목표로 펼치는 향촌진흥정책을 홍보하기 위한 기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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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 정서와 공산주의 이념을 바탕에 깔고 혁명, 항일, 항미원조, 구빈정책 등을 소재로삼는 주선율 문화는 천편일률적인 서사나 낙후한 문화산업때문에 개혁개방이후 대중들에게 외면당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기술적 완성도가 높아지고 입체적인 인물묘사, 나름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고려가 더해져, 작품성이 높아졌다. 주제의 정치적 선택을 논외로 하고 매우 보편적 세계관에서 하나의 완결된 작품만을 보자면 비판의 여지가 줄어든 것이다. 또, 젊은층을 중심으로 애국주의를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상황이 급변했다. 2019년 건국70년을 기념해 만들어진 옴니버스 영화 《나와 나의 조국我和我的祖國》의 주제곡은 지금도 중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무의식적으로 흥얼거리는 콧노래이다. 이후로 매년 국경절마다 《나와 나의 고향我和我的家鄉》, 《나와 나의 아버지我和我的父輩》시리즈가 중국 최고의 제작진과 스타를 동원해 만들어져서 연이어 인기를 끌었고, 몇 년째 대작 전쟁영화나 항일투쟁 영화가 박스오피스의 상위권을 차지한다. 이렇게 국가가 고무하고 대중이 화답하는 가운데 자본의 ‘안전빵’ 선택이 철의 삼각동맹을 이루다보니 주선율외의 이야기는 변변히 주목을 받지 못하고, 중국 대중문화의 다원성은 시들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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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머우 감독은 일찌감치 중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작가주의 거장에서 잘팔리는 대작상업영화 장인으로 변신했다. 하지만, 최근에도 종종 90년대 그의 출세작들처럼 중국 근현대사의 격변을 소재로한 작품도 만들고 있다. 2014년작 《5일의 마중》에 이어 작년에 개봉한 《1초一秒鐘》는 모두 한국어판도 출간된 옌거링嚴歌苓의 소설 《나의 할아버지가 탈옥한 이야기 陸犯焉識》를 원작으로 한다. ‘1초’는 2019년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받았지만 ‘기술적인 이유’로 돌연 공개가 취소됐고, 개작을 거친후 작년에 중국에서 공개됐다. 이 소설은 상하이의 지식인 가문에서 출생했고 문화혁명시기에 자살한 작가의 조부 이야기가 원형이다. 미국유학파 박사이자 무당파 자유주의자였던 주인공이 반혁명 우파지식인으로 몰려 노동교화소의 장기수로 살아남는 20여년의 과정과 그 전후 사정이 교차되는 가운데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군상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영화는 극적인 서사를 과장해서 각색했지만, 영화나 원작 모두 가족에 대한 사랑과 다시 그 기대를 저버리기도 하는 인간의 다채로운 면모에 대한 고찰이라는 주제의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옌거링은 그자신도 유년기 가족의 하방, 문화대혁명기간 청소년시절부터의 10여년 군복무, 중월中越전쟁 종군기자 참전, 89년 도미후 인종차별속 미국생활을 더한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40여편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그는 작년에 북한 김일성의 항일빨치산 신화도 탄생시킨 동북항일연군을 소재로 장편소설 《666호》를 발표했다. 만주지역의 혹한과 식량난속에서 일본군의 최정예 관동군, 그리고 변절한 아군출신 중국인들과 맞서 유격전을 벌이며 오랜 기간 초인적인 투쟁을 펼친 이들의 모습은 한반도출신 독립군의 고난도 연상하게 한다. 동북항일연군의 전설적인 지도자로 오인돼 체포된 한 삼류 유랑극단 배우가, 수인번호 666호와 함께 원치 않게 얻은 지도자의 아우라를 옥중에서 발휘하는 과정에 스스로 감화를 받는다. 나중에 대규모 탈옥을 진두지휘하기도 하고 탈출에 실패해 ‘진짜 양아치’대신 ‘가짜영웅’으로 죽음을 선택한다는 이야기이다. 예의 숭고한 이념과 가치가 비루한 인간을 변화시켜 대의를 위해 희생한다는 주선율처럼 들리지만, 결론에는 반전이 존재한다. 그의 죽음을 발판삼아 항일혁명의 영웅으로 28년간이나 더 살아남은 장군은 다시 문혁시기에 주자파로 몰려 불명예스럽게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가짜와 진짜영웅 모두 마지막까지 그리워한 것은 연인과 가족이기 때문이다.
최근 토론토 국제영화제에서 폐막작으로 다시 초대받아 갈채를 받은 ‘1초’를 보고 한 서구의 평론가는 정부의 애국주의 주선율 프레임속에 갇힌 중국 시민들이 선택한 시대정신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라고 평한다. 교조적 이념과 역사의 고난도 피붙이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성정들은 바꾸지 못한다는 것이다. 헐리우드가 마케팅을 통해 “소비자를 길들이며 세공해 내는 인위적 문화산업수요”와도 다른 것이고, 장이머우나 옌거링과 같이 문화대혁명을 겪은 중국의 장년 세대들이 국가의 선율에 댓구를 보태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한국의 X세대처럼 자신만의 개성을 강조하며 독립을 추구하고 부모세대와 유독 불화가 많던 80허우와 달리 중국의 상당수 90허우 혹은 Z세대 젊은이들도 가족의 품속으로 회귀하고 있다. 중국출신의 재미인류학자 옌윈샹閻雲翔은 중국사회의 ‘신가족주의’에 주목하는데, 중국의 자본주의가 고도화하는 가운데, 취업, 결혼, 주택 등 경제적 압력으로 고민하는 젊은이들이 전통적인 가족 안전망에 더욱 의존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지적한다. 한국의 중상층계급 청년들이 부모와 조부모의 경제력에 기대며 보수적인 정치적 성향을 보이는 것과도 유사하다. 올 설대목에 코비드 제한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역대 박스오피스 1위인 《전랑戰狼2》의 턱밑까지 근접했던 《안녕 리환잉 妳好 李煥英》이 부모님 세대, 특히 어머니와 화해하고 싶어하는 밀레니얼 세대 여성들을 중심으로 크게 환영받은 사실도 이를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국가와 가족사이에서 방황할 수 밖에 없는 중국의 젊은 창작자들은 변치않는 인간의 본성을 곱씹으며 어떻게 새로운 시대정신과 사회영역의 모습을 창조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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