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김혜정의 마음놓고 마음챙김
2023년 11월 8일
6. 명상이 현실 도피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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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센터에 밥 먹듯이 드나드는 나를 보며 명상을 통해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하는 지인들이 종종 있었다. 물론 이런 말을 해주는 이들은 내게 관심과 애정이 있는 자들이다. 혹여나 이 글이 그간 명상에 빠져 사는 나를 걱정해준 이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노파심에 글을 쓰기에 앞서 사족을 붙인다. 오히려 명상을 시작하고서 숱하게 받았던 이런 질문들은 내게 현실과 명상의 관계를 숙고해보는 기회를 주었으니 이들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마음과 현실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외부 현실이 마음에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자신이 처한 마음 상태에 따라 현실이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허무한 심경에 처한 사람에겐 세상만사가 헛되게 보이고, 의심에 차 있는 사람에겐 모든 게 미심쩍어 보이며, 행복한 사람에겐 세상이 아름답고 감사한 일들로 가득 차 보인다. 현실을 다채롭게 물들이는 이러한 정서들의 실체는 무엇일까?
방금 예로 든 허무나 의심 또는 행복과 같은 정서들은 실제 우리가 느끼는 마음 그 자체가 아니라 언명된 것들이다.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선 언어를 넘어서서 실제를 직접 경험해야 한다. 허무한 감정이 일어날 때 몸을 주의 깊게 관찰해보면, 가슴과 목이 뻣뻣하게 굳어 있고 손과 발 같은 몸의 말단이 차다. 의심에 차 있을 때 몸을 관찰하면, 가슴이 불안하게 울렁거리고 역시나 목과 어깨가 긴장되어 있다. 행복한 감정이 일 때 몸을 관찰해보면, 몸이 가볍게 느껴지고 가슴이 시원하다. 만약 감각을 자세히 관찰하지 않고 특정 정서를 지칭하는 단어들로 몸의 상황을 대충 눙쳐서 인식하고 넘어간다면, 무의식을 이해하는 첩경인 몸의 감각은 점차 둔해지고 마음의 지극히 일부만을 차지하는 의식적 차원에서만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다양한 마음 상태에서 몸이 어떤 감각을 느끼는지에 대한 관측 데이터가 차곡차곡 쌓이면, 특정 임계점을 지났을 때 인식의 상태 변화가 일어난다. 우리가 외부 현실이라 믿는 세상이 기실 우리가 느끼는 내부 감각에 기반해 마음이 만들어낸 관념이라는 사실을 이론적이 아닌, 경험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감각 이외에 외부 현실을 알 수 있는 방도는 없다. 우리가 믿는 현실은 모두 몸이 느끼는 감각을 통해 추측해낸 내용물일 뿐이다.
우리는 단 한 순간도 같은 감각을 경험하지 않는다. 매 순간 새로운 감각이 생겼다가 사라지고, 생겼다가 사라진다. 이는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경험이기에 언어라는 분절된 형식으로 추상화하는 게 불가능하다. 하지만 다른 이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강력한 욕망이 각자가 느끼는 생생하고 구체적인 현실들을 객관적이고 일반화된 현실로 대체한다. 그러나 객관적인 외부 현실은 소통을 위해서 상정될 뿐인 허구이다. 명상을 하면 언표 불가능한 개별적 현실들이 권위적이고 객관적인 현실의 피부를 뚫고 올라온다. 각자의 주관적 현실들은 언표 불가능하니, 어떤 유명한 분석철학자의 조언을 되새기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이제 침묵하고, 말할 수 있는 객관적 현실에 대한 생각만을 이야기해 보겠다.
한국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현실’이라는 단어 앞에는 ‘경제적’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괄호가 숨겨져 있다. 한국 사회에는 경제적 현실을 권위로 내세워 나와 다른 이들의 현실을 억압하는 폭력이 만연하다. 오해는 말자. 자본주의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리얼리티가 오직 하나의 현실로 군림하며 복수의 현실들을 억압하는 게 나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현실은 얼마나 초현실주의적인가. 강남의 땅 한 평이 1억을 호가하는 현실이 상식적이라 보는가? 내 눈에는 한국 사회의 유일한 현실로 군림하고 있는 이 현실이 달리의 초현실주의적 화폭처럼 기이하고 왜곡된 세계로 보인다.
세상엔 정말로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모든 사람이 하나의 우주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그물망에 포획되면서 사람들은 획일화되고 우열이 나뉜다. 안타깝게도 자본주의의 그물망은 너무나 촘촘해서 그물의 어디에 걸려들어도 나보다 위도 있고 아래도 있다. 우열을 가리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는 말이다. 명상이 현실 도피라는 일부의 오해와는 달리 명상을 하면 현실에 대한 감각이 날로 기민해진다. 명상을 통해 현실 감각이 예리해지면, 사람들이 단 하나의 현실이라고 주장하는 세계가 그저 유용하기에 생겨난 허구라는 것을 통찰할 수 있게 되고, 더는 여기에 휘둘리지 않는 내면의 힘이 자라난다. 내면에 중심이 잡힌 이들의 현실에서 경제적 현실은 극히 일부일 뿐이다.
남들이 주입하려는 현실이라는 중력에 짓눌리지 않아야 가볍게 새로운 현실을 창조할 수 있다. 객관적 현실이라는 중력의 영향을 덜 받는 높은 곳에서 외롭고 쓸쓸히 살며 아름다운 현실을 창조한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 일부를 인용한다. 바삐 사는 경제인의 현실도 우리에게 삶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지만, 한적하게 사는 시인의 현실도 우리의 현실을 풍요롭게 해준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 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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