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뉴아메리카 견문
2025년 3월 16일
6. 천상천하 유아독존 : 마이너리티 리포트

(사진 출처: trekkingasia)
1. 아웃도어 : 물아일체(物我一體)
야인(野人)이다. 오피스에서 그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데스크에 앉아서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이려고 한다. 길에서 들에서 산에서 움직이며 일을 한다. 실리콘벨리의 분주함에서 벗어나 기필코 고요함을 고수한다. 셀럽으로서의 부산한 삶은 질색이다. 여느 테크기업의 CEO들과는 달리 유명세에도 초연하다. 미디어 인터뷰는 어디까지나 팔런티어에 관련된 것으로만 한정한다. SNS를 사절하고, 스포트라이트도 사양하며, 프라이버시를 사수한다. 그래서 빌딩숲 천장 아래보다는 하늘 아래 포레스트를 즐긴다. 대자연, 와일드 오피스에서 걷고 뛰면서 사유하고 판단하는 액티브 명상을 사랑한다. 앉아서 하는 생각보다 서서 하는 생각이 더 뛰어나며, 가만히 서서 하는 생각보다는 힘차게 달리면서 하는 생각이 더욱더 탁월하다.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혈액순환이 활발하면 근육과 뇌에 더 많은 산소가 흐르면서 브레인 퍼포먼스가 향상된다.
업무가 몰려 있는 바쁜 기간에는 단전호흡과 합기도와 태극권으로 음양의 조화를 추구하고, 여유가 있는 시기에는 훌쩍 높은 산을 홀로 오르며 하이킹과 트래킹으로 심신을 단련한다. 크로스 컨트리, 산악 스키도 무척 애호한다. 변화무쌍한 지형의 변화를 재빠르게 이동해야 하는 스포츠는 극도의 집중력을 요구한다. 험준한 자연과 역동적인 몸의 움직임을 일체화 시키면 절로 고도의 몰입 상태에 들어간다. 야생에서 사색하며 기술의 초가속적 변화를 조망하는 야성의 깊은 시야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의 유별난 아웃도어 라이프스타일은 뜻하지 않게 결국 독보적인 개인 브랜드가 되었다. 2024년 이코노미스트가 선정한 올해의 CEO, 알렉스 카프의 비상한 일상이다.

(사진 출처: The New York Times)
내가 보건대 2010년대가 스티브 잡스, 2020년대가 일론 머스크라면, 2030년대는 알렉스 카프의 시대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빗질이 되지 않은 부스스한 헤어스타일 또한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 과학자들의 괴팍한 외양처럼 회자될 것이다. 도양광회(韬光养晦), 팔란티어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비밀스럽게 다양한 소프트웨어들을 개발해온 과정 또한 핵무기를 만들어낸 오펜하이머의 리더십에 견주게 될 공산이 높다. 격식을 갖춘 공식 만찬장에 추리닝 바람으로 등장하거나 스키복 차림으로 투자자 미팅에 참석하는 등 그간 카프를 둘러싼 온갖 뒷담화들 또한 해프닝보다는 전설적인 일화로 기억될 것 같다.
다양한 아웃도어 액티비티 중에서도 특히 수영에 각별하다. 장거리 수영을 데일리 루틴으로 삼는다. 아무리 태산이 높다 한들 하늘 아래 뫼이로다. 해상은 지상과는 또 다른 감각을 제공한다. 땅에서 하는 운동과는 달리 물 속에 들어가면 특유의 고립 상태를 경험한다. 초연결사회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어 오롯이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다. 회의는 물론이요 전화도 메일도 문자도 차단된 디지털 디톡스의 순간, 온라인 세계에서 탈출하는 웜홀을 제공하는 것이다. 자연스레 몸과 마음에도 일종의 변태가 일어난다. 산소와 수소가 만나 이루어진 H20라는 신비로운 물질이 우리의 신체를 감싸게 되면, 늘 O2와 CO2 공기와 접촉하던 피부에서부터 상이한 기제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다로 풍덩 뛰어들면 마음이 곧장 깨어난다. 시야가 확 열리고 청력도 살아난다. 깊은 사유와 명상을 물 속에서 한다. 조용하고 반복적이고 리드미컬한 수영의 움직임이 정신적 명료함을 선사하는 것이다. 수영으로 수양하면 자아에 함몰되지도 않는다. 수영에는 부유, 즉 우리를 떠받치고 감싸는 밀도가 높고 투명한 매질 속에 떠 있는 상태에서 느끼는 경이로움이 있다. 중력으로 가라앉는가 하면 부력으로 떠 있는 오묘한 중용의 경지에서 사람들은 앞으로 헤엄쳐 나아간다. 기이한 경계의 공간에 매달려 조류에 몸을 맡기면 동적이면서도 정적인 역설적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육체와 환경이 동시성에 빠져드는 사이, 몸과 바다를 나누는 경계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수영은 우리의 몸을 곧 바다의 바디로 만드는 행위이다. 플래닛 아쿠아와의 완전한 합일, 물아일체에 드는 것이다. 그 바다 위에 둥둥 떠서 하늘을 마주본다. 혼자이지만 전혀 외롭지가 않다. 수영하는 것은 더 큰 세상의 일부가 되는 일이다. 해가 지고 달이 뜨는 우주의 율동을 거대하고 거룩한 천장화처럼 감상한다. 한 가지 생각이 다른 생각으로 이어지다 어느 순간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생각의 무게에서 완전히 해방된다. 반짝거리는 모든 햇빛과 달빛과 별빛이 나의 뇌에 영원히 아로새겨진다. 생생하도다! 각각하여라! 무념무상에 빠져든다. 무아의 경지에 도달한다. 무아지경이다.
카프는 이렇게 매일 바다에서 정신적인 고양을 경험한다. 최선의 자아, 무아를 영접한다. 수영에 몰두하는 직접성으로 현존을 획득하는 것이다. 현재에 머문다. 현재에 존재하는 마음에 이른다. 무아지경은 마음에서 시간을 변형하여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상태이다. 시간이 마냥 느리게 흐르면서 현재의 순간이 최대한으로 확장된다. 백일몽과 흡사한 해일몽(Sea-Dreaming)에 들어가는 것이다. 뇌과학에서는 몽상에 빠지는 것이 문제 해결과 창조성에 중요하다고 말한다. 마음이 외부 상황에 집중하지 않고 배회할 때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가 활성화되는 것이다. 이는 예상치 못한 시냅스 간 새로운 연결을 가능하게 만드는 뇌의 독특한 기능이다.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하다가 형태가 불규칙한 물체의 부피를 구하는 방법을 추론한 것도 마찬가지 이치이다. 세로토닌이 상승하는 알파파 활동이 증가하면서 불현듯 유레카! 발견의 순간이 열리는 것이다. 정신이 개벽한다.
모든 강물이 결국 바다에서 만나듯, 개벽된 정신 안에서는 창조론과 진화론도 화해한다. 지구의 생명은 물에서 비롯된 것이다. 창세기 첫 구절, 태초에 하나님이 텅 빈 지구를 창조하셨다. 어둠에서 빛이 분리되었고, 창공의 물을 위아래로 나누자 땅에는 바다가 생겨났다. 마른 물이 드러나자 온갖 초목을 만들고 해와 달, 물의 생물과 공중의 새를 만들었다. 그리고 가축과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생물도 만들었다. 여섯째 날이 되자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에 따라 걸작을 만든 후, 일곱째 날에는 창조한 것들을 보며 편히 휴식을 취하셨다.
진화론도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다만 일주일이 아니라 40억 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깊은 물 속에서 최초의 단세포 생물이 두 개의 세포로 분화되고, 여덟 개로 분화된다. 이후 물에서 산소를 호흡하는 아가미를 갖춘 완벽한 물고기의 모습으로 진화하고, 그 다음 단계로 진화가 계속되고 가속된다. 산소를 호흡하는 생물들은 결국 뭍으로 나와 육지를 밟게 되며, 최초의 인류 또한 땅 위에 발자국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인간 안에도 틱타알릭, 물고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창조론의 신속한 단계이든 진화론의 과학적 절차이든, 서사의 중심에는 물이 있다. 실은 인간은 태어나는 직전까지 수중 포유류이다. 물이 가득 찬 자궁에서 나오는 순간 아기가 처음으로 하는 호흡은, ‘최초의 우리’가 뭍에 발을 디뎠을 때의 첫 호흡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에서 뭍으로 나온 인류는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 헤엄을 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사는 땅은 광대한 바다에 둘러싸여 있었고, 육지도 사이사이 강이 흘렀으며, 호수와 웅덩이도 있다. 1만 년 전, 물은 심지어 사하라에서도 손짓했다. 오늘날 지구에서 가장 건조한 지역의 동굴 벽에는 헤엄치는 인간의 모습을 묘사한 가장 오래된(약 8천년 전) 그림이 있다. 엄청난 모순처럼 보이지만, 지구사 46억년의 기후와 지형의 변화를 생각하면 딱히 이상할 일도 아니다. 작년 초 나는 다섯 살 아들과 함께 안나푸르나를 트래킹하며 암모나이트를 숱하게 발견했다. 이 공기마저 희박한 드높은 산도 한 때는 바다 아래 있었던 것이다. 지각의 융기, 천지의 개벽은 수시로 일어난다. 사하라도 늘 사막이 아니었다. 벽화 속 그 인류의 조상들은 죽는 날까지 물이 풍족한 환경에서 살았을 것이다.

(사진 출처: Los Angeles Times)
홀로세 1만년, 기후는 다시 격변하고 있다. 지상의 물은 바짝바짝 마르고, 해수면은 점차 차오르며 해안선의 풍경을 바꾸어 놓고 있다. 그러나 지상과 해상의 경계가 변화무쌍한 것 또한 늘 있어왔던 일이다. 인류세의 진정으로 예외적인 현상은 지상과 천상 가운데 가상의 해상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다에서 나온 인간들이 창조해낸 전혀 다른 인공바다가 거대하게 열리고 있다는 점이다. 기술폭발이 야기하는 제3의 물결, 정보의 바다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바다에서 수영하면 잔물결을 일으키는 데 그치지만, 인공의 바다를 헤엄치면 무수한 데이터를 남기게 된다. 지상에서 걸어가면 발자국도 지워지지만, 가상에서 움직이면 그림자가 차곡차곡 쌓이게 된다. 그 데이터들이 축적되면 어마어마한 빅데이터의 쓰나미가 일어난다. 장대한 파랑이 일렁이고 장엄한 해일이 요동친다.
즉 21세기 이 행성에서 가장 빨리 증가하고 있는 것은 인구도 아니요 닭 뼈도 아니며 이산화탄소도 아니다. 단연코 데이터이다. 데이터의 폭발적인 성장이 지구의 진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앞으로 정보세계에 진입하게 될 미래세대와 제3세계의 인구에다가 사물과 동물과 식물마저 산출하게 될 데이터까지 보탠다고 하면 영구적인 정보폭발의 겨우 초입기에 들어서 있을 뿐이다. 물에서 뭍으로 나온 인류가 다시 인공적인 바다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그 거대한 인공 파도의 맨 꼭대기에서 불가사의한 미래의 한복판에서 고요하게 참선에 들어가 있는 장본인이 바로 알렉스 카프이다. 우주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문명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인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빅데이터의 빅웨이브를 서칭하고 서핑하면서 빅퀘스천을 던지며 빅픽쳐를 그려간다.
2. 아웃사이더 : 군계일학(群鷄一鶴)
도인(道人)이다. 실리콘벨리의 테크기업 CEO 가운데서도 카프의 이력은 단연 두드러진다. 마을의 전설이라고 할 수 있는 자퇴한 천재 공돌이 출신이 아니다. 창고나 차고를 빌려 창업을 한 적도 없다. 부트캠프에서 코딩하고 해커톤에서 프로그래밍 실력을 뽐낸 적도 없다. 혹은 MBA를 거쳐 경영자 수업을 받은 것도 아니다. 그는 ‘문송합니다’, 문과 출신이다. 늘 도서관에 파묻혀 두꺼운 책을 읽었다. 그것도 교양서 수준이 아니라 빡빡한 학술서와 딱딱한 논문을 파고들었다. 각 잡고 인문학을, 철학을 연마한 것이다. 진지충 선비과였다. 난독증이 있음을 고려한다면 뼈를 깎는 노력을 들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리버럴아츠 칼리지에서 실컷 철학 공부를 하다가 스탠포드의 로스쿨에 진학하지만 단 3일만에 철회하고 만다. 더 제대로 된 학문에 흠뻑 취해보고 싶었다.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윤리적으로 판단하는 것에 희열을 느꼈다. 크게 보고 멀리 보고 깊이 보는 맛에 심취하였다. 결국 미국을 떠나 유럽으로 간다. 샌프란시스코를 등지고 프랑크푸르트로 떠난다. 1990년대, 때가 공교로웠다. 탈냉전 초기, 독일의 통일과 유럽의 통합을 현장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괴테 대학에서 유럽의 인문학을 도야하며 정통 코스의 정수를 음미한 것이다. 대가 위르겐 하버마스와 치열하게 토론하는 모습이 알렉스 카프의 젊은 날의 초상이었다.
프랑크푸르트는 비판이론과 철학의 도시로 명성이 자자하다. 그래서 프랑크푸르트학파라는 말도 만들어졌다. 로컬이 철학과 사상의 진원지로 브랜드가 되는 것은 교토학파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지 않나 싶다. 백여년 전 동양의 교토학파가 근대의 초극을 탐험하며 미국과 소련을 모두 물리치는 세계 최종전쟁의 이데올로기를 공급하고 있을 때, 서양의 프랑크푸르트학파도 자승자박을 초래한 근대성과 이성과 계몽을 깊이 자성하고 있었다. 그래서 출간된 명저가 학파 1세대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1947)이다. 나치의 잔악한 유대인 학살과 스탈린 체제 아래의 전체주의적 소련과 독점자본주의가 지배하는 미국을 경험하면서 근대문명에 내재된 파괴적 잠재력으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즉 프랑크푸르트학파는 탁상공론하는 상아탑의 학자들이 아니었다. 철학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다. 철학은 관념이 어떻게 현실을 만드는가에 대한 이해이다. 생각이 세상을 만든다. 사고가 세계를 이룬다. 20대 중 후반, 알렉스 카프는 20세기의 가장 걸출한 사상의 계보에 젖줄을 대어 사유하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그리고 그 철학을 현실세계에 적용하여 새로운 세상을 제작하는 방식을 연마했다.
카프가 사사했던 하버마스는 학파의 2세대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사상가였다. 대표적인 담론이 의사소통 행위이론이다. 카프가 프랑크푸르트에서 박사를 하고 있을 무렵, 신촌에서 사회학 전공으로 학부를 공부했던 나도 하버마스를 열심히 읽던 시절이다. 하버마스는 고립된 주체관에 기초한 근대적 의식철학을 상호 주관성에 기초한 의사소통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고자 했다. 계몽의 변증법을 자기 보존을 위한 도구적 이성의 확대 과정으로 해석하고, 주체와 주체 사이의 상호 작용을 행위의 근본 모델로 삼는 의사소통의 도입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한 상호 인정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합리적인 대화 자체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의사소통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토의 민주주의를 주창한 것이다. 성숙된 시민사회의 공론과 제도화된 의회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발전되는 민주주의를 지향했다. 민주주의가 선거 중에 단 한 번만 주권을 행사하는 형식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 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 숙의 민주주의를 제기한 것이다. 25년 만에 다시 간략히 정리해 보자니 참으로 지루하다. 아직 인터넷과 모바일과 SNS가 범람하고 이전의 이론이다. 디지털혁명 이전의 민주주의이다. 생활세계의 식민화는 물론이요 정신세계마저 완전히 알고리즘에 식민화된 21세기에 보노라니 참으로 소박한 담론이다. 외람되게도 한가하다고나 할까?
카프가 각별한 지점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비판이론을 섭렵하면서도 떠나온 실리콘벨리의 정보혁명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텍스트에 함몰되지 않고 테크놀로지도 관찰하고 있었다. IT혁명의 붐과 둠을 멀찍한 거리에서 조망할 수 있었다. 디지털 혁명의 명과 암도 조명해 볼 수가 있었다. 유럽에서 유학하는 정통 좌파 사회주의자로서 실리콘벨리의 후기자본주의와 소비문화의 폭발도 비판적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빅데이터는 시장에서의 빅버블로 그칠 성질의 사태가 아니었다. 데이터를 통하여 어떻게 돈을 벌까가 아니라, 데이터가 추동하는 사회가 어떠한 문명으로 진화할 것인가를 사유했던 것이다.
양적 변화는 질적 변화를 가져온다. 스몰데이터의 파편들이 빅데이터로 집적되면 정보는 통찰로 승화한다. 인포메이션에서 인사이트로 도약하는 것이다. 고로 데이터는 기술의 부산물이 아니라 의사결정의 기초가 될 수 있다. 인류는 장차 모든 곳과 모든 것에 데이터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을 잘 모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최적화된 최선의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다. 스승 하버마스의 고민을 토론과 공론과 숙론이 아니라 기술로 해결할 수 있을지 몰랐다. 지식과 윤리와 현실과 본질 등 유럽에서 수세기 간 진행되었던 철학적 논의가 마침내 디지털 시대의 개막과 함께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색하였다.
그러나 정작 구대륙은 디지털과 아득한 거리가 있었고, 신대륙은 철학적인 사유가 부족하였다. 그저 역사의 종언을 즐기며 대박을 꿈꾸는 기업가와 투자자들이 거대한 거품을 일으키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는 뒤쳐졌고, 샌프란시스코는 공허했다. 카프는 최첨단 기술과 최선단 철학을 결합하여 윤리의 이노베이션을 일으키고 싶었다. 함께 공부했던 선배 악셀 호네트와 같이 학파의 3세대로 안주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문자공화국 대학은 시대정신의 총아가 아니었다. 디지털혁명의 한복판으로 진입해야 했다. 담론 생산의 전초기지 또한 학계나 언론계, 출판계가 아니었다. 테크기업, 컴퍼니가 시대정신을 주조해간다. 그곳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창조적으로 계승하고자 하였다. 다시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온다. 철학박사가 되어 테크기업의 수장이 되기로 한다. 기술철학자, 기술사상가가 된 것이다. 실사구시, 실학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2003년 탄생한 기업이 팔란티어 테크놀로지이다. 인간이 데이터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가 인간에 복무하는 윤리적인 디지털문명을 건설하는 것이 팔런티어의 비전이 되었다. 빅데이터를 통하여 이 세계의 가장 중요한 과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알렉스 카프의 미션이 되었다.
팔란티어의 사내 분위기는 벨리의 자유분방한 공기와도 사뭇 다르다. 카프의 지적인 뿌리가 고스란히 팔란티어의 에토스가 되었다. 흡사 아카데미아의 연구실처럼 보인다. 마케팅과 브랜딩으로 브레인스토밍 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과 문명의 진로에 대하여 세미나를 여는 것에 가깝다. 카프 역시 단기적인 이윤 창출에 연연하는 최고경영자보다는 철학과의 지도교수님, 사상의 은사님에 근접한다. 빨리 빨리 회사를 성장시키려고 하기보다는 본질과 핵심가치를 집요하게 추구하며 비판적인 사고를 강조한다. 본디 철학이란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철학자의 본분도 질문하는 것이다. 커다랗고 거대하고 심오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래서 남들이 놓치는 것을 보고 연결망을 만들어 내고, 빅데이터의 복잡계를 창의적으로 사유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팔런티어의 본업이다. 다만 그리스 철학의 개념어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의 언어로 컴퓨터의 랭귀지로 수행하는 것이다.

(사진 출처: Los Angeles Times)
그래서 팔란티어의 임직원들은 디지털 소피스트들처럼 보인다. 소크라테스 사부님과 제자들 같다. 혹은 춘추전국 시대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다투는 학파와 군단처럼도 보인다. 벨리의 다른 파벌들이 세를 따지며 기업의 규모를 키워갈 때, 팔란티어는 도를 논하며 때를 기다린다. 새끈한 앱을 만들고 중독적인 알고리즘을 설계하여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빅데이터의 양심이 될 것을 자부하고 자긍하는 것이다. 고객들의 데이터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해야만 하는 것인가를 토론한다. 그래서 입사 면접부터 아주 까다롭기로 악명이 높다. 가치와 철학, 목적과 비전, 미션에 중점을 두고 사원을 뽑기에 직장 동료의 선발보다는 혁명 동지의 선출에 더 가깝다. 그래서 이직률도 비교적 높은 편이다. 코딩과 프로그래밍 실력으로 일확천금을 벌고 빨리 엑시트 하여 남은 인생을 유유자적 즐기고 싶은 친구들은 기술의 미래, 민주주의의 미래, 기술과 윤리의 관계를 두고 CEO가 강설하고, 직원들이 난상토론을 펼치는 조직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기적인 주주가치의 실현에 안달하지 말고, 오로지 빅데이터 문명의 본질에 육박해 들어가야 한다는 리더와 뜻을 같이 하는 충신들만 남게 된 것이다. 고로 팔란티어는 마스터와 도반들이 함께 모여 디지털 문명을 설계하고 창조하고 실행하는 신문명 기획사라고 하겠다.
3. 아웃라이어 : 보국안민(輔國安民)
신문명 기획사로서 팔란티어의 아이디어를 처음 떠올린 이는 피터 틸이다. 파운더스 펀드의 지론답게 전권을 행사하는 계몽군주적 CEO로 영입하여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친구가 알렉스 카프였다. 카프와 틸은 동갑내기, 1967년생이다. 이대남 시절부터 한 세대 위68세대에 적대적이었다. 선배들의 68정신이 미국을 망쳤다고 생각한다. 카프는 팔런티어의 도반들과 절차탁마했던 사상을 총결산하는 저작 <Technological Republic : Hard Power, Soft Belief, and the Future of the West> 올해 출간한다. 나는 1월 1일 선주문한 이래 오매불망 기다려왔다. 근질근질 50일이 500일처럼 느껴졌다. 트럼프 2기, 아니 21세기 중반 미국의 시대정신을 당사자가 직접 정리한 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두근두근 2월 18일 스마트폰의 킨들 앱으로 다운로드 되었다. 홀린 듯이 신들린 듯이 읽어 나갔다. 과연 철학자이다. 격변하는 시대에 거대한 질문을 던진다. 사자후를 토해낸다. 죽비를 내리친다. 실리콘벨리의 참회를 요청하고, 미국의 각성을 촉구한다.

(사진 출처: Forbes)

(사진 출처: Amazon UK)
인문학 박사 답게 <오리엔탈리즘>도 겨냥한다. 1978년 출판된 책이다. 그 해에 태어나 98년에 대학에 입학해보니 20년 사이에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막론하고 수업마다 그 책을 언급했다. 68세대 반문화의 근간이었던 반서구주의를 집약한 저작이다. 그 후 오리엔탈리스트라는 말은 치욕적인 낙인이 되었다. 인종주의자와 비슷한 어감이 되었다. 미국 대학에서 지식인 행세를 하려면 미국과 서방을 비판해야 하는 풍조가 만연해진 것이다. 1990년대 이후 포스트콜로니얼은 학계의 담장을 넘어 일종의 세계관이 되었다. 타자성, 혼종성 등 학술어가 출판계와 박물관을 넘어 할리우드까지 퍼져 나갔다. 미국의 정신문화를 이끌어 가는 주역들이 반미주의자, 반서구주의자가 되어간 것이다. 즉 68이래 근 반세기가 되도록 미국과 서방에 대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도전이 주류 문화가 되었다. 그래서 실리콘벨리에 모여 있는 최고의 인재들도 정작 미국에 충성하지도 헌신하지도 않는다. 민족주의는 반역이라며, 국뽕을 냉소한다. 엘리트일수록 코스모폴리탄 무국적성을 뽐내며 민족과 국가에 연연하는 풀뿌리 민중들을 아래로 깔아본다. 정체성 정치 타령하다가 정체성이 모호한 이들의 아성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다시 한번 잡스와 애플이 상징적이다. 잡스는 ‘나라’가 아니라 ‘나’, I에 집착했다. Individual, 개인의 창조성에 절대적인 힘을 부여하고자 했다. 줄곧 자아를 배려하고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디바이스를 만들었다. 아이팟, 아이패드, 아이폰 등 I 시리즈 모두가 그러하다. 돌아보면 잡스 1기, 1984년의 매킨토시 컴퓨터 광고부터가 예언적이었다. 빅브라더가 지배하는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에 맞서서 국가에 저항할 수 있는 개인의 해방을 표방했다. 애플이 PC, 퍼스널 컴퓨터를 하사하노라니, 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개개인의 힘을 선사해주겠다는 것이다. 즉 잡스는 미국을 넘어 전 세계의 소비자들에게 ‘나에게 집중하라’는 시대정신을 설파하며 I-제품들을 팔아먹은 것이다. 오롯이 ‘I’에 집중하는 세계시민들이 아이폰에 열광하면 할수록 국가와 민족 없는 무국적 애플 월드를 만들어갈 수 있었다. 잡스가 완성한 애플제국은 각국의 민족문화를 해체해가며 글로벌 소비문화의 아이콘이 된 것이다.
PC를 사용하기 시작한 I-세대들은 차츰차츰 PC주의에 물들어갔다. 반전평화, 생태주의, 페미니즘 등 68정신이 실리콘벨리의 주류문화가 되었다. 그래서 개개인=소비자는 왕이라며 소비자에 아부하는 서비스 개발에는 몰두하는 반면으로, 국가와 함께 하는 프로젝트에는 손사래를 쳤다. 반문화 세력들이 반국가 세력이 되어간 것이다. 21세기 첫 사반세기 벨리의 주민들은 국가라고 하면 사시 눈으로 쳐다본다. 정부는 혁신에 둔감하고 성가신 곳이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말고 가급적 거리를 두는 게 좋다. 아니 오히려 진보의 방해물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빅테크들은 정부와 일하기를 극구 꺼려해왔다. 연방정부의 오작동과 주정부의 오기능에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도, 정작 본인들의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의 현실을 외면하고 공동체의 업무를 소홀히 한 것이다. 2018년 구글은 국방부와의 프로젝트 메이븐(Maven)를 거부했다. 2019년 마이크로소프트는 미군에 버추얼 헤드셋을 공급하는 사업을 거절했다. Don’t be Evil. 68의 후예들이 다수인 빅테크의 임직원들은 이를 미 군사주의에 대한 승리라고 자평하며 박수를 쳤다. 그 정신승리를 통하여 다시금 글로벌 고객들을 현혹하는 앱 만들기에 그들의 탁월한 능력과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던 것이다. 음식배달 앱은 그토록 정교하게 설계하면서도 그 테크놀로지를 통하여 국방을 개혁하고 교육을 혁신하고 보건을 개선하고 행정을 변혁할 생각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혼이 비정상이다. 얼이 빠진 것이다. 기강이 해이해진 것이다. 물질은 초가속적으로 개벽하는데, 정신은 20세기 중반에 고착되어 개벽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가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지지 않는다. 시장은 파괴적 혁신을 강제하지만, 정작 지금 이 시대 가장 중요한 질문이 무엇인지는 요구하지 않는다. 미국의 품에서 나고 자란 실리콘벨리가 정작 미국을 가장 멀리하는 역설이 만연한 것이다. 오히려 미국을 저무는 제국으로 간주하며 팔짱을 끼고 있다. 배은망덕한 마을이다. 정신교육, 정훈이 필요하다. 국기에 대한 경계를 하고, 애국가를 부르며,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하도록 해야 할 판이다.
한가한 때가 아니다. 절체절명, 인류사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에 이르렀다. AI의 시대이다. AGI가 목전이다. 지구에서 사피엔스보다 더 뛰어난 지능이 알을 깨고 나오려고 한다. 지난 세기 원자폭탄보다 더욱 의미심장한 사태이다. 핵분열도 핵융합도 자연계와 우주생태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모방하고 응축한 것이다. 그러나 일반인공지능은 결이 다르다. 인간의 지능을 모방했지만, 인간의 자연지능을 월등히 앞서갈 것이기 때문이다. 식물과 동물 등 기왕의 자연지성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인위적인 지능이 생성되고 있는 것이다. 외계지성(Alien Intelligence)이 외계가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E.T.(Extra Terrestrial)를 우리 스스로 불러낸 것이다. 우주에 일찍이 없었던 판도라의 상자를 인간이 열어젖힌 것이다. 인류가 지구가 우주가 어디로 향할지 짐작하기 어려운 불확실성의 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AGI 시대의 리더가 미국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지난 세기 미국은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하여 원자력이 지배하는 시대를 선도할 수 있었다. 그래서 1945년 이후 세계질서를 이끌어 올 수 있었다. 그 패권국의 특혜 아래서 실리콘벨리도 혁신의 요람으로 번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자신만만, 장담할 수가 없다. 20세기의 독일과 소련보다 훨씬 더 강력한 도전자가 전속력으로 AGI를 향해 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판 68혁명, 문화대혁명의 파국을 딛고 일어난 신중국은 인류의 4대 발명품의 나라라는 전통을 되살려서 가장 먼저 인류의 희대의 발명품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당과 국가와 기업과 인민이 일심동체로 일치단결하여 일사분란하게 테크노-차이나를 완성하려고 한다. 저들은 나보다 나라가 우선이다. 정신력에서 중국이 미국을 앞지른다.
원자탄이 물리의 근본에서 빅뱅을 압축한 것이라면, AGI는 심리의 근본에서 의식의 핵폭발을 일으키는 것이다. 핵발전소를 대신하여 데이터센터에서 지성의 핵융합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그 절대반지를 누가 먼저 손에 쥐느냐에 따라 인류사와 지구사는 물론이요 우주사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지난 세기 핵무기가 그 후 100년의 지정학 질서를 규정한 것처럼, 이번에는 AGI가 새로운 질서를 규율해 갈 것이다. 그리고 AGI는 비단 지구에 그치지 않고 우주의 행성간 질서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국가간 체제, 세계질서를 주조했던 서방이 아니라 행성간 체제 우주질서를 동방의 중국이 먼저 규정해갈 수 있는 것이다. 코스모-폴리틱스, 우주생명문명의 서막을 한자문화권이 이끌어가면서 삼체문명을 창조해갈 수도 있다.
비상한 시국이다.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테크노-유신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더는 실리콘벨리의 테크놀로지와 워싱턴의 국가 사이에 벽을 세워서는 아니된다. 전력을 다하여 총력전에 임해야 한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정신을 개벽하고 의식을 개조해야 한다. 우리는 할 수 있다. 안되면 되게 하라. 그러지 못하면 우리나라 미국은 더 이상 세계 제1의 국가가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누라, 자식 빼고는 다 바꾸어야 한다.’ 고로 우리의 마음가짐을 새로이 해야 한다. 미국은 어떤 나라이며, 미국의 가치는 무엇이며, 미국은 어느 편에 서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질문해야 한다. 그래서 미국의 쇠퇴를 막아 세워야 한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서방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어야 한다. 68 선배들이 해체하고자 했던 바로 그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와 서구주의를 되살려내야 한다. MAGA와 MEGA(Make Europe Great Again)로 계몽의 변증법, 반문화에 다시 반하여 정반합의 결산에 도달해야 한다.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더 잘해야만 한다. 위대한 국민의 힘을 발휘하여 찬란한 민족문화를 창달해야 한다. 기술문화가 소비문화가 아니라 국혼을 일깨우는 위대한 사업이 되어야 한다. ‘나는 자랑스러운 성조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그래서 21세기와 22세기도 미국의 세기로 만들어야 한다. 앞으로 10년이 향후 100년, 아니 1000년을 좌우할지도 모른다. 동서양 역전 5백년만에 되치기를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고로 실리콘벨리 또한 더는 I, I, I, 아라한과 아트만의 소승 놀음을 그만두고 대승으로 거듭나야 한다. 엔지니어와 프로그래머들부터 디지털 의병장이 되어서 호국마을로 개조해야 한다. 좌파에서 우파로 전향하라는 것이 아니다. 카프 본인은 여전히 사회주의자를 자처한다. 좌파 중에서도 찐좌파, 서구 좌파이다. 본디 좌파의 본산은 소련도 중국도 베트남도 북조선도 아니다. 저 동방의 좌파들은 죄다 아류이고 하류이다. 본진은 헤겔과 마르크스를 잇는 서방의 좌파이다. 진심으로 프랑크푸르트학파를 계승한다. 미국의 진보세력들 또한 글로벌/리버럴 레프트가 아니라 웨스턴/내셔널 레프트로 회심해야 한다. ‘방법으로서의 아메리카’, 동양주의와 제3세계주의를 청산하라는 뜻이다. 천지가 일백 번 개벽해도 동은 동이고, 서는 서이다. 우리는 서방이다. 동방을 문화적으로 감싸 안아 서방을 고차원적으로 회복해야 한다. 미국은 서방의 최전방 공격수이자 최후방 골키퍼이다. 서방문명의 최후의 보루로서 미국의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만 한다. 북미의 캐나다부터 서구의 독일까지 범대서양 세계에서 디지털 계몽령을 발동하여 제 정신을 차리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제2차 태평양전쟁, MCGA(Make China Great Again), 중화문명의 위대한 부흥을 도모하는 중국과의 경쟁에도 비벼볼 만하다. 애국심을 동원해야 한다. 민족의 정기를 되살리고 국가의 신화를 재건해야 한다. 공격적인 민족주의도 위험하지만, 영혼 없는 탈민족주의와 세계시민주의는 더더욱 위험하다. 국적 없는 자본이 미국마저 해체시키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기술로 애국하고 사업으로 보국해야 한다. 디지털 총력전, 산학협력과 민관융합과 정경유착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만 기술공화국으로 미국을 재건하는 21세기의 뉴맨하튼 프로젝트도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팔란티어는 준비만전, 대비가 되어 있다. 절차탁마, 대기만성. 애플과 구글과 메타와 견주어 시작은 비록 미미했지만 그 끝은 실로 창대할 것이다. 벨리의 그 모든 테크기업들이 비아냥거릴 때에도 펜타곤과 CIA와 FBI 등 국가의 주요 기관들과 적극 협력하며 기술공화국으로 진화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들을 업그레이드해왔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 하던가. 시운도 따라주고 있다. 21세기 내내 진행되어 왔던 미 패권의 점진적 쇠락을 더 이상은 방치할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했다. 9.11 테러부터 세계금융위기를 지나 코로나 펜데믹에 이어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내우외환이 지속되어왔다.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개벽 아닐런가!’ 이제는 망국의 위기에 처한 국가의 부름에 모든 테크기업들이 응답할 시점이다. 서학국민운동에 모두가 나서야 할 시점이다. 띠어리(Theory)와 테크놀로지, 이론과 실천을 모두 구비하고 있는 팔란티어는 시대정신이 되어갈 것이다. 20세기 전반기 미국과 소련과 독일의 글로벌 포드주의의 경쟁처럼, 21세기에는 팔런티어이즘이 전 세계를 석권하게 될 것이다. 즉 팔런티어는 여럿 중 하나, 일개 테크기업이 아니다. 군계일학, 디지털 신문명을 기획하고 창조하는 유일무이한 기술기업이다.
도래하는 빅데이터의 인공바다에서 중국은 인해(人海)전술, 인민들의 바다를 융합하고 있다. 압도적인 쪽수로는 미국이 당해낼 재간이 없다. 오로지 지력으로 승부해야 한다. 총력을 기울여서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해야 한다. 저쪽이 14억 인구로 응전한다면 미국은 거꾸로 무인 전략으로 대응해야 한다. 무인 전쟁으로 전투력을 극대화하고, 무인 경영으로 생산력을 최대화하며, 무인 행정으로 정치력을 효율화해야 한다. 그간 팔런티어가 비웃음을 견뎌가며 와신상담 사반세기 갈고 닦아온 기술이 바로 그런 것이다. 고담(GOTHAM)과 파운드리(FOUNDRY)와 아폴로(APOLLO)와 온톨로지(ONTOLOGY)가 모두 그러한 소프트웨어이다. 빅데이터로 드러나는 데이터 간의 의사소통과 상관 관계를 시각화하여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기여하는 것이다. 스승 하버마스는 여전히 인간들의 말과 글로 구성되는 공론장에 머물렀지만, 제자 카프는 인간은 물론이요 사물과 활물이 산출하는 데이터까지 아우르는 만물의 공론장을 창조해낸 것이다. 디지털문명의 쟁패를 다투는 동양과 서양의 세계최종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우주생명문명을 선도할 수 있는 프로파간다와 프로그램을 모두 다 갖춘 것이다.
고로 팔란티어는 절대적인 권능의 반지의 제왕이 되려 한다. SF 매니아 머스크가 오프닝이라면, 판타지 서사의 본극은 카프가 담당한다. 2023년 11월 미국 상원에서 열린 AI 포럼에서 카프와 머스크는 나란히 앉아서 속닥속닥 귓 이야기를 나누었다. 2026년 7월 머스크를 앞장세운 DOGE의 미션이 완수되고 나면, 뉴 아메리카의 OS(운영체계)로 팔런티어의 프로그램들이 연방정부에 착착 장착되어갈 것이다. 미국 2.0, 뉴아메리카의 진정한 대표선수는 카프였던 것이다. 그는 빅데이터와 거버넌스를 결합하여 빅 거번테크(Govern-Tech)를 완성해 내었다. 인쇄술 시대의 데모크라시(Democracy)에서 디지털 문명의 데이터크라시(Datacracy)로 이행할 수 있는 절대반지를 손에 쥐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전지전능한 마법의 수정구슬로 일반의지를 시시각각 바라보고 있다. 범죄를 사전에 차단하고 처단한다는 2054년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설정을 사반세기나 앞당겨 현실로 구현해낸 것이다.

(사진 출처: Fox Business)
아카데미아의 선생님들과 선배님들이 천세만세라도 갈 절대가치라도 되는 양 ‘민주주의’ 앞에 온갖 수식어를 붙여가며 심폐소생술로 연명치료를 하고 있을 때, 오로지 카프만이 기술기업의 최전선에 진입하여 포스트-민주주의의 신세계와 신천지를 설계해 온 것이다. 백문이불여일견, 백분토론을 백 번 하는 것보다 디지털 일반의지를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 정기적인 여론조사를 잘 살피는 것 또한 국민들의 집합적 무의식의 흐름을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것보다 못한 것이다. 팔란티어는 마침내 동서고금 정치학의 정수에 자리했던 민심과 천심을 잇는 인터페이스의 아키텍처를 디자인해낸 것이다.
“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말며/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말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알렉스 카프가 무쏘의 뿔처럼, 무소불위의 기세로 만들어가고 있는 저 디지털 이데아의 수학 공화국. 그 전인미답 전대미문의 신문명을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