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2022년 2월 14일
5. ‘생/명’, 전환적 사상기획의 열쇠

출처 : pinterest(Chad Knight)
‘생/명’ 이야기를 시작하려니, 두 개의 그림이 떠오른다. 한겨레21과 김지하. 우선, 지난 연말 ‘한겨레21’에서 보았던 기사 제목, “젠더? 세대? 잘 갈라쳐 봅시다”가 그것이다. 대선을 앞둔 한국사회는 “과잉 이상화되어” ‘갈라치기’를 악으로 취급한다는 것, 이것이 ‘진짜’ 문제라는 말이다. 본래 “선거란 갈등이 조직돼 합법적으로 표출되도록 하는 경합의 공간”이라는 주장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열렬히 박수를 치며 지인들에게 기사를 전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https://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1456.html)
그렇다. 문제는 경합이 아니라, ‘경합의 코드’다. 니클라스 루만의 용어를 빌어 말하면, 지금 한국사회에 절실한 것은 ‘통합’이 아니라, 새로운 ‘구별’이다. 지금껏 수많은 구별을 해왔다는 점에서 ‘또 다른’ 구별이다. 나아가 자신의 구별함을 알아차릴 때가 됐다는 점에서 ‘자각적 구별’이다. 민주/반민주, 진보/보수, 좌파/우파와 다른 새로운 구별이 절실하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대체할 새로운 의미론이 필요하다.
그러나 새로운 구별은 쉽지 않다. 아직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구별과 범주는 ‘상상’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런저런 생각들이 그렇듯이 사회적 구별과 범주는 신체적/물질적 충격과 자극의 산물이다. 물론 충격과 자극은 언어와 개념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재-생’되어야 한다. 오늘 대선정국의 혼란은 아직 새로운 구별과 개념과 범주가 출현할 때가 되지 않은 탓이다. 그리고, 유권자는 직관적으로 그것을 알고 있다. 물론 후보자들도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나는 찢어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장면이다. 이번엔 김지하다.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 1990년 여름, 김지하 시인은 ‘개벽과 생명운동’이란 강연의 첫머리에서 ‘나는 찢어진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한다. 생명사상의 주창자가 생명운동의 비전을 설파하는 자리에서 찢어진 자신을 토로한다. 그렇다. 우리는 찢어진 존재다. 개인적으로 그렇고 사회적으로 그렇다. 음/양(陰/陽)이든 정/반(正/反)이든 분리를 통해 살아간다. 분열적 삶이 일상이요, 전일적 삶은 순간이다. 살아가는 내내, 아니 지금 순간에도 나의 몸과 마음, 욕구와 생각은 파편처럼 분리되어 있다.
희망은 더욱 치열한 ’갈라치기‘에 있는 것는 지도 모른다. 찢어짐은 매우 고통스럽다. 그러나 갈라치기의 ’사고실험‘은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도둑처럼 다가오는 일상의 충격들을 완충하는 삶의 기술로 작동한다. 그리고 언젠가 거대한 신체적/물질적 충격과 자극의 날, 새로운 사상과 세계관으로 출현할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묻는다. ”생명은 어떻게 생명일까?“
생명의 세계관, 0점에서 다시 묻기
팬데믹과 기후변화는 우리가 의심 없이 전제했던 기존의 질서를 다시 묻게 만들었다. 우리의 삶과 사회, 그리고 문명을 ‘0점’에서 돌아보게 했다. 우리는 살아가며 기존의 삶을 부정하는 전환적 성찰을 적지 않게 경험한다. 종교생활 속에서만이 아니다. 큰 사고를 당했을 때, 배신을 당했을 때, 예기치 못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혹은 죽음을 앞둔 경우엔 특히 그러하다. (수동적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체험은 항상 ‘체험된다’.) 그동안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 돈과 명예와 지식, 심지어 사랑하는 가족들마저도 부질없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 0점에서 ‘다시’ 물어야 할 때이다. 생명운동은 40여년 전, 1980년대 초 태동기서부터 산업문명과 인간중심주의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작은 충격에도 예민한 선각자들 덕분이다.)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대안을 탐색했다. 그런 점에서 생명운동은 가장 급진적인 사회운동이었다. 그리고 40년 후 오늘 우리는 재난적인 팬데믹과 기후변화를 겪으며 불연속적 단절을 함축하는 ‘전환적(transformative)’ 생명운동을 재-소환한다. 아니, 다시개벽의 ‘개벽적(改闢的)’ 사유를 소환한다. 지금까지 사회적으로 의심 없이 전제되었던 것들, 혹은 거꾸로 무조건 금기시되었던 되었던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물음표를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 출발점은 ‘생명’이다. 그리고 그 사변적 도구는 ‘생/명’이다.
판타지 소설이나 게임 스토리 작가, 그리고 영화감독의 첫 번째 작업은 ‘세계관 설정하기’라고 한다. 이를 통해 창조하고자 하는 세계의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30여 년 전 한살림선언의 저자들이 “전일적 생명의 세계관을 확립하고, 새로운 생활양식을 창조”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때 세계관은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관점이다. 그리고 그 관점의 배경에는 세계에 대한 어떤 느낌, 즉 ‘세계감(世界感)’이 있다.
세계관(世界觀)이란 말 그대로 ‘세계를 보는 관점’이다. 예컨대 한살림선언의 ‘전일적 생명의 세계관’은 세계를 하나의 큰 생명으로 보는 견해다. 세계를 ‘살아있는 전체’로 보는 관점이다. 세상의 원리가 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고, 이념도 아니고, 생명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세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은 손’이 바로 생명이라는 말이다. 정치를 움직이는 것도, 경제를 좌우하는 것도 생명이라는 관점이다. 20세기 들어 지질학적 충격의 주인공이 된 인류도 근본에서 있어서는 하나의 생명이라는 시각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세계관은 하나의 관점이다. 시각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관점도 가능할 것이다. 세계관은 객관적 진리나 법칙이 아니므로, ‘또 다른 생명의 세계관’은 생명에 대한 객관적 정의로부터 시작될 수 없다. 참조는 할 수 있지만,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생명의 관점’이라고 말할 때에도 사실은 집단이나 개인에 따라서 그 내용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생명, 혹은 ‘살아있음’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매우 다양하다. 자신(自身), 즉 자기 몸의 감각에 따라 동식물과 같은 ‘생명체’이기도 하고, 동시에 보이지 않는 ‘생명력’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에게 생명은 개체로서 이름을 가진 ‘명사(名詞)’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움직임으로 감각되는 ‘동사(動詞)’이기도 하다. 또 어떤 이들에게 생명은 주체나 대상으로 고정할 수 없는 순간적인 체험으로서 ‘부사(副詞)’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생명’은 실재가 아니다
‘생명’이라는 현상은 실제적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하나의 개념이기도 하다. 더욱이 유서깊은 전통적 개념이 아니라, 일본사람들이 만든 서양말의 번역이다. 일본어번역사전(日本語飜譯事典)에 따르면, ‘생명’이라는 말은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지식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영어 life, 불어 vie의 번역어이다. 불과 150년 전, 그것도 일본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김지하 시인은 대담집 『생명과 자치』에서 ‘기(氣)’ 대신 ‘생명’이라는 말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무려 ‘11가지’나 제시한다.(개인적으로 일본사람들의 번역에 크게 감사하는 마음이다. 생명이라는 번역어는 특히 그러하다.)
생명에 대한 관념도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최근 코로나19 이후, 급격하게 변화하는 생명 관념을 관찰할 수 있다. 예컨대 숙주가 있을 때만 생명체가 되는 바이러스의 ‘반(半)’ 생명적 형식(form)과 그 활동은 생명에 대한 새로운 생각의 계기가 되었다. 바이러스와 같은 생명형식에는 소재지가 따로 없다. 말 그대로 무소부재(無所不在)다. 무수한 변이로 정체를 특정하기도 어렵다. 인간-생명도 반(半)-생명적이라는 점에서는 바이러스와 다르지 않다. 공기와 물과 같은 자연환경이 없으면 잠시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생명은 생명이면서 동시에 생명이 아니다.
이렇듯 생명은 실제적이고 체험적이지만, 동시에 하나의 관념이고 개념이다. 경험과 학습에 따라서 이렇게도 말할 수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다. 생명사상 역시 하나가 아니다. 수많은 ‘생명사상들’이 있다. 그러므로 당연히 또 다른 생명사상을 발명하고 재-발명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님의 감각 부정의 사유
그런데, 갈라치기를 하기 전에 선행되어야 할 작업이 있다. 기존의 구별과 범주, 개념,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다. 40여년 전 생명사상의 태동 역시 시작은 ‘부정(否定)’의 감각‘이었다. ‘이것이 아닌 것 같은데…’와 같은 ‘아님의 감각’이었다. 한국 생명사상의 핵심적 참고문헌인 동학사상 역시 그러했다. 조선 말 절체절명의 위기 시대에 동학을 창도해 자기구원과 세계구원의 뜻을 펼친 수운(水雲) 최제우는 10여 년의 떠돌이 생활과 수행 끝에 그 당시 조선의 사회적 질서가 ‘아님’을 깨닫고 귀향을 하게 되는데, 그 ‘아니다’라는 자각을 각비(覺非)라고 하였다.(각비는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수운이 가져온 말이다.) 기존의 사회 질서, 삶의 양식, 경험세계, 학습된 지식에 대한 저항과 부정의 감각, 그리고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한 또 다른 느낌이 있었던 것이다.
(최근 나에게 가장 유용한 이론적 도구인) 체계이론과 정동이론 역시 ‘부정’의 사상이다. 예컨대 정동이론의 선구적 사상가들『인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각각의 학문이 그 자신을 위해 그와 관련된 ‘부정(非/Non)’과 근본적인 관계를 맺을 때만이 가능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또한, 체계이론가 니클라스 루만은 『사회적 체계들』이라는 책에서 “비-현재적인 잠재성들의 세계구성은 인간의 ‘부정’ 능력에 근거한다”고 논한 바 있다.
시인 김지하 역시 ‘부정의 생명사상’을 이야기한다. 김지하(『생명과 평화의 길』)에 따르면, 존재 바깥으로 추방했던 “무(無)와 비(非)-존재 카오스와 타협하지 않고서는” 창조와 진화가 만날 길이 없다. 이런 맥락에서 김지하는 생명을 ‘활동하는 무(無)’라고 말한다. 역설적 사유다. ‘부정의 생명사상’은 다시 말하면 ‘역설의 생명사상’이기도 하다.
한살림선언은 ‘전일적’ 생명의 세계관을 표방했다. ‘생명의 지평’을 바라보되 전체로서의 생명세계와 ‘개체 안의 전체’를 강조했다. 그러나 코로나-기후위기 시대의 오늘, 각비의 감각은 ‘전일성’에 물음표를 던진다. 생명세계의 질서와 조화, 통일성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한다. 찢어짐과 고통의 생명체험을 소환한다. 그리고 분열과 차이의 역동적 사유를 불러낸다.
‘생/명’으로 ‘생명’을 다시 생각하기
‘생/명’이라는 기호는 ‘부정의 생명감각’을 ‘부정의 생명사상’으로 변환하기 위한 생각도구이다. 부정의 사유를 생명의 세계관 안에 장착시키려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생/명’으로 다시 생각한다’는 말은 일차적으로 기존의 생명 관념에 대한 부정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유기체적 생명 관념’을 부정함과 동시에 ‘초월적 생명 관념’을 부정한다. ‘자연주의적 생명 관념’을 부정함과 동시에 ‘사회구성주의적 생명 관념’을 부정한다. (음양론적 세계관을 포함한) ‘창조질서로서의 생명세계’를 부정함과 동시에 “생명공학적 생명세계‘를 부정한다.
그리고 ‘생/명’으로 생명에 관해 다시 생각한다. ‘생명은 어떻게 생명일까’를 탐문한다. 기존의 생명 관념을 ‘생’과 ‘명’으로 해체하고 다시, ‘생/명’으로 재구성해본다. 이를테면 생명은 ‘생(生)’이면서 동시에 ‘명(命)’이다. 이때 새싹의 상형인 생(生)이라는 글자에 착안하여 형태가 있는 생명체를 지시한다. 명(命)이라는 글자의 어원을 참여하여 (‘주어진 의무’라는 뜻도 있으나) 의지와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객관 상황’을 의미한다. 조금 다른 맥락에서 ‘생(生)’은 유기체적 질서를, ‘명(命)’은 비-유기체적 ‘비-질서’를 가리킬 수도 있다. 그리고 생과 명 사이, ‘/’는 체계이론을 따라서 생명체와 환경 사이의 역설적 경계를 표상한다. 동시에 ‘/’ 하나의 사건으로 경험되는 온전한 한 세계의 순간을 상징하는 기호로 사용된다.
생/명이라는 생각도구는 무엇보다 체계이론의 ‘체계/환경’ 및 ‘형식/매체’ 구별을 수용한 것이지만, 사실 인류 역사 이래로 적지 않은 비슷한 도식이 관찰된다. 대승불교의 ‘색(色)/공(空)’의 사유가 일단 그렇다. 또한 노자의 ‘유명(有名)/무명(無名)’, 기철학의 ‘객형(客形)/태허(太虛)’과 ‘유형(有形)/무형(無形)’, 그리고 신유학의 ‘태극(太極)/무극(無極)’도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동학의 ‘태극(太極)/궁궁(弓弓)’과 ‘기연(其然)/불연(不然)’도 이와 다르지 않다.(기연/불연은 ‘불연기연’을 재-구성한 것이다.)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의 ‘드러난 질서/숨겨진 질서’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혼돈적 질서’를 의미하는 카오스모스(chaosmos) 개념이나 들뢰즈-가타리의 카오스모제(chaosmose) 개념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생명사상을 제창한 김지하 시인은 또한 ‘활동하는 무’, ‘살아있는 없음’, ‘흰 그늘’ 등을 통해 생명의 역설을 개념적으로, 혹은 미학적으로 표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생/명’은 생명에 관한 또 다른 생각을 위한 생각 도구이다. 물론, 다른 도구가 있을 수도 있다. 다른 범주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생/명’이다. ‘생’과 ‘명’, 그리고 ‘/’로 분해하고 재-구성해 또 다른 생명의 세계관을 탐문한다. 나에게 ‘생/명’은, 팬데믹-기후위기의 대전환시대 새로운 사상기획의 열쇠다.

주요섭(사발지몽). 생명과 전환을 화두로 오랫동안 정읍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해왔으며, 최근에는 (사)밝은마을_생명사상연구소를 중심으로 감응(感應)과 우형(又形)을 키워드로 하는 ‘또 다른’ 생명사상·생명운동의 태동을 탐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