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김혜정의 마음놓고 마음챙김

2023년 10월 24일

5. 지구는 하나!






올해 8월에 영국 헤리퍼드셔에 위치한 명상센터에 다녀왔다. 가기 전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내가 영국에 한 달간 명상과 봉사를 하러 갈 계획이라 하니 다들 의아해했다. 명상하러 영국엘 간다고? 인도가 아니고?

나는 인도에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적어도 당분간은 가고 싶은 마음도 없다. 인도의 모디 총리가 2025년까지 약 2조 달러의 비용을 들여 전기, 교통, 통신 등의 인프라 구축에 사활을 걸겠다고 약속했다. 이미 인도의 인프라는 과거보다 많이 개선되었다고 한다. 10년 전 인도의 국도 길이가 약 8만km였다면, 현재는 약 15만km로 매달 수백 km의 도로가 추가로 개설되고 있다. 모르겠다. 한 10년쯤 후에 인도의 교통이 편리해지고 치안 문제가 나아지면 인도에 가고 싶어질지도. 물론 그때가 되면 지금 인도 여행을 즐기는 많은 이들이 인도 여행의 최대 장점 중 하나로 꼽는 물가는 저 높이 치솟아있겠지만. 이미 인도는 2021년 기준 GDP 세계 5위에 등극한 초강대국이다. 많은 전문가가 2030년에는 일본과 독일을 제치고 GDP 순위 세계 3위에 올라 미중과 함께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할 글로벌 강국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점친다.

반면 이전 세기까지 인도를 식민지배했던 올해 내가 다녀온 영국은 브렉시트 이후 경제가 휘청이고 있다. 작년에 IMF가 전망한 국가별 성장률 지표에서 영국은 무려 –0.6%로 선진국 중 유일하게 마이너스 성장을 예상했다. 이는 전쟁으로 인해 주변 선진국들에 온갖 경제적 제재를 당하고 있는 러시아의 성장률보다도 낮은 수치였다. 현재 영국의 살인적인 물가는 영국에 다녀온 내가 피부로 느꼈다. 런던에서 식사 한 번, 뮤지컬 관람 한 번, 택시 한 번 탔을 뿐인데 하루 만에 파운드가 술술 새어나갔다.

하고 많은 곳 중에 영국의 명상센터에 가기로 한 이유는 인프라가 좋다고 들어서였다. 듣자 하니 평소 거의 스님과 같은 생활을 한다고 알려진 세계적인 작가 유발 하라리도 내가 다녀온 영국 헤리퍼드셔에 위치한 명상센터에서 위빠사나 명상에 입문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더 혹했다. 이제는 경제 강국이 된 인도가 아닌, 해가 지는 나라 영국으로 명상을 하러 가면서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생각을 했다.

헤리퍼드셔에 도착해서 보니, 한 달간 함께 일할 봉사자 중에 영국인은 한 명도 없었다. 두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이었고, 캄보디아계 프랑스인이 한 명, 페루인 한 명, 그리고 스페인 사람이 두 명 있었다. 이들 중엔 한국인인 내가 가장 먼 곳에서 온 듯했다. 그 중 Adva(에드바)라는 이스라엘 여자가 한 달간 주방 매니저를 하기로 했다. 주방일을 해본 적 있는 사람은 예상할 수 있겠지만, 주방 매니저는 쉽지 않은 자리다. 주방은 칼과 불을 다루는 곳이다. 게다가 정해진 시간 내에 육십 인분의 식사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도 다양한 국가에서 온 다양한 인종의 봉사자들을 데리고서. 아무도 그 일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에드바가 자신이 하겠다고 했다.

에드바는 심한 거북목의 30대 후반 레즈비언이었다. 늘 갈색의 긴 생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다녔으며, 시력이 나쁜 것 같았다. 그녀가 쓰고 다니던 안경의 안경알이 두꺼웠다. 그녀는 무려 한 달간 타국에서 지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여행용 캐리어도 없이 에코백에 짐을 담아서 왔다. 그래서인지 늘 같은 옷을 입고 다녔는데 알고 보니 그 옷도 본인 옷이 아니었다. 명상센터 사무실에서 제공해주는 후드티였다.

그녀가 처음 무언가에 대해 열중하며 말하는 걸 보았던 순간이 잊히질 않는다. 그녀가 말한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녀의 말이 인상 깊었던 게 아니었다. 그녀가 열정적으로 말을 하기 시작한 순간, 분명 나는 그녀를 영국에서 처음 보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를 아주 오랜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는 기묘한 느낌이 엄습했다. 착각이겠지만, 오래전부터 그녀를 그리워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신기했다.

나중에 내가 그녀에게서 받은 인상의 실체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그녀는 겉모습에 집착하거나, 남들의 눈치를 보는 성격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형상에 집착하느라 무겁게 산다. 형상의 무게가 무거워질수록 우리가 하나라는 사실은 개별 형상 뒤에 가려진다. 그녀는 가벼워진 형상 너머로 우리가 사실 하나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해 주었다. 나는 그녀와 내가 깊은 곳에서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내가 느낀 그리움은 이 일체감에 대한 그리움이었고, 내가 본 사랑스러운 모습은 개별 그녀를 넘어선 모습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녀와 같이 일을 해보니 그녀는 나와 잘 맞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는 내게 자꾸만 이래라저래라 명령했다. 물론 그녀가 키친 매니저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같은 말도 조금 더 친절하게 할 수 있을 텐데 왜 저렇게 꼰대 같이 말할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명령하는 어투가 반복되자 슬슬 짜증이 났다. 처음엔 그냥 넘어갔는데, 나중엔 그녀의 말에 토를 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가 당황했다.

나와 에드바의 신경전이 주방에 긴장감을 유발했다. 내가 주변에 폐를 끼치고 있다는 느낌이 불편했다. 그래서 다른 이스라엘에서 온 봉사자에게 하소연했다. 그러자 그 봉사자가 내가 모르는 히브리 문화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녀는 비록 이스라엘 출신이긴 하지만 런던에서 무려 10년 가까이 살고 있기에 양국의 문화 차이를 잘 안다고 했다. 영어에는 한 가지 의미를 표현하는 수십 가지의 서로 다른 뉘앙스를 지닌 표현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히브리어는 그렇지 않다. 그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영국 사람들보다 훨씬 직설적인 이유가 언어적 차이에 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풀렸다. 그녀는 영어와 히브리어를 비교했는데, 내가 아는 한 한국어도 영어만큼이나, 어쩌면 영어보다 더 상황에 따른 다양한 표현이 발달한 언어였다. 충분히 오해가 생길만했다.

에드바에게 가서 말했다. 나는 네가 내게 말을 걸 때마다 아무런 악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너의 직설적인 표현방식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한국을 흔히 고맥락 문화라 한다, 한국인들은 한 가지 의미를 전달할 때도 다양한 맥락에 의존해서 넌지시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다른 이스라엘에서 온 봉사자가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 어쩌면 우리 사이의 불화가 문화 차이에서 비롯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나는 너와 잘 지내고 싶다, 그동안 널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 얼추 이런 이야기였다. 에드바가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너는 이곳에서 나를 힘들게 한 적이 없어. 난 늘 네가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해왔어.”

우린 헤어질 때 서로의 이메일 주소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녀의 이메일 주소가 적힌 종이쪽지를 공항에서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으나, 별수 없었다. 한국에 돌아온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이스라엘에서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에드바 생각이 났다. 에드바를 알기 전 중동분쟁은 내게 뉴스에 종종 나오는 소식 중 하나에 불과했다. 중동지역의 일시적 평화는 이스라엘이 보유한 핵 억지력에서 비롯한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언제든지 다시 전쟁이 터질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젠 아니다. 전쟁은 절대로 터져서는 안 된다.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종교적 사명도 전쟁을 정당화하는 구실이 될 수 없다. 온갖 허상과 맹목적인 믿음으로 점철된 정신이 내뿜는 혐오감이 사랑스러운 내 친구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끔찍하다.







김혜정차와 명상을 좋아하는 김혜정입니다. 수행자가 되어가는 중입니다. 제가 행복해지고자 걸어온 수행 여정을 여러분과 글로 나누고 싶습니다. 10년차 요가강사이며, 미얀마 쉐우민에서 처음 위빠사나 명상에 입문했습니다. 그 후로는 주로 고엔카의 수행법을 따라 위빠사나 명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